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과 괴물의 이야기
추천 브금
[이 글은 작중 '영웅의 탄생'의 떡밥이 나오기 전에 플롯을 짜고 작성한 작품입니다. 그에 따른 설정 상 미스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알베르 크로스만의 결혼관이 나오기 이전의 캐해석입니다 (ㅠㅠㅠㅠㅠ) 유념하고 봐주시길 바랍니다.]
“미녀와 야수라고 아십니까?”
알베르는 제 손에 들려진 서류를 엄지로 아래에서 위로 한 번 길게 쓸었다. 서류에 내리 앉은 볕이 종이에 부딪혀 여러 방향으로 쪼개어지며 눈을 파고들었다. 이래서는 영, 커튼을 칠 시간이 벌써 되었군. 하고 머릿속에서 되뇌며 서류를 잘 세공된 집무실 탁자 위로 다시 내려놓았다. 몸을 일으켜 세워 창문 가까이 발을 옮기자 느껴지는 봄 내음과 몰아치는 햇빛에 작게 눈을 감자 뒤에서 나른한 물음이 들려왔다. 느리고 따스한 바람이 머리께를 한 번 헤집고 내부로 들어왔다. 탁, 문을 닫는 소리와 함께 푸른색 커튼이 빛을 감추었다. 곧 봄이로군. 왕실 정원에 장미가 피리라는 것을 예상한 왕세자는 몸을 뒤로 돌렸다. 물음을 던진 상대와 물음을 받은 상대의 눈이 마주쳤다.
“그 두 단어의 정의를 묻는 겐가?”
“설마요.”
“상관관계를 물어도 잘 모르겠는데. 썩 생각나는 건 없군.”
“하긴 그런가요. 로운에 안데르센이 있을 리가 없지.”
그게 누군데? 알베르는 순간 튀어나오려는 반문을 목 안쪽으로 씹어 삼켰다. 그는 가끔 알베르 앞에서 묘한 말을 별 거리낌 없이 꺼내곤 했다. 그리고 굳이 그걸 변명하려 들지도, 설명하려 들지도 않았다. 방금도 그랬다. 적어도 스무 해를 어디 가지 않고 로운에서 살아온 주제에 그 무슨 모순적인 말을? 생각해보면 목에 걸리는 부분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으나 알베르는 애써 반문하지 않으려 했다. 그에 대한 답이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심을 자아내는 빈틈을 툭툭 내뱉는 그 행위 자체가 어쩌면 케일이 알베르에게 보내는 무언가의 신호이자 답은 아닐까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오히려 반문하면 그 행위를 멈출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알베르는 질문하는 대신 미소를 짓고선 케일의 입에서 흘러나올 다음 말을 묵묵히 기다렸다.
“동화책 이름입니다.”
그렇지. 알베르는 표정과 행동에서 초조함을 드러내지 않도록 무던히 노력했다. 무의식적으로 두드리려던 검지를 주먹을 꽉 쥐어 슬그머니 테이블 아래로 떨궜다. 꽉 쥔 손에 얼얼함과 삼켜낸 초조함이 담겨있었다. 케일은 알베르를 안다. 알베르가 케일을 알고 있듯. 기다리면 케일이 그것에 대한 답을, 적어도 단서라도 제게 건넬 거라는 것을 알았다. 알베르가 그가 던진 말에서 위화감을 느낄 거라는 것을 누구보다 케일 헤니투스가 가장 잘 알 테니. 알베르는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케일은 허튼 말을 하는 자가 아니니까, 늦더라도 그것은 언젠가 저를 향해 열릴 의문일 터였다. 그럼에도 아직 초조함이 맴돌아 남은 후유증이 손을 괴롭혔다. 알베르는 이유를 알았다. 초조함의 원인은 케일에 대한 좁혀지지 않는 묘한 간격과 무지였다. 알베르는 케일을 전부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알베르는 케일을 신뢰했다.
“동화책에는 견문이 없어서.”
“저하께서 어린 시절에 책 하나 펼쳐보시지 않았을 리는 없고.”
“문학에 몸을 맡기지는 못했지.”
케일은 어린 나이에 동화책은커녕 국부론을 들고 끙끙대는 어린 알베르 크로스만을 무의식적으로 상상하다 이내 그만두었다. 하긴 한가로이 또래 아이들처럼 지낼 시간이 그에게는 없었겠지. 동화책 그 특유의 분위기조차 모른다면 설명이 좀 복잡해질 것 같아 설명의 범위를 가늠하고 있을 때 얼굴을 가린 서류 너머로 아예 모르진 않아. 하고 흐르는 듯 덧붙인 대답을 들었다. 왕세자는 서류를 약간 내려 저를 바라보는 암갈색 눈을 푸른 눈으로 마주했다.
“짬짬이 훔쳐보기라도 하셨습니까?”
“훔쳐볼 게 어디에 있다고. 왕궁에.”
타샤가 잠 못 드는 밤이면 못 이기는 척 서사시를 읊어주곤 했지. 이모도 그런 것에는 영 익숙하지 못한 시절이라 해주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맘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알베르의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가 살짝 퍼졌다 사라졌다. 결국 뒷이야기가 궁금해 오히려 잠들지 못하는 밤이었다. 그래도 그런 날이 어린 날을 즐겁게 추억할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이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알베르의 기억 속에 있는 동화란 그런 매개체였다.
“저하가 듣고 자랐던 동화책에도 왕자나 공주가 나오나요?”
“그런 것보다야 세상을 제패할 모험을 떠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곤란한 일들을 도와주고 다니는 어리고 멋진 다크엘프 소년이 나오지.”
타샤가 직접 지어낸 게 틀림없는 듯한 이야기의 주인공에게 케일은 옅게 미소 지었다. 분명 알베르를 위해서 직접 머리를 굴려 만들어 낸 동화일 것이다. 오로지 알베르를 위해서만 만들어낸 이야기. 타샤 성미에 고전적인 사랑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적과 싸우고, 사람을 돕는 데에 초점이 맞춰진 이야기를 했겠지. 야심많은 아이를 위해서 분명 왕자리에 걸터앉아 세상을 호령하는 결말을 준비했을 타샤와 눈을 반짝이며 듣는 어린 알베르를 생각하니 그런 부류의 동화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케일은 생각했다. 언젠가 아이들을 위해서 머리라도 굴려볼까. 우선 론의 도움이 필요불가결하리라.
“하기야, 왕자와 공주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결말은 진부하긴 하죠.
“진부한게 뭐 어때서?”
케일은 눈을 깜빡였다. 서류 사이로 반짝이는 푸른 눈은 뚱해 보였다. 마치 불만이라도 있는 듯이. 알베르는 서류를 내려놓고 할 말이 많다는 듯 입을 삐죽였다. 멍한 표정이 이내 눈썹을 들썩였다. 뭐야, 진심이야?
“그런 결말 좋아해요?”
“언제나 공주와 결혼하는 것은 아니었고, 굳이 결혼하지 않는 엔딩도 있었지만 어떤 상황이든 어떤 방식이든 영원한 사랑은 있었지.”
“저하가 그런 걸 좋아했다니 의외네요.”
“누구나 안온하게 살아가고 싶은 욕망은 있잖아. 그러면서 외로운 건 싫고. 나름 합리적인 결말 아닌가?”
케일은 고개를 푹신한 소파에 느긋하게 기대었다. 그렇지, 알베르의 말에 토를 달 부분은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느리게 눈이 감았다 떠졌다. 그렇지만 당신은 그럴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야 하지 않았던가. 어린 왕자님의 인생은 매정하게도 동화 속처럼 순탄하게 흘러가지만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나도 이른 시간에 가르쳐주었을 것이다. 케일 헤니투스의, 김록수의 인생이 그렇게 알려주었듯이.
김록수는 살아가는 오랜 시간 동안 체념을 배웠다. 걸어가는 순간순간이 항상 피치 못할 이별의 연속이었다. 잃어버린 일상, 보호자들. 정을 준 모든 사람. 곁을 내어주지 않는 것은 어느새 버릇이 되었다. 케일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언젠가 떠나리라는 것을. 행복이라는 것을 유지하는 데에는 그만큼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약하기에 모두 떠나보냈던 삶. 아물었다고 할 수 없는 상처들의 진물과 쓰라림을 억눌러 나가며 케일은 아끼는 것들에게 애써 매정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것이 약한 존재, 김록수의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케일은 그런 결말이 합리적일 수 있다는 것에는 동의했다. 하지만 그 결말이 이 집무실에 앉아있는 두 사람에게는 합리적이라고 하기 어려운 것을 알았다. 그 결말을 얻기 위해서는 두 사람에게는 더욱더 많은 고난과 역경이 따를 것이다. 심지어 이룰 수 없는 허황된 꿈일 수도 있다. 이룰 수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결코 합리적인 결론은 아닐 것이다. 더 쉬운 길은 무궁무진하게 있었다. 그중 하나가 김록수가 고수한 체념을 배우는 방법이었다. 케일은 느린 눈으로 알베르의 표정을 훑었다. 케일의 표정을 읽었는지 머쓱한 얼굴이었다. 그 표정으로 케일은 알베르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가늠이 갔다. 합리적이라는 것은 변명이구나.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의외로 꽤 감상적이시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
"뭐? 하, 젠장. 그른 말은 아니군. 그래, 그래. 뭘 속여. 변명이네."
"영원한 사랑 같은 걸 믿으세요?"
알베르는 끄응, 하고 낮게 소리 내다가 눈을 이리저리 돌렸다. 막상 자기 입으로 말하려니 낯간지러운 건지 망설이는 꼴이 우스워 케일은 작게 허, 하고 웃었다.
"있을 수도 있지."
"변하지 않는 것도, 떠나지 않는 것도 없잖아요."
"그럼에도 있을 수도 있지."
민망한 어투가 묻어나오는 그 말에는 망설임은 없어 보였다. 케일의 눈을 이리저리 피하다가 마주한 눈은 푸르게 반짝였다. 크흠, 작게 목을 가다듬고 케일을 바라보는 눈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아닌가? 재차 물어오는 말에 케일은 이 말도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나는 손에 쥘 자신이 있어."
알베르 크로스만은 그런 인간이었다. 자신이 나아가는 길에 확신과 자신이 있는 사람. 알베르는 케일과 동류였지만 모든 점이 온전히 같은 인간은 아니었다. 알베르는 어린 나이에 책 속의 달콤하고 다정한 행복을 바라기에는 자신의 삶이 그렇게 다정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야기를 해주다 되려 자신이 베개에 머리를 뉘어 잠든 타샤를 바라보며 알베르는 잠들지 못하는 밤을 새우며 눈을 힘주어 감았다.
그렇다면 나는 그 행복을 어떻게든 손에 쥘 정도로 강해지리라.
"나는 그럴 자신이 있어."
알베르는, 마주하는 암갈색 눈이 건네고 싶은 말이 많은 것을 눈치채었다. 그러나 케일은 침묵했다. 눈동자가 일렁였다. 알베르는 사실 그의 반박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쉬이 열지 않는 입이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이번에도 참고 기다려야 할 순간인가. 붙잡기 위해 말을 건네면, 손아귀에서 도망쳐버릴 순간인가.
"수없이 설득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붙잡고, 쫓아가서 또다시 사랑에 빠지고."
그럼에도 그는 말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수없이 반복한다면 영원하지는 않을지라도 그에 가까운 곳까지는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알베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 순간이 바로 지금이군.
그 눈은 지금 순간에서 도망치고 싶어하는 눈이었다. 그럴듯한 변명과, 그럴듯한 이유를 늘어놓고서는 도망칠 궁리를 하는. 케일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더 잘 드러나 빠르게 깜빡이는 내내 흔들렸다. 그리고 헛웃음을 지었다. 눈을 마주하지 않은 직후 잡힌 그 손목에. 뼈가 굵고 단단한 손이 케일의 손목을 감싸 쥐고 있었다. 잡은 스스로에게도 반사적인 행동일 게 뻔했다.
그럼에도 케일은 도망쳤다.
"저만이 아는 짧은 동환데, 모르시다면 설명드리겠습니다."
잡고, 잡힌 손이 다 부질없게도.
"모르시지요?"
*
알베르는 서류로 엉망이 된 자리를 치우러 들어온 하인을 물렀다. 지금 상태도 몹시 엉망이긴 하지만 모르는 자가 기억해두기 어렵도록 치우면 더 엉망이 될 터였다. 고개를 꾸벅 숙인 하인이 나가자 알베르는 얼굴을 쓸었다. 이 모든 서류 더미를 처리하기에는 오늘 밤을 새우는 것은 물론 내일 밤도 새야 할 터였다. 목을 가다듬자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목이 잠겨 그리 듣기 좋지 않은 목소리를 내었다.
