- 벌거벗은 임금님 각색
- 캐붕 낭낭
- 방송통신위원회 15세이상관람가 기준 준수
“우리 왕국은 정말 큰 일이야, 큰일.”
“자네도 소문 들었는가?”
“어떻게 모를 수가 있나!”
우리 왕국의 임금님이 노출증이라는데.
머리가 둘만 모이면 모두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입에 풀칠하며 사는 게 가장 중요한 헤니투스 왕국 백성들에게 최근 1년 동안의 핫이슈는 다름 아니라 왕국의 우두머리인 임금이었다. 정확히는 임금의 문란한 행실이 입과 입 사이를 나뒹굴렀다. 세간의 흐름을 모른 척하기에는 소문의 기세가 드높은 터라, 왕실 내부에서도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암묵적으로 임금의 괴벽을 묵인하던 신하들이 하나둘 절대자의 몸가짐에 대해 씹어 대기 시작했고, 왕의 수족이 되어 그의 옷을 입히고 벗기던 충직한 신하가 결국 왕의 앞에서 입을 열었다.
“전하, 부디 제대로 된 의복을 갖추시지요.”
“언제는 내가 벗고 돌아다녀도 관심 없다며?”
음침하다며 손가락질받던 검은 머리카락을 왕이 쓰다듬었다. 감히 왕의 손길을 거부할 자가 있겠느냐마는, 검은 머리의 신하는 임금의 다정함에 푹 절인 얼굴을 하곤 그의 손길을 받았다. 쓰다듬는 손길이 가슴 한쪽까지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멍하니 얼굴을 붉히던 신하는 왕이 그의 허벅지를 노골적으로 주물럭거리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전하, 이 나라 전체가 전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왕의 곁을 지낸 이 답게, 우문현답을 내놓았다.
“한아,”
왕은 완전한 나신이었다. 그는 침대 위에 엎드려 탱탱한 엉덩이와 매끈한 등을 보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최한?”
“ㄴ, 네.”
“나랑 내기 하나 하자.”
제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만백성에게 왕은 자애롭고 현명한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 스스로 말하기를, 개망나니 같은 면이 있었다. 노름을 좋아한다는 게 이유였다.
“내기는 동등한 입장일 때 해야 마땅한 법입니다. 전하께서는 그저, 바라는 바를 제게 명령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재미가 없잖아? 나는 증명하고 싶은 거야.”
왕의 매혹적인 붉은 머리가 하얀 등허리 위로 흐트러졌다.
“지금껏 내 몸을 보고 반하지 않은 자가 없었어, 그렇지?”
“……그렇습니다. 전하께선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이니까요.”
“그래. 잘 아네. 그런데 왜 너는 여전히, 내게 반하지 않아?”
“전하. 저는 언제나… 전하께 반해 있습니다.”
“거짓말.”
왕, 케일 헤니투스가 헛소리 말라며 가볍게 웃었다. 최한의 붉은 귀를 보고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이 자는 그저 깊은 충성심에, 일반적인 나신을 보고 밀려오는 민망함에 이리 행동하는 것이겠지. 케일은 숙맥처럼 행동하는 최한의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낱낱이 훑어 내렸다. 그 끈적한 시선에 최한은 온몸에 쥐가 날 것 같았다.
케일 헤니투스는 아름다웠다. 다른 이들도 그렇게 말하였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다. 케일은 그 어떠한 옷도 자신을 돋보이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옷이 날개다? 아니, 옷은 아름다움을 가리는 거추장스러운 장식에 불과했다. 그러니 케일은 ‘진짜 옷’이 필요했다. 제 내면의 아름다움까지 모두 끌어올릴 수 있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옷.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재봉사를 구해줘.”
“헤니투스 왕국에서 가장 좋은 옷을 입혀드리고자 하나, 매번 거절하시지 않습니까. 부족하십니까?”
“응, 부족해. 나를 가장 높은 곳으로 데려갈 옷이 필요해. 어느 정도냐면-”
케일이 팔을 뻗어 손가락으로 최한의 무릎을 톡톡 건드렸다.
“그 옷을 입은 나를 보고, 네가 무릎에 힘이 풀릴 만큼. 이게 내기야. 네가 그런 옷을 가지고 올 수 있느냐 마느냐.”
