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한부 소재 주의
* 케일과 최한이 동갑이라는 설정입니다.
“……뭘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최한은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투명한 창을 타고 들어오는 햇빛에 일렁이는 붉은 머리칼, 선명한 그 색과 달리 창백한 피부. 침대에 앉아 등을 기댄 사내의 모습은 꼭 다른 세상을 사는 듯 달라보였다.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사내는 이곳을 지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이야기 될 만큼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그가 처한 상황은 더욱 그의 존재를 안타깝게 만들기 충분했다.
“아뇨……. 날이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최한은 한 박자 늦게 대답을 뱉었지만, 사내는 상관없다는 듯 나른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주억였다. 이제 막 겨울을 벗어난 3월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땅은 서서히 초록을 찾고 있었다. 어정쩡하게 문 앞에만 서 있는 것도 이상해 보이겠다 싶어 최한은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사내의 시선은 최한이 제 곁에 올 때까지 그를 떠나지 않았으나, 목소리를 내는 일은 없었다.
“최한.”
“……네?”
“산책이나 갈래? 답답해서.”
냉기가 감도는 창에 손가락 끝을 댄 사내가 느릿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최한은 그에게 날이 아직 쌀쌀하니 다음에 가자는 말을 꺼내려 했으나, 꾹 다물린 입은 열릴 틈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최한은 문 앞에 둔 휠체어를 침대 앞으로 끌었다.
바퀴가 제대로 구르지 않는 탓에 침대 끝에 걸린 이름표가 흔들렸다. 케일 헤니투스, 25세. 최한의 시선은 그 이름 여섯 글자에 머물렀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적발의 사내, 케일 헤니투스를 휠체어에 앉혔다.
너의 시간
최한
케일 헤니투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가 우연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최한과 케일, 두 사람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제 막 성년이 된 젊은 간병인, 그의 또래로 보이는 유약한 환자. 한 줄로 정의하자면 케일의 부모가 최한을 간병인으로 임명했다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관계였다. 환자가 세상을 떠나거나 더 이상 생명을 연장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시기가 올 때까지, 간병인은 그들에게 유일한 말동무였고 또 하나의 가족이었다. 자신이 돌보던 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최한은 깊이 슬퍼했다. 이 일에 몸을 담고 있는 동안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절차라는 걸 알면서도 쉬이 적응이 되지 않았다. 1년 후에는 무얼 하고 다 나으면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그들의 미래를 듣고 있었기에 더욱 안타까운 죽음으로 다가올 수밖에. 그럼에도 최한은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외로움을 덜어줄 수 있다면, 최한은 자신 혼자 남더라도 쭉 이어갈 생각이었다.
처음 최한은 케일에 대해 아무것도 듣지 못 한 상태로 그를 마주했으므로, 으레 간병인을 구하는 이들은 고령의 노인이 대부분이었기에 그 또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더랬다. 병원에 들어가 병실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사전에 받은 인적사항을 확인하는 게 케일과의 첫 만남 아닌 첫 만남이었다. 케일 헤니투스, 라는 지극히 낯선 어감의 이름이었고 최한이 가장 놀란 것은 그의 나이 때문이었다.
스물, 넷. 으레 최한이 돌보는 이들은 시한부이거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의 상황이 짐작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자신과 나이가 같지 않은가. 감히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을 자신이 없었다. 무례하다고 생각할 게 뻔했다. 병실 앞에 도착한 최한은 케일 헤니투스라는 낯선 여섯 글자의 이름을 속으로 곱씹으며 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창을 타고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셨다. 빛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눈에 들어오는 건 사내의 뒷모습이었다. 붉은 머리카락이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환자복을 스쳤다. 사람이 들어오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듯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최한은 익숙하게 의자를 꺼내 그 뒷모습을 응시했다. 경계하는 걸까. 아니면 들어왔다는 걸 눈치 채지 못 한 것일까. 만일 전자라면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들어 최한은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순전히 자신이 조바심 난다는 이유로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 수 없었으므로.