꺼끌꺼끌한 손으로 얼굴을 쓸자 피로감이 얼굴을 흘러내렸다.
전쟁은 막을 내렸다. 세상은 다시 잔잔한 평화를 이룩했다. 케일 헤니투스, 그 이름이 널리 퍼진 유명한 젊은 영웅. 그 때문에, 그로 인한 후폭풍은 로운 전국에 느리건 빠르건 퍼지기 시작했고 그를 떠안고 일단락 짓는 것은 알베르 크로스만, 새로 역사를 시작하려 역사서에 점을 찍은 새 황제의 일이었다.
알베르는 우선으로 모든 기록에서 케일을 최대한 배제해주었다. 있더라도 두루뭉술하게, 자세하지 않도록. 기록된다면 차라리 만인에게 동질감이 느껴지지 않도록 인간적인 부분을 제외해 달라는 청에 알베르는 군말 없이 그리하였다.
케일은 동상과 숭배할 수 있도록 눈으로 드러나는 그 모든 '케일 헤니투스'를 선호하지 않았다. 굳이 무언가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면 꽃이 좋겠노라고, 장미꽃이 좋겠다고 케일은 그것 하나 허락해 주었다. 덧없이 순간을 피었다 스러져버리는 것이라 허락해 준 것인가. 알베르는 로운 전국에 붉은 장미꽃을 심으라 명했다.
케일 헤니투스를 향한 기존 권력계층의 본능적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는 두려움을 알베르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수없는 건의에 무색하게도 황제는 더욱 안정된 기틀을 닦으라는 성화를 전부 눈을 감고 무시하는 태세를 취했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대책이야 기껏해서 케일 헤니투스라는 존재를 짓밟는 방법밖에 더 있겠는가.
동남부의 한 구역을 차지하는 치기 있는 한 젊은 백작이 그가 하얀 별과 함께 자멸했으면 이런 논의를 할 필요 없었으리라 한탄했다. 그의 가문은 얼마 안 되어 암과 결탁했던 비리와 뇌물 수수 건으로 인해 반역죄로 목이 전부 달아났다.
그자는 그 나잇대 다운 용기가 장점인 자였으나, 만용이 흠이었다.
알베르는 이 서류 더미가 익숙했다. 양이야 사실상 전쟁과 외교관계로 부닥치던 시절이 훨씬 더 많지 않던가. 내용도 체스판에 올라 살 떨리는 눈치싸움을 하던 순간에 비하면 지금은 체스를 두는 사람 쪽이다. 그때보다 형세 파악도 내세울 수 있는 패도 월등히 많다. 왕세자의 자리에 앉아서는 한계가 있었을 테니까. 지금은 그 상황에 비하면 한결 본인에게 유리하다. 그러니, 알베르는 누군가에게 손을 벌릴 정도로 바쁘지 않았다. 이 정도는 그에게 있어 분명히 어려운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죠?"
그러니 백수를 하겠다고 노래를 부를 때는 언제고 일을 시켜달라고 돕겠다고 제 집무실 소파에 죽치고 앉아 부루퉁한 얼굴을 한 제 사랑스러운 애인에게 업무를 나눠줄 이유가 없다는 소리가 되었다. 케일은 얼굴을 부루퉁하게 하고 앉아 알베르가 쥔 서류조각을 쥐려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알베르의 간단한 저지에 그 노력은 수포가 되었지만. 몇 번 더 서류를 잡아 쥐려는 일이 반복되었다. 알베르는 이 상황이 우스웠다. 이 일 더미가 무엇이 좋다고 이렇게 필사적으로 서로 뺏고 뺏기지 않으려 경쟁 중인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치고 알베르도 필사적이었기에 케일에 종이 하나도 넘기지 않으려 고군분투 중이었다.
남이 보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는 꼴을 서로에게 보이며 몸이 엎치락뒤치락 움직였다.
힘을 주는 손에 핏줄이 서렸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헛웃음이 입가에 번졌지만 손은 여전히 힘을 빼지 않았다.
알베르는 틈을 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 이유는 첫 번째로, 이런 일까지 케일에게 선뜻 내민다면 케일에게 너무 의존하게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가뜩이나 물어뜯는 것은 케일 헤니투스라는 인물의 지나친 뛰어남과 반역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든 간에 더 이상 케일이 나서게 되는 일은 그 가능성의 불쏘시개가 될 뿐이었다. 케일은 그 후폭풍을 감당할 만큼의 이득이 되는 일을 쉬이 가져오곤 해 알베르의 이해타산에 거슬리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굳이 케일의 패를 페널티를 쥐고도 선택할 필요성은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알베르는 인간적으로 자신의 아끼는 이를 과로시키고 싶어 할 사람일 리가 없었다.
케일이 얼마나 미련한 자인지 굳이 입을 통해 말하는 것은 입이 아팠다.
케일은 고집이 세다.
마음이 약하고, 감정적이다.
무심하게 그를 드러낼 뿐이기에 쉬이 알아채기 힘 들 뿐이다. 그는 미련하고, 고집쟁이이며 감상적이다.
알베르는 케일 헤니투스라는 존재를, 여태까지의 알베르가 알 수 없는 그가 어떤 자이든 간에 제 눈앞에 보이는 케일 헤니투스는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아마 케일 헤니투스라는 책이 가죽으로 표지가 되고, 양피지로 엮인 한 권의 책이라면 알베르는 왠지 그것을 전부 끝까지 아직 다 읽지는 못하더라도 분명히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빨갛게 붉을 것 같을 모양새를 하고 수없이 검게 가라앉아 있는 그 책을, 의외로 서툴고도 솔직한 묘사 하나하나를. 그렇다고 여겼기에 알베르는 케일을 신뢰하고 있었다.
아직 알베르에게 주어진 시간은 수없이 길다. 읽지 못한 부분이 아직 지나치게 두껍고 읽어도 아직 이해 못 할 부분과 묘사들이 알베르의 손끝에서 쓸렸다. 그러나 초조해 해서는 안 된다. 우습게도 그 책은 읽는 독자를 그리 배려하지 않는 묘사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베르는 초조해 해서는 안 된다. 알베르는 결국 알 수 있을 테니까.
알베르가 살아가는 수없이 긴 시간 속에서 그를 읽어내러 갈 그 짧은 시간을 재자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니다. 책의 변덕을 조금이라도 기다려 줄 시간 정도를 투자하는 것은 그리 긴 인내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 정도는 할 만하다. 그 정도면 그럴 가치가 있다.
케일 헤니투스를 이해한다.
책을 덮는 순간에서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제 손에 감겨오는 활자들은 음미할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그것은 조각조각 나누어진 케일 헤니투스의 잔재였으니까, 흔적을 남기기 싫어하는 그가 유일하게 흩뿌리고 간 흔적들이었으니까.
알베르가 사랑하는 그는 책을 좋아하고, 그중에서도 이 세계라 칭할 수 있는 작품을 즐긴다.
고양이를 싫어한다고 말하곤 하면서도 고양이를 쓰다듬는 손은 따뜻하다.
의외로 식탐이 있다. 허겁지겁 먹는 습관이 요새 들어서야 조금 가라앉았다. 속에 좋지 않다고 은연결에 잔소리같이 말했던 것이 그의 흔적에 의식적으로 닿았던 것 같다.
무심한 듯 말하는 말투에는 느릿한 배려가 깔렸으며, 의외로 마주하는 자들에게 쉬이 감응하곤 한다.
한없이 여리기에 한없이 다정한 그를,
알베르는 그 책이, 그 활자가.
그자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감상적인가?
하, 내가?
감상적이라고 놀리는 투로 이야기하면서도 사실 그 결말을 진심으로 갈망하고 있는 것은 그 암갈색 눈이면서.
종이가 바람에 날았다. 케일이 고대의 힘까지 써 종이를 쥐려 애쓰는 것이다. 알베르의 손에 들린 것들이 허무하게 하늘을 날았다. 마치 그것은 알베르 뒤 너른 하늘을 장식하듯 호선을 그리며 상승곡선의 춤을 추었다. 나풀나풀 춤을 추어 도달한 곳은 케일의 성격 나쁘다고 하면 성격 나쁜, 사악한 미소가 잔재하는 얼굴 아래.
그의 손아귀 안이었다.
또 봐, 별것도 아닌 일 가지고 가장 나쁜 꿍꿍이를 벌이고 성공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그렇게 좋나?"
누가 보면 미련할 정도로 지나치게 감상적인 자. 의외로 사람과 사람의 인연에 수없이 흔들리는 사람. 마치 지금, 그를 감싸는 바람마냥 이리저리. 흘끔, 이른 시간에 눈으로 훑은 모양인지 서류 위로 암갈색 눈이 고개를 들고 끔뻑거렸다.
"요사이 일을 시키려는 기색이 전혀 없던 건 당신 아니었습니까?"
"쉬라니까."
"재상이네 뭐네 한 사람이 누군데. 오히려 일을 안 시키니까 나중에 혼자 과로해서 쓰러져서 배로 들어오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서는. 아니, 근데 나한테 이런 일도 상의 안 해요?"
진심으로 서운한 투로 퉁명스럽게 묻는 것에 알베르는 진심으로 곤란한 듯 얼굴을 쓸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케일을 올려다봤다. 허탈한 웃음이 입안에서 새듯이 흘러나왔다. 일 시키지 말라고 할 때는 언제고. 저 스스로 사지에 기어들어 가려는 꼴이 어찌 그리 미련하기 짝이 없는지.
"너 일하기 싫다며, 내가 너 쉬게 하고 싶다는 거 정말 농담으로 들은 거 아니겠지? 난 너한테 일을 줄 생각이 없어. 케일. 과로해서 드러눕더라도 너에게 따로 부탁할 생각도 없고. 그런 상황이 오면 이모를 불렀으면 불렀지. 아마 그게 너는 아닐 거야
" .... "
"서운한가? 네 능력을 중히 여기지 않아서 그러는게 아닌 걸 너도 알고 있잖아. 자넬 아직도 신뢰해. 왕세자 알베르로든, 그저 인간 알베르로든. 그것과 마음이 가는 것은 별개야. 케일."
"제가 빠지는 것이 도움되는 시국이기도 하고요."
"뭐, 그것도 없다고는 못하지."
케일의 눈꺼풀이 느리게 깜빡였다. 알베르는 그 눈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내려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고작 이 정도에 서운해할 사람이 아닌 것은 알베르는 알고 있었다. 그럼 어째서? 손에 얼얼함이 느리게 배였다. 초조해 하고 있는 것이다.
"왜?
" .. .. 잖아요."
"뭐?"
"제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면."
손을 파고들던 손가락이 느리게 힘을 잃어 펴졌다. 그러나 쥐지 않았어도 얼얼함이 남아있었다.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비단 손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 왜 그런 말을 해?"
가슴팍에도 느리게 퍼지고 있음을 알베르는 알았다.
무엇이라도 붙잡아야 할 것만 같아 허공을 쥐는 텅 빈 손안을 알베르는 서류를 쥔 케일의 손으로 채웠다. 겹치는 손가락이 마냥 차 그 사이로 파고들어 두터운 엄지로 케일의 손등을 쓸었다. 이런다고 간격을 좁힐 수는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았다. 그저 몸뚱이를 쥐려 애쓰는 것은 헛된 일일 따름이다. 아니, 사실 알베르 크로스만은 그 누구보다 더 또렷이 알고 있었다. 자신만 할지라도 그 속 안을 파고들기 힘든 단단하고 휘황찬란한 겉껍질을 그가 살아온 이래 오랜 시간 뒤집어쓴 채로 모두의 앞에 나서곤 하지 않았던가.
수없는 사람의 손을 쥐어도 그 체온은 항상 하얀 장갑 위에 맴돌았고, 촉감 또한 금빛 천 조각에 가려 닿지 않았다. 어쩌면 알베르는 케일 헤니투스라는 변수가 그의 삶에, 아직도 집필 중인 그의 저서 한 구간에 나타나 주지 않았더라면 계속 그 겉껍질을 단단히 유지한 채로 책 마지막 장을 덮었을지도 몰랐다. 로운의 성군이라는 호칭, 아니면 오히려 제국이라는 손아귀에 집어삼켜 진 로운의 비운의 왕으로. 어느 것이어도 짤막하게 한 문장으로 압축되어 그 뒤를 드문드문 가늠할 만한 그런 인생으로 남지 않았을까. 그의 속껍질은 타인이 보는 그의 책에서는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에는 엘프인지라 인간과 같은 시간선을 보내지는 않을 테니 어쩌면 한 2-3백 년 후의 어느 날에는 이름도 모르는 어느 피부가 옅은 다크엘프가 어딘가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러나 그 다크엘프는 알베르 크로스만이라는 짧은 단편의 주인공은 아니다.
