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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일은 아이들이 가져온 얇은 책의 표지를 바라보았다. 매개가 되는 문자는 분명 로운의 그것인데, 몹시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제목이 희한하다는데!”

“이상한 제목이라는데!”

“궁금하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니 해와 바람이라느니 하는 일반 명사를 쓴 제목과 달리 고유명사로 된 제목은 내용의 추측이 더 어려웠다. 더구나 다른 동화책처럼 겉면에 삽화가 그려져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런 점이 오히려 아이들의 흥미를 끈 모양이었다.

 

이 제목, 어디서 들어봤는데. 케일은 머릿속 한 구석에 떠오른 의문을 방치한 채 책을 읽어 내려갔다. 따뜻한 체온 셋이 옹기종기 달라붙어 케일과 함께 책 속의 낱장을 응시했다. 이윽고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침실 안을 나지막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이야기 속 어느 방앗간 주인이 물레를 돌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우연히 왕이 그 앞을 행차하며 지나가자 방앗간 주인은 거짓말로 노래를 부른다. 자신의 딸은 짚으로 금을 자아낼 수 있다고. 불현듯이 떠오른 기억에 케일은 저도 모르게 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왜 그러나 인간!”

 

책을 읽다 말고 저도 모르게 내뱉은 감탄사에 아이들이 눈을 땡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케일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앞부분을 읽다 보니 기억났다.

 

룸펠슈틸츠헨. 독일의 동화였던가. 금실을 자아내지 않으면 죽게 될 처지가 된 소녀에게, 한 도깨비가 제 이름을 맞히는 조건으로 대신 실을 자아 준 이야기였지. 언젠가 읽어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아이들이 가져오는 동화책들은 가끔 케일의 먼 기억을 건드리곤 했다. 김록수였던 시절에도 이 나라나 저 나라나 구전 설화는 꽤 비슷했다. 다른 세계에 와서도 사람 사는 건 거기서 거기라는 건지 이름과 물건 같은 세세한 요소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크게 다를 바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심지어 이름조차 차이가 없거나, 똑같은 경우도 있었다. 지금 이 동화책처럼.

 

부유하는 기억을 밀어내며 케일은 천천히 이야기를 마저 읽어나갔다.

 

거짓말이 사실인지 시험해 보겠다며 왕명이 떨어졌다. 방앗간집 딸은 궁으로 불려가 금을 만들지 못하면 죽을 처지가 되고 말았다. 케일은 누군가가 떠오르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찬란한 금빛을 거짓으로라도 뒤집어쓰지 않으면, 언제고 죽을 수 있음을 각오해야만 했던 사람.

 

“너무하다!”

“왕이라는 사람이 왜 그러냐는 건데!”

“거짓말한 건 잘못했는데 왜 딸을 죽이냐는 건데?”

 

그러게 말이다. 권력이 한 곳으로 집중되면 이런 폐해가 생긴다. 누가 왕좌에 앉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세상이 되어버리지 않는가.

 

“저하가 왕이 되면 이렇게 너무한 짓 안 할 거라는데.”

“맞다는데. 여기 왕 이상하다는데.”

 

제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튀어나온 아이들의 말에 케일의 눈이 흔들렸다. 온과 홍이 살래살래 흔드는 꼬리가 케일의 손등을 간질였다. 케일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인간이라면 애초에 딸을 끌고 오기도 전에 거짓말인 걸 간파하고도 남았겠지. 설령 데려왔대도 살살 구슬리지 않을까? 케일은 서로 경쟁하듯 혀에 기름칠을 하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케일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드리웠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됐나?”

“딸은 금실 못 만드는데?”

“죽는 거냐는데?”

 

케일은 다음 장을 넘겼다. 가엾은 딸을 도와 줄 도깨비가 등장했다. 거래가 확실한 도깨비였다. 딸에게서 대가를 받은 도깨비는 물레를 돌리기 시작했다.

 

“...도깨비는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라는 듯 금빛 실타래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소녀는 울던 것도 잊고 이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느 새 아이들은 다시 책 속의 내용에 집중하고 있었다. 케일은 아이들이 잠들기 전까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읽어주었다.

 

 

 

---

 

 

 

“룸펠슈틸츠헨?”

“네, 뭐... 저하도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산더미 같은 일에 질려 잠시 휴식 겸 사담을 주고받자 했더니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것은 아이들 이야기였다. 알베르는 턱을 괴고 삐딱하게 중얼거렸다.

 

“수습하지 못할 일은 저지르지 말라는 게 교훈인지, 수습하지 못할 일을 저질러도 기적적으로 해결될 수도 있다는 게 교훈인지 아리송해지는 그 동화 말이군.”

“...아시는군요.”

 

좀 의외였다.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외모를 하고 있는 사람이었으나 그렇다고 동화를 잘 알고 있을 거라는 기대는 그다지 하지 않았는데.

 

“뭐, 결국 큰 주제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거겠지. 옛 이야기가 다 그렇긴 해도 어릴 적에 읽고 어처구니가 없었던 기억이 나네.”

 

케일은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 어린 알베르 크로스만이라니.

 

“어떤 부분이요?”

“마법사도 아닌 평범한 사람을 끌고 와 가둬 놓고, 금실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왕이라니. 아버지도 그런 짓은 안 할 텐데, 싶어서.”

 

으음.

케일은 신음을 삼켰다. 과연 알베르가 했을 법한 생각이다만,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함의하고 있는 말이었다. ‘아버지라면’ 이 아닌 ‘아버지도’.

역시 제드 크로스만과는 사이가 좋지 않나.

 

“그 표정 오랜만에 보는군.”

“무슨 표정 말입니까?”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다는 표정.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지?”

 

알베르가 빙긋 미소지었다. 케일은 순간 멈칫했다. 불경함 같은 거야 신경 안 쓴 지 오래라지만, 조금 전 표정을 읽힌 것은 잘못이었다. 그 사실이 알베르에게 치부나 상처일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니까. 케일은 저도 모르게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키며 제 행동을 수습하고자 알베르를 바라보았지만 정작 그는 태연했다.

 

“이해해. 나라도 남의 가정사는 별로 엮이고 싶지 않거든. 원래 권력 좀 있다는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다 그렇잖아? 그래도 헤니투스 가문은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야.”

 

케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데르트와 바이올란을 보고 안심했네. 나야 미운털 박힐 뻔해서 곤란할 때도 있었지만.”

 

무엇이라 대답해야 좋았을까. 사실 그들은 제 진짜 부모가 아닙니다? 뭐라 할 수 없는 답답함이 가슴을 옥죄었지만 케일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말을 건넨 알베르의 표정이 정말로 안심한 표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게는, 그의 표정에 드러난 진심이 너무나 명확해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걱정한 건가.

나를.

 

케일은 알베르가 저와 자신의 과거에서 공통점을 찾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그는 단 한 번도 이 사실을 입 밖으로 낸 적이 없지만, 자신도 깨달은 사실을 그가 몰랐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알베르의 시선은 그 이상의 것이 담겨 있었다. 동병상련 따위로는 설명되지 않는, 몹시 무겁고 커다란 감정.

케일은 자신도 모르게 서류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빌어먹을 세상이었지만 알베르 크로스만은 제 갈 길을 너무나도 잘 만들어가는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완벽했다는 것처럼.

그래서 예정에 없었다. 다섯 권 분량의 활자들 속에서, 굳건히 걸어가는 당신을 보면서... 차라리 동경을 했으면 했지, 이렇게 가까워질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는데.

 

결국 케일은 먼저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이것은 동질감에서 비롯된 애정이다. 당신은 상실의 경험이 있지만 대의를 중시하는 좋은 사람으로 자랐다. 효율적인 해결책을 찾아가는 사고 과정도 닮았고 옳고 그름의 잣대도 같다. 그런 우리가 함께 여러 가지 일들을 헤쳐 왔는데, 내가 당신에게 호감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감정이 없다는 거짓말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알베르의 감정과 자신의 감정이 같아서는 안 된다.

절대로, 안 될 말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서류를 한 열 장쯤 넘길 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 알베르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솔직하지 못해.”

 

자료에 밑줄을 긋던 케일의 움직임이 멎었다. 진한 잉크 자국이 남고 말았다.

 

“제가 좀.”

 

열여덟의 3월부터 케일 헤니투스는 그 삶 자체가 거짓이었다. 이제 와 거짓말을 한 가닥 더 보탠들 얼마나 더 차이가 난단 말인가.

 

 

 

---

 

 

 

이튿날 집무실의 다과는 금홍빛이 감도는 꽃차와 크림 밀푀유였다. 매일 살뜰하게 종류를 바꾸면서도 하나같이 입맛에 맞는다는 건, 여러모로 방문객을 신경 쓰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너무하지 않습니까? 짚을 금으로 만들어 준 도깨비도 보상은 죄다 살뜰하게 챙겨갔는데. 무보수 노동이라니.”

 

결국 케일은 불평을 터뜨리고 말았다. 미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서류의 산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자고 일어난 사이에 하루 분량만큼의 서류가 다시 쌓였다! 오호 통재라, 시장바닥의 빵집도 휴일이 있거늘 로운 왕실에는 공휴일이라는 개념이 없단 말인가.

 

“미안하게 생각하고는 있는데... 자네가 자진해서 왔네만.”

 

알베르가 핵심을 찔렀다. 케일은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제가 스스로 오긴 했지만 제 약점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 아닙니까. 제가 여기 온 건 저하 탓이니까 불평해도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뭐?”

 

약점? 무슨 약점? 알베르로서는 드물게 케일의 머릿속이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빠졌다. 그러나 궤변이든 뭐든 와 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던지라, 알베르는 되묻는 대신 협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좋아. 뭐가 필요해? 너도 장신구 같은 게 필요한 건 아닐 거 아냐.”

 

케일은 정말로 알베르에게 도깨비 같은 존재였다. 아무것도 없는 짚에서 금을 자아낼 수 있는 존재.

 

“저는 룸펠슈틸츠헨이 아닌데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한껏 불경한 태도로 볼멘소리를 하는 케일이었지만 그런 모습마저도 귀엽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도깨비가 요구한 것은 케일이 요구했던 것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어쨌든 기본적으로는 재물 아닌가. 알베르는 제 생애 몇 번 발행해본 적도 없었던 왕국 제일의 백지수표를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이제 황금패는 안 필요한가 봐?”

“돈이라면 이제 꽤 있으니까요.”

“헤니투스 가는 원래도 부유했는데 말이지.”

“그건... 어쩔 수 없지요, 헤니투스의 이름으로 했던 일들이 아니었으니까.”

 

과연. 알베르는 저도 모르게 턱을 괴고 케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역시 올 초에 있었던 일들은 단독으로 벌인 일들이었군. 데르트와 바이올란은 가문의 영광을 위해 아이들을 성 밖으로 내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지. 필요하다면 왕실에 칼이라도 겨누겠다는 기세였던 부부를 떠올린 알베르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네 스스로 자금을 조달했다 이거지. 그것도 나를 상대로 거래를 제시해서.”

