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그러므로 각 가문은 조속히 휘하의 자식 중 택일하여 황궁으로 보낼 것을 명한다.
앞에 붙은 공치사는 제각기 달랐으나 끝을 맺는 문장은 모두 같은 서신이 로운 내의 모든 가문에 보내졌다. 알베르 크로스만이 즉위하고 이 개월 반, 중부의 로트 가문에서 새로 즉위한 국왕에 반발한 지 이틀 만의 일이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뭐라고!”
“안 된다!”
케일은 머쓱한 얼굴로, 하지만 완강히 서신을 손에 쥐었다. 도리어 반대하는 부모님이 이상했다. 괜찮지 않은가? 케일 헤니투스는 술 처먹고 문제 일으키는 망나니였고, 바센은 성실하게 백작위를 물려받기 위해 공부하는 아이였으며 릴리는 너무 어렸다. 가문에서 누군가를 보내야 한다면 하는 일 없고 그나마 나이 많은 사람이 가야 마땅하지 않겠나. 태연한 케일의 태도에 바이올란이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 아침에 로트 가가 어찌 되었는지 너도 들었잖느냐!”
“예.”
케일은, 정확히는 이 주 전까지 김록수로서 살아온 사람은 진중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의 케일이 가진 상식에서라면 무도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록수가 가진 지식으로는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아직 기반이 단단하지 못한 권력자가 공포심이라도 끌어다 쓰려 드는 건 동서고금에 흔하니. 무고한 핏줄까지 통째로 멸문지화를 입은 것도 아니고, 반역하려 든 이들만 나란히 목을 베었는데 뭘 그렇게까지. 그러고 보니 ‘영웅의 탄생’은 가상의 서양을 배경으로 한 퓨전 판타지였지. 역시 이 배경에서는 구족을 쫓아가며 잡아죽이는 종류의 황제가 등장하지는 않는가보다. 만일 그랬다 해도 별 상관 없지만. 케일은 주변의 사람들이 들었더라면 기함할 생각을 갈무리하고 고개들었다. 케일은 백이 넘는 귀족가 자제들 사이에서 고개 숙이고 지내는 편이 더 나을 듯 싶었으니까.
원작에선 분명 주인공의 망나니 오라비라 적혀 있었다. 그러니 적당히 나돌아다니면 괜찮을 줄 안심하고 있었는데, 읽었던 내용과는 달리 온가족이 단란했다. 그야 그렇겠지, ‘케일’이 눈을 뜬 시점은 작품의 프롤로그, 릴리가 겨우 열 살 남짓하던 시절을 설명하는 한 대목이었으니까. 원작의 주요 서사가 진행되려면 칠 년이나 남았다. 그래, 그 땐 아직 덜 망나니였을 수도 있지. ‘케일’을 향하는 태도가 읽은 것과 전혀 다르니 도무지 거기 맞춰 연기하기가 힘들었다. 그냥 밥을 먹고 인사를 해도 다들 기겁을 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케일’을 뺀 다른 사람들은 작품과 궤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점이었다. 얼굴과 성격이 자세히 쓰여 있었던 것이 고마울 따름이지. 케일은 눈물 그렁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릴리에게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매정히 고개돌렸다. 충분히 못된 오빠로 보일 만한 움직임이었다 싶어 뿌듯했다. 케일로서는 빨리 원작대로의 내놓은 자식이 되어 혼자 조용히, 편안한 생활을 하고 싶었으니까. 읽던 도중이긴 했으나 이 집안 온 사방에 무서운 이가 깔린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물론 빨리 해결될 인물들도 있긴 했다. 며칠 후 이 성에 들를 최한은 잠시 스쳐지나갈 것이다. 케일의 시종이자 정체를 숨긴 암살자인 론과 그 아들로 요리사 행세를 하고 있지만 고문기술자인 비크로스는 그를 따라 갈 테고. 그러나 새어머니 되는 바이올란의 나이든 스승도 성 밖 어딘가에 있고, 멀리 갈 것도 없이 이미 소드 익스퍼트인 힐스만도 부단장 자리에 있지 않은가. 케일의어린 시절을 다 보아 온 이들 중에서도 실력자가 꽤 된다는 뜻이다. 지금의 케일과 그들이 아는 ‘케일’이 다르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어떻게 될까? 케일은 마른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무엇을 걱정하시는지는 압니다.”
두렵겠지. 당연하다. 겪어 보니 케일은,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내놓은 자식이라기보다 아픈 손가락이었다. 거기 더해 위험한 자리에서 앞뒤 못 가리고 주정을 부릴까 걱정도 되겠지. 하지만 케일이 기대하는 바는 바로 거기 있었다. 사람은 두려운 일을 겪고 나면 조금씩 변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인질을 요구하는 강압적인 방식을 오래 유지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미 한 번의 본보기를 보였으니 당장은 모두 말을 들을 것이고, 그 후 관대한 태도를 보이면 다들 칭송하기 바쁘겠지요. 당근과 채찍은 번갈아 쓰는 게 중요하니까요.”
그러니 다녀와서는 조금 케일답지 못하게 굴어도 의심받지 않을 것이다. 그저 무서운 일을 겪었구나, 음식 투정에 술주정은 도저히 못 할 곳에서 고개숙이고 지내다 얌전해졌구나, 하겠지. 혼자 있고 싶어해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고. 케일은 굳은 얼굴의 가족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저 잠시 조용히 지내다가 돌아오면 그만입니다. 그렇잖아요?”
말하자면 케일은 장기적으로 편히 지내기 위해 지금 바짝 고생하는 쪽을 택했다. 혼자 조용히 가서, 숙이고 있다가, 그대로 돌아와 얌전히 산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몇 달 후, 케일은 위풍당당한 왕성 앞에 서 있었다. 케일이 조용히 살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었다. 크고, 넓고, 적당히 대접받고, 인파에 묻혀 눈에 안 띄게 지낼 수 있는 곳. 위댜한 야망의 초석인 성을 올려다보며 케일이 크게 한숨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케일은 품 안의 투명한 드래곤을 쓰다듬었다. 지나가는 길목이라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죽으라고 내버려 둘 순 없지 않은가? 재킷의 양 주머니에서 새끼 고양이 두 마리가 나란히 고개를 내밀었다.
“신기한데!”
“여기가 왕성인데?”
“씁, 들어가 있어.”
이 쪽도 마찬가지다. 역시 굶게 둘 순 없었을 뿐이었다. 왕성까지 가는 길에 무슨 일이 이렇게 많은지. 이야기의 배경쯤이었던 사건을 직접 겪으려니 고생도 이런 고생이 없었다.
“케일님, 힘드시면 제가 모두를 안아들겠습니다.”
...하나 더 있었군. 케일은 어색하게 손을 까딱여 말렸다. 말갛고 순한 얼굴, 드래곤 슬레이어로 시작해 명성을 떨칠 예정이었던 차원 이동자 최한이었다. 책 내용대로라면 슬슬 지금의 전하와 만나 전설이 될 만한 일들을 하고 릴리가 딱 연애라는 걸 시작해 볼 나이쯤엔 왕실 수호기사가 되어 있어야 한다. 원래 열 살 넘게 차이나는 남주 후보는 보호자라는 선 위에 서 있다가 아련히 떨어져 나가야 하지만, 그것도 수백 년쯤 차이나면 괜찮은 법이었다. 하지만 원래는 이 즈음 아직 어렸던 릴리에게 어렴풋한 인상만을 남기고 멀어지는 전개였을 텐데. 케일은 헤니투스 가의 병사 차림을 한 최한을 보고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미래에 일이 어떻게 꼬일지 생각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됐어, 얘네가 뭐가 무겁다고...”
케일의 일행은 시종 하나, 요리사 하나, 호위 하나가 전부인 단출한 구성이었다. 조용히 오기 위한 선택이었으나 번잡한 인파 속에 있으니 도리어 눈에 띄었다. 갖은 귀족 집안이 제 자식을 얼마나 아끼고 감싸는지 보이기 위해 시종과 호위들로 아주 둘둘 감아 놓았으니까. 그럴 필요 없을 텐데 공연한 일이었다. 케일은 심드렁하게 하품하며 왕의 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누구에게 우위가 있는지 보이기 위해 모두를 괜히 땡볕 아래 세워 놓고 있지만 슬슬 불러들일 때가 됐는데.
“국왕 전하 납시오ㅡ!”
납신다고? 안 들여보내? 여기 세워놓고 인사하게? 덥단 말이야! 그러나 케일은 질색하면서도 예의바른 표정을 지었다. 지금부터 시작될 절차는 듣기 힘들 만큼 기름질쳐진 말을 참고 들어야 하는, 귀찮고 끔찍한 형식적인 환영 인사 시간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괜히 딴청피우다 찍히기라도 하면 그 때야말로 정말 귀찮아진다. 절대로 얽히지 말아야지. 케일이 얌전히 경청하는 자세를 한 동안 주변에선 분노 섞인 웅성거림이 커졌다. 모두 제 영지에선 내로라하는 귀족 나으리들이시니 이런 취급은 처음이겠지. 하지만 케일은 얌전히, 원작에서의 알베르 크로스만을 떠올렸다. 사실 뭐 대단한 비중이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모두의 인정욕구를 자극하는 캐릭터라면 설명이 될까. 나라 안의 권력 피라미드 최정점에 앉아 허허허 네 말이 옳구나 말하는 것으로 상황을 제 입맛대로 조정할 수 있는 인물. 케일은 입 안으로 슬쩍 혀를 찼다. 귀족들의 기반을 불안하게 만들어 서로 무한경쟁체제에 던져버리고 승자를 가리는 역할만 맡았다. 당연히 점점 더 왕권은 확고해져 갔지. 그러고보니 작중 릴리의 목표도 국왕에게 인정받고 헤니투스 ‘후작가’가 되는 것이었던가? 엔딩쯤엔 공작가의 시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게 독자로써의 예상이었다만 이제 와선 별다른 의미도 없고. 케일은 십 년쯤 후에 어떻게 동생에게서 콩고물이나 받아 조용히 살 수 있을까 생각하며 계속해서 왕을 올려다보았다. 재위에 오르자마자 작위 박탈도 하사도 파격적일 만큼 잦았지. 높으신 분들이야 가진 걸 잃을까 두려워했지만 재능이 있는데도 나서지 못했던 이들에겐 기회의 시대였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목 좀 친게 문제랴. 돈 주시는 분은 고마우신 은인이 되는 게 사람의 법칙이다. 충성스러운 신하를 줄줄이 거느리고 의뭉떠는 모습이 참... 재수 없었지. 물론 돈 뺐아가는 놈은 철천지 원수인 것도 사람의 법칙이니 칼 가는 적도 산재해 있겠지. 케일은 구구절절 구성지게도 이어지는 모여 준 이들에 대한 기쁨과 고마운 마음과 앞으로의 기대 따위를 한 귀로 흘려보내며 감동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태양신의 가호가 있다고 사방팔방으로 자랑하는 왕가답게 햇살처럼 화사한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연설을 따라 우아하게 움직이는 손도. 저 희고 말끔한 장갑 너머의 손에서 피냄새가 가시기도 전일 텐데 뻔뻔스럽기도 하지. 정치인의 훌륭한 재목이로구나. 케일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을 때, 군중을 둘러보던 왕이 케일 쪽으로 얼굴을 향했다. 순간이었지만 침묵이 흘렀다. 다시 유려하게 이어지는 인사를 들으며, 케일은 이 거리에서 이 인파 속에서 눈이 마주칠 리 없다고 가볍게 고개를 저어 상념을 흘려버렸다.
케일은 내심 감탄했다. 이야ㅡ 방 좋다. 어지간한 호텔은 저리가라구나. 물론 이보다 좋은 방은 본 적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 되겠지만. 이만하면 그 돈으로 꼼꼼히 발린 티가 나던 케일의 방보다도 아슬하게 더 좋겠는데? 뭔가 착오가 있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괜찮은 방이었다. 궁이라 해도 수용에 한계는 있으련만 꼼꼼하게 잘 정비된 방이 모두에게 배정되었고 딸려 온 군식구들마저 조금 비좁긴 해도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케일은 푸른 비로드 커텐을 홱 젖히고 침대에 푹 드러누웠다. 아이고 좋다. 누우니까 이렇게 좋은데.
-인간아. 여기 녹음구가 여러 군데 있다. 궁전이란 건 원래 이러나?
좋았던 기분 확 잡치네. 케일은 조심스럽게 눈 근처를 툭툭 건드렸다. 드래곤은 도리어 모습을 홱 드러냈다.
-녹화구는 없다. 있으면 안 되는 건가?
케일은 가볍게 손을 들어 일행의 주의를 끈 후 입 앞에 검지손가락을 세워 갖다 대 보였다. 다행히 다들 눈치 빠른 사람들이라 반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크로스는 어딘가 녹음구가 숨겨져 있을 천장과 가구 따위로 눈을 한 번 굴리더니 가벼운 한숨과 함께 돌아나갔다. 온과 홍에게까지 조심할 것을 전하고 있는데 론이 케일의 등을 토닥였다.
“도련님, 욕조를 더운물로 채웠습니다. 환복을 도울까요?”
“응? 아냐. 론도 들어가서 쉬어. 최한! 너도.”
“문 앞에서 호위를 서겠습니다.”
“아니, 여긴 왕궁이잖아. 그렇잖아도 경비가 삼엄할 테니 그럴 필요는... 비크로스, 뭘 그렇게 가져오는 거야?”
“입이 심심하실까 싶어 가벼운 걸로 조금 챙겼습니다.”
케일은 이 고집스러운 일행을 둘러본 후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고 해도 잠들기 전까진 안 나가겠지. 결국 케일은 따끈한 차에 곁들여 치즈를 얹은 크래커를 먹고 온수에 몸을 씻고 나서 머리카락까지 뽀송히 닦인 후에야 세 사람을 내보낼 수 있었다. 그러고도 케일은 옆구리를 파고드는 솜뭉치 두 마리와 왜인지 다리 사이에 자리잡은 어린 용을 깔아뭉개거나 걷어차지 않기 위해 머리 옆으로 죄 끌어올리는 노고를 한 뒤 겨우 잠들었다.
케일은 눈을 깜박이며 천장이 새삼 참 낮설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백작가의 침실도 낮선 천장이었고, 그 다음의 숙소와 숙소와 또 숙소도 낮설었지. 지역별 여관의 건축 유행을 기억해 두어 봤자 아무 의미 없겠지만. 한가롭게도 이런 상념에 잠겨 있는 이유는 머리 바로 양옆에 세 아이들이 옹기종기 붙어 잠들어서이고, 아무튼간에 애들은 많이 자야 한다고 생각하는 케일로서는 섣불리 움직였다 애들을 깨울까 싶었던 탓이다. 케일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자니 다시 나른하니 졸음이 쏟아진다고 생각했다. 커튼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부드러워 눈이 감겼다.
“도련님, 일어나셔야지요.”
잘 수가 없네. 론은 능숙하게 아이들을 깨지 않게 옮긴 후 케일을 일으켜 앉혔다. 케일은, 그러니까 김록수가 이 세계에 오기 전의 케일은 원래가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늦게 깨는 사람이었기에 이런 식으로 잠을 깨우는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케일은 자신을 부드럽게 어르는 손길에 소름이 돋았다.