주인공은 언제나 빌어먹을 금발에, 푸른 눈의 왕자님이겠지.
알베르는 그 껍질을 싫어하진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만을 알베르 크로스만이라고 칭할 수 있을지는 우문이었다. 그 모습은, 그래. 거짓될 정도로 거창하진 않지만 그저 알베르의 한 귀퉁이의 조각일 뿐이다.
몸뚱이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모든 존재는 다양한 양상이 있고, 겉모습이란 너무 쉬이 변하는 것들이니까. 한 사람을 꼼꼼히 기록한 저서마저 어쩌면 전부 편향된 정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겨우 껍데기를 눈에 담고 품에 안으려 노력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제 눈앞의 암갈색의 사람은 금방이라도 언뜻 스쳐나간 바람만이 될 뿐 스러질 듯 불안한 것을.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빽빽한 문장들을 읽어내려도 채워지지 않는 행간의 거리감. 아직 알베르는 알 수 없는 의미심장한 단어와 단어 사이의 숨겨둔 진짜 케일 헤니투스라는 존재의 파편. 단지 눈에 닿고 손에 닿는 것으로는 붙잡을 수 없는 암갈색 책의 진짜 화자.
너는 누구지?
그러나 아무런 대답 없이 내려다보는 그 하얀 얼굴에 알베르는 조급한 질문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미녀와 야수, 기억 나나?"
미심쩍은 눈매. 경계하는 눈.
"제가 폐하가 저하이던 시절에 들려드렸던 이야기 말입니까?"
"그래, 그거. 꽤 흥미로운 이야기였지."
"그걸 지금까지 기억하고 계실 줄은 몰랏는데요."
"꽤 색다른 이야기라서 기억하고 있어."
"색다르다니.. 진부하기 짝이 없던 이야기 아니었습니까?"
"난 알다시피 진부한 결말을 좋아하는 감상적인 사람이잖아?"
화려하게 금박으로 장식된 집무실의 의자가 바닥을 끄는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났다. 당장의 편함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아무래도 앉은 사람의 지위를 나타내듯 지나치게 세심한 문양의 금제 장식은 오래 앉기에는 꽤 불편해 보였는지 온종일 자리에 앉아있던 황제는 목을 돌리고 어깨를 푸는 듯 움직였지만 여전히 손을 놓지는 않았다. 테이블 사이 기울인 몸이 여전히 쥔 손을 놓지 않고 붉은 머리 전 사령관의 이마에 아프지 않게 닿았다. 눈을 내리깔자 마찬가지로 눈을 가늘게 뜨고 알베르가 일어난 대로 시야를 올린 암갈색 눈이 마주했다. 속눈썹이 촘촘하고 길게 박힌 짙은 갈색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나는 그 괴물이 나를 닮았다고 생각했어."
툭,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 손에서 멀어져 부드럽게 허공을 맴돌던 서류 종이가 돌아 바닥에 닿았다. 이미 집무실 내에는 서류 더미들로 엉망이었으니 그 한 장 떨어졌다 해서 위화감이 들 정도로 거슬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괴물이 되었기에 사람과 진정으로 소통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꼭 어디의 누군가를 닮았지."
알베르는 경쾌하게 발걸음을 서류가 쌓인 테이블에서 바깥으로 빙 돌아 옮기기 시작했다. 여전히 손은 이어진 채로 알베르만이 둥글게 멀어지고선 다시 가까워져 갔다. 발에 채이는 서류 더미가 산을 이뤘지만 알베르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 저녁도 곱게 자진 못할 것이다. 평화가 도래했으니 이 정도의 대가는 권위자로서 당연한 부담이다. 그러니, 잠시간 몸에 쉬는 시간을 주어도 괜찮겠지.
"저주라고 생각 안 하지 않습니까."
"나름 크로스만 가의 저주 아니겠나? 금발에 푸른 눈, 태양신에 기댄 왕권 유지. 지긋지긋하지."
"그래도 그 모습을 싫어하지 않았잖아요."
갈색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어두운 피부를 짙게 물들인 얼굴이 미려하게 활짝 웃었다.
"결국 알베르 크로스만 또한 알베르로 존재한 모습이었으니까."
집무실 창가에 적당히 데워진 햇볕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어왔다. 사실, 이미 커튼은 제구실을 못 한 채로 들어오는 빛을 그저 공간에 내어주고 있었다. 이리저리 넓게 퍼져있는 서류들은 공간을 차지했고 그로 인해 움직일 자리는 몹시도 비좁았으나 조심해서 발을 내디디면 한 바퀴 돌 정도는 공간이 났다. 마치 무대를 내리쬐는 조명처럼 햇빛은 집무실에 멈춰있었다. 그 빛 아래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무대 위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그 공간은 무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좁았지만 두 사람에게는 그 작은 공간으로도 충분했다. 발만 디딜 수 있으면 그만이지 않아? 어차피 우리는 여태껏 온전한 땅이 아닌 전쟁터를 밟고 다닌 파트넌데. 실없는 농에 어이가 없다는 듯 작게 웃는 소리가 퍼졌다.
느리게 구둣발이 뒤로 물러섰다. 그 사이를 다른 구둣발이 채우고 또다시 뒤로 물러서고, 다시금 채우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고, 잠식당해가며 두 사람은 그 좁은 공간을 몇 번이고, 또 몇 번이고 돌았다. 춤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좁은 공간이었기에 어색하고 뻣뻣하기 짝이 없었고, 움직임도 서류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몸을 웅크리는 모양새였다. 쿵. 아무리 조심한다고 하더라도 둔탁한 소리가 안 날 수는 없는지 쓰읍. 하고 고통을 목 안쪽으로 삼키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그래도 그 공간을 도는 이상한 행위는, 다시 말해서
춤은 멈추지 않았다.
춤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괴물인 상태여도 좋아요."
아주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뱉은 말은 달큰했다.
펄럭이는 커튼 사이 흔들리는 조명에 흐르듯이 서류 더미 사이를 꽉 채운 장미 향이 공간을 두 사람과 함께 맴돌았다. 몇 송이 꺾어 오라고 한 보람이 있군. 집무실 한편에 정원사의 손길이 닿은 장미 화병이 떨어지지 않도록 테이블 위 안전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도는 내내 장미의 향과 색과 붉은 머리칼이 흩날려 어지러웠다. 마치 그 머리칼에서 장미 향이 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래도 어린 날의 나는,"
알베르는 그 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넘겨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손에 장미향기가 베이진 않을까. 장갑을 벗었으니 그 촉감이 여실히 손에 닿을 것이다. 놓아주고 싶지 않은 하얀 손의 체온이 제 손바닥에 닿는 것처럼.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나를 알아주길 바랐지."
책의 그림자 진 부분. 책 속에 머무르는 등장인물들은 알 수 없는 정보들. 어쩌면 그 책을 지나쳐간 수없이 많은 사람이 펼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마지막 장의 알베르 크로스만. 그의 비밀, 밝혀지는 그의 정체. 그만의 이야기. 책 속의 야수와 그의 식기들처럼 배척당하고 잊혀 가는 그와 같은 종족의 사람들.
어린 날의 알베르는 타샤가 이야기해주는 짧고 간결한 이야기 속 자신의 삶을 향해 나아가는 수많은 사람을, 주인공들을 작은 손을 모아쥐며 아무도 모르는 왕궁 서재 아래서 기도해 본 적이 있다. 행복하기를. 꼭 꿈을 이뤄 나아갈 수 있기를.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할 수 있기를.
나 또한 그럴 수 있도록.
알베르는 동화의 주인공이 되길 바랐다.
보다 솔직한 모습으로, 크로스만의 지독한 저주를 넘어서 그 머리칼과 눈은 광채를 잃어도 여전히 밤하늘 아래 빛나는 별로.
그렇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미인이라도 찾아서 해피 엔딩이라도 이룩할 생각이십니까."
"아, 그거 말이야. 너무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진정한 사랑을 논하는 자리에 외모 칭찬이라니 부자연스럽잖아.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을 하고 알베르는 빠르게 몸을 한 바퀴 돌렸다. 어엇, 하고 당황한 모양새로 미끄러지듯 품에 얼굴을 묻은 채로 안긴 케일이 눈매를 찌푸리며 알베르를 매섭게 올려다보았다. 흐흐흐, 만족스러운 웃음이 잇새로 흘렀다. 케일의 머리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다. 아마 얼굴을 부비고 있는 것이리라.
"제가 아름답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죠? 이 얼굴 꽤 예쁜데요."
"객관적으로 보면 미려한 얼굴이지. 그런데 내가 고작 너를 용모의 이유로 너를 중히 여기는 것은 아니잖아?"
"그럼요. 능력도 좋지 않나요. 요새는 무슨 이유이신지 몰라도 이 서류 더미를 독차지하고 계시지만."
"케일."
알베르는 한쪽 손을 오랜 기간 뜸을 들이다 놓아주고는 그 팔로 허리를 휘감고는 자신의 허리는 굽혀 올려다본 눈으로 눈을 맞추었다.
"나는 네가 나의 이해자이기에 너를 소중히 여기는 거야."
알베르는 알베르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알베르 크로스만이라는 극히 일부분이 아닌 알베르를, 알베르를 파고들어 마주할 사람.
묘하게 느릿느릿한 어투가 말을 이었다.
"내가 벨이 되길 바래요?"
"흠, 싫진 않지. 그 동화가 표방하는 주제가 종족과 겉모습을 뛰어넘은 진정한 사랑, 뭐 이런 거 아닌가?"
"폐하가 주장하는 저주받은 금발의 괴물을 벗어나서 말이죠."
"그래."
"그럼 지금 제 머리칼 위에서 흔들리는 어두운 머리칼은 해피엔딩의 증표라도 되는 겁니까?"
모두가 기피하는, 모두가 선호하는.
"해피엔딩이라기엔 앞으로 살아갈 일이 바쁘군. 우선 지금 바닥에 들어찬 수없는 서류 더미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고, 근 5년간은 뒤처리로만 골머리를 앓아야겠지. 처음으로 올라선 권력이니 수없이 삐걱거릴 테고. 네 향후 거처와 앞으로의 우리에 대해 수없이 고민해야겠지."
알베르 크로스만이라는 야수의 외골격을 넘어서.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단순한 등장인물로는 부족한 감이 있다. 알베르는 제 눈앞에 있는 케일 헤니투스를 만나온 순간과 순간 사이에 그를 알베르의 세상에 등장한 인물로 본 적은 없었다. 그것은 좀 더 집요한 동질감이었다. 세상에서 물러나 있는 듯한 동떨어진 감각. 인물과 인물 사이의 괴리감.
케일 헤니투스의 책 아래가 그와 닮았다고 생각한 것은 여럿이지만 그 모든 내용이 통째로 붙여놓은 듯이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알베르 크로스만과 전혀 다른 인간상이다. 하지만 타인에게 느껴지기에는 너무나도 기묘한 동질감이 존재한다. 단순한 나와 다른 타인, 그 이상으로 더 파고들어 서로를 이해하는 것.
알베르는 케일이 껍질을 벗어던진 그와 책의 전개상 영원토록 함께하는 상대가 되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바라왔던 결말이다. 금색의 등껍질을 벗어던진 이래로 알베르는 그 결말에 망설임이 없었다.
케일은 완벽하진 않다는 말이 그리 나쁘게 들리지는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정적이 메운 공간을 작은 허밍소리가 파고들었다. 느리지만 계속 움직이고 있는 몸이 발을 조심히 놀려 다시 한 번 돌았다. 매끄러운 촉감의 바닥이 바닥을 짚는 발을 미끄러트려 몸을 부드럽게 공전하게 만들었다. 둘 다 그럴듯한 복장이 아닌 간편한 프릴이 달린 셔츠에 달라붙는 바지 정도였으나 그 순간은 여느 연회장보다 화려하다고 묘사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 창문에 바람이 심하게 일지도 않았는데 서류가 허공을 날았다. 마치 공간을 표시하기라도 하는 듯 둥그런 큰 원을 기반으로 아래로, 위로 마치 새의 날갯짓처럼 주위를 맴돌았다. 알베르는 누구의 소행인지 모를 리가 없었으나 모른 척하고 마주 눈을 감았다. 귓가에 흐르는 허밍 소리에 취해있었으므로 그런 것이라 생각하며.
알베르는 영 익숙지 못한 멜로디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듣기 싫지는 않았다. 간간히 가사가 가미된 그 음은 지금의 이 엉성한 춤사위와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렸다.