 

케일이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알베르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뭐,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았잖습니까.”

“나쁘지 않다마다.”

 

케일을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알베르는 믿지도 않았던 신에게 감사하다고 기도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디서 이런 존재가 툭 떨어졌나 하고. 차라리 굴러들어온 복덩이 정도의 생각에서 그쳤다면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가까워질수록 알게 되는 그의 본질이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워서 곤란했다.

 

“걸 수 있는 게 고작 황금패 뿐입니까?”

“로운의 백지수표를 고작이라고 칭하는 건 세상에 너밖에 없을 거다.”

 

알베르는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문제였다. 정말 문제였다. 이런 당돌한 모습도 마음에 드니 어쩌면 좋지.

 

“하지만 정말로 줄 것이 없군. 자네에겐 모든 게 다 있잖아.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지위나 명예 같은 건 오히려 질색할 게 뻔하고, 사치를 부리는 것도 아니고. 너는 늘 내게 세상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백수 시켜주신다면서요.”

“그게 문제야. 이렇게 자원해서 일을 해 주니 백수와는 되레 멀어졌는데, 그걸 보상해 줄 길이 없군.”

 

흠. 케일은 서류로 입을 가린 채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왜 내가 여기서 일을 하고 있지.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질문에 미간을 좁히던 케일은 그가 찾을 수 있는 가장 정답에 가까운 말을 찾았다.

 

“그러게 왜 매번 통신 때마다 얼굴이 그 모양입니까.”

“뭐?”

“그런 얼굴로 통신을 걸어오면 누구라도 도와주고 싶어질 겁니다. 저하가 나빠요.”

 

예상치 못한 말에 알베르는 대답을 찾지 못하고 두 눈만을 깜박였다. 약점 운운했던 게 이 이야기였나.

 

“그러니까. 지금 여기 온 이유가... 내가 피곤해 보여서? 그런 이야기야?”

 

끄덕. 케일의 고개가 얕게 움직였다. 붉은 머리카락이 함께 흔들리며 케일의 눈가를 가렸다. 알베르는 당혹감에 이마를 짚었다. 가슴에 불화살을 꽂아 넣은 듯 한순간에 홧홧한 기운이 올라왔다. 간신히 입이 열렸다.

 

“네가 약한 사람에게 약하다는 건 알고 있어. 그렇지만... 그래, 그게 나에게까지 해당되는 줄은 몰랐군.”

“동감입니다. 저도 별로 알고 싶지 않았어요.”

 

알베르는 웃어버렸다. 그러나 그 웃음은 이내 한숨과 함께 사라졌다. 웃음의 끝이 한숨이었다. 기뻤지만, 동시에 괴로웠다. 웃음도 한숨도 사라지고 나자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함이 감돌았다.

 

“케일. 이러지 마. 나 진짜 피 마르는 기분이야.”

“마음대로 착각하는 거 꼴사나우니까 그러지 마십시오. 거 사람이 동정도 좀 할 수 있는 거지.”

 

언뜻 보기에 케일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낮게 가라앉은 두 눈이 머리카락이 드리운 그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손의 떨림이 계속된 필기 때문에 근육이 지친 탓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믿는다면,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알베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부분까지 비슷할 필요는 없을 텐데. 알베르는 몸을 의자 등받이로 물리며 결국 참았던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맞아. 동료로서 아낄 수는 있지. 하지만 석 달 전에 차인 사람에게 이러는 건 좀 너무한다고 생각해.”

 

사각거리던 펜의 소리가 뚝 멎었다.

 

“그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지. 미안해. 내가 실언을 했군.”

 

케일은 알베르를 홱 돌아보았다.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한 그의 얼굴은 평온했고 어떠한 미련의 조각도 찾을 수 없었다.

알베르는 이 순간, 평생을 갈고닦아 온 제 연기력이 달가우면서도 동시에 원망스러웠다. 아무렇지 않은 척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제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정도의 감정을 억지로 누르는 것은 몹시 괴로운 일이다.

유일하게 가면을 벗고 마주할 수 있었던 상대였다. 하지만 상대방이 원치 않는다면 얼마든지 다시 뒤집어쓸 수 있다. 그가 괴로워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서로의 진심을 정말로 모를 수 있을까? 모른 체 한다고 정말로 마음이 평온해질 수 있나?

 

먼저 눈을 돌린 것은 케일이었다. 케일이 시선을 돌린 것을 확인한 알베르 역시 시선을 종이 위로 떨어뜨렸다. 호흡을 가라앉히기 어려웠다. 늘 선을 긋고 밀어내는데도 상대방의 마음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가 너무나도 잘 읽혔다. 그 사실이 매번, 알베르를 몹시 곤란하게 만들었다.

 

 

 

---

 

 

 

꿈속의 자신은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알베르는 작은 손을 천천히 쥐었다가, 펴 보았다. 아이의 갈색 눈망울이 깊게 가라앉았다.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하며 연습했지만 되지 않는다. 아. 또 그 악몽이구나.

 

최근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벌써 이틀이나 연달아 같은 꿈을 꾸고 있다. 퍽 오랜만의 일이었다. 케일을 만나고 전쟁을 준비할 즈음부터는 꾼 적이 없어 이제 다시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알베르는 천천히 뒤를 돌아 벽면의 거울을 마주했다. 찬란한 금발과 푸른 눈은 간 데 없고, 어머니보다도 더 짙은 피부색을 가진 아이만이 거울 속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셀 수 없이 반복되었던 꿈의 내용은 거의 항상 비슷했다. 유리창이 많은 왕세자궁의 어느 방에서 시작한다는 점과, 무슨 수를 써도 외모가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거울 속 아이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동시에 이 꿈에서 자신이 늘 무력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복도를 가로질러 사용인들이 방문을 젖히고 들어오면, 그 날과 마찬가지로 비명이 온 세상을 울리겠지. 결말은 늘 한결같았다. 이미 세상에 없는 이의 죽음을 몇 번이고 바라보며, 죽은 이는 되살리지 못한다는 고대의 힘을 저주하며...

 

괜찮다.

알베르는 거울을 바라보며 애써 미소 지으려 했다. 그러나 힘이 풀린 아이의 몸은 휘청이더니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괜찮을 것이다.

괴롭긴 하지만 다 끝난 일이니,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모두 또 한 차례 겪고 나면 아침이 되어 있을 것이고, 피로한 얼굴을 한 차례 쓸어올리는 것으로 악몽의 잔해를 털어내는 알베르 크로스만은 이미 스물다섯의 왕세자일 테니까.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몹시 가까웠다. 악몽의 정해진 순서대로 이 소리가 끝나고 나면, 궁의 누군가가 이 모습을 발견하며 파국으로 치닫겠지. 알베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음 순간, 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나 두려움은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평소와 달리 다가오는 발소리가 작고 가벼웠다는 것을, 알베르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비명도 물건을 떨어뜨리는 소리도 없이 고요한 침묵이 이어졌을 때였다.

 

“안녕?”

 

알베르는 뒤를 돌아보았다. 눈앞에 보인 것은 열 살 남짓의 어린아이였다.

갑자기 달라진 꿈의 흐름이 낯설었다. 흑백의 대비가 선명한 아이가 신기했다. 뽀얀 얼굴에 어두운 빛 눈동자와 머리카락을 가졌다. 상의에 받쳐 입은 옷은 하얀 셔츠인데 드러난 것은 일부 뿐, 겉은 죄다 까만 옷으로 둘러싸였다. 심지어 타이마저도 검다.

 

“힘들어 보이네.”

“.....”

 

알베르는 묵묵히 아이를 응시했다. 로운에서는 쉽게 보기 어려운 외모였다.

 

“너는 누구지?”

 

내뱉은 질문에 이번엔 아이가 침묵했다. 한참만에야 아이는 대답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하지 않다고?”

“내가 누구인지가 뭐가 중요하지?”

 

알베르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건 원래 중요하단 말이다. 나 자신과, 상대방과, 그를 둘러싼 모든 환경을 철저하게 파악할 것. 그것이야말로 살아남기 위한 첫걸음이다. 그것이 꿈이든, 현실이든.

 

“궁에 정체불명의 낯선 이가 돌아다니는데, 그 신원이 어떻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지?”

 

날이 선 알베르의 질문에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작게 웃었다. 어려도 왕세자는 왕세자구나. 마치 자신을 알고 있는 듯 중얼거린 아이가 말을 이었다.

 

“안심해. 너를 해칠 생각으로 온 게 아니니까. 지금 내 정체보다도 더 중요한 건, 앞으로 일어날 일 아닌가?”

 

말을 마치는 아이의 표정이 사뭇 어두웠다. 그 말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복도 너머를 울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알베르의 표정도 그늘이 드리워졌다. 점점 가까워지는 이 발소리는, 이번에야말로 성인의 그것이다.

 

알베르는 다시 죽은 마나를 피워올리려 했지만 몸에서는 역시나 아무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빌어먹을 악몽 같으니.

 

“도와줄까?”

 

시선이 마주쳤다. 빛을 등진 눈동자 안에 담긴 생각을 읽기 어려웠다. 아니, 알 것도 같은데 모르겠다. 늘 같은 흐름에, 지긋지긋한 불청객과도 같던 꿈에 변수가 나타났다.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을, 알고 있는 것도 같다.

 

“네가?”

“그럼 여기 너랑 나 말고 누가 있는데?”

하. 알베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변수가 생겨 봤자 악몽은 악몽이라는 걸까. 꿈속의 저보다도 작은 체구를 가진 아이에게 도대체 무슨 도움을 바란단 말인가.

 

“숨기라도 할 셈인가? 이 방은 사방이 거울이다. 가구도 별로 없고.”

 

유리창과 거울이 벽면을 가득 채운 이 곳은 본궁의 홀 일부를 본뜬 방이었다. 해가 뜨면 눈부시게 찬란할 이 방은, 태양신의 가호가 내리듯 화려한 빛 자체가 화려함을 더한다지만 지금의 자신에게는 그저 재앙이나 다름없는 장소에 불과했다.

 

“물리적으로 숨을 필요가 있나? 짚도 황금실로 만들어 주는 게 도깨비인데 이게 뭐 대수겠어.”

“뭐?”

 

도깨비?

짚을 황금실로 만들어 주는?

문득 무엇인가 생각날 듯 말 듯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아이는 생글 웃었다.

 

“그 누구도 태양신의 가호를 의심하지 못할 금빛을 드리워 드리죠, 저하.”

 

짓궂어 보이는 아이의 웃음은 누가 보면 사악하게 웃는다며 호들갑을 떨 것만 같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따뜻한 물 같은 것이 끼얹어진 느낌이 들었다. 생경한 감각이 채 사라지기도 전이었다. 커다란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저하.”

“.....”

 

시종장과 알베르의 시선이 마주쳤다.

 

“여기 계셨군요. 한참 찾았습니다.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올해 환희의 궁 증축에 대해 전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시는군요.”

 

알베르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전개는 처음이었다.

