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산을 넘어가고, 어둠으로 물들 즈음의 시간. 집무실에는 오찬 이후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산더미 같은 서류를 처리하는 왕세자와 백작가 망나니가 있었다.
그 정신없는 시간, 노크 소리와 함께 들어온 시종을 통해 사람들이 백조가 되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케일은 그것이 마치, 오래전 김록수 일 적에 읽었던 동화와 조금 비슷하다 느꼈다.
“큰일이군.”
“저하, 백조 왕자라고 아십니까.”
왕세자는 처음 듣는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게 뭔가. 처음 들어보네만."”
왕세자가 들어봤을 리 만무하다. 로운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니까.
“동화입니다. 마법에 걸려 백조가 되어버린 오빠들을 위해 막내 공주 엘리제가 쐐기풀로 그들의 옷을 지어서 마법을 풀어주는 이야기죠.”
“정말 생소한 이야기네. 그런데 왜 하필 제목이 백조 왕자인 거지? 차라리 엘리제와 백조들이 낫겠군.”
“그러게요. 하여튼, 그 쐐기풀로 만든 옷이 필요한데요.”
“그래, 그 옷이, …뭐?”
알베르는 황당한 표정이 되어 케일을 쳐다보았다. 갑작스럽게 쐐기풀로 만든 옷이라니. 케일은 알베르의 얼굴이 어떻게 되었든 신경쓰지 않고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을 이었다.
“백조가 된 이들을 다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쐐기풀 옷이 필요합니다.”
“그걸 어떻게, 아니지. 확신은 있나?”
“고대의 힘에 관련된 기록들을 찾다가 관련 서적이라기에 읽어봤습니다. 오래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더군요.”
물론 거짓말이다.
“허, 참. 대단한 놈.”
“제가 좀.”
케일은 어깨를 으쓱이며 씩 웃어 보였다. 알베르는 능청스럽게 받아넘기는 그가 어이없어서 헛웃음을 뱉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또 뭔가. 혼자서 만들기라도 해야 하나?”
“오, 역시 로운의 태양이 되실 분은 다른가 봅니다. 정확히 꿰뚫어 보셨네요.”
“하, 척하면 척이지. 그래서, 누가 만들 건데. 네가?”
알베르는 흘러내린 앞머리를 대충 손으로 쓸어넘기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제 손재주를 아시는 분 입에서 잘도 그런소리가 나오네요.”
“너 그거 불경죄야.”
케일은 아랑곳하지않고 말을 계속했다.
“만드는 것은 제가 아니라 에르하벤 님께서 만드실 겁니다. 쐐기풀을 구해야 하는데, 어디서 자라는지 아십니까.”
“타샤가 알고 있을 거야. 지금 지하 도시에서 장로를 만나고 있을 테니 나중에 연락하도록 하겠네.”
“알겠습니다. 그럼 남은 서류 처리나 계속하죠.”
지겹도록 봐놓고도 아직 반절이나 남아있는 서류에, 케일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꼭 백수하고 말지. 꼭 백수해서 시골에서 살아야지.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타샤는 쐐기풀을 한가득 들고 도착했다. 다행히 백조가 된 사람은 더 늘어나지 않았고, 왕궁 한편에는 백조 우리가 생겼다. 그 것을 본 평균 9세들은 신기하다고 한참을 기웃거렸다.
백조 우리 앞에는 에르하벤과 온, 홍을 품에 안고 있는 케일만 있었다.
“왕세자는 어디에 두고.”
“서류 처리 중입니다.”
“박복한 인간이 하나 더 있었군.”
에르하벤은 한숨을 쉬었고, 케일은 별일 아니라는 듯 시선을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이 푹 끓여져 부드러워진 쐐기풀을 가져왔고, 백금빛 마나가 쐐기풀에 스며들더니 눈 깜짝할 새에 옷이 완성되었다. 순조롭게 마법 해주가 진행되는 듯 했다.
“이상하군.”
쐐기풀 옷과 백조들을 번갈아 보던 에르하벤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왜 그러십니까.”