그렇지만,
넌 나의 인생에서 고작 등장인물로만 묘사되기에는 아깝지 않은가?
케일 헤니투스를 고작 그 정도의 가치로 평가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앞으로의 나의 인생에 있어서.
그에게 있어서 무례를 범하는 것은 아닌가.
알베르는 알베르를 읽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알베르는 독자가 필요했다.
▼
눈을 뜬 건가?
눈을 떠보니 특이한 구조의 공간이었다. 애초에 눈을 뜬 건지도 확실치 않다. 몸이 상당히 흐릿했으니. 아니, 제대로 된 몸이 없을 정도였다. 마치 안개처럼 공간에 머물 뿐 불안하게 흔들거렸다. 시야만은 분명했으니 그거에 다행이라고 만져지지 않는 가슴을 쓸어내려야 하는 걸까. 그는 자기 뜻대로 잘 움직여지지 않는 형체를 끌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아주 좁은 방이었다. 좁고, 어두운 공간이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벽에 그 벽을 전부 잠식할 정도로 부피가 큰 화면이 틀어져 있었다. 마치 마법 영상구의 부피를 늘리고 싶을 정도로 최대한 늘려도 저 정도는 무리가 있을 정도로. 온통 하얀 배경 위에 티끌처럼 지직거리는 검은 것들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아직 무언가를 전송하지 않은 건지, 그 하얀 배경만이 계속 벽 위에 흔들거렸다. 두두두두, 작지만 분명히 무언가 돌아가는 소리가 그의 뒤편에서 울렸다. 아마 영상구가 있을 법한 곳이었다.
그가 화면에서 눈을 떼자, 화면 말고 다른 무언가가 그제야 눈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공간의 중앙을 차지한 의자가 있었다. 공간이 어두웠기에 자세한 색감과 모양은 파악이 어려웠으나 화면에서 내리쬐는 빛으로 인해 드문드문 적당한 형태는 눈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의자는 어둡게 붉은 기가 도는 듯했다. 부피감이 있어 보이는 듯하니 푹신하다고 묘사할 만했다. 빛이 한 번 더 그 의자를 물들였다.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
이 공간엔 그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얼굴은 빛이 일구어낸 그림자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가늠이 어려운 탓에 다리를 움직여 보려 했으나 몸이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 서 있는데도 짓눌린 듯 몸이 굳었다. 의자에 앉은 자는 그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 같이 뒤를 돌아볼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그 사람이 어떤 자인지 확인하려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숙이려 노력하는 것을 포기했다. 민망한지 헛기침이 나왔지만 그마저도 소리조차 나지 않아 제대로 그랬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자유로워지지 않은 눈으로 마주할 수 있는 것은 영상구가 빛을 발해 자리를 차지한 허연 화면뿐이었다. 화면은 변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그것을 눈이 시리게 보고 있는 것은 그에게 있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일 뿐이었다. 그와 달리 자리에 앉은 자는 어떠한 미동도 없었다. 지루해하는 투도, 관심을 돌리는 모습도 없이 계속 화면만을, 뚫어져라.
몇 번을 깜빡인지 모르는 것을 세기를 포기했을 지경에 이르자 그제야 무언가 하얀 노이즈가 색을 담기 시작했다. 무언가 싶어 마주한 것은 눈을 의심하게 하였다. 삽화? 삽화가 마치 사람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법인가? 그런 식으로 보고하는 예도 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화려한 연회장이었다. 무대장을 꾸미는 장식과 주축을 이루는 계단이 세심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그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노란 빛이 하나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수없는 프릴으로 이루어진 샛노란 드레스였다. 그 빛을 두르고 내려온 것은 어떤 사람이었다. 갈색의 머리칼이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미인을 선호하거나 하는 편은 아니기에 큰 감흥은 없었지만 통상적인 미인이라는 판단이었다.
그 노란 꽃과 마주하는 것은 푸른 천을 두른 자였다.
그는 언뜻언뜻 지나쳐가는 기억 속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괴물과 미녀였던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괴물이라기에는 수인족과 엇비슷하게 닮아있는 상태였기에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가 아닐까, 라는 생각 또한 머리에 흘렀다. 인간의 시선이기에 그리 판단하는 것인가. 들리지 않는 헛웃음이 흘렀다.
그에게 있어서 괴물의 형태란 인간의 형태였음을, 그는 어렴풋이 기억해냈다.
어쩌면 괴물은 오히려 인간의 기준에선 지나치게 아름다운 형태를 띌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끔찍하거나 징그럽거나, 무섭거나 타인에게 겁을 줄 필요도 없는 것이다. 괴물이란 형태는.
그저 이질적인 존재이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입과 눈이 달려 농담 따먹기를 하는 기이한 촛대와 시계. 이질적인 조합의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 지나치게 텅 빈 무도회장에 함께하는 두 사람을 그저 축복하는 찻잔들. 환상에 가깝도록 지나치게 아름다운 공간과 부드럽게 이어지는 장면, 장면들. 그리고 그림 안의 공간과 지금의 이 좁은 공간을 꽉 채우는 미려한 목소리.
그러나 그는
갑자기 그림 속의 두 존재가 그저 평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두 사람은 너무나도 대놓고 이질적인 조합인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만져지지 않는 가슴이 간질거렸다. 그저 서로에게 서툰 두 젊은 남녀가 화면 아래서 수없이 공간을 돌았다. 멀어졌다 가슴을 맞대고 눈을 가까이 맞췄다. 손을 잡고 끌어안았다. 서툴고 조금은 어색한 것이 두 존재 간의 관계는 그리 완벽하진 않았다. 순간순간의 결심을 세는 순간과 놀라는 얼굴이 삽화 안에 들어있었다. 손을 잡는 행동 안에 떨림이 묻어있었다.
그게 너무나도 평범했다.
그것이 너무 이질적이지 않아, 더욱 이질적이었다.
그들이 평범하게 서로와 교류하고 있었다.
그가 계속 수없이 책 안에서 마주해온 사랑은 어떤 면에서는 극단적이었다.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야 했다. 같은 종족이 아니기에 서로를 향한 감정은 더욱 절정을 향해 달렸다. 서로를 위한, 서로를 향한 행복한 미래를 무조건적으로 그려야 했고 그 끝은 영원해야만 했다. 우리는 언제나 행복해야 했다. 그것이 동화 속의 영원한 사랑이었다.
소위 해피엔딩이라고 말하는 끝의 마지막에는 언제나 행복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행복한 삶만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서 멈춰버린 것은 아닐까.
영원하도록.
영원히 나아가지 않도록.
주인공을, 등장인물을 자처하는 우리는 어떻게 될까?
나는, 우리는. 우리의 서사는 해피엔딩을 위해서 멈춰버리는 걸까.
그는 화면 안의 세상으로 멀어져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느라 의자에 앉은 자가 고개를 돌리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노래는 끝나는 기미가 보이고 그들을 지켜보는 관객은 점점 둘을 그대로 두고 떠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더 깊은 밤이 내려앉는 삽화 사이를 그림자가 뒤틀어 갈랐다. 앉은 존재가 일어선 것이다. 역광이라 여전히 자세한 얼굴은 볼 수 없었으나 그 그림자가 그리는 익숙한 형체에 얼어붙고 말았다.
내리깔린 어둠 아래 반짝이는 푸른 눈.
노년을 흉내 낸 푸른 눈의 알베르 크로스만이 거기에 있었다.
어쩌면 알베르 크로스만의 어떤 엔딩이 될지도 몰랐던 그 모습이.
황혼이 다가오는 그 얼굴 아래 수없이 숨겨진 이야기의 파편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알베르 크로스만으로 살기 위해 수없이 깎아내리고 잊히는 결말, 그런 서사를 맞이한 알베르의 밝게 빛나는 머리가 화면 앞에서 밀밭처럼 흔들렸다. 드문드문 하얗게 센 머리칼이 섞인 것으로 보아 세심하게 인간의 나이 듦을 흉내 낸 것으로 보였다.
그 눈이 마치 늙음을 연기하듯 느리게 감기고 뜨였다. 연기할 필요가 없는데도, 습관처럼 남은 듯했다. 그는 순간 저주라고 할 수 있는 그 모습을 마주하자 소름이 돋아 팔을 더듬었다. 분명한 이물감이 만져졌다. 얼굴을 급하게 더듬자 피부의 감각이 손 아래에서 날뛰었다. 몸이 분명히 움직이는 듯했다. 형체가 이곳에 분명히 자리 잡은 것이다.
그러나 썩 좋은 감각은 아니었다.
내려다본 팔뚝은 검었다. 분명 얼굴도 어두운 색감일 것이다. 그가 오랫동안 소원해 온, 지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가 오랫동안 소원해 온, 알베르 크로스만이 소원해 온 저주를 넘어선 밤하늘 같은 모습일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알베르 크로스만은 등장인물이었다.
주인공이었으나, 여전히 아직 책 안에 있었다.
형체가 남은 것은 그 탓이었다. 알베르는 저주로 뒤섞인 알베르 크로스만의 슬픈 눈을 마주했다. 더듬대던 손이 뚝 끊기고 그는 멍하니 그의 또 다른 결말을 마주했다. 그를 나는 안타깝게 여길 수 있는가? 자신 있게 마주할 수 있는가? 결국 달라진 게 없이 여전히 그 안에 남아있는데도.
그의 입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 벌어졌다.
알베르는 그를 듣기 위해 귀를 바짝 세웠다. 온몸이 긴장한 듯 뻣뻣하게 꿈틀댔다.
그러나 그 말은 그의 입이 아닌 그림자로 갈라진 화면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언제인지 몰라도 낮으로 시간대가 변한 배경, 여전히 흘러나오지만 허밍으로 바뀐 음색. 익숙한 목소리. 지나치게 익숙한 좁은 공간과 종잇더미 사이의 두 사람. 알베르가 분명히 기억하는 언젠가의 순간이었다.
그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화면 속 케일 헤니투스가 화면을 마주하는 알베르에게 말을 걸었다.
아직 지지 않은 붉은 머리를 하고서는.
"당신, 나를 제대로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 순간, 그 모든 것을 마주한 눈이 감겼다.
이상하게도 꿈에서 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알베르는 스스로 차려온 샐러드를 입 안으로 씹어 넘기면서 아직 꿈에서 덜 깬 건가 생각했다. 으적으적 씹어 삼킨 야채가 뿌릴만한 드레싱을 찾지 못해 입안을 쓰게 만들었다. 내오는 것에 익숙해지면 이런 문제가 생긴다. 다행히도 빈 접시를 내놓을 만한 곳을 찾았기에 빈 접시를 테이블에 덩그러니 놔야 하는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다시 집무실에 걸어오는 순간이 굉장히 고요했기에 알베르는 돌아오는 길에 발소리만이 외롭지 않도록 수없이 헛기침했다.
새소리마저 안 들리는 건 정말 큰일에 가깝군.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 계속 멈추어 있는 그림자와 아침에 가까운 시간에 떠 있는 해를 바라보며 알베르는 얼굴을 쓸었다. 이 정도의 커다란 고난을 그가 눈치채지 못 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계속 곱씹어봐도 의미를 알 수 없는 꿈만이 마음에 걸릴 뿐 어떠한 물리적인 이유를 찾을 수는 없었다. 여태까지 이런 상황이 알베르 본인에게 펼쳐지기 전까지 긴장을 늦춘 적이 있었나? 특별히 그런 적은 없던 것 같다.
알베르는 이것이 어떤 마법 실드에 가까운 것인지부터 조사했다. 마법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닌가 싶었다. 알베르에게 따로 해를 가하는 것도 아니었고, 최면에 걸린 것도 아닌 듯했다. 귀족들이 범인인가 했는데 그런 것도 아닌가. 이 세계에 가둬둔 것인가 싶다가도 일상을 그대로 굳혀놓은 듯 아침 준비를 하고 분주하게 움직이다 그대로 멈춰선 자들을 그대로 마주하고 있으면 특별히 다른 세계도 아닌 것 같이 느껴졌다.
특별하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들이 더는 움직이지 않는 것을 제외하면.
마치 시간이 멈춰선 듯이 순간을 그리듯 그렇게 숨도 쉬지 않고 멈춰있는 장면 사이에 알베르 크로스만, 그만 살아 움직이듯이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황당해 그저 헛웃음이 나오는 상황이었으나, 조금은 소름 끼치는 일이기도 했다.
알베르는 지나온 모든 자의 얼굴 아래 손을 대 숨을 쉬는지 확인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전부 숨을 쉬지 않았다. 죽은 상태라 보기는 어려웠으나 시간을 꽤 보냈다고 생각한 알베르의 눈에는 그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어 보였다. 아니, 죽음보다는.