“이건 내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명령이 더 좋다고 하지 않았나?”
케일이 샐쭉, 눈웃음을 쳤다. 최한은 애써 한숨을 삼키었다.
* * *
‘임금을 임금답게 만들어줄 재봉사’. 헤니투스 왕국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까지 이 구인 광고가 넘어갔다. 풍문으로만 들었던 케일 헤니투스 왕의 미모를 감상하기 위해 일단 지원하고 보는 재봉사부터, 철학적인 접근으로 누더기를 가져오는 재봉사, 흔해빠진 금박 갑옷을 가져오는 대장장이 등 다양한 인물들이 헤니투스 왕국을 찾아왔다.
최한은 언제나 제 주군에게 최고의 것만 쥐여주고자 노력했기 때문에, 이 노력이 헛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이미 헤니투스 왕궁에 있는 모든 것이 왕을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왕의 눈빛, 작은 손짓, 걸음걸이 그 모든 게 케일의 고결함에 날개를 달았다. 방문하는 모든 이들에게 드러낸 하얗고 티 없이 맑은 나신은, 다리를 꼬고 왕좌에 앉은 그를 더욱 지배자처럼 보이게 했다.
‘과연, 젊은 만큼 그 패기가 드높은 왕이다.’
한 나라의 임금이 방어구, 천 하나 없이 타국민을 맞이한다는 것은 그의 용맹스러움과 완전무결함을 상징하는 듯했다. 재봉사들은 모두 케일의 허벅지까지만 올려다보고, 그의 당당함에 기가 눌려 눈을 내렸다. 그는 이미 옷이 필요하지 않았다. 케일 헤니투스는, 이미 완전한 한 나라의 권력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충성심을 시험할 수 있는 옷이라?”
“네, 그렇습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에게 도사리는 수많은 위협과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옷이야말로, 임금을 위한 진정한 옷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이제 별 같잖은 약장수가 다 꼬인다는 표정을 짓던 케일이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최한은 케일의 행동에 기절할 것 같았다. 그건, 케일이 사안을 긍정적으로 본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입 털다가 간 놈들이 수두룩한데 고작 이런 장사치의 말에 현혹되다니, 최한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충성심을 어떻게 시험하지?”
“ㅇ, 예?”
“설명해 봐.”
“그, 그러니까- 쉽사옵니다. 그 옷을 볼 수 있다면 그 신하는 충신이옵고, 보지 못하면 그 신하는 불충한 자이옵니다.”
재봉사가 굽신거리며 대답하자, 최한은 케일의 손가락만 쳐다봤다. 여전히 케일은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치고 있었다.
“옷감의 소재가 무엇이냐? 마법인가?”
“예. 소인의 작은 잔재주라, 어디에 쓸 길이 없던 차에…….”
“신묘한 옷이구나. 그럼 오늘부터 당장 만들어 보아라.”
최한의 예상대로, 케일은 빠른 결정을 내려버렸다. 왕은 결정을 번복하지 않는 존재. 케일은 그 재봉사에게 왕궁 바깥에 작은 집을 주어 마법 옷감을 짜게 했다. 일주일이면 완성할 수 있다는 말에 케일은 정확히 5일 차에 최한에게 일렀다.
“최한, 나는 그자를 완전히 믿지 않아.”
“역시-.”
“그러니 밤이 되면 그자의 작업실로 가 봐. 네 눈으로 확인하고 와.”
장미꽃잎 가득한 욕조에서 나온 케일이 가만히 서 있자, 양쪽에서 궁인들이 케일의 몸에 향유를 발랐다. 질식할 것 같이 진한 라벤더 향이었다. 물에 젖어 청초한 두 뺨이 이제 막 끝낸 목욕 때문에 장밋빛으로 물들어있었다.
“네가 내 최고의 충신이잖아.”
최한은 물을 제대로 닦지도 않은 채 제 가슴을 툭툭 치는 케일에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젖은 게 고작 셔츠가 아닌 것 같았다.