“......가족 식사에도 깨운 적 없잖아.”
“영지의 행사가 있는 날은 깨웠지요. 오늘부터는 매일매일이 행사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내가 왜?”
늦잠을 방해받은 철부지답게 부루퉁한 표정에 론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이 흡사 손주를 귀여워하는 보통의 노인 같아 오싹하기까지 했다.
“왕명이 떨어졌습니다. 매일 아침은 왕실에서 친히 만찬을 내리니 모두가 참석하시라고요. 아파서 나올 수 없는 이에게는 의료진을 바로 붙여주겠다니 예전 바센 도련님의 생일날처럼 꾀병을 부리셔서도 안 됩니다, 도련님.”
이 녀석, 그런 짓까지 했었나. 케일은 입 안으로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옷을 갈아입는 것도 머리를 빗는 것도 반 이상은 론의 손이 닿으니 힘들 일도 없다. 아침식사는 꼭 다같이 하라니. 어느 아침드라마의 단란한 가정 같네. 같은 음식을 먹는 데 무슨 의미가 있던가. 심리적으로 동질감을 느낀다는 것 정도? 하지만 귀족끼리의 사이를 돈독히 다져서 왕실이 무슨 이득을 보지? 목적이 그런 데 있지 않은 경우라면... 케일은 복도와 계단을 지나 건물을 나서서야 론을 손짓해 가까이 불렀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는 어디에도 남지 못하도록 낮았다.
“비크로스에게 혹시 주방의 요리에 자백제나 환각제가 들어가는 건 아닌지 확인해 달라고 해 줘.”
결과적으로는 확인을 해 받기도 전에 그런 약은 없을 것임을 알았다. 온 나라의 귀족을 다 모았다 해도 말뿐이지 결국 당장 작위를 갖고 영지를 통치하는 자의 직계 자손 하나씩이다. 거느리고 온 식솔들을 모두 제하고 자리에 앉을 사람은 겨우 팔십 네 명이었다. 솔직히 케일은 이 나라의 긴 역사를 고려했을 때 수가 지나치게 적지 않나 생각했다. 하긴, 이렇게 한꺼번에 부르려면 어지간한 남작은 다 쳐내졌을 테고, 자작가도 몇 없고... 그런데도 그들만으로 이미 한참 과반이군. 케일은 느긋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크고 넓은 연회장에 거대한 다섯 개의 테이블이 배치되어 누구의 자리인지 표시하기 위한 카드까지 올려져 있었다. 지역과 세력 분포로 나누고 섞은 것이 아주 꾼의 솜씨였다. 케일은 꽤 늦은 축으로 자리는 이미 거의 다 차 있었고, 어디선가 좋은 냄새가 솔솔 풍기는 게 모두가 착석하는 대로 테이블로 날라져 올 준비가 되어 있는 성 싶었다. 배치가 어떻게든 되어 있나 괜히 얼뜨기처럼 어슬렁거린 케일이 느긋이 자리를 골라 앉았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하인들이 쟁반을 들고 줄지어 들어서기 시작했다. 연회장 안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설마...”
모두의 시선이 한 자리로 쏠렸다가 빠르게 흩어졌다. 앉은 사람은 팔십 세 명. 비어 있는 하나의 의자는 설령 왕 본인이 내려와 앉아 있다 해도 그럴 수 없을 만큼 위압감을 주었다. 아무도 없는 자리에 놓이는 에피타이저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케일은 내심 픽 웃으며 생각했다. 약이고 뭐고 탈 이유가 없네. 당장 서로 안면 있는 이들이 대다수고 그보다 가까운 이들도 많으련만 대화는 커녕 숨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손 댄 이도 몇 없는 에피타이저 접시가 치워졌다. 다시 느릿느릿 버섯 스프가, 몇 숟갈 뜨지도 못했는데 다시 흰 빵이, 겉이 바삭하도록 구워낸 생선에 이어, 한입거리인 딸기 셔벗까지 나왔다 사라졌다. 식사는 지나치리만큼 조용히 진행되었다. 간혹 손을 떠는 어느 댁 어린애가 나이프로 접시를 긁는 정도였다. 체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케일은 와인을 넣고 삶았는지 향도 좋고 부드러운 꿩고기를 크게 썰어 입에 넣었다. 오, 맛있다. 비크로스의 요리도 물론 맛있지만 향신료의 종류가 다른지 전혀 새로운 맛이었다. 케일은 다시 한 입 가득 고기를 베어물며 연회장 안을 슬쩍 둘러보았다.
‘공포 정치에 재능이 있으신가.’
빈 자리의 주인이 아침에 끌려나가 내쫓겼는지, 아니면 간밤에 쥐도새도 모르게 목이 따였는지 알 수 없지만 각자 최악의 상상을 고루고루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건 잘 알겠다. 가까운 이들은 카드가 보였을 테니 누가 사라진 건지 분명히 알 테고, 어쩌면 그 누군가의 지인은 사라질 만한 이유가 있었는지를 알 지도 모르고 가까운 방을 배정받았다면 어떤 소란을 목격했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정보를 나누기 시작한다면 대강의 큰 그림을 가늠해볼 수도 있으련만 오가는 하인들의 눈과 귀가 무서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곳에서의 모든 행동은 알베르 국왕 전하에게 알려질 거라 상정하는 게 낫겠지. 그럭저럭 현명한 처사다. 케일은 다음 차례인 샐러드를 냠냠 먹으며 생각했다. 아, 슬슬 배부르다. 이거 다 맛있는데 다들 남기네. 남은 거라 죄 버리려나? 아까우니까 누구라도 먹을까? 케일은 디저트로 나온, 손가락 두 마디만한 초콜릿 조각까지 입에 쏙 밀어넣으며 배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 좋다. 매일 이런 만찬이 나온다면 일찍 일어날 가치가 있었다.
“그런 자리에서 멈추지도 않고 잘만 처먹다니 내가 다 민망하더군.”
케일은 잠깐 손을 멈춘 채 고민했다. 얘들이 암만 새끼고양이 모습이라지만 아주 고양이인 건 아니잖아. 말도 잘 하는 인격체인데 이런 깃털 장난감으로 놀아줘도 되나? 하지만 종족 기준으로도 어린애고, 애들이랑 놀아주는 건데... 뭐, 상관없나? 상관없겠지? 케일은 다시 장난감을 흔들었다.
“망나니라더니 허명이 아니었나 보지. 다들 묵묵히 물만 마실 때 혼자 와인까지 받아먹는 걸 보았나?”
옷, 잡았다. 이 녀석 날랜걸? 어리니 몸도 가벼운가. 그래도 눈빛만은 벌써 사냥꾼인데. 케일은 어쩐지 알 수 없는 뿌듯함을 느끼며 홍의 발톱에서 깃털을 빼앗았다. 벌써 다섯 번째인데 지치지도 않나? 온은 두어 번 잡더니 동생에게 양보하는 건지, 귀찮아진 건지 늘어져버린 게 한참 전이었는데. 홍이 다시 반짝 고개들었다. 뭐야, 한번 더? 좋아.
“아무리 그래도 백작가의 격이 있지 설마 헛소문이려니 했건만, 진짜로 상황 파악도 못 하는 머저리였군.”
-인간아, 저거 왜 저러나? 죽고 싶은 건가?
“가만 있어. 아무나 막 죽이고 그러면 안 돼.”
-아무나 아니다. 약한 인간한테 함부로 말했다. 죽어도 된다.
“...안 돼.”
무섭게스리. 게다가 저 정도로 유치하면 대꾸할 생각도 들지 않는걸. 케일은 허공을 통통 두드리듯 용의 머리를 만져 준 후 뒤돌아보았다. 순간 움찔하더니 허세부리듯 턱을 드는 모습이 애송이 그 자체였다. 옷차림이나 태도 따위를 종합해 볼 때 케일 또래인 것 같은데, 저게 몇 살 더 많아서 들어 보이는 건지 그냥 노안인지 모르겠군.
“야.”
“-뭐, 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게 마치 크리스마스 전구 같구나.
“웬만하면 싸우지 말자. 찝찝하니까.”
“나, 나는 후작가의 사람이야! 너는 배-백작가 사람이고! 어떻게 나한테 찝, 찝, 찝찝하다고!”
“어. 찝찝하지.”
케일은 고개숙여 온과 홍을 집어들었다. 적당히 품에 안아 자리잡게 한 후 이어 말했다.
“말 애매하게 하는 거 봐라. 어느 가문에서 왔다, 내가 후계자다-라곤 못하지? 이런 때 이런 부름에 이렇게 와 있단 건 그런 뜻이니까. 너나 나나 거기서 거기라고. 버려도 되는 패. 만약 지금 맞붙어 싸웠는데 내일 둘 중 하나가 빈 자리로만 나타나면 얼마나 찝찝하겠어? 그러니까 원만히 끝내지. 지금 사과하면 넘어가 주겠어.”
음, 노안인 쪽인가보다. 이 정도 말에 빨갛던 얼굴이 시허얘지다니. 이제야 우리 처지를 새삼 알겠어? 살아남을 방도를 구하는 편이 나을 걸. 그런데 적당히 창백해지는 데서 그치지 않고 거의 퍼렇게 되어 갔다. 음, 그러니까 지금 그 비어 있던 자리를 생각하고 있는 게 맞겠지? 케일이 후원에서 노닥거리는 사이 무슨 소식이라도 들었나? 케일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물었다.
“죽었대?”
“주, 주, 죽-”
“너처럼 어느 후작가의, 너랑은 다르게 아침 먹으러 안 온 놈.”
가관이다. 딸꾹질까지 시작했군. 죽이지는 않았을텐데, 죽였나? 아냐. 아드엘 후작가는 쓸데없이 세가 컸으니 죽이진 않았겠지. 그 큰 세력으로 2왕자를 지지했다는 것 같은데, 1왕자였던 왕의 궁에 보냈으니 어찌 될지 예감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버려도 되는 패라 해도 혈육은 혈육. 죽여 돌려보낸다면 오히려 쓸 만한 패를 없애는 짓이다. 전향할래, 안 할래? 자식을 잃고 이 협박에 굴할까. 물론 손상을 입은 것 정도로도 원한을 품을 수 있지만, 그 댁 후계자인 영애가 똑똑한 걸로 알고 있는데 혼자라도 나서서 국왕 앞에 납작 업드리지 않을까. 부모가 그에 반대한다면? 어쩌면 아드엘 후작가 영애로서는 그 편이 더 좋을 수도 있다. 후작 자리에 빨리 앉게 될 테니까.
“거기, 뭐 하십니까?”
“음?”
끼익, 끼익. 쇠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돌아보기 전에 누구인지 먼저 알려주었다. 테일러 스텐. 이런 자리에 보내기엔 딱 좋다고 여겨졌을 만큼 가문 내 후계자 경쟁에서 밀린 장남이었다. 말하자면 저 멍청이에게 자신의 미래를-무사히 돌아가지 못하면 어떻게 될지, 그리고 돌아가더라도 어떨지- 보여주는 모습이었고 아마 막 불붙은 찝찝함을 몇 배는 증폭시켜 주었겠지. 테일러는 덤덤한 표정으로 케일과 머저리의 모습을 응시했다. 조금 뒤 한 시야에 둘을 모두 담기는 힘들어졌다. 시비 걸 때의 태도는 간데없이, 시허얘진 얼굴로 게걸음인지 뒷걸음질인지 모르게 멀어져 가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운 꼴이었다.
“이런 식으로 도와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저는 그저 말을 건 것 뿐인데 가버리셨으니 대화를 방해한 것 같아 죄송한걸요.”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실 분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 정도는 계산하고 나오신 거 압니다.”
케일은 테일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분함, 당황스러움, 들킨 듯한 기분과... 누군가 알아준다는 기쁨이 뒤섞여 묘한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체념한 듯한 미소로 말했다.
“그 정도 계산이 된다고 뭐가 바뀌겠습니까? 오늘 오지 않은 아이를 압니다. 똑똑하진 않았지만 모자라다고 할 수도 없었지요. 아직 소식을 못 들으셨나본데 한쪽 팔을 잘렸다고 하더군요. 왕 앞에서 예의를 지키지 못했다던데요.”
그러나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그저 핑계임을 알았다. 스텐 가문은 3왕자를 지지했으니 테일러라고 해도 다른 미래가 있지는 않을 것인가.
“저도 손을 잃을지 모르겠군요. 팔다리를 다 못 써서야 곤란한데.”
일반적으로 후작가의 자제 쯤 되면 이유 없이 드러누워 버텨도 누군가 붙어 먹이고 씻기고 입힐 수 있다. 케일도 몇 날 며칠을 놀고먹었지만 아무 문제 없었다. 하지만 스텐 가라면, 일부러 자식들을 잔혹하게 경쟁시키는 스텐 가라면- 죽이기 좋은 먹잇감이 될 뿐이겠지.
“못 쓰는 다리를 잘라 준다면 되려 편할지도 모르겠군요.”
“국왕 전하가 스텐 가의 일을 모를 정도로 어리숙하진 않단 걸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보아하니 ‘그 정도 계산’도 못하는 이들도 널렸습니다. 당신은 왕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인재죠.”
“예?”
“국왕 전하께 필요한 건 잘 뛰는 사람이 아니라 머리를 쓰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휠체어에 앉았다고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니고 당신은 단지 사는 것보다 나은 미래를 꿈꿀 사람으로 보입니다만. 그럼에도 그 다리가 당신을 끌어내리고 있다면 당신이 잃은 것이 단지 움직이는 다리가 아니라 권력에의 가능성과 가족에 남아있던 애정인 탓이겠지요. 괜찮지 않습니까?”
테일러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저희 가문이 좀 특이하여 날아오는 칼을 피할 다리가 없으면 괜찮지 않거든요. 어떻게 괜찮아지겠습니까?”
어허, 감 잡았으면서 떠보기는.
“당신의 가족이 왕의 손아귀에 당신을 버렸는데, 당신이 그에게 가족을 팔지 못할 이유가 있습니까?”
“왕은 교활한 사람입니다.”
“그렇다 해도 이용하고 버리는 일은 없습니다. 그저 당장의 보탬이 된다면 생명만이라도, 그보다 더한 것을 받아낼 수 있음을 확신시킨다면 투자를 받을 수 있겠지요.”
알베르 크로스만은 그런 사람이니까.
“뭐, 지금 이렇게 도와주셨으니 당신이 실패하더라도 당신의 친구가 난동부리지 않게 찾아서 말려보겠습니다. 이제 당신이 뒤를 봐 주지도 못할 텐데 파문까지 당하면 먹고 살 길이 좀 막막하지 않겠습니까. 소문에는 그런 걸 신경쓰지 않는 사람인 것 같았지만요.”
“그렇죠. 케이지는, 케이지는- 그런 것 따위 신경쓰지 않고 제 복수를 하려 들겠죠. 가문의 절반은 날아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분이야 시원하겠지만, 저는 친구가 살아줬으면 싶으니까요. 네, 말려 주십시오.”
케일은 이마를 잠시 찌푸렸다가 투덜거렸다. 그 사람도 엄청 무섭다고 읽었는데.