그들의 세상이 영원히 멎어버린 것 같은 광경이었다.
알베르는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편한 옷을 걸쳤다. 황제가 되고서는 단 한 번도 꺼내본 적 없는 겉옷이었다. 왕자 때나 가끔 둘렀지, 왕세자가 되고 나서는 정글에 들를 때를 제외하고는 찾아본 적 없는 옷가지. 먼지를 대충 털자 떨어져 나가긴 했다. 먼지마저 떨어지지 않는 건 아닐까 했으니 나름 다행인 일이었다.
두르고 나간 로운의 거리도 마치 모두 책을 덮어버린 것 마냥 그대로 멈춰 서있었다. 거리의 중앙에 서 있는 분수대도 그대로 숨을 멈춘 채 허공에 물을 띄웠다. 이 거리에는 궁중보다 오갔던 사람이 더 많았으나 멈추어버린 사람의 수 만큼 알베르는 위화감을 느껴야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전부 서서 죽은 시체에 다를 바 없었으니. 걷는 발걸음마다 시체의 산이었다.
알베르는 시간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 끝나지 않는 아침을 걸어 다녔다. 원체 체력이 좋은데도 불구하고 다리가 지끈거렸다. 모든 걸 마주하려면 이동수단도 더는 없었으니 제 발로 걸어가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이미 이 상황이 모든 세상을 집어삼키고 있다는 것을 알베르는 모르지 않았으나 그의 사람들은 적어도 눈으로 그들의 끝을 마주했다.
타샤를 마주한 순간은 꽤 피곤했다. 알베르는 얼굴을 쓸었다. 어차피 볼 사람도 없었으나 지독한 습관은 그를 절망하게 두지는 않았다. 그저 엄청나게 피곤할 뿐이었다. 머리가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었기에. 알베르는 이 꼴을 그저 가만히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죽음에 가까운 지금의 현 상황을 뒤집어 놓아야 했다.
알베르는 어떠한 모종의 이유로 이렇게 된 세상에 순응하고 가만히 둘 성격은 아니었다. 그게 어떠한 이유라고 해도 자신의 세상을 이대로 멈추게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어떤 그럴듯하거나 동정을 구할 이유여도 제 영역을 건드는 것은 아니 되었다. 그는 상황과 대립하기로 했다.
이기적인 선택이라도 상관없었다. 알베르는 당초 그런 인간이었으므로.
멈춘 세상, 동대륙까지는 어려웠으나 서대륙 정도는 대강 살펴본 알베르가 돌아온 곳은 로운이었다. 고요한 세상은 알베르를 엄청나게 피곤하게 만들었으므로 아직도 푹신하기 짝이 없는 침대에 제대로 행색도 갖춰 입지 않고 드러누워 수면을 취했다. 창을 커튼으로 전부 치니 그럭저럭 잠들 수 있는 느낌이 났다. 창문 밖에는 아직도 빌어먹을 장미가 피어 있었다. 날짜가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꿈도 전혀 꾸지 않고 자고 일어난 몸은 뻐근했다. 온몸은 고난을 이겨낸 후유증으로 찌뿌둥했다. 평소 같은 이부자리에서 눕고 일어나도 여전히 날은 밝았다. 장미는 피어있었다. 심지어 알베르 취향대로 내일을 위해 정리해 둔 서류 배치마저 같았다. 아직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지친 것은 아니었으나 스트레스가 쌓인 것은 맞았다. 알베르는 목 아래로 끄응, 짜증을 내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사실 행해야 할 행선지가 하나 남아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미심쩍은 곳이 하나 남아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알베르는 굳이 그곳을 찾지 않고 미친 듯이 다른 곳을 향해 돌고 돌아 멍청이처럼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다시 여기로 돌아왔다. 이유 정도는 알베르도 모른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쥐고 있었기에 작게 아, 단말마를 내면서 손을 풀었다. 손이 얼얼했다. 빌어 처먹게도 그 손이 벌벌 떨렸다.
아, 초조했나.
다시 그 손을 쥐었다. 그리고 힘없이 풀었다.
나는 여전히 답을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나.
알베르가 모르는 행간, 알베르가 원래는 알아차릴 수 없는 세계.
책을 읽는 것으로는, 기다리고 그 속내를 읽는 것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케일 헤니투스.
알베르는 불안했다. 만약 케일이 이 세계에 깨어있을 경우 최악의 상황을 상정한다 하고 케일과 대립해야 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이 세상은 정말로 알베르 혼자만이 버텨내야 할 정적이었다. 알베르는 차라리 전자를 마주하는 편이 그나마 덜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순간에 잠든 케일을 마주할 때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좀 없었으니까.
알베르의 손은 이미 쥔 손가락을 따라 붉은 멍이 들어있었다. 수없이 망설이고, 초조해 한 결과였다. 힘을 너무 주었는지 손이 아리다 못해 더는 감각이 없는 듯 따끔거렸다.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무엇을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커튼 사이 붉은 장미 냄새가 코를 찔러 알베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걷는 발걸음이 기대에 젖어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무겁기에 질척였다. 로운과 동북부는 그렇게 먼 길도 아니었으나 여태까지의 걸어온 길 중에서 가장 버거운 길이었다. 무엇에 젖어 이 얼마 되지도 않는 길에 진척이 있는 것일까. 휴식도 분명 취한 몸뚱이임에도 불구하고 숨이 차고 발이 느렸다. 자주 마차를 타고 발걸음을 한 곳인데도 발로 걷는 길은 낯설었다. 분명히 세상에는 시간만이 멈출 뿐 색이 전부 빠진 것도 아닐 터인데 세상이 무채색으로 보인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분명 푸르르고, 또 붉은데.
알베르는 손등으로 땀을 훔쳤다. 알베르의 시간만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으니 계속 내리쬐는 태양에 헐떡이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살아있다는 반증이었다. 코는 이미 수없이 붉게 펼쳐진 장미길을 따라 걷다 보니 뭉개져 장미 향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손등이 내려가 코를 매만졌다.
그렇지만 세상은 이미 알베르에게 있어 제대로 된 감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더는 푸르게 느껴지지 않았고 붉게 느껴지지 않았다. 들리는 것은 알베르의 발소리밖에 들리지 않아 둔해졌고 코는 지겹도록 장미 향을 맡았다. 지속되는 세상에 이미 온몸이 질려버린 것이다.
붉은 장미는 케일의 부탁이었지.
기둥이나, 조각 같은 눈으로 보이도록 남겨지는 흔적을 질색하는 케일이 유일하게 알베르에게 부탁한 그의 흔적이었다. 붉은 장미가 가득 핀 로운, 알베르는 무리해 인력을 동원해서라도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 장미는 그러므로 당연히 로운 전체 중 헤니투스 영지를 향해 더 화려하게 피어있었다. 코가 이미 상한지 오래여도 지겹도록 장미 향이 들이박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마치 길을 따라 핀 듯이 점점 늘어나는 그 꽃망울. 도착했을 적에는 그 장미가 헤니투스 영지 성을 삼킬 듯이 뒤덮고 있었다.
화단에 난 장미뿐만이 아닌 들장미 또한 엉겨 붙어 성을 덩굴로 휘감고 있었다.
마치 성을 장미가 게걸스럽게 집어삼킨 것 같았다.
알베르는 바닥을 밟기도 어려운 그곳을 조심히 넘고 짓밟으며 영지 성의 입구 가까이 발을 옮겼다. 문이 열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해 들장미 넝쿨을 밟고 창문을 살피려던 찰나 몸을 기댄 입구 문이 너무나도 쉬이 열리는 바람에 뒤로 그대로 넘어질 뻔했다. 문이 기묘하게 열려있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안은 더 악취에 가까운 장미 향이 났다. 알베르는 습관적으로 코를 막았다. 코가 아릴 정도였다.
그리고 순간, 알베르는 다시 손을 놓았다.
숨을 다시 들이쉬었다. 분명하게 느껴지는 장미의 향.
여태까지 알베르의 시간선은 지독하게도 무색무취의 세계였다.
그러나 유일하게 장미 향만은 숨을 쉬었다.
끼이익, 거대한 소리를 내며 문이 너무나도 헐겁게 열렸다.
걷는 걸음마다 생명이 파고들어 있어 알베르는 결국 장미 더미를 짓밟고 헤니투스 영지 성을 올라야 했다. 이질적인 장미만이 벽과 바닥을 파고들어 성을 짓눌렀다. 인간은 그대로였다. 식기와 컵, 분주한 채로 멈추어선 집사들. 영지를 책임지는 헤니투스 백작과 그 식솔들까지 완벽히 그 공간에 있었다. 장미에 감긴 채로.
흐드러지게 핀 장미 더미의 성.
장미 넝쿨은 온 구역을 꾸역꾸역 침범하며 위로, 계단 위로, 그의 방으로 이어져 있었다. 벽을 짚는 손안에 방금 피어난 붉은 장미가 공간을 씹어 삼켰다. 분명 자연에서 피어난 모양 그대로이거늘 지나치게 인위적인 느낌이 들어 알베르는 지나쳐 온 복도의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알베르가 지나친 복도 뒤로 꽃이 만개하고 만개해서, 걷는 내내 꽃잎이 눈앞을 흐리게 만들었다. 아마 뒤를 돌아보는 순간 다시는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멈추어도 마찬가지다. 나아가는 방법은 짓밟는 것뿐. 뭉개지 않으려 애를 쓰거나 소유하려 꺾거나 해선 안 되었다.
이 장미들은 어느 것 하나 탐스러운 것이 없다. 알베르 또한 결국 바스러질 환영 같은 것을 꺾어들 멍청이가 아니었다. 알베르는 발을 들일 때부터 머리에 또한 피는 위화감을 그저 개화하게 두었다. 만일 이곳이 장미로 물든 성이라면,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야수의 성이라면.
그가 이빨을 드러내고 욕심을 낼 장미는 따로 있지 않은가.
알베르는 장미 더미에서 숨을 쉬면서 잠시 눈을 붙였다 뗀 꿈을 어렴풋이 기억해 낼 것만 같았다.
그 꿈은 허황하거나, 말도 안 되는 전개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해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그저 뇌리 안에 남아있는 순간의 한 귀퉁이를 잠깐 틀어놓은 기분이었다. 어떤 순간이었나. 아른아른하는 그때는 아슬하게 머물기만 할 뿐 결국 닿지 못하고 그대로 바스러졌다.
그는 제 눈앞에 있는 갈빛을 내는 사내를 마주 보았다.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음에도 그는 여전하다. 끝이 없는 영원함에 머무는 것 같아 가끔은 정말로 영원하지는 않을까 하는 착각에 사로잡힌 것이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눈에 들어온 자신의 손은 세월을 그대로 마주한 듯 주름을 품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다. 마치 눈을 감고 뜨면 사라질 것 같은 환상 속에서, 새겨지는 그것만이 현재의 시간을 제대로 되씹어 삼킬 수 있게 했다.
그는 그 손을 부드러이 쥐었다 폈다. 그 동작도 약간은 느렸다. 익숙하게 어두운 피부의 커다란 손이 편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여주었다. 여전한 미소로, 붉은빛이 이제 약하게 도는 그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면서. 이마에 무언가가 닫았다. 분명 그 뒤에 안 봐도 뻔한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뚱한 표정으로 손을 빼려 들자 울상인 표정으로 더 힘주어 잡아왔다. 얼씨구, 이번에는 볼이었다.
남들이 보면 주책이라고 할 지도 모를 행위를 사내는 개의치 않고 반복했다. 이마와 볼, 손등. 그 다음에는 짧게 입술에 입술이 맞닿았다.
그는 그 손으로 평생 시간이 흐르지 않을 것만 같은 얼굴의 볼을 쓸어내렸다. 야속하지, 당신의 시간축과 나의 시간축이 지나치게 뒤틀어져 있다는 것은. 당신이 어떤 방식으로 영원을 갈망해도 결국 꽃이 지는 계절을 마주하게 될 테니까. 붉은 잎이 뒤틀어져 한 잎, 두 잎. 그리고 바스러져 가는 꽃의 마지막.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어내리기라도 한 듯 어두운 갈색의 눈이 슬프게 휘었다.
하나 마나 한 위로가 당신에게 필요할까. 이리도 강한 사람일 터인데. 그는 손을 휘저어 입가에 귀를 대도록 요청했다. 몸이 쉬이 고개를 숙여준다. 목은 오랫동안 쓰지 않아 분명 갈라져 있을 것이다. 괜찮아. 어차피 제대로 전하기만 하면 그만이지 않는가.