그를 따라나서기 전, 알베르는 주위의 거울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본래의 모습은 간 곳 없이 크로스만 왕가의 역대 초상화들과 다를 바 없는 금발벽안의 자그마한 아이는 누구보다도 당당해 보였다.

 

그러나 온통 까만색을 두르고 있던 작은 아이, 아니, 도깨비는 거짓말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

 

 

 

왕실 행사에서 쓰려고 생각해 둔 팬던트가 있었다. 붉은 빛이 선명한 루비가 마르퀴즈 컷으로 세공된 팬던트였다. 검붉은 루비 외에는 별다른 장식도 없이 수수한 편이었으나 검은 셔츠든 흰 셔츠든 그 위에 늘어뜨리면 쉽게 눈에 띄리라. 브로치를 달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평소 알베르가 팬던트를 자주 매는 편이 아니었으므로, 그보다는 이쪽이 더 이목을 끌 수 있을 것 같았다.

붉은 색. 현재 로운에서, 아니 서대륙 전체에서 왕세자 알베르 크로스만이 지닌 붉은 색이 있다면 그것의 함의는 단 하나뿐이다.

하지만.

 

“저, 그것이.”

 

방을 정리했던 하인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다른 시간대에 이 방을 찾아온 이들도 모두 조사했지만 그 팬던트를 본 이가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허.”

 

누가 감히 간도 크게 왕실의 보석을 훔친단 말인가. 알베르는 턱 아래에 손을 괸 채 비뚜름한 미소를 올렸다. 그 미소를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불려온 이들 모두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팬던트가 사라졌다, 라.”

 

말로 하지 않아도 중요한 행사에서 걸치는 옷과 장신구 하나하나는 입이고 얼굴이 되어 자신의 뜻을 알린다. 사라진 루비는 알베르의 소유로 되어 있는 보석 중에서는 케일의 머리카락 빛과 가장 닮은 것이었다. 케일 헤니투스가 제 사람임을 못박아두겠다는 의도를 읽은 누군가가 일부러 벌인 짓인가? 아니면...

 

“릴케.”

“예.”

“내가 며칠 전 준비하라 일러 둔 팬던트를 대신할 수 있는 다른 물건이 있나?”

“3년 전 제국에서 보냈던 루비 팬던트가 있습니다. 크기는 조금 더 크지만...”

“제국에서 ‘하사’한답시고 보냈던 걸 쓸 만한 시기는 아니지. 기각해. 강옥을 구하기 어려우면 첨정석 종류라도 상관없다. 최대한 같은 색으로 맞춰.”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알베르는 생각에 잠겼다.

없어진 것을 알아챈 것은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조사하면 할수록 기이한 느낌을 주는 사건이었다. 그 어떤 시간과 조건에서도 누군가 팬던트를 훔칠 수 있는 빈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지간히 계획적으로 트릭을 쓴 게 아니라면 거의 자연적으로 사라진 수준이다.

평소 같았으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을 일말의 가능성이 알베르의 머릿속을 스쳤다.

 

“컬리넌. 도서관까지 다녀올 수 있도록 일정을 조율해주게. 잠깐이면 되니까.”

“도서관이요?”

 

상관관계가 없는 알베르의 통보에 비서가 잠시 눈을 깜박였다.

 

“그래. 도서관.”

 

다소 뜬금없기는 했지만 그의 상사는 대상을 흘끗 쳐다보는 것만으로 수만 가지 계산을 끝내는 사람이었다. 비서는 두말없이 곧 채비를 끝냈다. 왕실 도서관은 본래도 왕세자가 자주 오가던 곳 중 하나였다. 물론 그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로운 제일의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는 그 곳에서, 제 상관이 설마하니 동화책을 살펴볼 것이라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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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펠슈틸츠헨.

알베르가 집어든 것은 각지의 설화를 연구한 서적도 아니고, 삽화를 곁들여 얇게 만들어진 동화책 한 권이었다. 얼마 전 케일과 나눈 대화 덕분에 보다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설령 그 대화가 없었더라도 언젠가는 찾았으리라. 그냥 넘기기에는 도깨비가 던진 단서가 너무나도 명확했다.

 

짚을 황금실로 만들어 주는 도깨비.

알베르는 이 동화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오래 되어 기억이 희미하지만, 처음 도깨비가 거래의 대가로 요구한 것은 분명 장신구였다.

 

알베르는 흘끔 저를 뒤따른 이들을 곁눈질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혼란이 번져 있었다. 처음에는 서가를 잘못 찾은 게 아닌가 고민하는 얼굴이더니 이제 웬 동화책이냐며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이다.

뭐 궁금해도 지들이 어쩌겠어.

알베르는 그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제 할 일을 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무언가를 떠올린 알베르의 입가에 호선이 머물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럴듯한 구실을 붙여 이용해볼까. 알베르는 시선을 책에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케일 공자가...”

“네?”

“어린 아이들을 거두어 데리고 있다는 말이 있더군. 무척 아끼는 것 같아서 말이네.”

“아.”

 

알베르는 책장을 팔락팔락 넘기면서 내용을 확인했다. 동화여서인지 각 낱장에 실린 활자의 수가 많지 않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과연, 첫 요구를 들어준 뒤 도깨비가 요구한 것은 목걸이가 맞았다. 그런데 이 책 삽화, 왜 이렇게 도깨비를 괴상하게 그려 놨어?

제 꿈에 나온 도깨비 아이를 떠올린 알베르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그러고 보니 그, 일전에도... 사령관에게 다과를 챙겨 주셨지요.”

 

인간이란, 제가 보는 대로 주어진 정보를 해석하기 마련이다. 자신이 던진 말이 즉각 효과를 발휘함을 느끼며, 알베르는 책장을 탁 소리가 나게 덮었다.

 

그런 일이 있었지. 시종들이 추측한 대로 아이들도 주라며 넉넉하게 챙겨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중 대부분이 케일을 위한 것이었으니 진실은 아니다. 심지어 이들은 온과 홍, 라온의 존재를 잘 모르고 있을 테니 더더욱.

알베르는 다과를 챙겨 갔던 날 저녁의 영상 통신을 떠올렸다. 케일과 아이들이 과자를 나눠먹고 있었다. 그 풍경이 당일 회의실에서의 모습과 퍽 대조적이었다. 그 날은 케일과 알베르가 한 차례 귀족 회의를 ‘뒤엎은’ 날이었다.

회상하던 알베르는 저도 모르게 킥 하고 웃었다. 그 살벌하고 압도적인 분위기를 내뿜는 사령관이 사실 어린아이들과 꼭 닮은 입맛의 소유자라니. 귀엽잖아.

 

“...정말 두 분께서 각별한 사이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알베르는 대수롭지 않게 시종의 대답을 흘려넘겼다. 앞서 걷던 알베르는 뒤따르는 자들의 표정이 변화하는 것까지는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공자가 거둔 아이들을 챙길 만큼 무척 친하신 모양이다, 세상에 선물할 동화책을 직접 살뜰히 살펴보시더라, 어찌나 사이가 돈독하신지 케일 공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 저하께서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리시더라.

뭐 그런 이야기가 돌게 된 것을 알베르가 알게 된 것은 꽤나 나중의 이야기였다. 어느 정도는 의도했던 행동이었으니 신경 쓸 것도 없었지만.

 

 

 

---

 

 

 

또다.

알베르는 주변을 둘러싼 거울을 보며 생각했다. 다시 반복된 꿈은 늘 그랬듯이 제 능력을 속박했다. 죽은 마나는 마음대로 다루어지지 않았고 희미하게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이 온 방 안을 화려하게 밝혔다. 금빛 아침 햇살 사이에서 오롯이 자신만이 어둠의 색을 두르고 있었다.

 

“이번에도 도와줄까?”

 

알베르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너는 몽마인가?”

“허? 몽마라니. 나는 도깨비야. 처음 만났을 때 말했잖아.”

 

그거나 그거나. 알베르는 갑갑하게 목을 채운 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리고 벼르던 대로, 도깨비에게 제 손을 펼쳐 내밀었다.

 

“뭐야?”

 

도깨비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알베르는 손을 내민 채 말했다.

 

“내놔.”

“무엇을?”

“팬던트.”

 

네가 가져갔잖아.

당당하게 내밀어진 작은 손을 바라보던 아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말하는 거야?”

 

어느새 아이의 목에는 붉은 팬던트가 둘러져 있었다. 사라졌던 루비였다.

 

“그래, 그거. 너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이 불려가 곤혹을 치를 뻔 했어.”

 

알베르의 말에 아이의 움직임이 잠시 멈추었다.

 

“그건... 잘못했네.”

 

의외였다. 도깨비는 무엇에 찔리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야기 속 도깨비라는 녀석들이 원래 이런 성정을 가지고 있었던가. 그러나 마음대로 행동한 것은 도깨비였고, 도깨비의 양심 사정 따위 알베르가 알 바는 아니었다.

 

“대가로 이 정도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처음에 비해 어딘지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알베르는 단호했다.

 

“대가가 필요하다는 말도 한 적 없잖아. 그리고 난 도와달라고 한 적도 없어.”

 

알베르는 아이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가까이 가 보니 생각보다도 더 체구가 작았다.

 

“그렇지만 나쁘지 않았잖아.”

“멋대로 도와주지 않았어도 해결될 일이었어.”

“어떻게? 네가 폐위되는 것으로?”

 

냉소적인 아이의 말에 알베르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폐위.

그것만으로 끝나면 다행이지.

 

“그래. 폐위든 뭐든. 꿈이니까 그 정도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이건 현실이 아니니까.

 

단호하게 내뱉는 알베르의 말에 도깨비라고 주장하는 아이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상관없다고?”

 

알베르는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당당하게 맞받아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잔뜩 찌푸린 아이의 표정을 보자, 차마 그렇다는 대답이 떨어지질 않았다.

 

“하긴, 그래, 꿈이니까...”

 

말끝을 흐리는 아이의 얼굴은 보통의 어린아이들에게선 보기 힘든 느낌이 있었다. 알베르는 곤혹스러워졌다. 이쪽에선 잘못한 게 없는데 왜인지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케일에 대한 일을 제외하곤 이렇게 비이성적인 감정의 흐름을 겪을 일이 드문데. 꿈이라 그런가.

 

“알았으면 다시 돌려줘.”

 

알베르는 다소 떨떠름한 기분으로 재차 손을 내밀었다. 금방이라도 손 위에 놓일 듯 보석이 가까워지고 짙은 붉은빛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러나.

 

“싫어.”

 

노을빛 보석은 아이의 품속으로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뭐?”

“싫어. 이건 내 거야.”

 

뭐 이런 경우 없는 도깨비가 있나.

 

“제멋대로 도와준 뒤 말도 없이 물건을 훔쳐가 놓고, 소유권을 주장하겠단 건가? 도대체가 어린애 생떼도 아니고...”

 

아. 알베르는 말하다 입을 다물었다. 어린애 맞잖아.

알베르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가늘게 뜨며 아이를 관찰했다. 보송보송한 피부와 자그마한 체구를 가진 아이는 보석을 내밀던 손목조차도 얇았다.