“제가 먼저 말을 꺼냈으니 말려는 보겠는데, 장담은 못 하겠습니다.”
테일러의 밝은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케일은 낮게 휘파람을 불며 숙소로 돌아갔다. 일찍 일어났고, 애들이랑 산책도 했으니 당연히 낮잠 잘 시간이지. 여기저기 다른 사람들이 분명 있을 텐데 온 궁이 조용했다. 다들 겁에 질려 틀어박혔나. 아닌 경우는 아까처럼 불안감을 해소하려고 만만한 대상을 찾고 있을 테고. 케일은 마음껏 낮잠자더라도 눈에 띄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 한층 기분이 좋아졌다. 고요한 복도에 가벼운 휘파람 소리만 울렸다.
이튿날도 빈자리는 하나였다. 사람이 줄지 않았단 뜻은 아니다. 없는 사람에겐 의자를 내어 줄 필요가 없고, 아직 왕궁 어딘가에 있는 이의 의자는 빈 채로 식사가 시작되었다. 아쉽게도 이번 차례가 어제 시비 건 멍청이는 아니었다. 메인은 가재 요리로 어제의 꿩고기만큼 맛있었고, 어디선가 음식이 넘어가지 않는지 조그맣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으나 케일이 알 바는 아니었다. 아드엘 후작가의 막내아들, 그러니까 갓 십육 세가 되었고 후계자 순위에서 가장 꼴지였던 아이는 어제 오후 본가로 돌려보내졌다고 한다. 오늘의 빈 자리는 오후나 되어야 그 옆에 앉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알음알음 번지겠지. 그 때쯤 되면 이미 죽었을 수도 있고. 그리고 나는 그 때는 용이랑 소리 없는 도둑잡기를 하고 있을 테고. 케일은 연회장을 나서며 하품했다. 언제까지나 용, 용하고 부를 수도 없고 뭐라고 이름을 지어 줘야 하나, 그런 생각이나 하면서.
삼 일째는 돼지고기에, 사 일째는 농어였다. 닷새엔 디저트로 나온 블루베리 타르트가 엄청 맛있었지. 케일은 자신의 현명했던 선택에 대해 감탄하고 있었다. 아침은 맛있고, 낮잠은 아무리 자도 좋고, 가족들 앞에서 어색한 연기를 펼칠 이유도 없다. 칠십 몇 명으로 줄어든 높으신 분들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음식을 입에도 대지 않거나 마지막 만찬으로 여기는지 우겨넣듯 먹어대는 이도 있었다.간혹 지나친 스트레스로 저보다 낮은 계급의 이를 괴롭히는 경우도 있었지만, 삼 일째 되는 날 어느 조그만 영지의 남작 자제를 린치한 놈이 곧장 그날 밤 지명되어 왼다리를 잘린 이후로는 그런 일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자잘한 시비나 기싸움이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늘상 와인을 잔뜩 들이키고 벌건 얼굴을 한 망나니는 뒤에서 욕이나 듣는 정도였다. 아무도 케일에게 과한 관심을 보일 일은 없다는 뜻이다. 케일은 순식간에 형성된 좁은 사회와 그 꼴을 보며 혀를 찼다. 멍청한 녀석은 한 둘이 아니고,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끼리 모여선 괜한 기싸움을 하거나 크게 격의 차이가 나는 경우 괴롭히려 들기까지 했다. 후계자라는 건 하나로 정해 두는 편이 싸움이 적고, 그 스텐 가 정도 되지 않으면 둘째까지만 기회를 주는 게 보통이었다. 첫째가 사고로 죽기라도 하면, 혹은 큰 흠결이 있으면 계승권은 그 밑으로 넘어가는 정도였다. 집안의 대가 끊겨 그 명예와 재산을 허공에 날리고 싶은 이는 없다. 그러니 무리해서라도 셋 정도는 낳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자란 막내들, 덜 배워 재목이라기엔 모자란 이들이 모인 게 당연하겠지만, 집집마다 버리는 패를 보낸 걸 감안하더라도 심했다. 이게 정말 영지를 다스려야 할 귀족 가문의 환경에서 자란 놈들의 언행이란 말인가? 사이사이 좀 나은 것들이 보이긴 하지만 손에 꼽혔다. 하긴, 케일이 5권까지 읽어 본 결과, 솔직히 릴리 주변엔 개차반 같은 놈들이 너무 많았다. 천재로 두각을 드러낸 파릇한 소공녀나 어린 나이에 공을 세운 전쟁 영웅 따위였는데도 말이다. 다시 짚어보자. 전쟁 후, 세력을 불린 로운은 가히 제국이라 불려도 될 정도였다. 그 쟁쟁한 영웅들 사이에서 새로 떠오르는 별이 될 인물은, 이미 권력을 잡은 이들 사이에서 치이고 또 치이며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싸가지 없는 태도, 동정을 닮은 도움, 보호를 가장한 무시를 숱하게도 볼 수 있었다. 그야, 돈많고 권력 없는 무가의 막내딸이 검술 실력 하나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면 자연스럽게 일어날 일이기는 했다. 물론 갖은 사건을 거치며 모두가 점점 솔직한 태도로 변하며 마음을 주는 전개가 될 것이 뻔히 보이기는 했지만, 이제 손윗형제가 된 상황에서 그런 새끼들에게 동생의 곁을 내어 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로 읽을 때야 뭐 그럭저럭 견딜 만 했지만, 아니 귀족이란 새끼들은 전부 인격 파탄자인가? 하긴, 그러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거름망을 쓰지. 케일은 왕이 뭘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니, 눈치가 좀 있는 자라면 말을 않을 뿐 많이들 알아챘을 것이다. 전부 모아놓고 무작위로 집어가는 듯 하지만 2, 3왕자를 눈에 띄게 지원했던 가문의 자식들부터 잡혀 들어갔다. 사라진 사람들의 옆 방을 썼던 이들의 말로는 밤이 깊어서 데려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처벌은 다음 날 오후라니. 밤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진 몰라도 집안 분위기를 캐거나 하겠지. 아니면 그냥 각 가문에 내밀 본보기를 만들 적당한 핑계를 위한 것일 뿐일지도. 케일은 픽 웃었다. 무슨 천일야화 같네. 군주의 방에 끌려간 이가 하룻밤이 지나 죽어 사라지는 것 말이다. 그래도 여기서는 아직 아무도 안 죽었잖아. 그럼 됐지. 케일은, 김록수는 주변의 파랗게 떠는 애송이들과는 다른 생각을 했다. 살아만 있으면 다음 수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 두려울 것도 없다.
결국 칠 일째 되는 아침, 의자가 비지 않는 일이 생겼다. 연회장은 전에 없이 부산스러워 사방에서 포크와 나이프를 떨궈대는 소리가 났다. 오후가 되기도 전에 누가 불려갔었는지 금방 밝혀졌다. 평소 같으면 문 밖의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어도 알 듯 말 듯 했겠지만, 쇠바퀴가 구르는 소리는 꽤나 독특해 잘못 들을 수가 없으니까. 케일은 주방에서 뜯어낸 와인을 홀짝이며 테일러 스텐의 주변에 몰려든 이들을 구경했다. 어떻게 멀쩡히 돌아올 수 있었냐는 질문들일 게 뻔했다. 하지만 말해주지 않겠지. 자신의 생명줄인데. 이놈도 저놈도 왕의 지지세력이 되겠다 한다면 자신의 몸값을 떨어트리는 일이고, 거기 더해 멍청한 놈과 눈치 빠른 놈을 못 거르게 되면 왕에게 손해를 끼치는 게 되니 두려움까지 느낄 테다. 이 왕궁에 갇힌 채 외부와 소통할 순 없지만, 타겟이 될 만한 가문 중 자식을 아끼는 집에서는 지금쯤 왕 앞에 절절한 충성을 맹세한 전서를 보냈을 것이다. 결국 모두가 무릎꿇는다면 이 집단 감금은 끝날 것이고, 그렇지 않은 동안은 위험도가 높은 집안의 자식부터 썰려나가겠지. 아직 어린 축에 드는 인질들은 뭐가 뭔지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으니 상황이 개선될 리 없다. 케일은 와인을 다시 한 모금 머금었다. 그렇다고 전부 바보는 아니지만. 해서 다시 일 주일 후 에이시 공작가의 영애가 아침 만찬에 멀쩡히 얼굴을 드러냈다. 아직 바센보다도 어린 나이인데 조언 하나 없이 왕의 의중을 파악해 낸 것이다. 테일러는 꽤 놀란 얼굴이었지만 케일은 그러려니하며 빵을 뜯어 입에 넣었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쟤는 여주 중 하나거든요. 저 좋은 머리로 왕의 측근이 되어 입지를 다진 후 언젠가 우리집 막내에게 플러팅하게 된단 말이지. 케일은 솔직히 말해 베트 에이시는 싸가지 없어서 싫었지만, 수십 수백 권을 읽어 본 입장에서 초반에 싸가지 없게 구는 녀석이 가장 이어질 확률이 높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난 주인공이랑 이어지는 건 다감한 타입이 더 좋은데. 마음 속으로 제일 밀어주던 녀석이 벌써 헤니투스 가와 연이 생겨버렸으니, 이대로 돌아가게 되면 릴리를 어린애로밖엔 안 보겠지?
생각이 여기까지 흐르니 자연히 헤니투스 가의 입지가 생각났다. 쓰읍, 어쩐다. 헤니투스 가는 잠잠히 있긴 하지만 자금력은 왕국 제일이라 해도 모자라고, 달리 리스크가 될 만큼 부족한 것도 없다. 왕으로서는 당연히 손 안에 넣고 싶을 텐데 어떻게 나올지. 지금 분위기상 불려가게 되면 가문을 차지하여 당신을 비호하겠다고 맹세해야 할 게 뻔하고, 그러면 내 백수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거지? 죽지도 않는데 개겨 볼까? 물론 헤니투스 가는 정치에 연줄을 대는 데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어느 왕자에게도 붙지 않았고, 덕분에 순서는 한참 뒤로 예정되어 있을 것이다. 그쯤 되면 좀 개겨도 관대하게 풀어 줄 가능성이 훨씬 높다. 왕에게 반발하는 분위기가 사그러들지 않으면, 여든 네 번째의 밤이 지났을 때 케일도 어딘가 크게 다쳐 있을 수도 있겠지. 아냐, 최악의 경우라도 손가락 두어 개 정도가 아닐까. 케일은 혼자 이리저리 셈을 해 보다가 이 역시 왕의 의도겠거니 싶어 신경질적으로 잠을 청했다. 어차피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 영구적인 장애를 얻는다 해도 생존에 불편은 생기지 않을 높으신 분들 아닌가. 이틀째의 녀석은 의료진이 빨리 붙어 몇 달 고생하면 전처럼 손을 쓸 수 있을 거라고도 했고. 조용히, 조용히. 평온한 삶을 위해서. 그나마 너무 겁내지 않고, 발끈해 난동을 피우지도 않고 버틸 수 있는 자신인 게 낫지 않겠나. 바센이나 릴리가 여기에 올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런 꼴을 당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당신은 두려워하며 따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두려움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도 있음을 알기에 버리는 패들만 모은 거겠지. 케일은 어쩐지 주인공이 될 아이가, 그리고 그의 다정한 오라버니가 될 소년도 그를 미워하진 않았으면 싶었다. 그래, 내가 와서 다행이다. 당신은 무섭지만 좋은 왕이잖아. 팔십사일야화. 천일야화에 비하면 얼마나 짧나. 꼭 그만큼만 버티면 된다. 그의 노후대비계획은 이제부터 시작인 셈이었다.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케일은 방문 앞에서 쓰디쓴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히 공작, 후작의 자제분들께 가장 좋은 방이 돌아갔다. 그렇다고 자작, 남작들에게 돌아간 방이 나빴다는 뜻일 리 없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배정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어느 지역에서 어느 지역까지는 별궁에, 또 어느 지역은 동궁에, 각 궁마다 다시 층마다 다른 방이 있고... 다시 말해 케일이 다른 백작가 자제들보다 조금 큰 방을 가지게 된 것은 결코 케일의 의지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 베인 공작가의 뭣도 아닌 아들놈이-서편의 별채를 배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케일의 방 안에 들어앉아 그런 초라한 방은 너나 쓰라고 외쳐 대는 것을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은 잘못 찾은 행동이었다. 남의 개인 짐에 멋대로 손대선 복도에 쌓아 놓질 않나. 오늘따라 애들을 죄 끌고 산책나갔던 게 다행이었다. 케일이 없는 사이 어린 애들에게 함부로 손댔으면 그 땐 정말로 화가 났을 테니까. 케일은 문고리를 한번 더 당겨볼까 하다가 가만히 팔짱을 꼈다. 이 시간에 짐을 옮긴다 방을 찾는다 부산떨고싶지 않은데.
“그냥 복도에서 잘까?”
-안 된다 인간아! 너는 너무 약해서 병 든다! 네가 아프면 다 부순다!
“무슨 그런 말씀을! 저쪽이 잘못한 건데 왜 케일님이!”
아이고 깜짝이야. 너네 이러다 왕궁 부수겠다? 케일은 부당한 일에 발끈하는 게 역시나 착한 녀석들이라 생각하며 돌아보았다. 그리고 흠칫 굳었다.
“...론, 저기 음... 나는 괜찮은데... 먼저 들어가서 쉬어. 시간도 늦어지고 있고...”
“아닙니다, 도련님. 도련님 잠자리를 살피는 게 제 일이니까요. 제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처럼 잠드는 것까지 보고 물러가겠습니다.”
잠깐만, 이런 자리에서 암살당하는 사람이 나오면 어떻게 되더라? 전쟁? 내전 나나? 케일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삐딱히 서서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해 보니까 어차피 나는 망나니잖아. 왕궁이 무너지고 유력가의 자제가 살해당하는 것보다는 내가 난장피우는 게 낫지 않나? 케일이 팔을 풀고 바로 서자 등에 부드럽게 손이 닿았다.
“도련님, 제가 한번 더 노크해 볼-”
쾅!
“응? 못 들었어.”
케일은 덜걱거리는 문고리를 보며 생각했다. 두 번 정도 더 차면 열리겠는데. 경험에 기반하여, 더 효과적으로 차기 위해 조금 거리를 벌리자 이번엔 양쪽에서 팔을 잡았다.
“제, 제가 하겠습니다!”
“도련님, 그러다 다칠 수도 있습니다.”
케일은 둘을 번갈아 보다가 조심스레 팔을 당겼지만 풀려나지진 않았다. 하지 마. 연행당하는 것 같아. 너네 무섭단 말이야.
“괜찮아. 안에 있는 게 좀 높으신 분이잖아. 신분 차라는게 더럽고 치사해서 별 것도 아니면서 나중까지 긁어대면 귀찮아져. 어차피 시끄럽게 굴 거라면 내가 하는 편이 뒷탈이 덜할 확률이 높아. 물러나 있어.”