작게 속삭인 말은 귀를 흘러 그의 표정을 결국 일그러트리게 했다. 그러나 사내는 다시 손을 맞잡고 쓰게라도 웃어주었다. 답하기 싫으리라는 것은 그가 제일 잘 알았다. 굳이 물어본 이유는 나름의 확신이 필요해서였다. 당신을 믿고 있다는 확신.
"그럴 일은 드물 거로 생각하지만, 케일."
아, 그에게 있어서 저 미소는 그가 알베르를 다시금 사랑하게 하는 미소였다. 확신에 가득한 화려함, 금과 백으로 둘러싸고 치장하지 않아도 화려하고, 또 두르는 금 장신구의 무게 만큼이나 무거운 남자.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든 반드시 너를 찾으러 갈 거야."
만족스러운 대답에 케일이 미소 지었다.
*
알베르는 버석하게 마른 꽃잎을 밟으며 문을 열었다. 방 안의 장미는 하얀 침대보에 어지러이 핀 몇 송이를 제외하고는 전부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인위적인 느낌이라기보다는 세월이 아직 언저리에만 닿은 것 같았다. 천천히 침대보에 가까워지는 시간의 축. 천천히 다가오는 시듦이 인위적으로 머물러 있는 듯했다. 세상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장미꽃의 꽃잎도 더 이상은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인위적이라는 뜻은, 누군가가 그렇게 만들기 위해 수를 썼다는 뜻이다.
알배르는 꽤 오랫동안 그 방 구조를 지켜보았다. 한 걸음을 넘어서면 아직 생명이 숨 쉬는 장미밭이었다. 마치 손으로 시간축을 손톱을 세우고 손아귀에 힘을 주어 급하게 잡아 뜯은 듯한 흉터가 공간에 남아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급한 결말, 멈춘 세계. 내려오는 종이를 둘러싼 하드 커버.
장미꽃에 둘러싸여 잠이 든 인영이 꽃잎 사이로 아른아른 보였다. 하나의 인영 옆에 둥글게 눌어붙은 작은 인영 셋, 마치 평소의 어떤 나날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그 공간에서 햇볕 아래서 잠든 자들이 거기에 있었다.
알베르는 한 발자국 앞서 나갔다. 푹, 발에 닿아오는 살아있는 장미의 기묘한 감촉에 알베르는 무의식적으로 이미 멍든 손을 쥐었다가 다시 폈다.
영원한 해피엔딩의 흔적이 거기에 있었다.
걸어가는 발걸음에 붉은 것이 물들었다. 아마 짓밟힌 장미꽃잎일 것이다. 시간이 억지로 끊긴 그곳에서부터 그는 천천히 거슬러 올라갔다. 바스락, 뒤에서 그의 구두 밑창에서 나는 소리가 아닌 다른 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들렸지만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발아래를 내려보았다. 짓밟은 꽃잎이 구두에 질척하게 묻어나와 원체 그 색깔이 아닌데도 짓무른 붉은 빛이 감돌았다.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났다. 아직 알베르가 그에게 닿기 전, 걸어온 길을 점점 말라 비틀어져 목이 떨어진 장미로 물 들이고 있을 때쯤.
당신이,
낯선 목소리가 방에 울렸다. 커튼의 그림자진 사이로 침대에 누워 잠든 인영 대신 움직이는 무언가가 서 있었다. 체격과 목소리가 낯설었다. 은은하게 깔린 햇빛이 침대 끝자락에 닿아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서 있는 곳은 어둠이 깔린 부분이었기에 언뜻언뜻 어떤 인상인지조차 어둠에 뭉개져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를 닮은 자였다.
낯선 목소리지만 익숙한 투가 사근사근 귀에 닿았다.
올 줄 알았습니다.
그 감각이 그에게 있어 어찌 그리 익숙할지.
"케일?"
붉은 구두가 홀려 춤추듯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 사람은 그림자 아래에서 나와도 온몸이 전부 어두운 무채색으로 뒤덮인 것 같은 사람이었다. 어두운 머리칼에 키와 체격이 있었고 알베르가 여타 본 옷 중에서 가장 특이한 행색을 하고 있었다. 어떤 복장이라고 명확히 말을 할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알베르가 마주한 서대륙 가까이에서 즐겨 입는 것은 아닌 듯한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생각 외로 빠르고 가볍게 알베르의 주위에 다가섰다. 허공을 느리게 가르는 손, 그에 움찔 이느라 더 가까이 다가서려는 것을 구두는 잠시 멈추었다. 그 사람을 가까이 보는 것은 가능해졌으나 더 나아갈 수는 없었다. 가까이서 보니 가는 눈매 사이 그 눈은 갈빛이 돌았다.
그 암갈색 지평선 너머를, 그 눈은 마주하고 있었다.
"케일."
남자는 답을 하지 않았다.
"네가 언제고 그 눈으로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다고 언질해 준 적이 있었지."
남자는 다만 그의 발아래 붉은 물이 든 구두를 내려다 보았다. 표정 없는 그 눈에서도 알베르는 미묘하게 올라가는 즐거움을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그래, 기록하는 눈.
"그 눈은 네 거야."
그 눈은 '케일 헤니투스' 또한 지니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 올 줄 알았지? 아니, 너무 우스운 질문이겠군. 너한테도, 나한테도."
그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남자는 암갈색 눈을 마주하는 그 눈을 기억했다. 그의 기록을 뒤져 마주한 수없이 많은 쌍의 눈. 푸르고 어두컴컴한 하늘을 닮은 눈이 하는 양을 암갈색 지평선 또한 기억했다.
"널 읽어내려갔으니까."
'케일 헤니투스'의 기록을, 남자의 기록을.
그 눈은 행간을 꿰뚫고 읽어내려가는 눈이었다.
"그렇기에 결말에 도달한 거로군."
의도한 결말이었다.
'케일 헤니투스'는 생각했다. 그는 기록하는 자였다. 그의 눈 안에서 흘러내려 가는 모든 것들은 하나의 이야기로 남았다. 그것이 그 지평선 안에 담겨 거대한 바다가 되었다. 수없이 흘러들어왔기에 그 바다는 끊이지 않는 파도가 쳤다. 그렇지만 그것이 오랜 기간 동안 출렁거릴 뿐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을 바다를 마주하는 그만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마를 호수. 그 크기가 커 바다로 착각할 뿐.
남자는 등장인물로 머무르길 은연중에 바랐다. 그 바다의 한 흐름이 되어 가라앉기를 바랐다. '케일 헤니투스'가 되어서. 붉은 머리칼이 그 깊은 바다 안에서 물과 함께 흩날렸다.
그렇지만 호수가 마르면 남는 것은 마른 바닥을 기는 그뿐이었다. 물기가 말라 버석한 땅을 긁는 김록수만이 있을 뿐.
붉은 꽃잎과 갈색의 꽃잎이 발끝에서 날아들어 춤을 추었다.
느리게 구둣발이 뒤로 물러섰다. 그 사이를 다른 구둣발이 채우고 또다시 뒤로 물러서고, 다시금 채우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고, 잠식당해가며 두 사람은 그 공간을 몇 번이고, 또 몇 번이고 돌았다. 그것은 분명 서로가 부딪히는 상황이었다. 서로에게 발을 맞춰 공간을 도는 행위가 아니었다. 영원한 삶이 죽음을 침범하고 온전한 결말이 인위적인 결말을 짓눌렀다. 앞으로 나아가 확인하려는 눈과 침묵을 표하며 다문 눈이 부딪혔다. 살아있는 붉은 잎이 충격에 크게 튀었고 죽어가는 갈색 잎이 발끝에서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머물러 붉은 것으로 덧없이 남고 싶은 욕망과 애써 현실을 마주하려 발을 구르는 의지가, 바스러지도록 무릎을 치는 버석한 마음이 함께 하늘을 날아 호선을 그리며 나비처럼 흩날렸다.
그 행위는 가까이서 보면 단순한 몸싸움이었다. 밀어붙이고, 또 그를 막아 세웠다. 그 과정에서 둘은 수없이 공간을 돌았다. 그 반동에 꽃잎도 주위를 감싸듯 도는 듯한 착시가 일었다.
그렇지만 멀리서 보면 그것은 춤으로 착각할 만한 행위였다.
빨간 구두, 김록수는 또 다른 동화를 하나 떠올렸다. 금기를 깬 자의 상징. 그 벌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춤사위. 알베르의 구두는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붉은 장미를 밟고 헤쳐나가는 것은 알베르뿐만이 아니었다. 분명 자신의 신발도, 붉을 것이다.
금기를 깨고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걷는 붉은 구두와 붉은 구두.
기록하는 인간은 등장인물이 되고 싶어 했다.
"케일. 아니, 너를 뭘로 불러야 하지?"
말도 안 되는 동화의 한 장면으로 남아 책 안에 머무르고 싶었다. 결국 돌아갈 수 없어도 괜찮아. 인간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좋았다.
"너는 어떤 사람이지?"
알베르의 멍든 손이 남자의 팔뚝을 감싸 쥐었다.
"케일 헤니투스가 아닌 너를 지칭할 단어를 알려 줘."
괴물인 상태여도 좋다.
"너를 알려줘."
그와 대조되게, 읽어내리는 등장인물은 인간이 되고 싶어 했다.
끊임없이 춤을 출지라도, 나아가고 나아가서. 책을 벗어나 보다 솔직한 모습으로.
알베르 크로스만이라는 등장인물의 외골격을 넘어서.
"결국 야수는 너였던 거야?"
케일 헤니투스라는 등장인물의 외골격 너머로.
파사삭, 바닥에 있는 장미의 목덜미가 먼지처럼 바스라 들었다.
돌고 돌아 춤의 절정에 마주한 곳은 결국 방의 중앙이나 다름없는 침대의 위였다. 한 바퀴, 또 두 바퀴. 집요하게 공간을 돌고 돌면서 알베르 크로스만은 케일 헤니투스의 그림자를 꿰뚫듯이 몰아세웠다. 집요하게 꿰뚫어 찢긴 틈 사이로 그의 이야기가 새어 나왔다. 이 세계에 발을 디딘 야수의 모습이 아닌 온전한 인간의 이야기.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째서 또 다른 인간의 틈바구니에서 기생하며 섞여 이질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는지. 그리고 그의 담담하지만 처절한 과거사부터, 그에서 케일 헤니투스를 제외할 수 있는 그 틈바구니 안 인간의 호칭까지.
이야기는 생각보다 대단치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대단치 않게 이야기했다는 쪽이 맞을 것이다. 이야기를 끝내 끝까지 들은 쪽은 경악을 금치 못한 채로 침대 위의 남자, 그러니 이제는 김록수인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니까. 거친 몸싸움에 가까운 추궁 탓에 두 사람 다 숨이 거칠었다. 그 소리만이 공간을 울린 채 한참 동안 둘은 눈을 맞추고 있었다. 시선이 어지러운 호흡처럼 얽혀들었다.
알베르는 넘쳐흐르는 정보량, 머리 안을 소용돌이치며 철썩이는 이야기의 바다에 휘청이며 눈을 찌푸려 감았다. 바다가 안정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눈을 감고 뜬 곳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믿기 어려운 눈앞의 현실에 흔들리는 동공의 초점에 닿은 것은 침대에 누운 다른 인영이었다. 케일 헤니투스.
그의 머리는 하얗게 세어 있었다.
그는 손을 뻗으려다가 주변의 장미마저 시들어 가는 것에 급히 손을 다시 자신의 쪽으로 가져다 대었다. 심호흡하고 다시 내려놓았다. 케일은 나이가 들어있었다. 깊게 팬 주름, 인간이었기에 세월을 비켜 나가지 못한 흔적들. 붉은 기가 옅게 남아있는 머리칼이 베개 위에 흐트러져 있었다.
다가가면 그 붉은 기마저 가실까 알베르는 손을 대지 못했다. 현명한 처사였다.
케일 헤니투스와 반대로 침대에 걸쳐 누운 새까만 사내, 김록수는 알베르의 떨리는 눈이 다시 제 쪽을 향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알베르는 생각보다 덤덤한 표정이었으나 추스를 시간이 필요한 듯이 잠시 동안 김록수에게로 시선이 멈추어 있었다.
이제 몇 남지 않은 장미를 손으로 쓸자 그 시선이 손을 따라갔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한 순간, 김록수가 아직 케일 헤니투스로 있을 적에 생각한 것이 있었다. 행복한 해피엔딩 뒤에는 무엇이 남을까. 우리가 모르는 그들의 이야기? 아니, 김록수는 한 이야기를 떠나 보낸 것을 알고 있다. 더는 읽지 않았던 이야기, 더 이상 마주하지 않았던 그 현실. 독자가 읽을 의지가 없다면 그 세계는 멈추고 만다. 읽어내리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대로 추락한다.