 

“너에겐 어떨지 몰라도 나에겐 중요한 물건이야.”

 

알베르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타이르듯 말했다. 상대방이 어린아이임을 인지하자 어조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책이 그랬던가. 도깨비란 본디 고집이 센 족속이라고.

 

“중요해, 나에게도.”

 

아.

알베르의 얼굴에 설핏 짜증이 비쳤다.

 

“너에게 이게 중요하다고?”

“네게 중요한 만큼이나 중요하지.”

 

말이 안 통한다.

 

“차라리 다이아몬드를 가져가. 에메랄드라거나.”

“하얀색은 필요없어. 초록색도 의미가 없고.”

 

색.

알베르는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다.

광택도, 가치도 아닌 색을 말하는 도깨비를 바라보는 알베르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수많은 팬던트들 중 저 팬던트가 선택된 것은 오로지 그 색채 때문이었다.

꿈 속의 이방인은 정말로 도깨비인가?

 

...그럴 리 없지 않은가.

 

“너는 누구지?”

 

질문을 받은 아이는 낯익은 미소를 그렸다. 웃지 않는 눈 아래 오로지 붉은 입술만이 호선을 그렸다.

 

“제 이름은 저하가 알아내셔야지요.”

 

동화도 뭣도 아닌 꿈의 끝에는 그 목소리만이 남았다.

 

 

 

---

 

 

 

케일은 홍차를 홀짝였다. 왕성에서 마신 것과는 달리 새콤한 과일 향이 가미된 차였다. 시트러스 계열의 향이 날 뿐 정말 신 맛이 나는 건 아니니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케일은 론을 흘끔 바라보았다. 사람 좋게 웃어 보이는 눈웃음을 본 케일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케이지 씨. 부탁드렸던 대로 여쭤 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혹 저주 중에...”

 

케일이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주의가 흐트러진 두 사람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저택은 여전히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늑대족 아이들과 평균 아홉 살의 아이들이 달려가는 모습이 멀리서도 잘 보였다.

훈련을 하는 건지, 노는 건지. 정확히 무엇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의 표정도, 목소리도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거면 됐지. 케일의 입에도 미소가 머물렀다.

 

“오늘도 활기차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그래서 하시려던 말씀이?”

 

아.

케일은 다시 질문을 이어나갔다.

 

“혹, 악몽과 관련된 저주가 있습니까?”

“어머. 많죠.”

 

케이지는 산뜻하게 대답을 이어나갔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도 짧아진 머리카락이 그녀의 모습과 무척 잘 어울렸다.

 

“보자... 꽤 상급의 저주 중에는 꿈속의 죽음을 통해 영원히 가사상태에 빠뜨리는 것도 있고요.”

 

해사한 얼굴과는 달리 그녀가 입에 담은 말은 산뜻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케일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하하. 케일 공자라면 그런 저주에 걸려도 제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케이지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케일은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한 말씀이군요.”

“뭘요.”

 

과연 죽음의 신. 생각보다 무시무시하잖아? 케일은 괜히 목이 타는 기분에 연달아 차를 들이켰다.

 

“그러면 저주에 걸렸는지도 확인할 수 있습니까?”

“음... 강한 저주에 걸린 사람일수록 확연한 죽음의 기운을 풍기죠. 누구 아는 사람이 저주라도 걸렸나요?”

“아닙니다. 그냥 전부터 궁금했거든요.”

 

저주는 아닌 모양이군.

케일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미소지으며 그녀의 말을 넘겼다. 그러나 케이지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의 입가에 묘한 웃음기가 머물렀다.

 

“그런 말 쉽게 믿기에는 공자가 벌여온 일들이 하나같이 좀 어마어마했어야지요.”

 

케일은 짐짓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딱히 대단한 일도 안 했는데요.”

“농담이죠?”

“진담입니다. 전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인데, 제발 잊어 줬으면 좋겠습니다. 좀 쉬게.”

 

전쟁이 끝난 지도 한참인데 이 평화로운 세월에 영웅 같은 게 왜 필요하냔 말이야. 말하다 보니 더욱 진심이 우러나와 케일의 미간에 얕은 주름이 패였다.

그러자 케이지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도대체 어느 부분이 재미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쉽진 않을 걸요.”

“지지라도 해 주시죠.”

“물론, 공자님의 꿈은 늘 응원하고 있답니다.”

 

정말이에요. 케이지는 간식으로 내어 놓은 아몬드 쿠키를 입 안에 넣었다. 와그작, 하고 견과류가 부서지는 소리가 유난히 경쾌했다.

 

---

계획한 예장은 차질 없이 준비되었다. 크라바트 위로 드리운 붉은 팬던트는 꽤 거리가 있는 곳에서도 그 빛깔이 확연했다. 홀에서 잔을 기울이고, 부채로 입을 가리고, 서로를 곁눈질하던 그 모든 이들이 그 날 왕세자의 의도를 읽었다. 아니, 그냥 보였다. 모를 수가 없었다. 경외와 시기, 존경하는 시선이 한데 엉켜 진득하게 따라붙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감히 그의 의중에 대해 말을 얹지 못했다. 알베르는 그 점이 만족스러웠다.

 

“아. 어서 오게, 케일 공자.”

 

밤늦게 계속되는 연회가 피곤했는지 케일의 표정은 다소 불만스러운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러나 알베르가 말을 건네자마자, 증발해버린 불만 대신 공손한 몸가짐과 우아한 미소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오늘도 왕국의 별이신 저하께서는 이 자리를 빛내시는군요.”

“아무려면 자네만 할까.”

 

누가 보아도 절친한 두 사람이었으나 알베르는 짧은 순간, 케일의 표정에 스친 그늘을 읽었다. 그의 시선이 붉은 보석 위에 머물러 있었다.

굳이.

케일의 암갈색 눈동자가 침잠해가는 것을 깨달은 알베르가 입을 열었다. 두 사람만이 알아들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였다.

 

“더 이상 숨길 수는 없어. 드러내서 꺾는 수밖에.”

 

앞뒤가 모조리 생략된 말이었지만 케일은 알아들었다.

오랜 시간, 두 사람은 케일 헤니투스의 흔적과 영향력을 숨기거나 지우고자 했고 대부분은 성공했다. 그러나 한계까지 했음에도 케일을 걸고넘어지는 세도가들은 끝이 없었다. 그런 귀족들에게는 차라리 대놓고 공고한 유대를 과시해 기대를 무너뜨리는 것도 방법이리라. 상대할 수조차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전후 사정을 다 알고 이해하는 것과 제 마음이 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케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드러내서 꺾는 데 이런 연출까지 필요하단 겁니까?

-이왕이면 확실하게 해야지.

 

케일은 짧은 숨을 삼켰다. 한숨을 내쉬려다 주변을 의식해 참은 것이리라.

 

“왕국민의 자랑이신 저하.”

 

알베르는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노을보다는 한낮의 태양이. 한낮의 태양보다는 자애로운 밤이 더 아름답지요. 보십시오. 참으로 아름다운 밤이 아닙니까.”

 

그들의 대화를 들은 수십의 눈동자가 그 의중을 파악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 사이에서 알베르만이 너털웃음을 쳤다. 웃음으로 무마하려 했지만 케일은 여전히 눈빛으로 제 뜻을 피력했다.

 

-오늘만 참습니다. 왕실 행사에서 붉은 색을 한 번만 더 썼다가는 가만 있지 않겠습니다.

 

생글생글 웃는 눈이건만 어쩌면 그리도 날카로운 빛을 쏘아대는지.

 

“그렇군. 참고하도록 하지.”

 

알베르는 술잔에 가볍게 입술을 대며 그의 말을 곱씹었다.

붉은 빛보다 드러내야 할 것은 크로스만의 황금빛. 그러나 진실로 그들이 써내려갈 새 이야기는 더 이상 숨지 않아도 되는 밤의 이야기이다. 케일은 분명히 제 말 끝에 노을도, 태양도 아닌 밤이라고 못을 박았다. 오롯이 제 본질을 아는 이의 숨은 뜻이, 제 진짜 모습을 아름답다 하는 그의 다정함이 숨막히도록 달콤했다.

 

 

 

---

 

 

 

늦게까지 이어진 연회 덕분에 케일의 얼굴에는 피로함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론의 도움을 받아 몇 겹으로 입은 예복을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케일은 그대로 침대 위에 드러누워 버렸다.

 

“많이 피곤하냐는데?”

“어.”

“그래도 씻고 자야 한댔는데.”

 

누가?

 

“저번에 약한 인간이 그랬다. 아무리 피곤해도 씻고 자야 한다고.”

 

아.

케일은 표정을 잔뜩 찡그렸다. 그런 일이 있었지. 길게 한숨을 내뱉던 케일은 결국 일어났다. 얼마 전 도토리를 줍는답시고 숲을 굴러다녔던 아이들을 안아들고 강제로 씻겼던 적이 있다. 피곤해도 씻고 자야 한다고? 어쩐지 어디서 들어 본 말 같더라니 그 말을 한 장본인이 자신이었다.

...애들 앞에선 찬물도 못 마신다는 말이 딱이군.

 

“물은 받아 놓았습니다. 그 동안 수면에 좋은 차라도 준비해 드릴까요?”

“어. 그래 줘.”

 

케일은 터덜터덜 욕실로 향했다. 문득, 입구에 걸린 커다란 거울 속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붉은 머리카락.

 

이 세계로 떨어진 후 종종 자각하는 사실이 있었다. 서대륙에서 그리 찾기 어려운 편도 아니건만, 사람들은 케일의 붉은 색에 대해 상당히 강한 인상을 받는 모양이었다. 물론 가문의 다른 이들에 비하면야 확실히 눈에 띄는 색이었지만, 이런 피 같은 색이 뭐가 좋다고.

 

케일은 거울을 가만히 짚었다. 몇 시간 전의 연회가 떠올랐다. 알베르의 목에 걸려 있던 붉은 팬던트가 어른거리는 듯했다. 그것을 발견했을 때의 제 감정은 너무나 복잡해서 도무지 정리를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그가 목걸이를 해 주길 바랐던 걸까, 아니면 하지 않기를 바랐던 걸까.

 

그 자리에, 붉은 보석 대신 새카만 오닉스를 달아 주고 싶었다. 붉은 색은 본래 자신의 색이 아니었으니까. 검은 보석은 알베르 자신을 드러내는 상징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 자신이 밤이 내려앉은 자들의 후손이었으므로.

 

“역시 머리카락을 좀 자를까...”

 

케일의 중얼거림에 세 아이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자를 거냐는데?”

“우리 처음 만났을 때처럼 짧아지냐는 건데?”

“물론 약한 인간은 어떤 모습이든 잘 어울린다! ...그런데 진짜 자르나?”

 

한달음에 발치로 달려오는 아이들 덕분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케일은 자세를 낮추어 아이들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금은 아니고.”

 

종종 아이들은 제 머리를 땋거나 묶곤 했다. 어차피 누워 있을 때의 일이고, 아이들이 좋아하니 늘 내버려두던 케일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머리카락을 자른다 한들 사람들이 새삼스레 붉은 색을 머릿속에서 지워줄 것 같지도 않다.