“케일, 마법에 걸린 자들은 분명 열 명 이지?”
“네, 전부 열 명이고 직접 확인했습니다.”
케일은 확실히 보았다. 보고, 만지고, 들었다. 그런데 옷 하나가 남았다. 분명 백조 수에 맞게 진행되었을 마법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대륙 최강의 존재. 고룡 에르하벤의 마법이 잘못되었을 리는 없었다.
“아직 남아있는게 아니냐는 건데.”
“그럴 거 같다는 건데!”
은빛 고양이와 붉은빛 고양이가 입을 모아 말했다. 확실하진 않았으나 어린 묘족들이 하는 말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인간아, 왕세자가 이상하다!
에르하벤의 이야기를 듣고 잠시 왕세자를 보러간다던 라온의 목소리가 케일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거기에 있는 백조들이랑 같은 마나 파동이 느껴진다!
케일은 퍼뜩 왕세자의 집무실 쪽을 돌아보았다. 그럴 리 없을 텐데. 알베르는 오찬 직전까지 케일과 함께 있었다. 금발과 푸른 눈동자.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좀 다르다! 백조가 아닌 것 같다! 백조긴 한데, 꼭 원래 모습 같다!
케일은 서둘러 집무실을 향했다. 검은 백조. 알베르가 다크엘프 쿼터라는 것을 들키기 가장 좋은 상태다. 알베르의 집무실에 누구도 들여선 안 된다. 케일의 두 발에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
“저하, 접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빠르게 달려오느라 흐트러진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문을 열었다. 다행히 안에는 다른 이가 없었다. 대신, 고혹적인 짙은 빛깔의 검은 백조 한 마리가 있었다. 틀림없이 알베르다. 완전한 검은색이 아닌 다크엘프 쿼터 알베르만의 색.
방에 있던 시종과, 은신하던 수하들까지 내보내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간담이 서늘해졌다.
“라온, 나 말고 들어온 사람은.”
“없다! 방음 마법 걸었으니 큰소리 내도 괜찮다!”
“고맙다.”
케일은 공중에 둥둥 떠있는 라온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검은 용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통통한 앞발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하아, 어쩌다 이런 모습이 되셨습니까.”
검은 백조는 멀뚱히 케일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부리로 깃털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말 새가 되어버린건지.
“라온, 에르하벤 님 좀 불러줘.”
“알겠다, 인간아! 조금만 기다려라!”
케일은 검은 백조를 안아들고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에르하벤이 들어왔다.
“역시 왕세자였군.”
“알고 계셨으면 진작 말씀해주시지 그랬습니까.”
“지금 말하러왔지 않나.”
케일은 연신 마른세수를 했다. 어이가 없었다. 에르하벤은 케일의 얼굴을 보고 참 박복하다고 생각했다.
“일단 그 옷 좀 줘보십시오. 입혀놓고 이야기 좀 해야겠습니다.”
케일은 옷을 건네받아 검은 백조에게 입혔다. 잠시 뒤, 알베르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두 팔을 빼고서.
“뭡니까, 팔은 왜 안돌아와요.”
“나도 알고 싶군. 염색 마법도 통하질 않아.”
그래서 아직 갈색 머리 상태였다.
“일단 뭐 때문에 백조가 됐는지 말해보시죠.”
“아, 잠깐만. 다른 이들은 내보내면 안 되겠나?”
아주 조금, 알베르의 표정에 금이 갔다. 케일은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어쩔 수 없군요. 다 나가세요. 뭘 말하려는건지 이렇게 뜸을 들이는데, 저만 듣고 오겠습니다.”
“치사한데!”
“맞다, 치사하다 인간!”
홍과 라온이 불평했다. 온은 일찌감치 에르하벤의 품에서 둘을 한심하게 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군. 나가자, 꼬맹이들.”
에르하벤이 평균 9세들을 데려가자, 집무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케일은 커다란 두 날개로 얼굴을 감싸고 있는 알베르를 빤히 쳐다봤다.