“…….”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최한은 케일이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 한 채 제 손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상황을 수습하려 해보았지만 혀가 꼬여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 그……. 안녕, 하세요.”
“…….”
케일은 최한을 하나하나 뜯어보듯 한참 동안 시선이 머물러있었다. 첫인상부터 최악이었으면 어쩌지. 최한은 되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케일이 무서웠다. 여태껏 함께 했던 이들은 제 아들, 손자처럼 최한을 반겼고, 스스로 인상이 나쁜 편은 아니라 생각했기에 더욱 의문이었다. 제 상황이 탐탁치 않은 걸까. 스스로가 처한 상황에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이 또한 적잖이 봐왔으므로 최한은 선을 넘고 가지를 뻗어가는 생각을 잘라냈다. 과한 망상은 독이다.
최한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케일 씨의 간병을 맡게 된 최한이라고 합니다. ”
무거운 정적이 병실 안을 가득 채웠다. 내뱉은 건 짧은 한 마디였으나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가시 돋힌 듯 입 안이 따끔거렸다. 예상 범위 밖의 경우였고, 처음 겪는 일이었기에 최한의 감정은 당황으로 가득찼다.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라도 펼쳐지는 이처럼 저도 모르게 눈을 꾹 감았다.
침묵을 비집고 들어온 것은 의외의 말이었다.
“그래, 잘 부탁해. ……최한.”
고저 없는 목소리는 낮은 울림을 일으켰고, 그에 걸쳐진 잔잔한 미소에 어쩌면 생각과 달리 어려운 사람은 아닐 것이라고, 최한은 생각했다.
-
케일 헤니투스는 생각보다 훨씬 느긋한 사람이었다. 아침잠이 퍽 많았고, (최한의 출근은 매일 오전 8시이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싫어하며 (날이 좋아 산책하자고 휠체어를 끌고 오면 세상에서 제일 귀찮다는 표정으로 최한을 바라봤다.) 의외로 식물을 좋아하는 듯 바깥에 바로 보이는 나무와 꽃을 한참 바라보고는 했다. (꽃이 좋냐는 물음에 본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으므로 이것은 최한의 예상이었다.)
일을 시작한 지 3개월이 지났을 무렵 케일은 가벼운 미소를 지어주기도 했고, 최한은 간병인과 환자가 아닌 동갑내기 친구를 새로 사귄 듯 설렜다.
그토록 꺼려하던 산책도 가을이 될 즈음 먼저 이야기를 꺼낼 정도였다. 바스락거리며 부서지는 나뭇잎 소리와 유독 높게 보이는 청명한 하늘.
담요 위에 떨어진 단풍을 집은 케일이 중얼거렸다.
“예전에는 별로라고 생각했어. 계절이 어떻게 변하든, 나는 죽을 텐데 이걸 알아서 뭐하나.”
“…….”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거, 천천히 맞이하면서 지낼 걸 그랬나봐. 앞으로 몇 번 남았는지도 모르는데.”
최한은 드물게 침묵을 지켰다. 케일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해준다는 사실이 기뻤지만 기쁘지 않았다. 그의 고백에 최한은 자신과 케일의 관계를 다시금 상기했다. 간병인과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 휠체어를 이끄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조금 더 살아달라는 말이 기만처럼 들릴까. 최한은 케일의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 했다. 그저 함께 있으면 그가 사라질 거라는 생각을 할 수 없어서…….