 

“너희도 씻을 거야?”

“우린 다 씻고 잘 준비 하고 있었는데.”

 

하기사 그럴 시간이지. 케일은 아이들을 들고 도로 침대로 향했다. 세 아이를 폭신한 이불 위에 내려놓자 시트 위로 작은 주름이 잡혔다.

 

“졸리면 먼저 자.”

“기다릴 건데!”

“막내랑 책 읽을 거라는데!”

“늦게 자면 못써.”

 

그 말에 온이 눈매를 가늘게 해 보였다. 케일이 할 말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온의 얼굴은 케일의 양심에 큰 타격을 입혔다.

보호자가 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빨리 올게.”

 

어쩔 수 없다는 듯 덧붙이자, 아이들은 그제야 만족한 것 같았다. 옹기종기 모인 꼬리 셋이 살랑거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

 

 

 

알베르는 탁자에 앉아 도깨비를 기다렸다. 며칠 만에 다시 같은 꿈을 꾸게 되었지만 예전처럼 좌절감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흥미가 동했다. 이쯤 되면 악몽이라 부르기도 애매하다.

 

“오늘도 변장이 잘 안 돼?”

 

알베르는 고개를 돌렸다. 어느 새 나타난 도깨비가 반가웠다.

 

“그런 것 같네.”

 

알베르는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미소를 본 도깨비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저 도깨비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곤 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알베르는 가뿐하게 바닥으로 내려와 아이에게 다가갔다. 이걸로 꿈속의 도깨비와는 세 번째 만남이었다.

 

“그런 것 같은 건 또 뭐야?”

“아직 안 해 봤거든. 기다려봐.”

 

알베르는 손을 들고 집중해 보았지만 역시 변화는 없었다.

 

“응. 안 되는 거 맞나 봐.”

 

도깨비의 얼굴에 기가 막혀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해 보지도 않고 모르는 사람... 아니, 도깨비만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러는 너도 굳이 또 찾아왔잖아?”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피차 도토리 키 재기인 상황이었다. 알베르는 아이를 탐색하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너... 그 옷은 상복인가?”

 

도깨비는 그제야 제 옷차림을 알아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보며 알베르는 자신이 생각했던 여러 가설 중 하나를 소거했다.

죽음과 관련 있는 무언가가 아닐까, 자신을 해하려는 자의 저주인가. 낮 동안 수많은 의심을 떠올렸지만 눈앞의 아이는 묘하게 어리숙한 면이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가는 도깨비였다. 그 정체는 여전히 불분명한데도.

 

아이는 제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아이의 얼굴에 착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왜인지 열 살 배기 아이가 아니라 삼십 년은 산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오닉스가 낫겠다는 말은 취소야.”

“뭐?”

 

도깨비는 알 수 없는 말을 툴툴거리더니 알베르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역으로 아이가 알베르를 훑어보고 있었다. 이윽고 도깨비가 알베르의 손을 가리켰다. 알베르는 아이의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제 손을 들어올렸다. 도깨비의 의중은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반지?”

“응.”

 

소재가 착실하게 이야기의 흐름을 밟고 있었다. 알베르는 제 손에 끼고 있던 것을 내려다보다 아이를 곁눈질했다.

 

“그러면 너는 또, 내게 금빛을 입혀줄 건가?”

“물론이지.”

 

첫 대가가 목걸이였으므로, 조금은 예상했던 일이었다.

도깨비가 가리킨 반지는 왕가의 인이 찍힌 반지였으나 국새로서의 기능은 없다. 그보다는 더 상징적이고 장식으로서의 용도가 강한 반지다. 세자 책봉식 전후에야 종종 소지하곤 했으나 그마저도 실무를 보기 시작한 이래로는 거의 끼지 않던 것이었다.

사라진다 해도 알아챌 사람이나 있을지.

 

“정말 이걸로 되는 건가? 이건 화려한 보석도 없는데.”

“응, 그거면 돼.”

“좋아.”

 

알베르는 제 손가락에 있던 반지를 빼어 도깨비에게 건넸다. 아이는 반지를 받아 제 손에 끼웠다. 그러나 주인이 바뀐 반지는 알베르 자신이 가졌을 때와는 전혀 다른 손가락에 자리잡았다. 알베르의 갈색 눈이 옅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약지?

 

노골적인 시선이 이어졌음에도 아이는 눈치 채지 못한 것처럼 반응이 없었다. 제가 낀 반지에 온 신경이 쏠린 것 같았다. 들어올린 왼손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표정이 평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아이의 손은 그리 좋은 모델은 아니었다. 애초에 아이의 몸집은 알베르보다도 더 작았고, 그런 아이가 검지에 끼었던 반지를 약지에 끼었으니 맞기는커녕 손을 내리는 순간 쑥 빠질 터였다.

 

그럼에도 굳이 왼손 네 번째였다.

 

“너 의미는 알고 끼는... 후, 아니다.”

 

알베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깨비에 어린 아이다. 인간이 부여한 장신구의 의미 정도는 모를 수도 있지. 그래.

 

“...”

 

정말 모를까?

알베르는 전에 없이 아이의 눈에 생기가 돈다는 느낌이 들었다. 표정은 한 곳에 집중하느라 살짝 풀려 있는데도.

아이의 집중한 시간을 따라 꿈의 시간도 멈춘 듯했다. 정지한 풍경 속에 이성의 끝으로 붙들어매지 못한 감정의 파편이 부유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도 반지를 끼워 줄 수 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저 아이처럼.

 

나이대도 전혀 다르고 얼굴 생김 하나하나 비슷한 데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건만, 아이의 무표정한 얼굴이며 웃는 입매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몹시도 닮았다. 그래서 그 말간 얼굴이 맞지도 않는 반지를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을 때-

저도 모르게 상상해 버리고 만다. 그 녀석도 저런 표정을 지을까, 하고.

 

이 무슨 바보 같은 짓인지.

 

“많이 크긴 하네.”

 

...좀 심하게 컸다.

 

“그래도 좋아. 맘에 들어.”

 

아이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눈까지 휘어 웃는 함박웃음이었다.

순간, 심장이 소란스러워지는 감각에 알베르는 무언가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입술을 달싹이던 순간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가 반지를 끼지 않은 손을 살짝 내젓자, 햇살 같은 빛무리가 피어올랐다. 도깨비의 마법은 밤을 뒤집어쓴 자신의 모습을 한낮을 닮은 색채로 바꾸어갔다. 어린 날의 비극을 피할 수 있도록.

 

알베르는 작별 인사라도 하듯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아이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꿈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

 

 

 

케일은 장신구함을 열었다. 햇살이 아주 조금 비쳐들었을 뿐인데도 그 빛이 찬연했다. 잠시 함 속에 담긴 것을 바라보던 케일은 이내 눈을 감았다. 함의 뚜껑도 그의 눈을 따라 닫혔다.

눈을 감고 말없이 서 있자니,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침대 머리맡에 옹기종기 모여 케일의 행동을 관찰하던 아이들이었다.

 

“케일 요즘 표정 안 좋다는 건데.”

“내 표정이 왜.”

 

대답 대신 홍은 말없이 케일의 품으로 슥 들어오더니 작은 머리통을 부벼댔다. 따끈한 감촉이 느껴졌다. 늘 그랬듯이 홍을 쓰다듬는 케일의 손길은 익숙해 보였다.

 

“그 함에 뭐가 들었냐는 건데?”

“장신구함이니 장신구가 들었지.”

 

열여덟 이전의 화려한 것들은 취향이 아니었기에, 예장에 맞출 만한 것 몇 개만 단촐하게 추려 담았던 함이다. 이미 몇 년 동안이나 봐 왔던 함인데도 온은 묘한 표정을 짓더니 함의 뚜껑을 톡톡 두드렸다.

 

“온. 장신구 필요해?”

“별로 필요 없는데. 케일이 안 하던 짓 하니까 그렇다는 건데.”

“안 하던 짓?”

 

온은 대답 대신 작게 가르릉거렸다. 홍을 따라 품 안으로 들어오는 아이를 안아올리며 케일은 다시 침대 위로 향했다.

 

“인간! 또 잘 거냐?”

“안 되는데!”

“너무 많이 잤는데!”

“인간, 아침도 점심도 안 먹었다!”

 

아이들이 소란이었지만 먹을 것이 그렇게 급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잠도 깬 지 오래였다. 걱정시키면 안 되니까 점심이야 곧 먹겠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라온.”

“왜 그러나?”

“이거, 잠금 마법 걸 수 있어?”

“물론이다! 위대한 나는 그런 것쯤은 식은 스프 먹기다!”

 

케일은 함 속에 담긴 장신구를 떠올렸다. 갖고 싶었던 물건이었지만 지금 이 물건들이 자신의 손에 있어서는 안 된다. 아무래도 조만간 에르하벤을 찾아가야 할 것 같았다.

 

 

 

---

 

 

 

두 번째 대가를 치르던 날부터 알베르는 줄곧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여인은 더 이상 도깨비에게 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여인은 여전히 금실을 자아야만 했고- 그들은 마지막 거래를 한다. 그 날, 도깨비가 내걸었던 것은.

 

알베르는 심호흡을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어김없이 찾아온 아이가 서 있었다. 알베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이는 못 걸어.”

“뭐?”

“살아있는 생명을 걸 수는 없어. 다른 조건을 제시해.”

 

애초에 결혼할 생각도 딱히 없지만 태어날지 어떨지도 모르는 생명을 어떻게 꿈의 대가로 치른단 말인가. 안 될 말이었다.

그러나 뜻밖에, 도깨비는 알베르의 말에 질색하며 쏘아붙였다.

 

“누가 아이 필요하대? 말이 되는 소릴 해. 어린애 건드리는 건 상종 못할 놈들이나 하는 짓이야.”

 

알베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보다 상식적인 대답에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넌 룸펠슈틸츠헨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애초에 이름을 말하면 되는 문제였잖아? 하지만 굳이 지금까지 말하지 않은 것은 그의 이름이 룸펠슈틸츠헨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알베르의 예상은 적중했다. 아이는 빙그레 웃었다.

 

“뭐, 룸펠슈틸츠헨에 나오는 것 같은 도깨비라고 해 두지요.”

 

역시.

하지만 상대방이 룸펠슈틸츠헨이건 아니건, 지금 상황은 좀 문제였다. 알베르는 탐색하는 눈을 해 보였다.

 

“아닌 것 치고는 착실하게 이야기에 나오는 것들을 빼앗아가던데.”

 

심지어 첫 번째는 반강제였다. 결국 돌려받지 못한 루비 팬던트 대신 행사 당일 알베르의 옷을 장식한 것은 비슷한 색채의 스피넬이었다.

 

“그건... 그냥 내가 갖고 싶어서.”

 

얼씨구?

 

“그럼 마지막으로 갖고 싶은 건 뭔데?”