두 사람이 뭔지 모를 눈빛을 교환하는 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얘네 좀 친한 설정이었던가. 그나마 비크로스라도 애들 밥 먹인다고 빠져 준 게 다행이었다. 왜인지 둘은 서로의 검-하나는 장검이고 하나는 단검이었지만-의 손잡이를 번갈아 보더니 뭔가 합의점을 찾은 듯, 그제야 잡힌 팔을 놓아주었다. 둘은 한 걸음 물러섰지만 여전히 여차하면 달려들 태세로 서 있었다. 케일은 그나마 조용해져 준 것에 감사하며 힘차게 문고리를 내리찍듯 발로 찼다.
카앙!
“이봐! 미쳤어?! 이 방에 있는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감히!”
오오, 드디어 나온다. 케일은 여유롭게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헐거워져 축 늘어진 문고리가 덜걱이더니 잘 차려입은 시종이 고개를 쑥 내밀었다. 우리 집안 잘났다고 악이라도 쓰고 싶은 얼굴이네.
“베인 공작가의 도련님이 계시는 방에 이 무슨 무례야!”
“어 그래. 너는 백작가의 도련님께 무슨 무례냐? 방 주인 나오라고 해.”
“이, 이...!!”
얼굴 빨간 거 봐. 곧 숨 넘어가겠네. 케일은 망나니답게 건들건들한 태도로 대답을 기다렸다. 시종이라 해도 도련님 바로 옆에 붙은 몸종이면 다른 시종들보다는 월등히 교육받았을 테고, 육촌이나 그 이상 가는 친척일 수도 있을 테다. 공작가 사람으로 나고 자라 배웠을 텐데 백작가의 나부랭이에게 기싸움에서 질 수는 없다 이거지? 그러나 케일도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게 무슨 소란인가?”
슬슬 납실 때가 됐다고 생각했거든.
“아, 아아아.. 저, 저저, 저저저전하!”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긴. 오밤중에 이 난리를 피운 지도 벌써 몇 시간 째인데 당연히 들여다보러 오겠지. 케일은 속으로 혀를 차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전하, 전하의 은덕으로 오늘도 평온한 밤입니다. 베인 가의 영식께서 방을 잘못 찾으셔서 약간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런 가벼운 다툼으로 우리 로운의 태양의 밤잠을 설치게 만들었다니 죄송한 마음 한량없습니다만 곧 해결될 것이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이럴 땐 적당히 고운 말로 상황을 피하고 봐야 할 것 아냐. 왕의 눈꼬리가 움찔하는 게 보였다. 왜. 난 아까 땡볕에 서서 공치사만 몇십 분을 들었는데 네가 들으니 낯간지럽고 싫냐? 역시, 통할 것 같았다. 영웅의 탄생에서의 알베르는 그다지 등장하지 않는, 애매하고 적은 분량의 캐릭터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케일은 알베르가 자신과 비슷한 종류의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기름칠 발린 소리를 하는 건 쉬운데 듣는 건 질색이지. 케일의 계획대로 알베르는 케일을 퍽 불편하게 느낄 것이다. 밤이 깊었는데도 여전히 우아하고 화사한 차림의 왕은 곧 케일로부터 고개를 치워 버렸다.
“아, 알렉세이 베인- 베인 공작가의 둘째, 알렉세이 베인입니다.”
어느새 튀어나와 관등성명을 읊는 방 도둑이 보였다. 내가 부를 땐 안 나오더니. 그러나 케일은 곧 문을 걷어찬 데 대해 좀 미안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케일보다 두어 살 아래로 보였다. 말인즉슨 어리다는 거지. 오들오들 떨고 있구만. 하지만 노크할 때 안 나왔잖아. 말로 해결이 가능한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 온 건 너란다. 지금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는 줄은 아는 거니?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애써도 모자랄 판에 말이다. 케일은 새파랗게 어린, 하지만 사리분별 정도는 할 줄 알았어야 할 나이의 알렉세이의 명복을 빌어 주어야 하나 고민했다.
“방을 잘못 찾았다니. 분명히 안내가 내려갔을 텐데, 뭔가 착오가 있었나?”
“그, 그게... 다른 공작가는 모두 이정도 방을 받, 받았습니다! 만... 저는, 그 방이, 조금 작아서...”
“그래서?”
“이, 이 자가 백작가치고는 너무, 좋은 방을 받은 것 같, 같아서- 정정하려고.”
대충 알겠다. 무서웠겠지. 벌써 두 달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아예 테이블 하나가 줄었다. 사람은 절반 가까이 없어졌고, 살아 돌아온 사람은 단 둘인데 절대 입을 열지 않고. 그러니 내 차례가 오면 어떡하지 하는 공포를 느낀 건 알겠다만. 케일은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의 방에 숨으려고 들었는데 막상 초라한 방엔 들어가기 싫고, 벌써 빈 방은 있었던 일이 생각나 무섭고, 세력이 비슷한 이는 마찰이 생길까 껄끄러우니 제일 만만해 보이는 백작가 망나니를 찝은 건가. 너무 얕고 멍청한 수잖아.
“그래서,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케일은 자신을 돌아보는 왕의 얼굴을 보았다. 잘생겼네. 그림처럼 아름답지만 어쩐지 섬뜩한 느낌으로, 젊고 싱그러운 얼굴 선이 아직은 왕이라기보단 왕자님 같다. 햇살 같은 금발, 여름 하늘 같은 푸른 눈동자. 아, 눈 마주쳤다.
“......”
“이 자의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네만.”
케일은 알베르의 눈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숙였다. 뭐였지? 방금.
“송구합니다, 전하. 제가 모자라 전하의 뜻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저의 식견이 부족하여 알렉세이 공자께서 왜 그런 착각을 하셨는지는 짐작가는 바가 없군요. 저희가 있을 곳은 모두 국왕 전하께서 정해주신 바, 어디라도 전하께서 저의 자리라 하시면 그곳이 저의 자리가 됨을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하신 일을 멋대로 바꿀 수 없고 감히 이견을 품을 수도 없으니까요.”
자, 납작 업드려 드렸다. 어떻게 나오실 건가요, 전하? 정수리로 서늘한 시선이 느껴지는 게 우스웠다. 맞은편의 알렉세이가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그래, 넌 지금 살고 싶다고 왕명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한 거란 말이야. 기껏 아무도 죽어나가지 않고 있는데 명을 재촉하는 데도 정도가 있지. 복도가 어찌나 고요했는지 국왕이 가볍게 내쉰 숨이 케일의 귓가를 스치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정정하겠다는 건 내 결정에 잘못이 있었다는 이야기지.”
“아, 아니-”
“그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야. 나도 사람인데 실수 한둘쯤 하지 않을 리 없지. 충신의 간언을 듣기 저어해서야 무엇이 되겠나.”
저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얼굴이 밝아지지 않는 게 나을 텐데.
“그러나 나의 잘못을 말하지 않으면서 뒤에서 한을 품고 내가 모르도록 내게 반발하는 것은 무어라 해야 하겠나?”
것 봐.
“이는 목을 베어야 하는 중죄가 아닌가.”
케일은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보석처럼 파란 눈과 다시 마주쳤다. 이 상황을 지긋지긋해하는 눈이다. 케일도 저런 눈을 안다. 거울 속에서 자주 보던 눈빛이다. 지겨운 피냄새, 지겨운 싸움. 살기 위해 죽이는 것만으로도 바쁜데 괜한 서열 정리를 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던 날들. 김팀장, 그렇게 해서 되겠어? 인기 좋은 건 알지만 몸도 좀 사려야지. 케일은 무심코 입을 열었다.
“봐주죠.”
이런.
“뭐?”
어리고 불쌍하잖아요-라고 하면 지금껏 저것보다 더 어린 것에게도 가혹했던 왕을 비난하는 게 된다. 사실 별일도 아니잖아요? 이건 자살행위지. 심각해 봤자 손가락 두 개였는데 어쩌다 그런 소릴 해 버렸지. 등에 식은땀이 죽 흘렀다. 내가 다쳐서 얘들이 홧김에 왕을 죽이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이 왕은 필요하다. 귀족들에게 가혹한 게 대수야? 통치는 전혀 다른 분야인데. 케일은 동생들을 생각했다. 더 나은 미래가 있었지. 그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는 시대를, 거기서의 삶을 이미 읽어 보았다. 내전으로 서로를 썰어대거나, 전쟁에서 남을 죽여 공을 세우는 것보다 훨씬 좋은 일이었다. 그 애들이 영웅이 되는 길은 케일이 꿈꾸어 본 적도 없을 정도로 아득히 반짝이며 존재했다. 그럴 수 있는 세상을 만든 사람인데. 거기에 케일은 없는 거나 다름없었지만...
“알렉세이 공자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제 실수도 있으니까요.”
“호오.”
“처음 방을 받았을 때 지나치게 좋은 것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물론 전하께서 뜻이 있어 내려주셨다고 생각했지만, 제가 품을 수 있는 의혹이라면 남도 그리 생각할 수 있음을 알았어야 합니다. 그 때에 미리 확인하고 전하의 뜻인지, 명령이 하달되는 중에 혼선이 있지는 않았는지 확실시 했다면 오늘의 일은 없었겠지요. 그러니-”
“그, 그렇습니다! 전하께서 틀렸을 리 없지요. 누군가 명이 내려오는 동안 시-실수를 했겠거니 싶어...”
끼어드냐. 그리고 방금 왕이 제 입으로 말했잖아. 자신이 틀렸다고 하는 건 상관없다고.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라 머리가 안 돌아가나. 국왕의 눈이 그 절박하고 멍청한 얼굴을 향했다가 돌아왔다. 아까와는 달리 반짝이는 눈이었다.
“하긴 내가 계속 정무로 바빠 이리 많은 손님들을 초대해 놓고도 제대로 이야기 할 기회가 없었지. 케일 공자가 이렇게 나오니 내 이번만은 관대한 처분을 해야겠군. 여봐라. 여기 알렉세이 공자가 공작가의 집이 그리도 그리운 모양이니 내일 낮이 밝는 대로 돌려보내도록. 왕명을 어기고 함부로 움직인 바 두 다리를 자르는 것으로 마무리해 지나친 벌은 면해 주겠네. 오늘처럼 실랑이 할 것 없이 방 안에서 오래 푹 쉴 수 있을 테니 잘 되었군.”
봐줬네. 죽였어도 됐던 건데. 케일은 한층 홀가분한 기분으로 바로 섰다.
“그리고 케일 공자. 따라오게. 듣고 보니 이 방은 조금 큰 듯 하군. 자네에게 맞는 방을 새로 내어주지. 짐도 곧 옮겨 줄 테니 걱정 말고.”
음?
“괜찮아. 그러지 마.”
케일은 최한의 검손잡이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떼었다. 당장이라도 뽑혀나올 것처럼 덜그럭거려서 무서웠다.
“난 무조건 괜찮으니까. 론, 이 녀석 좀 살펴. 지금 있었던 일은 비크로스한테도 잘 설명해 줘. 일단 오늘은 애들 맡겨야 할 것 같아 미안하다고도 전해주고.”
“안 따라오나?”
“가겠습니다, 전하.”
밤이 깊어 어둑한 복도에 촛불이 일렁였다. 왕이 앞서 가고 시종 둘이 등을 들고 뒤따르니 케일의 시야엔 온통 왕의 그림자였다.
“사실 자네가 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지 뭔가. 막내아이가 올 거라 생각했었지.”
케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웬 관심? 혹 미래의 남주 자리를 꿈꾼다면 글렀습니다. 걔는 한참 어리거든요. 수백 년 차이는 괜찮지만, 스무 살 차이는 안 된다네. 케일은 마음 속으로 혀를 쯧쯧 차 주었다. 만약 릴리에 대해 허튼소리라도 하면 실수인 척 정강이를 까 줄 생각이었다. 이미 이유를 붙여 잔혹하게 군 직후인데 넘어가 줄 수밖에 없을 거다. 왕명에 거역하는 건 역심이다. 역심에 가혹한 것은 첫째 당연하거니와 둘째 왕실의 법도를 바로 세운 것이라 괜찮다. 그러나 발을 헛디딘 실수 따위에 불같이 화를 내면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되어 앞서 세운 위엄까지 추락하겠지. 조금 깝쳐도 관대하셔야지. 케일은 흠, 하고 등을 곧게 펴며 대답했다.
“릴리는 이제 겨우 열 살을 넘겨 먼 여행을 하기엔 아직 무리입니다.”
“그런 뜻이 아니네. 이런 자리에 장자를 집안은 드물다는 뜻이지.”
“베인 공작가를 말하십니까?”
“이런, 그쪽은 외동이라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게지.”
“전하께 차이가 있습니까?”
“원한을 산다는 점에서? 없다만...”
알베르가 어깨를 으쓱하자 그림자가 산처럼 솟았다가 꺼졌다.
“삼 일 전인가 죄를 고하고 함께 죄지은 이들을 팔며 자식을 돌려달라 애걸하더군. 그래서 받아주었는데 이제 와 목을 자르면 내 면이 서질 않잖나.”
“사지 중 둘을 잃은 이는 처음이었지요. 공작가에서 받아들일까요.”
“마땅한 형벌인데 우는 소리를 해서야 쓰나. 더 큰 벌을 받게 될 뿐이네.”
“제 잘못으로 촉발된 일이니 헤니투스에서 사죄의 뜻으로 포션을 바로 보내겠습니다.”
“서둘러야 할 텐데? 처벌은 내일 정오가 될 거네. 하룻밤은 지하감옥에서 보낼 테고.”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최고급 포션으로 하겠습니다. 절단면이 조금 지저분해도 무리없이 붙을 겁니다.”
“자네는-”
“예?”
방 앞에 서자 알베르 국왕 전하가 손짓해 시종들을 쫓았다. 손수 문을 여는 모습에 케일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문이 닫히자 둘 뿐이었다. 넓다는 정도가 아닌데. 케일이 쓰던 방 세 개는 들어가겠다. 방의 장식은 화려하기보다는 섬세한 모양이었지만 하나같이 최고급이 아닌 게 없었다. 이 방이 내게 더 어울릴 거라고? 케일이 당황하고 있는데 알베르가 뒤돌아보았다.
“나와 동류지?”
“아니요.”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는데.”
“당신은 의욕이 넘치지 않습니까.”
알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만사가 귀찮지 않고서야 이 정도의 이가 망나니라는 헛소문까지 내어 가며 자신을 가릴 리 없지. 지친 눈, 지치고 지쳐서 꺼져 버릴 것 같은 눈이었다. 이런 지긋지긋한 일을 해 본 적 있는 것처럼. 그러면서도 이유 하나 없이도 타인을 도왔다. 알베르는 재차 물었다.
“그 외의 부분은?”
결국 케일은 어깨를 으쓱하고 대답했다.
“동류죠.”
“거기서 베인 공작가를 도울 줄은 몰랐어.”
“나중에 감사 인사를 들으면 전하를 원망하지 않도록 잘 말해드리겠습니다.”
“아, 나를 도운 거였나?”
“저는 전하께 충성하는 신민이니까요.”
국왕은 제 앞을 터벅터벅 가로질러 상석을 남겨두곤 소파에 털썩 앉아버리는 케일을 보았다. 헛웃음이 났다.
“앉으라고 묻지도 않나?”