더 이상 읽어내리지 않게 된다면 그 이유는 다시는 그 세계에는 볼 일이 없어서일까?
아니, 잃을 것이 너무 많아서였다.
그의 머리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부정했을지라도 어쩌면 무의식중에 강하게 갈망했는도 몰랐다. 머물고 싶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으로서 머물 수 없는 것은 남자는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눈 안에는 케일 헤니투스의 암갈색이 뒤섞여 있음을. 뒤섞였으나 섞이지 않은 존재가 김록수 또한 짓눌러 어그러트렸다.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죄책감이 그를 김록수로, 인간으로 규정하지 못하게 했다.
케일 헤니투스는 케일 헤니투스도, 그렇다고 김록수도 아닌 존재였다.
이질적인 무언가였다.
이대로 멈추고 다시는 끝나지 않을 꿈을 꾸고 싶었다. 돌아가는 일 없이. 야수로, 케일 헤니투스로.
케일 헤니투스로서 주어진 삶은 지나치게 달콤한 장미향 기가 흘렀다. 일종의 저주였으나 그는 저주를 짓씹어 삼킨 채 살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화책에서 으레 그렇듯 그 저주에는 한계가 있었다.
잎이 다 떨어진 죽은 장미, 하얗게 센 붉은 머리.
꽃잎이 다 떨어지면 그 목숨과 함께 야수의 저주는 풀린다.
케일 헤니투스의 수명은 한 떨기 장미꽃이었다.
붉은 잎이 뒤틀어져 한 잎, 두 잎. 그리고 바스러져 가는 꽃의 마지막.
그 마지막을 앞두고 세계는 시간선을 멈춰 세웠다. 그가 사랑하는 세상을 기록하는 것을 제어하게 두었다. 덮어버린 하드커버로 인해 인위적인 영원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 뒤로는 아무도 알 수 없도록, 읽어내릴 수 없도록.
김록수는 이것이 하나의 유혹이라고 생각했다. 제대로 세계를 마주하지 않은 자에 대한 비웃음이 섞인 제안이었다. 세계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무언가는 김록수에게 끝나지 않는 영원을 선택할 기회를 주었다. 장미가 삼킨 커다란 테이블보는 김록수에게 있어 이곳이 자신의 무의식이 반영되는 순간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했다. 얼굴이 없는 후광을 닮은 것이 마치 그의 마음을 전부 꿰뚫어 본다는 듯이 오만하게 낄낄댔다. 그것은 김록수에게 해피엔딩에서 살아갈 것을 요구했다. 김록수가 아닌 이야기 속 등장인물인 케일 헤니투스로서 엔딩을 맞기를 바랐다. 이방인을 불러모아 그들을 세상의 하나의 커다란 서사가 되게 한 것처럼 케일 헤니투스 또한, 이야기에 삼켜지길 바랐다. 김록수가 바라지 않았다고 하기 어려운 제안이었기에 쓴 웃음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세계는 기억되고 기록되기를 원했다. 그게 그들의 욕구였고 케일 헤니투스는 그러기에 충분한 등장인물이었다.
김록수는 선택했다.
이기적인 선택이라도 상관없었다. 김록수는 당초 그런 인간이었으므로.
그러니 당신도 그런 사람이지. 우리는 닮아있었다.
알베르는 얼굴을 짓누르듯 쓸었다.
본인의 세상이 단순한 책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당연히도 꽤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표정이 썩 좋지 않아 보였다. 그저 별다른 말 없이 케일 헤니투스에게 건네려던 손을 갈무리해 제 아래 깔린 검은 머리의 남자를 몇 번이고 쓸기를 반복하더니 이내 그대로 두었다. 손을 김록수의 위에 올린 채로.
"우습군."
그것은 제 눈 앞에 있는 케일 헤니투스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눈살을 찌푸린 아래에는 자신을 향한 자조가 드러나 있었다.
알베르 크로스만이라는 커다란 전기, 그를 뛰어넘어서 본인의 드러나지 않았던 진짜 이야기를 마주하려 발버둥 쳤던 순간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렇지만 결국 머물러 있던 것은 또 다른 거대한 틀이라는 것인가. 유리병을 나온 금붕어가 된 기분이었다. 빠져나와 마주한 거대한 수조가 숨이 막혔다.
고개를 숙인 볼 아래 꺼슬한 손이 닿았다. 케일 헤니투스의 손은 아니었다. 그것보다 투박하고 흉터진 촉감이었다. 꾸준하게 세월을 들여 잡아왔던 미려하고 굳은살 하나 박히지 않은 부드러운 하얀 손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촉감이었으나 알베르는 오히려 이것이 당연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 손이, 이 감각이 오히려 진짜 그와 닿아있는 기분이 들어 헛웃음이 나왔다. 네가 내게 드러내 준 것인가 아니면 내가 네게 드디어 닿은 것인가.
알베르 크로스만이라는 커다란 전기, 그를 뛰어넘어서 본인의 드러나지 않았던 진짜 이야기를 마주하려 발버둥 쳤던 순간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렇지만 결국 머물러 있던 것은 또 다른 거대한 틀이라는 것인가. 유리병을 나온 금붕어가 된 기분이었다. 빠져나와 마주한 거대한 수조가 숨이 막혔다.
고개를 숙인 볼 아래 꺼슬한 손이 닿았다. 케일 헤니투스의 손은 아니었다. 그것보다 투박하고 흉터진 촉감이었다. 꾸준하게 세월을 들여 잡아왔던 미려하고 굳은살 하나 박히지 않은 부드러운 하얀 손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촉감이었으나 알베르는 오히려 이것이 당연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 손이, 이 감각이 오히려 진짜 그와 닿아있는 기분이 들어 헛웃음이 나왔다. 네가 내게 드러내 준 것인가 아니면 내가 네게 드디어 닿은 것인가.
그렇지, 결국 여기는 아주 조그마한 틈의 균열일지라도 수조 밖이었다. 제 밑에 있는 자가 작게 숨을 고르는 것을 마주하며 그는 쓰게 웃었다. 붉은 구두가 그 수조 안을 헤엄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암갈색의 빛을 띤 수조가 느리게 접혔다. 알베르만이 알 수 있는 무표정 속 낮은 웃음이었다.
나는 여태까지의 순간을 이야기가 아닌 세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파도에 바짓자락이 천천히 적셔 들어가고 있었다.
제가 사랑하는 것들이 분명히 제 눈 안에는 살아있었어요.
젖은 셔츠가 몸에 달라붙어 온몸에 소름을 돋치게 만들었다.
내가 아니어도 좋으니, 나는 그 살아있는 세계에 발붙이고 싶었습니다.
목 끝까지 그 파도가 차올랐을 때 알베르는 정신이 퍼뜩 드는 기분이었다. 투박한 손을 매만졌다. 익숙하지 않은 얼굴선을 보고 낯익지 않은 목소리를 들었다.
이곳은 바다로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너는 내게 인간의 형상을 보였지?"
김록수의 미소는 여태껏 마주하지 못한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익숙한 미소였다.
케일 헤니투스는 항상 알베르에게 예상치 못한 제안을 하곤 했다. 알베르에게 있어 케일 헤니투스가 제안하는 것들은 투자가치가 있다는 것이 거의 공식처럼 남아있었다. 물론 골때리는 사안일 때가 상당히 많았으나 그것은 분명히 왕세자 알베르에게 있어 이익을 보장하는 방안들이었고 또한 케일 헤니투스같이 올곧은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케일 헤니투스는 한 번도 변주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수없이 많이 준비하고 나아가는 길이었으나 걸어가는 길은 막막할 정도로 곧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 분명 그가 내가 아는 케일 헤니투스라면, 그 속 안의 또렷한 그림자라면 그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곧은 길을 애써 걷는 너를 막고 싶다.
도망치는 너를 붙잡고 싶었다.
알베르는 여태껏 김록수의 의뭉스러운 침묵을 쪼개고 밀고 들어왔었다. 공간이 전부 갈빛으로 물들어 버린 것은 그 탓이다. 김록수는 발을 맞춰 알베르의 파고드는 모양새를 쉬이 막는 듯하면서 손쉽게 틈을 내었다. 갈라지고 뒤틀어진 틈새로 김록수의 파편이 새었다. 알베르가 알지 못한 김록수만의 파도가 일렁여 닿았다. 그 파도의 갈증에 눈이 멀어 밀어붙이고 밀어붙였다. 물에 머금어진 금붕어는 수없이 팔딱팔딱 뛰었다. 비늘이 붉었다.
그러나 그 파도가 볼을 스쳤을 때 알베르는 금붕어의 꿈에서 깨었다. 턱을 삼킨 김록수의 파도가 위협적이었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잠겨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번에는 붙잡을 수 있을 것도 같았으나 휘젓는 것은 물 뿐이었다. 김록수라는 존재에 욕심이 나 그대로 잠길 뻔할 때까지 비집어 들었다. 그 파도에 쓸려 또다시 그를 놓칠 수도 있음을 간과하고.
김록수의 입매가 내려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얼굴이 어떤 미소인지를 모를 리가 없는 알베르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꿍꿍이가 있는 얼굴. 그 꿍꿍이는 실패하는 법을 몰랐다. 그의 사랑하는 용이 있었다면 분명 저 얼굴을 사악하다 칭했겠지.
뭐 하실 말 없으십니까?
"불경한 놈."
알베르는 일부러 뜸을 들이고 있었다.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바닥으로 파도를 틀어막고 있었다. 새어 나오지 못 하도록 아등바등하는 꼴이 멍청한 짓이었으나 그런데도 최대한 새지 않게 짓누른 두 손 아래에 수압이 느껴졌다. 그것이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은 알베르가 더 잘 아는 상황이었다.
김록수에게는 커다랗게 벌어진 구멍이 있었다. 왼손으로 그 잔재가 느껴졌다. 그 압박이, 그 중압감이 쏴아아, 아차 하는 사이에 벌어진 손틈의 틈새로 물이 줄줄 새어 나왔다. 더는 틀어막을 수 없는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만약 그 선심을 베푸는 듯한 거래를 거절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지 안 물어보십니까?
"너는 어떻게 되지?"
알베르는 오른손으로 틀어막은 의문을 결국 입 바깥으로 내뱉지 않았으나 결국 부질없는 짓이 되었다. 결국 무너지듯 터져버린 그것들이 알베르를 덮치고 집어삼켰다. 그 안에 온몸이 잠겨 들었다.
첫번째 질문의 답을 그는 너무 쉽고 흔쾌히 답해주었다. 적어도 세계선이 가만히 그 비틀린 행보를 바라보고 있지만은 않으리라는 것을. 둘을 분리해 끝없이 끝나지 않는 세계 속 김록수를 페이지 안쪽에 가둔다든가, 아니면 아예 없던 일처럼 처음으로 돌아가 버릴 수도 있는 것이 그것이었다. 알베르는 이야기를 듣고 살아온 모든 기억이 순간 모두 없던 일로 되는 것이 너무나도 간단한 것임을 깨닫고 섬찟, 소름 돋은 목 뒷덜미를 쓸어야 했다.
어쩌면 간단한 방법이었다. 여태껏 살아오던 대로, 그대로. 계속 살아간다면 그런 일까지는 없을 것이다. 아주 쉽고 편한 방식이었지.
그러나 알베르는 골머리를 싸맸다.
케일 헤니투스가 하는 양을 알베르가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면 김록수는?
알베르는 마주하는 두 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똑같은 말투, 똑같은 성격.
익숙한 저 이죽이는 미소.
알베르는 떠올린 두 번째 물음에 대해 침묵했으나 효과는 없었다.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케일 헤니투스에 대해서, 김록수에 대해서.
두 번째이자 마지막 물음은 간결했다.
그렇다면 김록수는 어떤 선택을 했는가?
벽이 전부 무너져 종잡을 수 없이 쏟아져 오는 것처럼 그 답이 알베르를 삼켰다.
흔들리는 알베르의 눈에 그 호선이 닿았다. 점점 더 또렷하고 진해지는 얼굴이었다. 원래 이런 느낌이었군. 위화감에 뒤틀어진 묘한 느낌이 아닌 자연스럽게 그 얼굴에 스며드는 진한 미소.
".. 내가 뭘 하면 되지?"
알베르가 사랑하는 미소였다.
선택에서 도망치게 당신이 날 도와줘요.
파트너로서의 부탁입니다.