 

알베르는 저도 모르게 툭 내뱉었다. 왜인지 만남이 이어질수록 도깨비의 앞에서는 누구 앞에서와 같은 말투가 나오곤 했다. 꿈속의 자신이 어린아이 상태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유독 그렇다.

 

“음...”

 

도깨비는 잠시 자신을 보다가, 허공을 보다가, 등을 돌렸다. 어물쩍 하는 것이 대단히 수상했다. 저건 아마도 몹시 들어 주기 어려운 것이거나. 지나치게 말도 안 되는 보상을 요구하려는 것이거나. 어쨌든 좋은 현상은 아니다. 알베르는 재빨리 조건을 달았다.

 

“일단 말을 해. 안 되면 결렬이야. 지난번 목걸이처럼 마음대로 갖고 갔다간 가만두지 않겠어.”

 

그 말에 도깨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가만두지 않을 방법이나 있고?”

“있겠지. 뭔가.”

“근거도 없이 자신만만한데.”

“지금까지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자신감이지. 나는 내 능력을 믿어.”

 

알베르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아이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마주한 아이는 무언가 억울해하는 얼굴이었다.

 

“내가 네 이런 점을...”

 

입을 앙다물다시피 한 채 중얼거리는 바람에 아이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알베르가 무슨 말이냐고 되묻기도 전에 도깨비는 평정을 되찾았다.

 

“됐고. 이야기로 돌아가서- 룸펠슈틸츠헨이 요구한 건 왕비가 된 주인공의 첫 아이잖아. 그렇지?”

“그렇지?”

“즉, 룸펠슈틸츠헨이 요구한 첫아이는 왕가의 장손이야.”

 

자신을 도깨비라 주장하는 아이는 어느 새 성큼 다가와 있었다. 암갈색 홍채의 움직임마저 볼 수 있을 가까운 거리였다.

 

“여기서 뭐 느껴지는 것 없으십니까, 저하?”

 

질문을 던지는 말투가 무척 낯익었다. 알베르는 시선을 마주한 채 오래도록 침묵했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두 눈에 일렁이는 소유욕이 선명했다. 알베르는 침음을 삼켰다. 완전히 잘못 짚었다.

 

“네가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당사자의 자식이라는 점이 아니었군.”

 

룸펠슈틸츠헨이 데려가려 한 아이가 특별한 어려움 없이 장성했다면 자연스럽게 1순위 왕위계승자가 되었을 것이다.

...자신처럼.

 

“어린애 건드리는 건 상종 못할 놈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당신은 어린아이도 아니잖아.”

 

틀린 말은 아니다. 눈을 뜨고 나면 현실의 알베르 크로스만은 스물다섯의 청년일 테니까.

 

“내 마지막 요구 사항은 너야, 알베르.”

 

이미 읽힌 감정에 재차 쐐기를 박는 아이의 눈동자에는 수천의 감정과 언어가 새겨져 있었다. 당신을 갖고 싶어. 내가 욕심내어서는 안 되는데, 그래도 욕심이 나.

알베르는 이와 꼭 닮은 눈을 알고 있었다.

 

“만약 네 요구를 거부한다면?”

“이야기를 알잖아.”

“진짜 이름을 맞히라는 거군.”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알베르는 생각에 잠긴 것처럼 천천히 눈을 감았다. 서로를 이해하는 데 언어도, 소리도 필요치 않았던 단 한 사람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던 그의 눈은 소란스러웠다. 마치 지금처럼.

이윽고 눈을 뜬 알베르가 대답했다.

 

“하지만 애초에 이 거래는 필요가 없어. 첫째. 네가 있는 이상 이미 이 꿈은 나에게 더 이상 악몽이 아니기 때문이며, 둘째.”

 

알베르는 잠시 숨을 들이켰다. 석 달 전의 시간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나는 네가 요구하지 않았더라도 기꺼이 나를 네게 주었을 거야.”

 

그리고 그 언제라도 네게 사랑한다 말했을 것이다. 석 달 전의 어느 날에 그러했듯이.

 

“...케일.”

 

탄식처럼 이름이 흩어졌다. 씻어낸 듯 무표정한 얼굴에서 오로지 홍채만이 동요를 내비쳤다. 백일몽 속 작은 도깨비의 마법이 산산이 바스러졌다. 태양을 입은 듯했던 자신의 몸에는 다시 밤이 스며들었고, 검은 상복의 아이에게는 저무는 노을이 배어들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알베르의 대답은 반쪽짜리 정답이었다.

 

“아니야.”

 

그건 내 진짜 이름이 아니야.

부정을 표하는 케일의 눈은 마치 빛이 꺼져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씻어낸 듯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알베르는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꿈속의 도깨비는 분명히 자신이 아는 케일 헤니투스였다. 그 어떤 저주나 마법도, 자신과 동일한 흐름으로 사고하며 같은 감정을 가진 그를 완벽하게 흉내 낼 수는 없을 터였다. 그래서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니라고?

 

알베르는 문득, 지금까지 제 눈앞에 나타났던 케일의 모습이 유년 시절의 케일 헤니투스와 전혀 관련이 없는 모습이었음을 깨달았다.

 

“너는...”

 

너는 누구지?

알베르의 눈에 맺힌 혼란을 읽은 케일이 웃었다. 말했잖아요, 저하.

제 이름은 당신이 알아내야 한다고.

 

 

 

---

 

 

 

다음 날은 마침 케일로부터 통신을 받았다. 숙면을 취하지 못한 티가 역력한 얼굴에 케일은 또 한숨을 쉬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러나 알베르는 불만을 표할 수 없었다. 웬일로 먼저 통신을 보낸 케일은 동북부 해상과 동대륙의 주요 흐름을 보고해 왔다. 특별히 신경 쓸 만한 것은 없었지만, 하나같이 알아두어 나쁠 것 없는 고급 정보들이었다. 이번에도 제 주변 사람들을 통해 알게 된 것일까. 알베르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다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난 뭘 하면 되지?”

 

케일의 눈매가 휘어졌다.

 

-아시잖습니까.

 

역시 이런 일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편하다. 알베르도 마주 웃었다.

 

“...사람을 보내지. 서류상으로는 우바르 영지의 해상 기지 시찰로 해 두고.”

-아미르 영애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니 따로 연락은 드리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헤니투스 백작도 물론,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

 

그럼요. 화사한 얼굴의 케일을 보며 알베르는 혀를 차며 웃었다.

 

“하여간 백수한다더니. 이쯤 되면 천성인지 운명인지.”

 

그 말에 화사하던 케일이 정색을 해 보였다.

 

-전 지금도 백수입니다만?

 

“그렇지?”

 

알베르는 누가 뭐라 했느냐는 듯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뭐 다 좋은데.

너 나한테 할 말 있지 않아?

 

-뭐 더 궁금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알베르의 시선에 불경한 얼굴을 해 보이는 케일이었다. 알베르는 케일을 탐색하듯 바라보았다.

 

“이것 말고 보고할 거 더 있지 않나? 좀 더 사적으로.”

-지금도 충분히 사적인데요.

“내 말은, 이런 국가나 가문 차원의 일이 아니라 자네와 나 사이의 일 말이네.”

 

그러자 케일의 표정이 몹시 이상해졌다.

 

-아직 포기 안 하셨습니까? 지난 달에 업무 도와드렸을 때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받아들일 생각도 없고... 이런 이야기, 안 하기로 했잖아요.

 

진심으로 당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에 알베르는 당혹스러워졌다. 당황한 알베르의 표정에 케일의 얼굴에도 혼란이 떠올랐다.

 

-뭡니까.

“아니... 아무것도.”

 

무언가 이상했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케일은 곧, 서로 대화가 엇나갔음을 인지한 듯했다.

 

-...다른 이야기였군요.

 

아니. 알베르는 케일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본질적으론 같은 이야기이다. 현실에서의 자신이 케일에게 그랬던 것처럼, 꿈에서의 케일도 알베르를 요구했으니까. 왕세자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개인으로서.

 

그 동안 케일은 자신의 감정을 부정해 왔다. 그러나 어젯밤에 만난 이의 요구는 그것과 정 반대의 것이었다. 알베르는 몇 개월 째 난항에 부딪힌 두 사람의 관계를 붙잡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했다. 꿈 속의 케일과 현실에서의 케일이 완전히 동일한 인물이라는 것.

알베르는 자신이 세웠던 가설이 틀렸던 것인지 고민했다.

 

“아냐, 잊어버려. 일단 시찰단 파견 후에 다시 연락하지.”

 

서둘러 통신을 종료했다. 언제나와 같이 일방적인 통보였다. 통신을 끊은 직후 황당해할 케일의 표정이 눈에 선했다.

알베르는 뜨끈하게 열이 오르는 기분으로 이마를 짚었다.

 

약 한 달, 집무실에서 처음 룸펠슈틸츠헨의 이야기를 했던 그 날부터 지난 밤까지. 꿈 속에서 만났던 케일은 현실에서의 케일과는 이어져 있지 않았단 말인가?

알베르는 미간을 좁힌 채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꿈이니, 애초에 꿈 속에 등장하는 인물도 제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환영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도깨비라 주장하던 이에게서 익숙함을 느꼈으면서도 섣불리 확신하지 못한 것은 그래서였다.

 

그러나 사라진 물건은 물론, 어제의 대화나 상황은 자신의 무의식이 채웠다기엔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 차에 걸려온 통신이었으니 기대를 안 하는 게 더 이상했겠지만...

 

“대체 내가 만났던 아이는 누구지?”

 

 

 

---

 

 

 

케일은 제 목에 걸린 금붙이 위에 손을 얹었다. 얇은 셔츠 너머로 전해지는 딱딱한 감촉이 선명했다. 그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내심 기대했는데.

케일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근 한 달 가까이 잊을 만하면 반복되던 꿈을 떠올렸다. 시작은 조금 끔찍했다. 얼굴도 모르던 이였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보았다는 점부터가 그랬다. 그러나 정말 괴로운 것은 따로 있었다. 절대로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이가 그녀의 죽음에 소리도 없이 울었다. 너무나도 작은 몸집과 앳된 얼굴을 하고서.

 

이것은 자신의 상상인가? 적어도 자신의 기록에는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사자에게 물어볼 수 있는 종류의 일도 아니었다. 다음 날 같은 꿈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악몽을 바꿔 주겠다며 나선 것은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딱히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은 아닌데 자신 역시 어린 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런 모습이 되었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그의 어머니가 맞이한 죽음이 자신이 겪은 상실의 기억을 건드린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꿈에서 일어난 일은 실제 역사를 바꾸지 않는다. 시종장을 따라 나서는 알베르의 뒷모습을 보며 수없이 생각했다. 이것은 자기만족에 불과한 행동이라고. 그래도 좋았다. 무의식 속 세계이니 제 마음을 억지로 누를 필요도 없지 않은가.

 

케일은 이 궁 안에서 가장 익숙해진 장소를 찾아갔다. 주인 없는 집무실 탁자 위에 붉은 팬던트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발견하자 심장에 쇳덩이를 올려놓은 것처럼 숨이 막혔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은 여전히 까만 머리칼을 가진 아이였다. 김록수일 적의 모습이다. 붉은색은... 원래 내 것이 아니지.