“조금 건방진 정도로 저를 처벌하시면 엄한 게 아니라 폭력적일 뿐이라고 말이 나실 겁니다?”
“그래, 워낙 손에 피를 묻히고 있으니.”
“...최대한 죽이지 않으려 하시는 것 알고 있습니다.”
“지금 내 비위라도 맞추는 건가?”
“제가 지금 전하를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아니, 아니지.”
케일은 국왕이, 늘상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던 알베르가 고개를 젖히고 웃는 것을 보았다. 아직 이렇게 젊구나. 갓 스물을 넘겼을까 싶은 홍안의 젊은이가 거리낌 없이 웃는다. 이런 점도 영 안 닮았단 말이다. 성격이 이상하잖아. 뭐가 웃기다고 웃어? 난 지극히 정상이라고. 케일이 입을 삐죽 내밀고 알베르의 하는 양을 보고 있자 알베르는 싱긋 웃더니 케일의 맞은편에 앉았다. 상석이 아니라 맞은편에.
“자네 참 대하기 불편하군.”
“저도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습니다.”
알베르와 케일은 마주보며 미소지었다. 억지미소도, 진심에서 우러난 웃음도 아닌 묘한 얼굴들이 서로를 관찰했다.
“그래서, 뭘 원하나?”
“역시 전하께서는 영민하십니다.”
그 멍청이가 바보 같은 짓을 시작한 것부터가 문제였다. 설마 그정도로 멍청한 놈이 있을 거라고는 사실 케일도, 알베르도 짐작하지 못했다. 겁에 질려 패닉한다고 해도 왕명의 무게를 잊는 놈이 나올 줄이야. 알베르는 너무 겁을 준 것도 문제였나 싶어 씁쓸하게 웃었다. 너무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걸까. 결국 알베르의 책임 하에서 일어난 일이니 모른 척할 수도 없고, 처벌을 하지 않을 수도 없고, 처벌을 강하게 내려도 리스크가 컸던 일이다. 케일이 적당히 분위기를 수습하고 뒷처리까지 하겠다고 나섰으니 망정이지. 알베르는 찜찜한 듯 투덜대며 말했다.
“너나 나 같은 종류의 사람이 공짜로 뭔가를 해 줄 리 없지. 무엇을 원하나?”
“이런 상황에서 바랄 수 있는게 온 상태 그대로 돌아가는 것 외에 있겠습니까?”
“신체적 부분으로만 한정해 줄 생각은 없고?”
“내일 정오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지만, 저는 잠이 많은 편이라서요. 죽음의 맹세는 세심하게 따질 것이 많은 일인데 대충 해 치워버릴 수도 없고요. 제가 실수로 늦잠을 자는 탓에 행동에 늦기라도 하면 죄송해서 어찌 할 바를 모르게 되겠지요. 공작가와 척을 지는 건 전하께도 귀찮은 일이실 테니까요.”
협박까지. 알베르는 이 괘씸한 이를 어찌하면 좋나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무엇보다도 알베르의 눈에는 케일이 보였다. 알베르가 자신을 해하지 않을 줄 믿는 눈, 귀찮다는 태도,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피곤한가?”
“예? 아닙니다.”
지쳐 보이는데. 의식하지 못할 뿐 긴장해 있었는지도 모르지.
“한숨 자라고 할 참이었는데.”
“아...”
“왜?”
정말로?
“여기가 제 방입니까?”
“뭐? 아니. 여긴 내 방이네만.”
알베르는 전보다 더 당황한 케일의 얼굴을 보고는 이상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지금 나가서 원래 순서였던 놈을 잡아 올 순 없잖나. 원래대로라면 지하감옥에 보내거나 죽음의 신전 신관을 불러와 내내 맹세할 목록을 손보거나 하는데, 자네는 둘 중 어느 쪽도 아니니 어찌 해야 할지.”
“그게 아니라- 매번 이렇게 본인의 방에 불러오셨습니까? 위험하잖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아니, 여기가 제일 안전하네.”
믿는 구석이 있나. 아니면 아무도 못 믿어서 그런가. 케일은 알베르를 흘금 보고는 테이블에 눈을 고정했다. 일단 이 침실엔 보이는 것보다 더한 안전장치가 되어 있나보다. 용을 데려왔으면 바로 알았을 텐데. 그리고 아마도 이 침실 외의 왕궁은, 알베르 크로스만에게도 믿을 만한 공간이 아닌 거겠지.
“뭐, 아비를 죽인 자의 앞에서 쉽게 잠들 수 없는 것쯤은 이해하네.”
“그런 이유는 아닙니다.”
알베르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어 말했다.
“어쨌든 지금 비어 있는 방으로 혼자 보내기엔 적절치 못하기도 하고, 안전하지 않으니까 안 돼. 정 자기 싫으면 내 말상대나 해 주게.”
케일은 즉시 대답했다.
“소파에서 자면 되겠습니까?”
“아냐, 침대를 쓰게. 나는 일이 더 있으니까.”
“...잠은 주무시고 계십니까?”
“요즘은 포션이 참 잘 나오지. 마법학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어 지원금이 아깝지 않네.”
그러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케일은 한 마디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일어섰다. 누가 누굴 걱정한담. 아비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자, 어느 가문에서 반발하는 말이 나오자마자 잡아다 목을 베어 성벽에 걸었다는 젊은 왕. 반란을 가혹히 진압하고 대륙 내 크고 작은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머쥘 권력자의 미래를 가지게 될 자. 그러니 자양강장제를 마셔 가며 과로에 시달리던 김록수의 과거 따위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케일은 방을 반 바퀴 돌며 옷을 걸쳐 놓을 만한 곳을 찾았다. 편한 차림으로 잘 순 없겠지만, 재킷을 걸치고 침대에 누울 순 없잖아. 옷걸이 하나 없나? 옷장은 국왕의 것일 테니 함부로 열 수 없고, 대충 서랍장 위에 올려 두면 되려나. 케일은 한쪽 벽에 붙어 놓인 서랍장에 다가섰다. 별로 고급스러워 보이지 않는 상자가 하나 있는 것 말고는 말끔해서 케일은 상자 위에 두어도 될지 상자를 내려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 그거 먹어도 되네.”
먹어? 뭘? 케일은 의아해져 국왕을 돌아보았다가 종이상자를 슬쩍 열었다. 안에 든 것은 뜬금없게도 마른 육포 더미였다. 이게 왜 있어? 목소리를 조금만 높여도 시종이 산해진미를 들고 뛰어올 텐데. 그제야 돌아보니 앉았던 티 테이블도 소파도 새삼스럽게 보인다. 창을 면한 책상은 침실에서 업무라도 볼 듯이 큼직하고, 자기 전에 읽기 위해서라기엔 지나친 양의 책장들도 있었다. 드레스룸이 따로 있을 텐데 굳이 가져다 놓은 큼직한 옷장도, 욕실로 이어지는 문도 방 안에 있으니, 만일의 경우 오래 버티기 위한 요새로라도 쓰기 위한 것처럼 보였다. 이런 대비를 해야 할 정도는 아닐 텐데. 그럼에도 이 정도로 불안해하고 있나.
“......안 자나?”
“누우려고 하니 잠이 깨 버렸습니다.”
케일은 결국 다시 알베르의 앞에 마주앉았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좀 주무시는 게 좋겠고요. 안색이 안 좋으시네요.”
“정말 말을 거리낌없이 하는군, 자네.”
“이제 와서 거리낄 것 있겠습니까. 왜, 다른 사람이 있으면 잠들기 어려우십니까?”
알베르는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케일을 아래위로 슬쩍 훑어봤다. 빠르지만 정확한 눈짓에 케일은 이게 왕만 아니면 한소리 했을 텐데 아쉬워졌다. 그 눈이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저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배에 근육도 있고.”
“배에 근육이 있다는 걸 기준으로 삼을 정도면 약한 거네.”
지는 얼마나 쎄다고. 체격차는, 그야 조금은 있지만 키도 비슷하고... 케일은 괜히 뾰족해져 마찬가지로 알베르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미안하다, 몸 관리 잘 해 놓은 케일. 못 이기겠네.
“그럼 문제 없잖습니까. 주무세요.”
알베르는 찡그린 눈으로 케일을 보았다. 케일은 마주 찡그린 눈으로 보아 주었다. 이제 와서 새삼 제가 당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짓을 할 것처럼 보입니까? 하듯이. 대답은 음, 어... 그건 아닌데, 민망해서. 라는 눈빛이었다. 설마?
“잠버릇이 엄청나게 고약하십니까? 걱정 마십시오. 보고 들은 것 전부 잊어드리겠습니다.”
“자네의 상상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군.”
“아니면 그냥 좀 주무시라니까요. 전하께서 내일 졸려 쓰러지기라도 하시면 제 탓이 되잖습니까.”
“그런 문제인가?”
“저에게는 목숨이 달려 있으니까요.”
알베르가 잠깐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고민하는 듯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들어올 때 한 번 보았으니 평생 볼 국왕의 얼굴은 다 본 줄 알았는데, 오늘 참 다채로운 표정을 보는군. 미인은 고민할 때도 미인이구나. 케일이 무심하게 알베르의 얼굴을 감상하고 있자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것 봐, 피곤하지?
“노력은 해 보겠네. ...잠이 잘 안 오거든.”
케일은 일이 왜 이렇게 됐나 생각했다. 침대는 넓다. 그건 좋은 일이다. 케일은 김록수일 적 공동 숙소를 여러 번 써봤으므로 특별히 불편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문제는 옆사람이 끊임없이 부스럭거린다는 점이었다. 바로 누웠다가 돌아누웠다가 고개를 어떻게 놓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더니 이제는 손을 허벅지 옆에 붙였다 배 위에 올렸다 가슴 위에 깍지를 꼈다 난리를 피웠다. 차라리 엄청나게 피곤했다면 옆에서 좀 부산떠는 정도로 이렇게 신경쓰이진 않을 텐데. 아니면 차라리 옛날의 피난소처럼 이런 사람들이 가득한 곳이라면 도리어 백색소음으로 느껴질 텐데 말이다. 하지만 넓은 방엔 단 두 사람이 있었고, 그 중 한 사람이 엄청나게 꼼지락대는 중이었다.
“...전하. 그렇게 잠이 안 오십니까?”
“아까 말했잖나...”
결국 케일은 몸을 일으켜 수면등을 켰다. 은은한 불빛이 침대 위로 퍼졌다. 왕의 머리카락이 부스스한 꼴을 본 적 있는 사람? 저요.
“역시 제가 소파로 가겠습니다.”
“아니.”
흰 손이 헝클어진 금발을 거칠게 쓸어넘겼다.
“원래 이렇네. 미안하게 되었군. 원래 자네는 대면할 일도 없었어야 했는데...”
우와, 왕이 사과했어. 그래도 되나? 안 될걸? 역시 포션빨로 버텨 봐도 수면부족은 인지능력을 저하시키는 게 틀림없다. 케일은 피곤해 보이는 알베르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등을 조금 더 밝게 조절했다.
“고민거리라도 있으십니까?”
“그걸 아무에게나 말 할 순 없지.”
“자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일은 다 해보신 거고요?”
“그래.”
케일은 잠시 생각했다. 아는 자장가가 있던가? 이곳의 자장가는 모른다. 그래서 말했다.
“잠들 때까지 이야기라도 해드릴까요?”
“내가 어린아이로 보이나?”
“도움이 될 지도 모르잖습니까.”
“......”
알베르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체념한 듯 케일을 향해 고쳐 누웠기에, 케일은 입 안으로 말을 골랐다.
“옛날 옛날 바위가 많은 나라의 어느 마을에...”
“동화는 다 똑같이 시작하는군.”
“지겨워야 잠이 잘 오지 않겠습니까?”
“조용히 듣겠네.”
“옛날 옛날 바위가 많은 나라의 어느 남동쪽 마을에 제비꽃 향수가 특산물인 가문이 있었습니다.”
“음?”
“쉿. 이야기 도중이잖습니까. 그 가문의 가주는 배때지에 살이 오른 데다 간도 부어서 적법하게 즉위한 왕에게 불손하게 굴었답니다.”
“큭큭...”
케일은 키득키득 웃는 왕을 흘긋 내려다봤다가, 조금 편안해진 마음으로 다시 허공으로 눈을 돌렸다. 이 이야기는 좀 더 미래에 밝혀질 이야기였고, 그 재판에서 유죄를 끌어내기 위해 애쓸 사람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남이 다 해 놓은 일로 생색을 내는 거나 다름없는 도둑질이다. 하지만 피해 볼 사람들을 줄일 수 있다면 그게 더 좋은 일이겠지.
“그는 지금의 왕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예전의 왕은 더 너그러운 분이셨고, 다시 말해서 감히 속이려고 시도할 때 별로 두렵지 않았거든요. 가령 세금은 예년과 같이 징수되었습니다, 라고 말하면 그렇다고 믿어주신다거나요.”
알베르의 눈이 크게 떠지는 것이 보였다. 케일은 그와 잠시 눈을 마주쳤다. 이건 그냥 이야기에요, 전하.
“혹은 흉작을 피할 수 없었던 해에 백성들의 고초를 이야기하며 금액을 줄여 줄 것을 청하면 약간의 검토 후 대체로 승인해주셨답니다. 참 좋은 왕이셨죠. 하지만 가까운 사람에겐 그리도 의심이 많았으면서, 저 멀리서 결코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수 없을 정도로만 배를 불리는 소인배는 의심한 적이 없으셨어요. 그래서 그가 이중장부를 쓴 것도, 늘 세금을 과하게 걷으며 모두 왕의 명령이라고 말하고 다닌 것도 몰랐답니다. 지역민의 불만은 들끓고 있지만, 조사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그 이중장부는 아직도 그의 침실 벽 속 비밀 금고에 들어 있답니다.”
“아니ㅡ”
“그는 당장은 너무나 무서워서 감히 속임수를 시도할 생각도 못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벽은 한번 손에 붙으면 떨어지지 않는 것이라 조금만 지나면 더 교묘하고 섬세하게 세금 도둑질을 시작하게 될 겁니다. 새 왕은 좀 더 영리해서 곧 수상쩍은 점을 찾아내겠지만, 명확한 증거가 없어서 몇 년이나 사건을 질질 끌 수도 있겠죠. 어쨌거나 그 가문이 골칫거리인 사람이 있다면,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조금 더 잠들기 편해지긴 하겠죠. 아, 방금 문장까지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그걸 어떻게ㅡ”
“이야기라니까요.”
케일은 천천히 손을 내려 왕의 두 눈을 덮었다. 어둠에 잠긴 알베르를 향해 속삭였다.
“막막할 때는 잘 수가 없죠. 하지만 약간이라도, 바보 같은 짓이라도 한번 해볼까- 싶어지면 마음이 잔잔해지는 법이니까요.”
“내가 꾸며낸 이야기를 듣고 가신의 침실을 부수는 폭군이 되길 바라는 건가?”
“글쎄요, 그렇게 대놓고 나서지 않으셔도 강도로 위장할 만한 수하는 있으시지 않습니까? 더구나 가혹한 수탈에 지친 농민들이 있는 곳에서라면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겠죠.”
케일은 손가락 틈을 살짝 벌렸다. 푸른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걸 볼 수 있었다.