알베르는 헛웃음을 지으며 마치 익숙해지기라도 하고 싶은 양손으로 부드럽게 얼굴선을 쓸었다. 고통스러워 보이기도 했고, 어떤 방향에선 눈에 총기를 담기도 했다. 한 가지의 단조로운 감각으로 알 수 없는 다채로운 표정이었다. 그 일그러지게 미소 짓고 눈이 휘고 입매가 찡그려진 그 얼굴이 웃음을 내뱉었다. 한숨과도 같았다.
평생을 널 잡으러 아등바등 손에 쥐었으나 또 너는 이렇게.
"내가 올 걸 알고 있었나?"
내가 당신을 모릅니까?
김록수는 항상 생각했다.
어느 순간,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 어떤 순간에 갑자기 세상이 끝난다면.
엔딩 크레딧이 오르고, 마지막 장을 넘기고. 더는 이어지지 않는 스크롤을 보고, 더는 이어지지 않고 어두워져 버린 화면을 보고.
김록수는 자신의 세상마저 그런 이야기에 가깝다고 여겼다. 기록하지 않으면 그렇게 끝나버리는 순간들.
이야기가 끝나는 그 다음 날에 그는 어떻게 될까.
그 이야기를, 그 세상을. 이제는 나의 삶과 나의 의식이 집요하게 뒤엉켜 버린 그 세계를.
집요하게 내리쬐는 아침 햇살과 함께 청아하게 우는 새의 소리를 들으며, 소파에서 깨어나 출근준비를 하고 배 위에 올라와 있는 책을 정리하고 그것을 한밤의 길고도 짧은 꿈으로 갈무리해야 하는 걸까.
그 세계를 하나의 이야기로 규정해 버려야 하는 날이 오는 걸까.
어느 순간,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 어떤 순간에 갑자기 이야기가 끝난다면.
그래야 하는 걸까.
그 끝이 찾아오는 순간이 결국 나를,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삼킨다면.
나는 당신들이, 당신이 나를 읽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읽고 있으리라 예상했다.
수없이 당신이 나를 해석하고, 또 재해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의문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그렇다면 이야기는 끝나도 끝이 나지 않을 테니까. 나를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내가 당신들을, 당신을 생각하는 것처럼.
저주를 푸는 방식은 간단했다. 괴물 케일 헤니투스의 시간을 흐르게 하는 것. 침대 위는 검은 장미와 붉은 장미로 뒤섞여 있었다. 알베르는 이 공간의 최대 변수였으니 다가서는 모든 행동이 시간을 다시금 흐르게 했다. 검은 장미와 붉은 장미가 무엇 할 것 없이 흐드러지게 졌다 흩날렸다. 금방이라도 닿을 듯한 저주받은 붉은 장미, 저주받은 야수. 케일 헤니투스.
알베르는 몇 발자국 떨어져 그를 지켜보는 김록수를 마주 바라보다 느리게 웃음을 흘렸다. 그 눈에 작게나마 슬픔이 어려있었다. 눈물은 한 방울도 어려있지 않았지만 알베르는 그것이 슬픔임을 알았다. 자기가 그리해달라 요청했으면서 애도의 눈빛에 젖는 그 표정을 잠시 가만히 지켜보았다. 누군가는 그것이 그저 무신경하고 무감한 표정으로 읽히도록 오해할 수 있는 얼굴이었다. 그렇지만 그저 그건 슬퍼할 방법을 잊어버린 듯 수없이 깎여 건조해진 표정이었을 뿐이었다.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는 데 익숙한 얼굴이었다.
"하나, 아니 둘만 묻지."
뭡니까?
"정확하게, 내가 네 저주를 끊는다면 이야기는 다시 어떻게 흐르지?"
제가 가장 큰 변수였으니 제가 다시 이방인으로 내쫓긴다면 반복하게 되겠죠.
마치 동영상이 끝나고 다시 재생 버튼이 떠오르는 것처럼. 김록수는 알베르가 아직은 알지 못 하는 농담을 실없이 뱉으며 작게 웃었다. 무슨 소리냐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는 꼴에 무릎에 턱을 괴고는 더 이죽였다.
영웅이 다시금 탄생하고 반복하게 두고 싶진 않아서요. 이야기는 해피엔딩의 그 이후부터 다시 반복될 겁니다. 그 전을 케일 헤니투스한테 위임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어쩔 수 없이 기록되어버린 필사의 기록이 있거든요.
"그 뒤는 케일 헤니투스의 그 어떤 것도 기록되지 않았으니까?"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는 거죠.
웃기는군. 알베르는 등을 돌렸다.
다음 거는 뭡니까? 발을 한 발짝 내디딘 알베르의 등 뒤에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내가 네 저주를 끊는다면 너는 어떻게 되지?"
분명히, 그 뒤의 대답 사이에는 침묵이 있었다.
돌아갈 겁니다.
꽤나 긴 침묵이었다.
"그것뿐인가?"
케일 헤니투스의 삶을 거절했으니까요.
저주에서 깨어나 원점으로 돌아갈 두 사람은 각자의 삶을 다시 배정받을 것이다.
섞이지 않은 덩굴. 붉은 장미와 검은 장미, 오롯이 두 존재로.
그렇지만 꿈을 꾸겠죠.
언제나 몇 번이라도. 그가 저주받은 존재로 살아온 사랑스러운 세계를, 사랑스러운 존재들을 그리며 두고 온 것들과 생겨버린 빈자리에 밤을 지새울 것이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꿈속에서 수없이 그들을 곱씹으면서.
잊을 수 없는 것들을 눈에 담으며.
"이 곳에 애써 남지 않은 것은 본래 케일 헤니투스를 향한 죄책감 때문인가?"
그것도 없다고는 못 합니다.
케일 헤니투스를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또각, 또각. 걷는 발아래에 죽은 땅이 꺼졌다. 공간 전체가 바스러져 가고 있었다. 아마 김록수의 케일 헤니투스가 없는 내일이면 꽃은 전부 피지도 않은 채 다시 땅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럼?"
차례차례로 침대 위의 검은 장미가 졌다. 넝쿨이 비틀어져 보기 싫은 꼴이 되어갔다.
알베르는 케일 헤니투스의 앞에 선 그제야 그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세계를 끝나는 이야기로 규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김록수는 세계를 미완성으로 남겼다.
김록수가 마주하지 않아도 분명히 흘러갈 세계, 의도적으로 마주하지 않은 끝은 세계의 진행을 뜻했다. 그 뒤를 꿈꿀 수 있는 재해석이 가능한 곳으로 두었다.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곳은 어딘가에 있으리라는 꿈을 꿀 수 있도록.
어두운 손이 하얀 머리칼을 손에 감아 들어 올리고 느리게 쓸었다. 햇빛이 그의 등에 가려져 그림자가 진 것이 케일 헤니투스에게 드디어 밤이 찾아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다시 한 번 쓸자 느리지만 그 얼굴의 주름이 천천히 늘어가는 모양새가 보였다. 시간이 아직은 아주 느리지만 분명히 흐르고 있었다.
알베르는 생경한 느낌이었다. 그는 나이 든 그의 얼굴을 쓸었다. 어딘가에서. 아니, 매번 그랬던 것처럼 익숙한 투였다. 그리고 느리게 고개를 숙였다. 머리카락, 이마와 볼, 손등. 그 다음에는 짧게 입술에 입술이 맞닿았다. 작별인사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야속하지, 당신의 시간축과 나의 시간축이 지나치게 뒤틀어져 있다는 것은.
붉은 잎이 뒤틀어져 한 잎, 두 잎. 그리고 바스러져 가는 꽃의 마지막.
그는 고개를 들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또 다른 그와 시선이 마주 섞였다. 바스러져 가는 것을 손에 쥔 어두운 갈색의 눈이 슬프게 휘었다. 알베르는 김록수를 마주보았다. 암갈색의 눈이 일렁였다. 알베르는 손 아래의 머리칼을 느리게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냈다. 그리고 항상 놓치고만 마는 그 손을 다시 맞잡았다. 김록수에게 밤이 내려앉았다. 그의 시간마저 다시 흐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또 놓아주어야 함을 그는 알았다.
알베르는 다시 한 번 갈증이 일었다. 목이 틀어막혔다. 다시 수조에 틀어박히는 기분을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에도, 또다시 멍이 들게 손을 쥐는 한이 있어도. 알베르는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는 순간에 눈물을 적시거나 하는 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쓰게 웃었다. 아, 나는 이토록 감상적인 인간이었군.
결국에 놓을지라도, 놓지 않도록. 알베르는 힘을 있는 힘껏 주었다.
"나는 손에 쥘 자신이 있어."
그 말을 들은 그 눈매가, 놀란 듯이 뜨이더니 이내 찰나처럼 느리게 휘었다.
"나는 그럴 자신이 있어!"
모두가 바스러진 그 잔해 속에서 두 사람만이 앉아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또 흐르고 흘러 알베르의 귓가와 피부에 공백이 아닌 다른 것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천천히 속도가 올라 그와 그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시간은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머리칼에 바람이 일었다.
"수없이 설득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붙잡고, 쫓아가서 또다시 사랑에 빠지고."
잔해가 바람에 흩날려 주위를 돌았다. 그곳이 잔해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장미 냄새가 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향기가 코를 찔러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 앞이 흐릿해져 오는 것을 알베르 크로스만은 애써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수없이 반복한다면, 영원하지는 않을 지라도.. 그에 가까운 곳까지는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알베르는 케일 헤니투스를 이해하고, 또 읽어 내려갔으나 그것이 완벽하게 그라는 존재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동류이나 서로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등장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겨우 책으로, 그 한정된 공간에만 있는 묘사만으로는 행간에 감춰진 사람을, 괴물 안에 뒤섞인 인간을 파헤칠 수 없다.
알베르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
보다 솔직한 모습으로, 지독한 저주를 넘어서 두꺼운 책 안이 아닌 행간과 서사를 넘어서.
"그렇지 않나. "
그래서 언젠가 너에게 닿을 수 있기를.
"그렇지 않아?"
나의 케일 헤니투스이자 김록수, 어떤 순간이건의 너를.
"나는 어떻게든. 반드시 너를 찾으러, 갈 거야."
만족스러운 웃음이 짙게 피었다. 짙은 향이 훅 몰려 끼치는 것에 결국 그는 눈을 감았다. 머리가 띵한 기분에 숨을 들이켜야 했다. 몸이 기우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손의 힘은 풀지 않으려 아득바득 힘을 주었다. 아슬아슬하게 뜬 눈 사이 검은 인영이 흐릿하게 들어왔다 암전되었다.
"그럼 다시 한 번, 사랑을."
사랑을, 하자. 반복되는 기계처럼 내뱉은 말이 끝내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다시 한 번 종족이든 세계선이든 짓밟고 뛰어넘는 짓을. 그것이 결국 그 이야기의 결말이 나타내는 의미가 아닌가? 알베르는 자기 좋을 대로 이야기를 상상했다. 상당히 비현실적이었으나 알베르는 손에 쥘 자신이 있었다. 치밀하고 교활하게, 말이 안 될 것이라 혀를 내둘렀던 일들은 그가 언제나 해왔던 일이다.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동화같이 완벽한 결말은 있을 수 없다. 그 뒤는 수없는 복잡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넘기 곤란한 위기도, 갈등도 분명히 존재하며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찾아올 수밖에는 없다.
그래도 나는, 우리는.
시야가 완전히 어두워지더니 감각마저 천천히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힘을 주었던 손 사이 얽힌 손가락이 천천히 풀리는 기분이 어렴풋이 났을 뿐이었다. 이대로 까무룩 잠이 들 것만 같은 감각에 눈을 뜨려 안간힘을 쓰다 결국 그마저 무용지물이 되려는 찰나.
나를 잡으러 와 줘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
느리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귀를 울리고,
그것이 감각의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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呼んでいる 胸のどこか奧で 부르고 있는 가슴 속 어딘가에서
いつも心踊る 夢を見たい 언제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꿈을 꾸고 싶어.
悲しみは 數えきれないけれど 슬픔은 셀수 없이 많지만
その向こうで きっと あなたに會える 그 너머에서는 분명 당신을 만날 수 있어.
はじまりの朝の靜かな窓 시작의 아침. 고요한 창.
はじまりの朝の靜かな窓 ゼロになるからだ 充たされてゆけ 원점으로 돌아갈 몸을 찾아 나가자.
海の彼方には もう探さない 바다의 저편은 이제 찾지 않을거야.
輝くものは いつも ここに 빛나는 것은 언제나 여기에.
わたしのなかに 見つけられたから 내 마음 속에서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언제나 몇번이라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OST) /다즈비 COVER [한국어 자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