 

케일은 팬던트를 품에 넣었다. 약간의 심술이었다. 깨어나서 실제하는 목걸이를 발견했을 땐 몹시 황당했고, 내심 초조했다. 그러나 며칠 후 연회장에서 만난 알베르의 모습은 제 걱정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아 안도하면서도 기분이 나빠졌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붉은 보석을 두르고 있었다. 역시 자신의 정신세계가 실제로 나타난 것뿐인가?

 

조만간 이 일을 해결하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먹은 것과는 달리 행동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당장 큰일이 일어나는 종류의 사건도 아니었거니와, 무엇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냥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주인공처럼 계속 등장하는 누군가를.

 

두 번째로 반지를 얻었을 때는 약간 고민에 빠졌다. 보석도 없이 금세공만으로 모양을 낸 반지는 틀림없는 크로스만 왕가의 문장을 드러내고 있었다. 케일은 오전 햇살에 반지를 이리저리 비추어 보다가, 꿈에서처럼 손가락에 끼워 보았다. 꿈에서보다는 잘 맞았다. 어쨌든 성인의 손가락이었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헐거웠다.

 

케일은 함에 반지를 넣고, 라온에게 보안 마법을 부탁했다. 왕가의 문장이 찍힌 반지가 저택 안을 굴러다니는 걸 들켰다가는 귀찮은 일이 생길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민에 빠졌다.

 

반지... 받을 일 없겠지.

케일은 애꿎은 함을 손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이미 거절했고, 앞으로도 받을 생각 없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해 보았던 장면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케일은 다른 보석함의 팬던트들 중 하나에서 적당히 금속줄을 빼 왔다. 목에 걸고 품 안에 넣으면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굳이 위험부담을 감수하는 어리석은 짓인데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마음이 소란해질 때마다 가슴 위에 손을 얹으면 딱딱하고 둥근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꿈 속에서 그를 만났을 때, 케일은 고민했다.

 

목걸이도 반지도 실제로 나타났다. 그러면... 그렇다면.

사람도 요구할 수 있나.

 

이야기 속 룸펠슈틸츠헨이 요구한 것은 왕비의 첫 아이였지 않은가.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기대가 없었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다음날 꿈에서 깨었을 때, 당신이 내 옆에 있지는 않을까. 목걸이와 반지처럼. 담담한 척 요구했지만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말하다가 잠을 깨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허황된 꿈이었다. 잠에서 깨면 그저 흩어지고 말아 버릴. 물론 그가 자신의 진짜 이름을 맞히는 일 따위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날, 눈을 떴을 때 궁에 있어야 할 사람이 제 옆에 누워있다거나 하는 기적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케일은 말없이 잠든 아이들을 껴안았다. 전에는 혹여 자던 아이들이 깰까 봐 하지 못했던 행동이었다. 그만큼 괴로웠다. 잠시 뒤척이던 아이들은 이내 제 품으로 파고들었다. 세 덩어리의 작은 체온이 무척 위안이 되었다.

 

 

 

---

 

 

 

해상로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동북부 세력이 지나치게 성장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케일에 의해 적절한 선에서 조절될 것이다.

 

“이렇게 해도 되겠어? 어쨌거나 너희 가문의 이득과 직결되어 있는데.”

“너무 많이 먹으면 체해요.”

 

하여간에 징그러울 정도로 똑똑하지. 알베르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헤니투스는 늘 현명했지. 행복과 평온의 가치를 아는 이들이니까. 그것들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도.”

 

케일은 대답이 없었다. 다소 부자연스러운 간격을 두고 그의 말이 뒤늦게 흘러나왔다.

 

“저도 이 집안의 가훈은 마음에 들더군요.”

 

알베르는 케일의 말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도 케일은 가문 사람들에 대해 미묘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화법을 쓴 적이 있었다.

줄곧 생각해 왔던 꿈에 대한 상념이 알베르의 신경을 건드렸다. 사실인지, 사실이 아닌지 확신할 수 없는 명제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케일 헤니투스의 이름은 진짜 이름이 아니다...

 

“케일.”

“네.”

 

암갈색 눈동자가 자신과 시선을 맞춰왔다.

 

“네 이름이 뭐지?”

 

질문을 받은 케일의 표정이 괴상하게 구겨졌다.

 

“케일 헤니투스, 지요?”

 

뭐 잘못 먹었냐는 얼굴이었다.

 

“아니. 그거 말고. 원래 이름.”

“....”

 

알베르는 케일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한 순간의 흔들림을, 알베르는 놓치지 않았다.

 

“원래 이름이라니요. 저하는 뭐 아명이 따로 있으셨던 모양입니다만 제가 알기로 저는 어릴 때도 케일이었는데요.”

“그런가.”

 

찝찝해진 얼굴이 된 케일이 시선을 돌려 버렸지만, 알베르는 케일의 변화를 모른 척 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나도 원래부터서 알베르 크로스만이긴 했는데 말이지.”

“별로 안 궁금하거든요?”

“응. 그런데 자꾸 자기 이름을 맞혀 보라는 도깨... 아니, 사람이 있어서 좀 곤란하거든.”

 

그 말에 케일의 표정이 더욱 괴상해졌다.

 

“룸펠슈틸츠헨의 주인공이라도 되셨습니까?”

“뭐. 비슷해.”

 

알베르는 케일을 보며 입을 열었다.

 

“마치 이야기 속 여인이라도 된 기분이더군. 그런데 싫지가 않으니.”

 

턱을 매만지는 알베르를 향해 케일은 계속해 보라는 듯 눈짓을 보냈다.

 

“안 웃을 건가?”

“일단 들어 보고요.”

 

알베르는 한 달간의 꿈을 간단하게 요약해 주었다.

 

“꿈에 사람 형상을 한 도깨비가 나와. 아이 모습인데... 내 악몽을 해결해 주는 대가로 목걸이와 반지를 차례대로 요구하더니 이번엔 이름을 맞히라는군.”

 

케일의 표정이 꽤 심각해졌다. 뜻밖이었다.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더라도 그래, 저게 보통의 반응이지 하고 수긍했으련만 역시 평범한 꿈은 아니었나.

케일이 알베르의 소매를 붙잡았다.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케일은 동요하고 있었다.

 

“거절하면 어떻게 됩니까?”

“나를 갖겠대.”

“뭐라구요?”

 

알베르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되면 현실의 나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 아니, 왕자가 되려나.”

“잠깐만, 웃을 일이 아니잖아요. 그거 정말 단순한 꿈 맞습니까? 그러니까... 어쩌면 뭐, 저주 같은 거라거나.”

“안타깝게도 약간 진실일 지도 몰라. 팬던트와 반지가 정말로 없어졌거든.”

“....”

 

순간 케일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전에 없이 흔들리는 케일의 눈을 보며, 알베르는 의혹이 확신이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알베르는 케일을 안심시키려 했다. 그러나 케일의 질문이 더 빨랐다.

 

“굳이 제 이름을 물어보셨던 이유는 뭐죠?”

 

솔직하게 이야기할까.

짧은 순간, 알베르의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의 답이 스쳐지나갔다. 눈을 마주치고 있던 케일은 알베르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이유를 찾은 듯했다. 알베르의 소매를 붙잡고 있던 케일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

 

“왜냐면... 왠지 네가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알베르는 뒷걸음으로 멀어지는 케일을 붙잡으려 했다.

 

“케일, 나는.”

“...실례하겠습니다.”

“케일!”

 

황급히 텔레포트 진으로 뛰어가는 케일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아니, 정말 잡으려 했다면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알베르의 손끝에 망설임이 머물고 있었다. 저리도 창백해진 얼굴을 만든 장본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자각한 탓이었다.

 

도망치듯 텔레포트 진 위로 올라간 케일이 순간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무언가 말을 전하려는 듯, 케일의 입이 여러 차례 달싹였지만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새초롬한 눈과 입 모양이 전하는 말은 분명했다. 알베르가 저도 모르게 탄식하는 사이 마법이 발동했다. 빛무리가 그의 몸을 감싸자 남은 것은 빈 공간뿐이었다.

 

 

 

---

 

 

 

알베르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한숨과 함께 내려놓았다. 글자가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등받이에 몸을 한껏 기댄 알베르는 피로해진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마자 줄곧 생각하던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것도 병이다, 병.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건 같은 모양이지. 육체에 드는 질병은 아니건만 상사병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걸 보면. 다만 본인이 그 당사자라는 건 좀 문제였다.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때의 기억이 줄곧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붉은빛이 선명한 인영이 등을 돌리곤 입을 달싹인다. 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말이지만, 사실 이해했다.

 

이해라...

이해했다는 말은 조금 어폐가 있었다. 뜻은 이해했는데, 그 말을 하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겠으니까.

 

-그러게 누가 악몽이나 꾸랍니까?

 

그 어조와 표정이 언젠가의 대화를 떠올리게 했다. 영상통신 때마다 힘들어 보이는 기색이 역력한 알베르 때문에 무보수 노동을 하게 되었으니 당신이 나쁘다고. 그 때도 그렇게 책임을 떠넘기며 치뜬 눈을 하고 있었다. 화를 내는 것 같지만 그보다는 토라진 것처럼 보여 알베르로서는 귀엽게 보일 뿐이라는 점도 비슷했다.

 

몰랐던 거군.

 

예상했던 대로 꿈은 현실과 이어진 부분이 있었고, 아이는 케일 본인이 맞다. 여태 케일의 태도는 케일 스스로가 그것을 자신의 꿈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아귀가 들어맞는다. 사실은 내 꿈이기도 했었는데 말이지.

도대체 무슨 일로 그렇게 된 건지는 알 길이 없었다. 워낙 주변에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는 사람이라 놀랍지도 않았다.

 

“미치겠네, 진짜.”

 

알베르는 제 머리칼을 마구 흐트러뜨렸다. 이제 나 피하는 거 아냐? 피하겠지! 당연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던 알베르는 급기야 자기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어쨌든 케일은 본인이 의도치 않게 비밀을 폭로하게 된 셈이다.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케일 헤니투스가 망나니에서 갑자기 지금의 케일로 변하게 된 것도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진짜 이름이라니...

 

정체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다만 케일의 행동이 굉장히 의외였다. 아무리 꿈이라 생각했다 한들 알베르가 아는 케일은 섣불리 자신의 비밀을 꺼내 보일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의 가족은... 그를 아끼는 이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알베르는 케일이 요구했던 것을 천천히 되새겼다. 요구 사항은 두 가지였다. 알베르 자신을 내어주거나, 혹은 진짜 이름을 알게 되거나.

케일은 아무도 모르는 자기 자신을 찾아주길 바란 걸까.

 

알베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듣지 못했던 대답을 듣게 되었으니 자신도 움직여야만 했다. 원래도 기다리면 기다렸지 영원히 단념하겠다는 선택지 같은 건 남겨둔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같은 마음이었으니 포기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다만 그렇게까지 말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며칠 전까지의 이야기였다.