“불 끄겠습니다.”
케일은 눈을 반짝 떴다. 반드시 할 일이 있는 날은 평소보다 이르게 눈이 떠지곤 한다는 건 꽤나 편리한 장점이고, 불규칙한 교대 생활이 남겨놓고 간 비상한 능력이었다.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이 떠지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까. 케일은 생각했다.
‘최고급 포션.’
그래. 최고급 포션을 그 멍청이 알렉세이에게 줘서 다리를 붙여 놔야 한다. 이미 복종한 이에게 가혹하게 구는 건 잔인할 뿐 아니라 멍청한 짓이니까. 케일은 눈을 부비곤 밖에 있을 호위를 불러 론을 불러오게 해야겠다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침대는 꽤 높았고, 내려서기 위해 시트를 짚은 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양손으로 시트를 짚으면서 그 손을 내려다보는 일도 별로 이상하진 않을 것이다. 그 시야 안에 들어온 풍경은 명백하게 이상했다. 가령 퍽 짙은 갈색 머리카락, 남부인의 것보다 더 검은 피부색 같은 것. 케일은 다시 눈을 부볐다. 내가 잠이 덜 깼나? 그리고 눈을 가렸던 손을 내렸을 때, 자신의 것과 비슷한 갈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하지만 조금 더 밝은, 따스한 톤의 갈색 눈동자. 아주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잔 것처럼 느슨하게 덮여 있는 아름다운 눈이었다. 그 눈은 케일의 눈에서 경악과 당황을 읽어냈다. 곧 그 눈동자가 완전한 원으로 드러났다. 케일의 것과 거의 같은 감정을 보이며 거의 본능적으로 케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누군가가 똑똑, 방문을 두드렸다. 평이하고 자연스러운 언제나의 일과인 것처럼.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전하. 들어가겠습니다.”
케일은 자신의 목과 쇄골에 걸쳐 어정쩡히 걸쳐진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게 뭔지에 대해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급히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 위까지 덮는 것만이 그가 간신히 할 수 있었던 일의 전부였다.
알베르는 모든 게 어리둥절했다. 이불은 폭신하고 가벼워서 아침 햇살을 조금 투과시켜 주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덮인 이불 속에서 알베르는 케일의 동그랗게 떠진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이불의 끄트머리를 꽉 잡은 케일의 손가락은 흐릿한 빛 속에서 하얗게 도드라져 보였다. 진작에 그의 목을 부러뜨렸어야 할 자신의 손은 맥없이 풀린 채 케일의 목 위에 얹혀 있을 뿐이었다. 손가락 아래에서 두근, 두근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알베르는 케일의 수축된 동공을, 당황해 찌그러진 눈썹을 볼 수 있었다. 가쁘게 쉬는 숨이 자꾸만 알베르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알베르가 눈을 깜박일 때마다 마주한 얼굴이 침착을 되찾는 게 보였다. 그가 이 상황을 뭐라고 변명하면 좋을지 궁리하고 있단 것 정도는 그 표정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케일은 아침 수발을 들러 들어온 시종의 눈에서 자신을 숨겨 주기 위해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알베르는 느리게 케일의 살갖에서 손을 떼어냈다. 미미한 아쉬움이 맥박처럼 달라붙어 손 끝을 간지럽혔다. 그리고 속삭였다.
“괜찮네.”
맑은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상이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어디부터라고 할 것도 없이 환한 색으로 물드는 모습은 경이라기보단 일상이었지만, 케일의 눈이 놀란 듯 깜박이는 건 조금 재미있었다.
“전하?”
“응ㅡ. 일어났네. 조용히. 케일 공자가 간밤에 잠을 설쳤거든. 깨우지 말게.”
케일의 얼굴이 ‘이 거짓말쟁이!’라고 외치는 걸 보자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알베르는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나란히 누운 두 사람분의 부피를 보고 마구 떨리던 시종의 눈동자가 알베르의 옷이 멀쩡히 여며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차분히 가라앉았다.
“공자가 일어났을 때 불편하지 않게 그의 시종을 불러와주겠나?”
알베르는 언제나 그랬듯 시야를 가리는 밝은 금발을 쓸어올렸다. 흰 손바닥 위로 햇살이 부서졌다. 잠결에 위장을 풀어버릴 정도로 방심했던 적이 있을 리 없다. 그 정도로 무른 마음이었다면 지금쯤 죽어 넘어진 건 아버지가 아닌 자신 쪽이었겠지. 하지만 일어난 일을 부정하는 것도 소용 없는 짓이었다. 알베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태연히 옷을 갈아입었다. 케일이 이불을 대충 끌어안고 자신을 노려보는 것도 모른 척 했다. 다시 둘만 남은 방 안은 천이 스치는 소리만 들렸다. 잠시 후 다시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아, 론. 들어와. 해 줄 일이 좀 있는데.”
방 안에 들어와 선 론은 침대에 누운 케일과 말끔한 차림의 왕을 보고 눈썹을 들어올렸다.
“말씀하시지요.”
“오늘 정오에 다리가 잘리는 놈이 하나 있을 텐데 못 쓰게 되지 않도록 최고급 포션을 구해서 제때 갖다 주도록 해.”
“알겠습니다. 평상복인 채로 주무셨군요. 갈아입을 옷을 가져다드릴까요?”
“잠옷이면 되네, 그는 좀 더 잘 거거든.”
론은 무표정히 왕 쪽을 쳐다봤다가, 정중히 고개숙이고 돌아나갔다. 케일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잠을 설친 것도 전하시고, 좀 더 자는 게 나을 쪽도 전하 같은데요.”
“그래도 자네는 여기 있어야 해.”
“봐선 안 될 것을 보아서입니까?”
“그래.”
“잊어드리겠다고 말해도 소용없겠지요?”
“잠버릇 정도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않나?”
케일은 침대에서 좌우로 데굴데굴 구르며 고민했다. 알베르는 꼭 작은 동물을 연상시키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며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강아지나 토끼 같은 게 저러지 않나. 무심하게 올려다볼 뿐인데도 뭐 하나라도 주고 싶어지는 눈도 그렇고.
“죽음의 맹세를 하면 어떻겠습니까?”
“좀 더 순진한 이를 속여넘기는 데는 쓸만하겠지. 한정적인 충성을 얻어내는 데도 괜찮고. 하지만 자네는 까짓 맹세에서 얼마든지 헛점과 함정을 찾아낼 수 있잖나. 자신의 안전을 위한 자리는 반드시 마련해 놓을 텐데 그런 맹세는 필요없어.”
“전하께서 그런 타입이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겠죠.”
알베르는 피식 웃으며 케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한동안 여기서 지내줘야겠어.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건 안 돼. 애완동물을 데려왔다던데 그들과는 같이 지낼 수 있게 도와주지. 식사는 여기로 가져다 달라고 할 테니 나와 함께 들지.”
“그게 가장 큰 역린입니까?”
“그래.”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늦잠을 잘 걸 그랬습니다.”
알베르는 킬킬 웃었다. 웃음이 나와선 안 될 상황인데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짧고 붉은 머리카락이 밤새 부하게 흐트러져 손가락으로 헤칠 때마다 달라붙었다.
“머리 헝클어뜨리지 마십시오.”
“원래 헝클어져 있었네.”
“아침은 만찬식으로 주십니까?”
알베르가 멍한 얼굴로 내려다보자 케일은 좀 더 또렷이 말했다.
“그게 맛있는데. 뭐 나올지 기대도 되고. 그걸로 주세요.”
“...그래. 원하는 건 그게 다인가?”
케일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자기엔 좀 눈부신데 커튼 좀 쳐주시겠습니까?”
알베르는 허허 웃다가 커튼을 치기 위해 일어섰다.
케일은 배부르게 먹고 어린애들을 품에 안은 채 침대에 드러누워 생각했다. 별로 나쁘지 않은데? 실제로 그랬다. 방은 전보다 훨씬 좋고, 식사는 여전히 좋고, 산책도 할 필요 없으니 또한 좋다. 방문은 밖에서 잠겨 있지만 나갈 이유도 없고, 무엇보다 녹음구가 없다는 게 편했다.
“인간아. 내가 열쇠 금방 열 수 있다. 지금도 열 수 있다! 우리 또 산책 가자. 어제 봐 둔 돌멩이 거기 있나 봐야 한다!”
“안 나가기로 약속을 해서 안 돼. 혼자 잠깐 갔다 오던가.”
“안 된다! 나도 왕 봤다. 전에 본 적 없어서 뭔진 모르겠지만 인간은 아니었다. 약한 인간만 여기 두면 안 된다. 죽을지도 모른다!”
응, 그렇구나. 그건 다크엘프라고 해. 그리고 아마 죽일 능력은 있어도 죽이진 않을 거야. 네가 있었다면 마음의 준비를 좀 했을 텐데. 케일은 설명하기 귀찮아서 그냥 대충 끌어안아 드래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밥은 잘 챙겨 먹었어?”
“비크로스가 스테이크 구워 줬다!”
“맛있었다는데!”
“맛있었는데~!”
“그래, 잘 했어. 더 먹어. 너넨 좀 쪄야 돼.”
열심히 먹이는데도 아직 이렇게나 말랐다. 어린애들의 가는 팔을 주물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애들은 그저 잘 먹고 푹 자야 하는데.
“한동안 밥은 같이 못 먹으니까 때 되면 비크로스한테 가서 먹고, 여기 있는 게 심심하면 최한한테 가서 놀자고 그래. 알겠지? 그럴 수 있지?”
이놈들이 대답이 없다? 왜 이렇게 삐죽해? 케일은 영문을 모른 채 세 명의 머리를 대충 쓰다듬었다. 빠릿하게 차려입고 나간 왕은 밤까지 정무를 볼 테고, 난 여기서 뭘 한담. 달리 할 게 없으니 자는 수밖에. 케일은 길게 하품하고 다시 잠들었다.
“내내 잤나?”
케일은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허전한 팔을 내려다보다 반문했다.
“애기들은요?”
“애지중지하는군. 자네의 요리사가 와서 데려갔어.”
“저녁은요?”
“자네는... 먹고 바로 눕고, 점심도 깨워서 먹이고 다시 눕는 것까지 보고 갔는데 배가 고프긴 하나? 그렇게 먹으면 더부룩할 것 같은데.”
“아뇨, 저 말고.”
왜 시비야, 침대 가장자리에 멀뚱히 앉아선. 눈 뜨자마자 보여서 놀랐네. 케일은 여전히 졸음이 묻은 얼굴을 마른세수했다. 입가에 침이 말라붙어 버적했다. 세숫물이 어디 있더라. 론이 없으니 이런 게 불편하군. 입가를 마구 문지르고는 다시 입을 뗐다.
“전하 밥 드셨냐고요.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아서.”
“......아니, 아직.”
“하암... 밥 드세요. 빈 속이면 안 좋습니다. 혼자 먹기 싫으면 같이 먹어드릴게요.”
알베르는 찢어져라 하품하고는 비척비척 욕실로 향하는 케일의 뒷모습을 보다가 뺨을 긁었다. 어딘지 모르게 신경을 건드리는 데가 있단 말이야. 울컥하는 것처럼 속이 찡 울리고, 화날 때처럼 심박이 빨라진다. 알베르는 그 날 하루 몇 번이나 생각한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아침 햇살이 흰 이불 속으로 스미고 커다랗게 떠진 맑은 눈동자, 거기 비치는 얼룩처럼 검은 자신의 모습. 경악과 당황, 그리고 걱정. 자신을 숨겨 주려던 희게 질린 손가락. 그 흰 몸 위에 닿았던 자신의 짙은 갈색 손, 그 손과 대비되어 더 하얗게 빛나던 가느다란 목. 놀라서 가쁘게 뛰던 맥박과 온 몸을 간지럽히는 듯 하던 바쁜 호흡...
“뭐야, 아무도 안 부르셨네요? 저녁 안 드실 거에요?”
“그새 씻었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대로 씻고 나왔습니다.”
“...잠깐 멍하게 있었나. 곧 불러주겠네.”
“전하.”
알베르는 자신의 이마에 닿는 온기를 느꼈다. 깜짝 놀라 올려다보니 케일이 자신의 이마와 알베르의 이마에 각각 한 손을 얹고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다.
“열은 없으신데요. 상태가 안 좋으십니까? 저녁은 수프로 달라고 하고 일찍 주무시죠.”
이것 봐, 또. 알베르는 말끔한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제법 애써야 했다.
“애보기에 익숙한 것 같군.”
“이렇게 커다란 애가 어디 있습니까? 잠 덜 깬 소리 하지 마시죠.”
“잠 덜 깬 건 자네잖나.”
애 대하듯 하는 게 아니면 왜 이러는데? 알베르는 허물어지는 입가를 가리며 고개돌렸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사람을 부르는 종을 집어들어 흔들었다.
“시종이 오면 제가 주문해도 됩니까?”
“안 돼. 내가 하지.”
“저 정말 아무에게도 말 할 생각 없어요.”
“알아.”
“그럼 왜 가둬두시는 겁니까?”
“생각은 바뀔 수도 있으니까.”
케일은 부루퉁히 알베르를 보다 자리에 앉았다.
“저를 여기 두고 있어봤자 이렇게 제 수발이나 들어야 하실 거라고요.”
“별로 싫지 않네. 아, 왔나? 가볍게 들 수 있게 포타주와 흰 빵을 주게.”
“예.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뭐가 싫지 않아? 시종은 어리둥절한 기색을 숨기려 애쓰며 돌아갔다. 저 사람 방금 들은 거 아닌가. 그런 농담을 누가 들어도 상관없나? 케일은 미심쩍은 눈으로 알베르를 올려다보았으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시선을 받아냈다. 케일과 마주앉은 알베르의 얼굴은 어제보다 생생해 보였다.
“어제의 이야기 말이야.”
“예? 아, 그거.”
“어떻게 알았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케일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그건 전부 이야기일 뿐입니다.”
“출처를 밝힐 수 없는 정보라 이거군.”
“그렇게 억측하시니 충신의 가슴이 무너지는군요.”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하지 그래.”
“그런 거 안 발라도 말만 잘 하잖습니까.”
“혀에서 기름이 떨어지겠군 그래.”
“허.”
지는?
“표정이 왜 그렇게 불충한가?”
“예? 제가요?”
“가증은.”
테이블 위에 놓인 스프는 따끈하고 부드러웠다. 둘 다 몸에 익은 지극히 우아한 태도로 스푼을 입으로 옮겼으므로 겉으로만 봐선 마치 연회날을 위한 교육용 교본이라도 된 듯 했다. 실상은 침실 한구석에서 야식 먹듯 배를 채우는 중이었지만.
“오늘은 누구 차례입니까?”
“자네가 있는데 다른 사람을 부르자니 맞지 않지.”
“저는 다른 방에 가도 괜찮습니다.”
“안전하지가 않다니까.”
“저 그렇게 만만한 사람은 아닙니다만.”
“다른 방은 잠금장치가 그렇게 좋지 않아서.”
얼씨구. 내가 탈주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나. 케일은 괜한 짜증이 밀려왔다.
“제가 그렇게-”
“이쪽은 목숨이 걸려 있으니 이해하도록.”