그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최한은 붉어진 눈가를 꾹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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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영 행복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은 건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자신이 직접 목격하지 못 했기 때문이었고, 최한이 알고 있는 케일은 조금 무기력하지만 좋은 사람, 오래 살았으면 하는 사람, 제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한 이였으므로 그의 병명과 그를 완전히 분리시킬 수 있을 줄 알았다. 적어도 여느 때처럼 산책을 마치고 병실로 돌아와 케일을 침대에 눕힌 뒤 피를 토할 때까지. 여지껏 본 적 없는 선혈에 최한의 몸은 딱딱하게 굳었다. 처음 교육을 받았을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매뉴얼마저도 백지처럼 하얗게 지워져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케일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무력감에 휩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린 최한은 다급하게 긴급 벨을 눌렀고 의사와 간호사가 달려와 케일의 상황에 대해 물으며 바쁘게 움직였다. 무어라 말을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터졌고 부정확한 발음으로 내뱉은 말들이 제대로 그들에게 닿았을지 그것도 알 수 없었다. 텅 비어버린 호실에서 최한은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입술을 꾹 물었다. 눈을 감아도 조금 전 상황이 훤했다.
최한은 한동안 케일을 만날 수 없었다. 그의 부모로부터 직접 온 연락이었다. 가끔 시간이 빌 때 케일의 병실을 찾아갔지만 절대 안정이라는 경고문에 걸음을 뒤로하기를 몇 번, 꽃집을 지날 때면 자연스레 그에 대한 생각이 났다. 이제 곧 봄이 올 것이다. 자신과 케일은 한 살을 더 먹을 것이고, 스물다섯이 되면…….
일을 나가지 않는 동안 최한은 케일에 대해 생각했다. 케일은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병이 기적처럼 낫게 되어 30대가 된 케일. 40살 즈음이면 결혼을 했을 것이다. 갓 태어난 자식이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흘러서 60대가 된다면 귀여운 손자 손녀들을 돌보는 할아버지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 무수히 많은 미래를 그릴 수 있는 그의 시간이 아무것도 하지 못 한 채 사라지는 게 싫었다. 그에게 평생 전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최한은 그것이 너무나도 슬펐다.
연락이 온 것은 2달이 지난 25살의 2월이었다. 사전에 저장해둔 번호로 온 연락에 최한은 혹여 케일이 잘못되었을까 받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듣게 될 이야기라면 후회하는 것보다 낫겠다 싶어 스피커 너머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언젠가 한 번 보았던 그의 아버지였다. 내용은 대강 증세가 호전되어 내일부터 다시 나와줄 수 있냐는 이야기였다. 최한은 그가 제 앞에 있기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다음 날 평소보다 더 빠르게 병원에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 야위었으면 어쩌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건 아닐까. 수많은 걱정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채웠지만 생각과 다르게 손은 빠르게 문고리를 돌렸다.
보고 싶었다. 케일이.
……그것도 아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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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은 만나지 못 했던 사람들처럼 수없이 많은 말을 쏟아내었다. 케일이 지쳐보인다 싶으면 최한은 다급히 물을 따라주었고, 나중에 더 이야기 해도 된다고 말했지만 케일은 의외로 고집을 부렸다.
“더 해도 돼, 네 얘기.”
그 말에 힘이라도 얻은 듯 최한은 장장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제 풀에 지쳐 까무룩 잠이 들었을 때, 누군가 제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감각에 눈이 뜨였다. 설마 병실에서 잠든 건가. 스스로에 대한 욕을 여러 번 속으로 씹던 최한은 당장이라도 일어나려는 듯 몸에 힘을 주었지만 이내 들려오는 목소리에 얼어붙은 듯 몸을 굳혔다.
“아직 봄을 같이 못 봤으니까. ……적어도 그때까지만, 많이 욕심 안 부릴게. 3개월만 더.”
케일의 목소리였다. 어딘가 물기에 젖은 듯 잠긴 목소리. 최한은 금세 그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신과 함께 맞이하지 못 했던 계절. 어쩌면 그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건 이런 이유였던 걸까.
꽃이 다 지게 된다면 그때는 떠나겠다는 의미인 것일까.
“……조금만 더, 살면 안 돼요?”
“…….”
처음이 마지막이 되지 않게. 제대로 된 시작이 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