왕의 명령으로 궁을 떠난 신하는 밤늦은 시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충직한 신하를 기다리던 왕은 내일의 격무를 준비하기 위해 먼저 잠을 청했지만, 달이 해의 구애를 받고 도망가는 시간에 깨고 말았다. 예민한 그의 귀에 최한의 인기척이 너무나도 크게 들린 탓이었다.
“한아?”
“……전하.”
어디서 통곡이라도 하고 온 모양인지, 목소리가 아까 나갈 때와 달리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케일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켜 등잔에 불을 붙였다. 자고 있던 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최한의 얼굴이, 정확히는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최한, 왜 울었어?”
“왕이시여. 부디 저를 죽여주세요.”
최한은 지금껏 왕에게 무언가를 절실히 간청한 적이 없었다. 그 간곡한 목소리와 눈망울에 케일은 하마터면 최한의 부탁을 들어줄 뻔했다.
“나는 무슨 이유에서도 너를 죽일 생각이 없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단호한 어조의 기저엔 무한한 신뢰가 담겨있었다. 이런 주군에게 고작. 최한은 그가 스스로 깨달은 제 얄팍한 감정을 생각하니 목구멍에서 울컥 덩어리진 핏덩이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완전히 잠이 깨버린 케일이 침대에서 내려와 최한을 달래려 하자, 최한은 황급히 왕의 손목을 잡았다가 불에 덴 것처럼 손목을 놓았다. 이래서. 최한은 또 한 번 제 감정을 깨닫고 감정을 추스르는 것에 실패했다. 임금에게 이리도 얄팍한 감정을 가진 신하라니, 지금까지 보필해온 세월이 무상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부드러운 천의 질감도 느낄 수 없었고, 눈부시다고 말하던 옷감에서 어떠한 빛도 볼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저는 전하의 진정한 신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최한이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었다. 그러지 않으면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왕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일 것 같았다. 제 충성심이 얄팍하다고는 하지만, 추태를 보여서 왕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모두 제가 전하께 불손한 마음을 품고 있어서입니다. 저는, 저는 이런 더러운 마음으로 더는 전하 곁에 있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짐승만도 못한 절 죽여주세요.”
최한이 울먹이며 말을 맺었다. 사형을 청하는 신하의 두 뺨에 눈물길이 마를 새가 없었다.
“그래, 그랬구나.”
조용히 울음을 삭히는 드넓은 어깨가 어찌나 어린아이 같은지. 케일은 제 신하가 몇 살이었는지 다시 생각해보았다. 성년이 되어서도 제게 관심을 두지 않아 혼자 밤을 지새웠던 시간이 환상이었나 싶을 정도로 작고 왜소해 보였다. 케일은 기꺼이 제 두 손으로 최한의 바들바들 떨리는 어깨를 쓰다듬고, 눈물 젖은 뺨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꼴값 떠는 재봉사를 고용하고 최한을 보내어 제 감정을 마주하게 하려던 것은 케일의 큰 그림이었으나, 이 정도의 충격요법이었으리라 생각하진 못했다. 적당히 겁을 주어 고백하게 하려던 왕의 영민함보다 제 감정이 충성심이라 찰떡같이 믿고 있던 최한의 맹목성이 한 수 위였던 탓이었다. 한참 동안 제 신하를 달래던 왕이 운을 떼었다.
“그렇지만 한아, 난 네 더러운 마음이 뭔지 궁금해.”
케일이 최한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최한의 손을 빌려 입고 있던 로브의 리본을 풀었다. 새벽이 지나가니 창백한 파란색이 케일의 하얀 몸을 물들였다. 최한이 수백 번을 보았던 케일의 벗은 몸이, 기이할 정도로 투명하고 깨끗해 보였다. 누군가를 지배하기는커녕 누군가의 따뜻한 살갗에 닿아서야만 생기를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순진의 색이었다.
“그러니 증명해 봐. 네가 내 신하가 아니라는 걸. 네가 나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충심이 아니라는 걸.”
이미 왕은 임금다운 옷을 걸치고 있었다. 최한은 코가 시큰거리는 걸 느끼며 왕의 침대 위로 머뭇머뭇 기어 올라갔다. 케일을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려주기 위해선 왕의 땅을 전복하고 왕의 하늘이 되어야 했다. 마침내 최한은 제 의지로 가장 불충한 신하가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