케일은 나올 뻔 했던 말을 꾹 눌러 넘겼다. 제가 그렇게 못 미덥습니까? 미친놈 아냐.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를 정보를 알고 있고, 숨겨야 할 비밀도 알아버렸다. 만난 지 하루 된 사람을 그렇게 믿는 사람이 어디 있어.
“태양신을 섬기는 나라니까요?”
“비슷해.”
“선왕은 몰랐습니까?”
“그것도 죽기 전엔 과거형이 되었지만.”
몰랐‘었’다- 라.
“그래서 말이 새면 안 되는군요.”
“역성혁명까지 가지도 않을 걸. 동생들이 눈을 퍼렇게 뜨고 쳐다보고 있으니.”
“잠이 안 오실 만 하군요.”
다시 조용해졌다. 이거 먹고, 양치하고, 애들이랑 자는 건 무리고, 오늘도 부스럭거리면 어쩐다. 하루 종일 누워 뒹굴어서 잠도 안 올 것 같은데.
“오늘도 괜찮겠나?”
“예? 뭐가 말씀이십니까?”
“이야기 해 줄 수 있나?”
“저는 사지멀쩡히 나가는 일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루지 못하고 여기 갇혀 있으니 정신이 산란하여 해 드릴 만한 이야기가 떠오를지 모르겠습니다. 용서하시지요, 전하.”
아, 재수 없다는 표정 지었다. 약속 어긴 건 그쪽이면서 왜 그래. 목숨이 걸린 문제면 알아서 조심했어야지. 나는 아무것도 해 줄 말이 없네요. 이 이상의 이야기는 절대로 안 해.
“옛날 옛날 어느 추운 나라에.”
아, 모르겠다. 케일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 짓도 벌써 며칠 째인가. 아는 거 몇 개 되지도 않는데 다 뱉어놓고 나면 이제 쓸 데 없다고 목 잘리는 거 아냐? 그렇게 심란해하면서도 케일은 어쨌든 계속 이야기했다. 골칫거리가 될 만한 일은 너무 많았고, 자신이 그의 입장이어도 잠이 오지 않을 것이다. 철야할 거리가 없을 정도로 일을 해 뒀다고 해도 말이지. 케일은 손끝에 감기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파에른의 이야깃거리를 털었다. 케일은 알베르가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것을, 케일 가까이 몸을 붙이고 머리를 기울이는 모습을 보았다. 눈앞에서 감긴 눈과 길게 내려온 속눈썹이 뺨에 드리운 그림자도. 케일은 가만히 팔을 뻗어 등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도 그 얼굴은 망막에 새겨진 듯이 선명했다. 잠들어 깊어진 숨소리를 들으며 케일은 가만히 고민했다. 내 코앞에서 안전할 줄을 믿고 잠들 수는 있으면서, 도저히 내보내 줄 수는 없다고? 이건 결국 신뢰의 문제다. 그리고 솔직히 케일이라도 알베르 같은 인간을 상대로 죽음의 맹세 같은 걸 받았다고 안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교묘하게 피해 갈 테니까. 그는 자신과 너무 닮은 동류고, 곧 당장 서로를 배신할 마음 따위는 없다고 해도, 앞으로 역시 그럴 계획 없다고 해도 덜컥 믿을 수는 없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 지 확신할 수 없는데 어떻게 눈앞의, 지금의 상대를 확신할 수 있겠나. 케일이 증명해야 할 것은 조금 다른 방향의 신뢰였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라면 수상쩍은 출처의 정보를 속삭여주는 것도 할 만한 일이었다. 케일은 옛 이야기 속의 세헤라자데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냈다. 당신,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겠군요. 당신도 이렇게 무섭고 피곤하면서도 원흉인 왕이 좀 귀여워 보이던가요? 케일은 자신의 옆에 잠든 알베르를 다시 보았다. 그 큰 덩치로 등을 웅크리고 자는 모습이 꼭 동면에 들어간 다람쥐 같았다. 잠에 취해 조금 부은 뺨을 손끝으로 꾹 눌러 보곤 이내 잠들었다.
“론한테 그렇게 전할 수 있겠어?”
케일은 잠긴 문 안에서 속삭였다.
“우리도 가고 싶은데!”
“잘 갔다 올 수 있는데!”
“위험해서 안 돼. 여기가 몇 층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태우고 가면 된다!”
“하늘을 나는 고양이는 너무 눈에 띄어.”
어허, 삐죽해지긴. 케일은 우선 부루퉁해진 고양이 두 마리를 품에 꼭 안았다. 이어 사르르 투명해져 사라지는 용의 턱을 긁어주곤 창 밖으로 내보냈다. 괜찮겠지? 원작 내용대로라면 애초부터 셋이 다녔어야 하는 거잖아. 그가 맡긴 일 정도는 너끈히 해낼 수 있는 조합이기도 하고. 케일은 케일의 안전에 민감하게 구는 세 사람을 생각했다. 하긴, 고용주의 안전만큼 걱정되는 게 없지. 무슨 일 생기면 월급 떼먹히잖아. 그러니까 더욱 이것저것 고려해서 용은 케일이 데리고 있어야겠고, 온이랑 홍도 여행길에 딸려보내기는 아직 어리다. 뭐 애완동물이랑은 계속 지내게 해 준다고 했으니 한 입으로 두 말 하진 않겠지. 케일은 데굴 몸을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고착 상태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케일이 알베르의 침실에 유폐된 지도 꽤 되었다. 처음 그 소식에 무섭게 굴던 론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그럭저럭 무뎌져 왕의 침대에 드러누운 케일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가 전해주는 소문이었다. 알베르는 더 이상 새로 사람을 잡아와 썰어대지 않는다. 아직 불안정한 권력으로 자신의 손님을-혹은 화근을- 시야 밖에 둔다는 건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기에 케일은 계속 침실에 눌러앉아 있었다. 그렇다고 케일이 마치 뭐라도 되는 것처럼 알베르의 곁에 끼어 면담을 할 수도 없지 않은가. 물론 케일은 적당히 거들 수 있고 알베르 역시 그걸 알고 있지만,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신뢰가 부족하므로. 그래서 모인 귀족 자제들은 뜬금없는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케일은 대충 이 사실이 어떻게 와전되어갈까 생각해보았다. 왕의 침실에 들어간 이후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어느 망나니. 더 이상 누구도 찾지 않는 왕. 내가 죽어가고 있다고 소문나려나? 폭력적인 왕으로 알려지는 건 좋지 않은데. 케일은 어쨌거나 알베르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했다. 그래서 물었다.
“전하께서 저와 함께 나가는 건 안 됩니까?”
“뭐?”
국왕의 눈빛은 말로 하자면 ‘얘가 지금 바깥 상황을 알고나 말하는 건가?’ 였다. 아니, 그러니까 같이 나가자고 하는 거잖아. 알베르는 한참 동안 찬찬히 케일의 얼굴을 살피다가 손을 내밀었다. 케일은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까지? 하지만 뭐, 그래야겠다면. 케일은 알베르의 손을 맞잡았다.
“잠깐 산책만요. 내내 여기 있었더니 답답해서.”
알베르는 한 팔로 그의 손을 꼭 잡고, 다른 팔로 두 마리의 아기고양이를 끌어안은 케일을 보았다. 뭔가가 연상되는 이미지인데, 뭔지 명확히 떠오르지가 않았다.
“어디로 갈까.”
“어디라도 좋아요.”
그래서 케일은 알베르의 옆에서, 한 발짝 느리게 따라 걸었다. 색유리를 끼워 아름답게 그늘이 드리운 창가, 벽을 따라 섬세한 세공이 된 복도를 걸어 계단을 내려갔다.
“조심하게.”
“제가 어린아이도 아닌걸요.”
“난간을 잡을 손이 없잖나.”
“전하께서 잡아주고 계시니까요.”
한 단 아래 있는 알베르가 이상하다는 듯이 케일을 돌아본다.
“앞을 보셔야지요. 전하께서 넘어지시면 그 땐 어떻게도 못 합니다.”
“안 넘어져.”
“앞을 안 보면 누구라도 넘어져요.”
“안 넘어진다니까.”
케일은 자신을 불편할 정도로 쳐다보는 알베르를 무시하려 애쓰며 계단을 내려갔다. 맞잡은 손에 힘을 실어 균형을 지탱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여기서 오른쪽.”
케일은 복도를 부드럽게 꺾으면서, 품 안의 온이 꼼지락거리며 자신과 왕을 번갈아 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왜 이렇게 이상한 듯이 보지? 바로 앞에 국왕이 있으니 물어볼 수도 없고. 케일은 짧게 정리된 잔디를 밟으며 말했다.
“이런 곳이 있었군요.”
“자네는 매일 누워 자기만 했다니 모를 법도 하지.”
“놀리십니까?”
“비슷해.”
“보라색 꽃이 폈군요.”
“저 위에서 사람들이 여길 구경하고 있는데.”
“보고 싶으면 보라지요. 남의 눈 신경쓰지 말고 정원 구경이나 시켜주십시오.”
“나에게 정원 안내를 시키는 사람은 너 정도일 거야.”
“이제 부탁할 사람이 없어지는걸요.”
“자네를 그렇게 아끼는 수하들이 있지 않나.”
“별로 그들을 수하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다만... 제가 그 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시중도 호위도 딱히 필요없는데다 집안에서 걱정도 할 것 같아 소식도 전할 겸 잠시 내보낼까 합니다.”
“헤니투스 가에 다녀오게 한단 말인가?”
“그렇지요. 문제될 것 있습니까?”
“없다고 해야 할지.”
“있으면 똑바로 말씀하십시오.”
“그게...”
케일이 한쪽 눈썹을 들어올리자 알베르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케일의 손을 끌었다. 어느 늦은 오후, 국왕의 침실에 틀어박혀있다던 케일 공자가 국왕과 조용히 손을 잡고 정원을 산책하는 동안 소문이 어떻게 퍼지게 될 지는, 케일만 몰랐다.
“케일.”
“예?”
“요즘 묘한 일들이 일어나더군.”
“그렇습니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내게 불손하던 귀족 가문이 차례차례 공격당하는 사건이 일어나.”
“오오, 신께서 전하를 도우시나봅니다.”
“장난치지 말고.”
케일은 입을 다물고 딴청을 피웠다. 하지만 케일과 마주앉은 알베르는 집요하게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모른 척해도 소용없어, 모르는 척 한다는 것까지 보이는 거 알잖아. 갈색 눈동자는 아주 고집스럽게 케일의 모습만이 비쳤고, 결국 케일은 항복하듯 말했다.
“전하께서 손을 썼다고 소문나지는 않겠지요?”
“않겠더라. 꼼꼼히 미끼를 던져서 모두가 다른 방향으로 삽질하고 있어.”
“그럼 됐잖습니까.”
“너의 그 ‘수하는 아닌 동행’들은 언제쯤 헤니투스 가로 돌아가겠나?”
“조금 멀었습니다. 느긋이 기다리시지요.”
“그게 이미 내 일이 되었는데 아는 게 없으니 느긋할 수가 없네.”
케일은 빙긋 웃었다. 이 방 안에서만 지낸 지도 어느 새 석 달이 가까웠다. 내전은 없을 것이다. 귀족들은 인질을 잡아 무릎꿇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케일이 속삭여준 정보는 그대로 그의 힘이 되었고, 그의 적이 될만한 이들은 케일의 수족에게 무너지고 있었으니까. 알베르는 그를 놓아 주어야 할까 생각했다. 이제 알베르는 강하다. 귀족 자제들을 잡아다 베고 어르며 우스운 연극으로 피곤해지는 일을 재개할 이유도 없고, 그들을 풀어주면서 케일만 데리고 있을 명분도 없다. 그러나 알베르는 그러지 않았다.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알베르는 이젠 당연히 자신의 옆자리에 누운 케일을 보다가,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잘 먹고 쉬는데도 마르니 역시 운동을 시켜야 할까.”
“그럴 시간도 없으시잖습니까. 저는 혼자 나갈 수가 없으니.”
“내 탓이지, 그래.”
“아뇨. 저 원래 움직이는 거 싫어합니다.”
그리고 그렇게나 먹어댄 건 저 혼자가 아니라 아이 셋 포함이라고요. 양으로만 따지면 저는 평소보다 덜 먹은 편이니 좀 빠지더라도 별 수 없죠ㅡ 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케일은 어쩐지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듯한 알베르의 얼굴을 관찰했다. 일국의 국왕이 인질의 건강을 그렇게 걱정할 필요 있나.
“대체 네가 언제 어떻게 바깥에 명령을 내리고 정보를 다시 받아 듣는지 알 수가 없다.”
케일은 찔끔하여 시선을 돌렸다. 아마 허공을 보고 있는 듯 보이겠지만 케일은 지금은 투명화한 용이 있던 곳 즈음을 보고 있었다.
“그러니 너를 두려워해야 옳지. 너를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하는데.”
무서운 소리 하지 마세요. 여긴 암살에 쓸 만한 능력을 가진 묘족 아이 둘과 드래곤 님까지 계시다고요. 당신이 헛소리하다가 죽으면 내 미래는 어떻게 됩니까. 케일이 말같잖은 소리 말라는 얼굴로 돌아보자 알베르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그게 가장 문제지.”
얼굴을 덮도록 내려온 붉은 머리카락은 갈색 손가락이 쓸어넘겼다. 이토록 무방비하게, 타인의 눈 앞에서 자신을 드러낸 적 있었나. 알베르는 매일 매일이 신기했다.
“나를 위해 주고 있으니 필요한 게 있으면 말 해. 손닿는 한 지원할 테니까.”
“그러면 당신에게 빚을 지울 수가 없잖아요.”
케일은 알베르의 표정이 변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또 다시 빤히 바라봐 올 뿐이었다.
“내가 너라면 여기서 ‘빚’이란 단어를 내놓고 말하지 않아.”
“......네.”
케일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그게 맞다. 우리는 서로 돕고 있지 않아요, 이득을 보고 싶어서 거래를 하는 거에요-라고 말했을 때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어 정의감을 맛보고 싶어하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언제나 교묘하게, 하지만 돌이켜 봐도 손해봤다고는 느낄 수 없도록 최대한 대등한 거래로. 하지만 케일은 말해버렸다. 왜 그랬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알베르가 케일의 어깨에 이마를 대었다. 한 사람분의 무게가 케일에게 기대졌다.
“내가 너를 여기 묶어두고 있지.”
옷 위로 눌리는 머리가 묵직했다. 늘어진 갈색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그러니 내가 너에게 빚을 지울 수는 없겠구나.”
“전하께서도 제게 빚을 지우고 싶으십니까?”
“응.”
“저를 왜요? 더 해드릴 것도 없는데.”
“왜냐하면, 그러면 너는......”
케일은 가만히 알베르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알베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전혀 다른 말을 툭 뱉었다.
“애초에 순서가 반대였던 거야.”
“케일, 나는 황제가 될 거야.”