“왜 그렇게 쳐다봐.”
“무슨 얘길 하려고 이렇게 전부 물렸는지 궁금해서요.”
케일은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자연스레 다리를 꼬았다.
“내가.”
“네.”
“아침에.”
“아침에요.”
“네가.”
“제가요.”
“그러니까….”
저 다크엘프 쿼터가 계속 말을 끊는다. 케일은 답답해 돌아버릴 것 같았다.
“거 참, 답답하게 구시네. 제대로 대답 안합니까?”
그리고 말했다. 진짜 불경죄로 잡혀가도 변명거리가 없었다. 그리고 알베르는 케일의 재촉에 의해 말해버렸다.
“아침에 자네가 확인한답시고 백조들 쓰다듬는 것 보고 그들이 부럽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되었다네. 이제 만족하나?”
“어이구.”
“하아, 이렇게 말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케일은 솔직히 이 상황이 조금 웃겼다. 그 왕세자가 백조에게 질투를 한 꼴이니, 귀엽지 않은가.
잠깐, 귀여워? 케일은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팠다.
“나도 쓰다듬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나 봐. 정말 돌았군, 알베르 크로스만.”
“그러게요, 돌았나 봅니다.”
알베르는 날개로 얼굴을 감쌌다. 지하 도시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이 순간만큼은 정말로 타샤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몸이 한쪽으로 쏠렸다.
“뭐야.”
“뭐긴요, 쓰다듬어주는 건데요.”
“갑자기?”
“싫어? 그럼 안해.”
“아니, 아니야. 계속해 줘.”
자연스럽게 반말이 오갔다. 다른 귀족들이 들었다면 경을 칠만한 대화였지만 둘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그냥 이게 좋았다.
케일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서는 가만히 쓰다듬어지는 알베르는 고양이 같기도 하고 다람쥐 같기도 하고 하여튼 그랬다.
서로의 감정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딱히 그럴듯한 계기가 없었다. 전쟁이다 뭐다 하는데, 연애할 시간이 어디 있나.
“팔은 언제…, 돌아왔네요.”
“욕구가 충족되면 돌아오는 것 같은데.”
“허이구, 그렇게 쓰다듬어지고 싶으셨나.”
알베르의 귀 끝이 약간 빨갛게 물들었다. 별로 티도 안났지만 케일은 알았다.
“다른 이들한테 어떻게 설명할지 생각했나?”
“대충 국혼한다고 하죠.”
“하, 진짜 망나니 자식.”
“제가 좀.”
골 때리는 소리를 내뱉고 다음에 하는 말도 아주 불경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좋았다.
머리를 쓰다듬던 가느다란 손가락이 점차 내려갔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에서 높고 오뚝한 콧대로, 매끈한 뺨에서 말랑한 입술로 옮겨갔다.
“케일, 간지러워.”
“뭐 어때요. 보는 사람도 없는데.”
붉은 머리카락이 점점 내려왔다. 알베르는 암갈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꽈당.
음?
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에 기대고 있던 홍과 라온이 넘어졌다. 온은 둘을 한심하게 보았다. 에르하벤은 어딜 갔는지 없었다.
보는 사람은 없었다. 고양이 두 마리와 용 한 마리는 있었다. 그랬다.
“뽀뽀하는 건데!”
“왜 멈추나, 인간!”
“계속하라는 건데.”
온이 둘을 질질 끌고 나갔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정적이 흘렀다.
“어쩔래.”
“어쩌죠.”
이렇게 들킬 거면 차라리 왕국민 앞에서 연설을 하는 것이 덜 부끄러웠다. 알베르는 붉어진 얼굴을 감싼 채로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케일 앞에 무릎 꿇었다.
“케일.”
“왜요.”
“나랑 국혼하자.”
“돌겠네.”
케일은 알베르의 양 뺨을 잡고 입술을 맞대었다. 제 앞에 무릎 꿇고 앉은 다크엘프 쿼터가 바보같이 귀여웠던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