케일은 눈을 깜박이며 알베르를 내려다보았다. 하루종일 회의다 뭐다 바빠 간수처럼 밥만 쑥 넣어주고 가버리더니 침대에 뻗자마자 하는 말이 이거다. 금사처럼 반짝이던 머리카락이 나무기둥 같은 색으로 사르르 변해가는 걸 보는 건 즐거웠다. 케일은 쿠션처럼 베개를 받치고 앉아 있던 침대머리에서 엉덩이를 떼고 알베르의 옆에 당겨 앉았다.
“거창한 꿈이네요.”
내가 본 이야기에서 당신은 여전히 왕이었는데. 지쳐 드러누운 왕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며 케일은 곰곰히 생각했다. 황제가 되려면 뭐가 필요하더라. 영토 확장?
“거창하다고 생각해?”
“일반적으론 그렇죠.”
“그러면 나한테 왜 잘 해 주지? 그 정도도 못 해낼 이에게 과한 투자야.”
케일은 피식 웃었다.
“당신은 좋은 왕이잖아요.”
알베르가 구물구물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자고 싶은데 억지로 몸을 일으키는 것 같은 몸짓이었다. 피곤하면 그냥 자라고 한 마디 하려다가, 케일은 그대로 멈췄다. 알베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왜요?”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봐.”
이상한 일이었다. 알베르는 조금, 아주 조금 가혹하게 굴긴 하지만 좋은 왕이었다. 케일이 어리둥절한 표정인 채로 움직임을 멈추자 알베르는 더 크게 웃었다. 케일은 굵은 팔이 자신을 끌어안자 그만 어색해졌다. 뭔가 엄청 듣고 싶었던 말을 해 줘 버린 건가. 귀찮아지는데. 케일은 따끈한 품 안에서 고민했다. 그럼 무슨 대답이 나았던 걸까.
“취소하기엔 늦었습니까?”
“늦었어.”
맞닿은 살은 따끈따끈하고, 누운 자리는 폭신폭신하다.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은데 이 상황이 너무 어색해서 잠이 오지도 않았다. 뭐라고 변명해야 하지. 케일은 뻘뻘거리며 열심히 생각했다. 아, 생각났다. 당신에게 신뢰를 주어야 했지. 그의 입지가 망나니의 헛소문 하나로 흔들릴 정도면 케일은 당연히 위협이 된다. 그건 상황의 문제다. 케일이 얼마나 진심이든, 케일이 얼마나 알베르를 위하든 약한 자에게는 약간의 위협도 두려운 것이니까. 그래서 케일은 알베르에게 그를 믿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었다. 케일은 알베르의 등을 차분히 쓸어내리며 물었다.
“이제 제가 두렵지 않으시지요?”
“무서워.”
“아시잖아요. 이제 저는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아니, 네가 가장 큰 위협인데.”
“여전히 말입니까?”
“아니, 점점 더.”
케일은 고개를 저었다. 이 사람이 왜 겁쟁이 흉내를 낸담. 그런 일들을 해내는 것 자체가 불안한가? 능력의 유무 자체가? 하지만 그런 부분은 당신이 훨씬 뛰어난데. 내가 한 침대 쓰면서 칼을 갈 정도의 인간으로 보이나.
“저는 귀찮은 일은 싫어해서 괜찮습니다. 이제 와서 당신에게 해를 끼치진 않아요.”
“하아......”
“...거짓말처럼 보여요?”
“아니, 그 정도는 보면 알아.”
“저는 당신이 이 나라에 편안한 미래를 만들어주기만 하면 그만이에요. 그러면 저는 쉴 수 있을 테고.”
그래, 그랬지. 나의 미래, 주인공의 미래. 아무것도 거리낌 없이 살아갈 미래의 누군가를 위한 좋은 터전. 그 때 자신은 어느 방 구석에서 편안히 누워 놀기나 하면 되기를 바랐다.
“아직 한참 젊은 나이인데 지친 사람 같은 말만 하고.”
“편한 걸 누가 싫어하나요.”
“내가 뭘 해도 변하지 않나 싶어. 그럴 바에야 내 손으로 평생 놀게 해 줘야 하나.”
케일은 눈을 깜박였다. 변하지 않나. 그 말이 묘하게 와 닿았다. 알베르는 그 시대의 배경이었다. 모든 걸 이미 정리해 둔 승리자의 모습. 어떻게 보면 케일이 원하는 자신의 미래와 꼭 닮지 않았나. 그야 알베르는 의욕이 넘쳤지만, 그것만 빼면 둘은 늘 동류였으니까. 결국 알베르가 바라는 것 역시 더 안정된, 평화로운 나라였다. 그리고 확고한 권력과 부강한 국력을 더해서. 케일은 알베르가 황제가 되면 무엇이 변하는지 생각해보았다. 변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건 변하지 않는다. 어차피 이야기의 요소 요소들은 이미 케일이 멋대로 틀어버렸잖나. 지금의 아이들이 자라 미래의 주역이 될 때, 조금은 달착지근한 모험을 펼치기 좋은 세상이 올 건 변하지 않는다. 그 때의 케일도.
“알베르.”
자신을 안은 사람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케일은 말했다.
“황제가 되세요.”
그런다 해도 알베르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힘이 되어줄게요.”
“도련님, 제가 없는 사이 도련님에 대한 갖은 소문이 났더군요.”
케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항변했다.
“나는 전하의 눈 밖으로는 나가지도 못 해. 무슨 말이 났는진 몰라도 내 탓 아냐.”
그러니까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보지 말라고. 케일은 론 앞에서 입술을 비죽 내밀고 툴툴대고 싶었다. 얼마나 얌전히 있었다고. 하지만 무서우니까 기각. 그러나 론의 눈은 더 가늘어졌다. 함부로 길어져 내려온 붉은 머리카락하며 운동 부족 햇빛 부족으로 보이는, 전보다 확연히 창백하고 마른 몸. 사람을 이 지경이 되도록 가두어 두었다니 말도 안 된다. 무엇보다 너무나 태평해 보이는 도련님 탓에 속이 탔다.
“그런 상황을 참아 드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왜 없어. 모두가 안전한 게 우선이지.”
“백작님도 백작 부인도 아주 걱정하고 계십니다.”
찔끔.
“소문이 그렇게 나쁘게 났어? 내가 무사하다고는 말해드렸겠지.”
“물론입니다. 하지만 요즘 같은 정세에 걱정하지 않으실 수는 없지요.”
“도리어 안심할 때 아닌가.”
케일이 조그맣게 투덜거리자 론의 서늘한 눈빛이 홱 날아왔다. 케일은 살고자 하는 사람이 첫 번째로 하는 일을 했다. 다른 사람을 들이밀었다.
“얘네 많이 컸지?”
“할아버지, 오랜만이라는데!”
“하나도 안 변했다는데!”
엄한 척 하지만 아이에게 모질지 않은 론의 눈꼬리가 슬쩍 풀어졌다. 휴. 이대로 애들하고 이야기나 하면서 나에 대한 건 잠깐 잊어줬으면. 케일의 단순한 바람이었다.
“막내는 지금 없는데.”
“라온 산책 갔는데!”
“있을 때 왔으면 좋았을 건데!”
“라온도 할아버지 보면 좋아할거라는데!”
“라온?”
론은 다시 허리를 곧게 펴고 케일을 응시했다. 감회가 남다른 표정이라고 할까. 마치 뭐든지 거부하던 아이가 선물 하나를 쑥스럽게 받아든 감동적인 장면을 본 것처럼 놀란 얼굴이었다. 세상사 다 그렇듯이, 겉으로 드러난 작은 변화 한 조각은 보이지 않는 변화가 얼마나 컸는지 알려주는 단초가 되곤 했다. 론은 눈앞의 하룻강아지 같은 도련님이 자신이 떠날 때와 같은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도련님께서 이름을 지어주셨군요.”
케일은 한 손을 들어 머쓱히 뒤통수를 긁었다. 잠옷 차림은 아니었다. 말끔한 흰 셔츠, 단정하고 격식 있는 검은 재킷. 어느 회의에라도 참석하고 온 듯 다른 손에는 서류가 들려 있었다. 알베르가 다른 귀족 자제들을 돌려보낸지도 몇 주가 지났다. 그러고도 케일은 여전히 알베르와 침대를 함께 썼다. 왕의 손 아래에서만 돌던 소문이 각지로 터져나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소문을 증명하듯 케일은 알베르의 파트너로 두각을 드러냈다. 길어진 머리카락을 꽁지내어 묶고 직위도 작위도 없이 단순한 차림으로 알베르의 곁에 섰지만 그 누구보다도 정확하고 무서운 일처리였다. 그 두려운 왕이 둘이 된 것 같다는 평마저 있었다. 스텐 가의 새로운 가주만이 별로 놀라지 않은 것을 제하면 귀족 사회에 끼얹어진 충격이었다. 어째서 지금껏 조용히 있었느냐 따위는 아무도 몰랐지만 왜 이제 와서 움직이느냐에 대한 추측은 모두 비슷했다. 왕을 보필하면서 부도 명예도 권력도 원하지 않는 특이한 이 인물은, 왕에게 원하는 것이 조금 더 개인적인 수준의 보상이 아니겠느냐는 추론이었다.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추문이다. 알베르도 케일도 그 추문을 모를 리 없으나 대응하는 것도 바보같다 여겨 무시로 일관했다. 그리고 그 추문이 끌어올린 문제는 케일이 알베르가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기 쉽도록, 손에 걸리는 모든 걸 정리해 나가는 동안 전혀 의외의 곳에서 튀어나왔다.
“뭐라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반역이라도 꾀할 기세라던데요.”
알베르는 케일의 심드렁한 표정에 어이가 없었다. 평화롭게 살고 싶다며. 사지 멀쩡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게 원하는 전부 아니었나? 케일은 기꺼이 알베르를 꼭대기까지 데려다 놓는 일에 나서 주었으나, 그게 끝나면 아마 떠나 버릴 것이다. 케일이 하는 일이 저 스스로의 노후 대비쯤 된다는 사실을 알베르는 모를 수 없었다. 케일의 효율적이고 거침없는 일처리가 기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매초 조금은 늦출 수 없을까 생각하는 알베르였다. 그러니 그가 원하는 게 바뀌었다면 알아 두어야 했다.
“이젠 상관없나?”
“그럴 리가 있습니까? 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케일은 자신의 말 한 마디에 깨갱하는 예비 황제를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슬쩍 잡아당기자 약속이라도 한 듯 환한 색이던 알베르가 스륵 어두워졌다. 그 모습이 더 마음에 들어 흡족한 기분으로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케일은 저 온통 톤이 다른 갈색 덩어리 위에 황제의 관을 씌워주는 상상을 해 보았다. 정말 많은 게 변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겠지. 무엇이 되건 알베르는 여전히 알베르일 것이고, 케일은 계속 케일일 테니까. 어차피 우리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니까.
“반역자로 처리하면 다 엎어버리고 튈 거니까 허튼 생각 마시고요.”
“안 해. 네가 어쩌고 싶나 해서 물어보는 거지.”
“저랑 같이 헤니투스에 좀 들러 주셔야겠습니다. 해명을 하죠.”
“언제?”
“내일요.”
“내일 회의 있어, 케일. 알잖아.”
“늦춰요. 제가 더 급하니까.”
알베르는 다시 서류를 읽어내려가는 케일의 옆모습을 보다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일은 보지 않고도 알베르가 항복했음을 알고 있었다. 케일이 상대라면 알베르는 지는 수밖에 없었다.
케일은 텔레포트 진 너머로 발을 디뎠을 때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잔뜩 긴장한 듯한 바이올란과, 하얗게 질린 데르트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바센과 릴리도. 케일은 새삼 주인공의 얼굴이란 별처럼 반짝이는구나 생각했다. 네가 살아갈 미래는 원래 버젼보다 꽤 좋을 거란다. 물론 너는 더 좋게 만들어 보려고 애쓰겠지만. 케일이 아주 짧은 상념에 잠긴 사이 순식간에 가족들에게 둘러싸였다.
“케일!”
“오, 케일.”
화닥닥 다가오던 두 사람이 멈칫한 건 오직 케일에 뒤이어 -그리고 케일과 손을 잡은 채로- 나타난 사람 탓이었다. 케일은 알베르의 손을 놓지 않은 채 한 팔로 양친과 가벼운 포옹을 나누더니 즉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두 분이 제 상태를 크게 오해하고 계신 듯 하다는 말을 들어서 해명도 할 겸 함께 왔습니다.”
알베르로 말하자면 제법 긴장하고 있었다. 무슨 해명을 하겠다는 건지도 못 들었다. 오늘 시간을 비우기 위해서 어제 새벽까지 일하고 아침부터 단장을 하느라 바빴단 말이다. 케일은-알베르에게 익숙한- 계획이 있거나 재미있어하는 얼굴은 아니었고, 다만 당연히 일어날 일을 처리하듯 건조해 보였다. 습관이 들어버린 맞잡은 손이 바싹 긴장해 버적거렸다. 케일이 뭐라 말할지는 모르겠지만 장단을 맞춰 주어야 할 테니까.
“제가 국왕 전하를 돕는 데에 어떠한 외압도 없으며 전하께서도 저를 잘 대해주고 계십니다. 혹 좋지 않은 생각을 하셨다면 오해이니 거두어 주세요.”
“아, 그렇네. 케일이 있어 큰 도움이 되고 있어. 계획한 일이 끝나는 대로 큰 포상을 내리고 돌려-”
“저는 계속 이 사람의 곁에 머무를까 합니다.”
알베르를 포함해, 케일 외의 모든 사람이 펄쩍 뛰었음은 틀림없다. 하지만 케일은 생각했다. 이야기 속에 잘 등장하지도 않는 왕의, 그것도 침실 같은 건 등장한 적도 없는 걸. 얼굴도 자주 내밀지 않는 망나니 오라비도 마찬가지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살아갈 평화롭고 다정한 배경이 될 것이다. 둘 모두가 바라는 바가 바로 그것이므로. 사실이 그런 이상 어디에 있든 뭘 하든 크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케일은 그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일을 하며 지내도 상관없지 않을까.
“저도 여러모로 생각해 봤는데 신경쓰여서 안 되겠습니다. 밥은 밥대로 안 챙겨먹으면서 제 걱정이나 하고, 밤이 되면 과로로 눈 밑이 꺼매져서 오는데 잠이 안 온다고 징징거리니 매번 안아 재워 줘야 하고, 보이는 것보다 겁이 많아서 슬금슬금 제 눈치나 살피는데 이걸 두고 돌아간다고 마음이 편할 것 같지가 않더군요. 제 시중을 들라 해도 싫지 않고 제 일이 자신의 일과 같이 된 지 오래라는데 어떡합니까. 도리어 돕는다는 일은 별로 손이 안 가는 편이니 쉴 시간도 충분하고요. 지금도 보십시오, 놀라서 별 말도 못 하면서 좋아하는 기색은 숨길 줄을 모르니 저 없는 데 두고 노심초사하느니 그냥 제가 끼고 살아야겠습니다.”
이게 불평인지 자랑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말에 바이올란은 머리가 어질함을 느꼈다.
“그, 그러면.. 앞으로는 어떡할 생각이니?”
이것저것 바뀐다 해도 큰 틀은 변하지 않는다. 좀 진부한 동화의 끝이지만 별 수 있겠는가. 케일은 당당하게 말했다.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