네가 나를 갖고 싶다고까지 말했는데 어떻게, 안 잡히고 배겨.

 

 

 

---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벽면에 즐비한 거울과 유리공예품에 부딪혔다. 어슴푸레한 빛은 여명인지 황혼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지만 낮은 조도로도 반짝이며 부서져서 화려하게 빛났다. 알베르는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거울 속 자신을 발견했다.

 

확실히 꿈은 변했다. 그는 더 이상 어린아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스물다섯의 거울 속 청년은 제 몸을 찬찬히 훑었다. 갈색의 머리칼과 피부는 크로스만의 다른 이들과는 확연히 다른 외모였다. 알베르는 마나를 피워올려 제 모습을 바꾸어보려 했지만 지난날 그러했듯, 마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낮보다 밤의 가호가 어울릴 법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러나 알베르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이제 더 이상 두려움에 웅크려 있을 이유는 없었으니까. 알베르는 기울어지는 해가 뿌려대는 금빛으로 가득 찬 방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그리고 더 이상은 이 곳에서 기다릴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알베르는 제가 먼저 방의 문을 열었다. 수도 없이 반복된 꿈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복도는 인기척 없이 조용했다. 알베르는 걸어가면서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꿈의 시작점인 거울로 가득 찬 방은 특별히 몸을 숨길 만한 장소가 없었다. 방을 나서기 전 이미 곳곳을 훑었지만 지금의 복도와 마찬가지로 적막하고 텅 빈 공간일 뿐이었다.

 

난감한 노릇이었다. 중앙궁만큼은 아니더라도 환희의 궁 또한 규모가 결코 작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왕세자궁으로 한정된다는 보장도 없다. 꿈이란 건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로운 왕성에서는 알베르 자신이 모르는 곳을 찾기가 더 어렵고, 궁 밖 출입을 안 해 본 것도 아니다.

 

“돌겠네.”

 

왕성 밖까지 찾아야 한다는 가정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잠깐만. 설마 동북부 헤니투스 영지까지 가야 하는 거면 어떡하지? 알베르는 살짝 소름이 돋았다.

 

아, 제발. 케일.

 

알베르는 습관처럼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며칠 동안 영상 통신을 걸어보았지만 당연하다는 듯 받지 않았다. 놀랍지도 않았다. 애초에 기대도 안 했으니까. 지위를 이용해 소환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다.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알베르가 생각하는 케일은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명령은 할 수 없지. 부탁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케일은 알베르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직접 만나러 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 또한 도로 접었다. 케일이라면 자신을 피하는 것쯤은 일도 아닐 테니.

 

그래서 밤을 기다렸다.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반드시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도깨비가 내건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추론의 근거로서는 빈약하기 짝이 없는 이유였지만 애초에 자신이 겪은 상황 자체가 상식적이지 않으니 나름대로 합리적인 예측이다.

 

알베르는 집무실의 문을 잡아당겼다. 쏟아지는 햇살을 등진 인영이 책상에 걸터앉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베르는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미몽에서 깨어난 기분이야. 여전히 꿈 속인데도요.”

 

케일이 쓰게 웃었다.

 

“용케 도망 안 갔군.”

“생각 안 한 건 아닙니다. 숨을까도 생각해봤고.”

 

알베르는 손을 뻗어 케일에게 건넸다. 체념했는지 케일은 묵묵히 그 손을 잡았다. 케일을 일으켜 세우며 알베르가 말했다.

 

“숨을 이유가 없는데.”

“없긴 왜 없습니까?”

“내가 그렇게 보기 싫었나?”

“네.”

 

이런. 알베르의 몸이 움칠 굳어졌다. 움직임을 느낀 케일도 아차 싶은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상처 받아.”

“저하가 싫은 게 아니라...”

“그래.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했겠지.”

 

정곡을 찔렸는지 케일은 말이 없어졌다. 알베르는 케일을 소파 위에 앉혔다. 업무를 볼 때면 곧잘 앉는 자리였다. 매번 제 집의 가구인 양 거리낌없이 앉던 케일이지만 알베르를 위한 자리를 늘 비워두었기에 앉는 자리는 고정되어 있었다.

 

알베르는 케일이 늘 비우곤 하던 상석에 앉는 대신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태도에 케일은 적잖게 당황한 듯 시선을 피했다. 알베르는 묵묵히 기다렸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케일은 한참 만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구라도 자신의 비밀이 알려지는 건 두려워요.”

“내 비밀을 털어먹을 때는 그렇게 당당했으면서?”

 

그야 당신은...

 

“저하라면 잘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원래도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는 사람이고, 나만 입 다물고 있으면 되니까.”

“나라고 네 비밀을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진 않아. 걱정돼?”

 

알베르는 케일이 죽은 마나를 내밀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의 신기하고도 기묘한 감각도.

 

“솔직히 말해볼까. 분명히 아찔한 순간이었는데도, 나는 네가 내 정체를 안다고 했을 때 그렇게 두렵진 않았어. 이상한 일이지. 하지만 그도 그럴 게, 닥쳐온 위기보다도 눈앞의 네가 무척 신기하게 느껴졌거든.”

 

그 말에 케일의 시선이 알베르를 향했다.

 

“결정적으로는... 네가 확신을 줬잖아. 정말로 누구에게도 내 비밀을 발설하지 않을 거라고.”

 

알베르는 케일의 손을 당겨 입술을 댔다. 어지간한 의식을 치를 때가 아닌 이상 그런 행동을 할 일이 없었을 텐데도 몹시 자연스러웠다. 명백한 경의의 표시였다.

 

“아무래도 나는 너만큼의 신뢰는 못 주는 건가.”

 

알베르는 케일의 눈을 바라보았다. 케일이 불안에 떨지 않기를 바란다. 자신에게서 신뢰감을 느끼고 안심할 수 있었으면 했다. 그 날,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못 믿어서는 아닙니다.”

 

자조 섞인 중얼거림에 케일이 급히 덧붙였다. 알베르는 이어질 뒷말을 기다렸다. 케일은 다시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제 존재 자체가 기만이니 그렇죠.”

“나는 뭐 아닌가. 이쪽이야말로 대국민 사기극이었지. 전쟁 이전까지, 나는 언제 폐위되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었어.”

 

그런 자신을 알면서도 선택한 케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보다 그 태도가 완고했다. 이제 와 누가 더 나쁘네 위악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의미 없는 일이니까. 다만 알베르는 케일이 어째서 이런 태도를 보이는지가 궁금했다.

기만이라는 말에서 알베르는 한 단어를 떠올렸다. 케일이 열여덟을 전후하여 전혀 다른 행적을 보였다는 사실이 걸렸다.

 

“체인질링(Changeling)인가?”

“비슷합니다만,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습니다.”

 

알베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끊임없이 환생하는 적도 있었는데 무슨 일인들 못 일어날까. 수많은 가능성이 떠올랐지만 역시 결론은 한 가지로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자신은 지금의 케일을 사랑한다. 그가 설령 다른 곳에서 온 영혼일지라도.

 

“여태 안 받아준 이유가 그것 때문이야? 네가 케일 헤니투스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케일이 감정의 행방을 뻔히 알면서도 외면해온 이유는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거슬러 올라가보면 결국 자신의 근원과 직결된 문제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었으므로, 케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어떤 사람이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지금의 너인데.”

“영원히 있으리란 보장이 없어요.”

“원래 영원한 건 없어. 감정도. 인간의 수명도.”

 

케일은 알베르의 표정에서 그의 과거를 읽었다. 한 순간에 등을 돌린 아버지와 애도해야만 했던 어머니. 유한하고 덧없는 것에 대해선 질릴 만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네가 너인 이상 나는 너를 사랑하겠지. 나에게 네가 케일 헤니투스인 이유는, 네가 그 이름으로 내게 왔기 때문이고. 하지만 네가 너를 다른 이름으로 정의하길 원한다면 그렇게 할 거야. 그렇다고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바뀌는 건 아니니까.”

 

잡고 있던 손에서 가느다란 떨림이 느껴졌다. 케일이 동요하고 있음을 느낀 알베르는 더 힘을 주어 두 손을 쥐었다.

 

“동화 속 사람들은 어떤 수소문 끝에도 도깨비의 이름을 알아낼 수 없었어. 그래서 기한의 마지막이었던 세 번째 날이 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답을 말하지 못했지. 오직, 도깨비 본인이 제 이름을 스스로 노래하기 전까지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모든 인간의 본능이다. 모든 인간은 그 행위 안에 자신이 없을 때 불행해진다. 어쩌면 도깨비 룸펠슈틸츠헨도 노래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알베르는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케일 역시 온전히 누리게 해 주고 싶었다. 제 본질을 알았어도, 가면을 뒤집어쓰지 않아도 나를 믿고 아끼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충족감을.

 

“네가 아무리 원해도, 먼저 말해 주지 않으면 나는 네 과거를 알 수 없어.”

 

알베르는 주어진 사실을 인정했다. 자신은 전능하지 않다. 케일이 끝내 비밀로 두고자 한다면 도리가 없다.

 

“하지만 그래도 너를 사랑하겠지.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아끼고 생각할 거야. 네가 편안하기를 바라. 기꺼이 붙잡혀 줄게. 그러니 네 진짜 이름과 감정을 줘. 스스로를 모른 체 하지 마, 케일.”

 

너를 알고 싶어.

내가 아는 진짜 너라는 사람을.

 

시선이 마주쳤다. 케일은 알베르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 그러나 여전히 고민에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 알베르는 묵묵히 기다렸다. 그가 어떤 대답을 내놓더라도 받아들일 자신이 있었다.

마침내 케일의 입이 열렸다.

 

“내 이름은...”

 

기나긴 백일몽의 끝이었다. 세계가 부서지는 중에도 온통 반짝임으로 가득해서 눈이 부셨다.

 

 

 

---

 

 

 

알베르는 초조했다. 먼저 불러야 하나. 혹은 그를 기다려야 하나. 살면서 이토록 사람이 어려운 것은 처음이었다. 이래서 다들 사랑에 빠지면 어리석어진다고 하는군.

 

알베르는 천천히 낯선 이름을 발음했다. 전혀 다른 조음법이라 걱정이 앞섰다. 기껏 알아 놓고도 이름 하나 제대로 못 부르냐며 걷어차이고 싶진 않은데. 물론 이제 와서 정말 그걸 이유로 찰 것 같진 않지만 그냥... 그런 거 있잖아. 좋아하는 만큼 뭐든 완벽하게 주고 싶고, 할 수 있는 최선을 주고 싶고.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해명하던 알베르는 스스로에게 질리고 말았다. 아, 알베르 크로스만. 정말이지 갈 때까지 갔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알베르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이 시간이면 아마 오후 회의 안건이겠지. 딴 생각을 하다 들키기라도 한 것 같아 괜히 머쓱한 기분이 되었다. 일을 하며 딴 생각에 빠져 있었던 경험도 별로 없었기에 더욱 심경이 복잡해졌다.

 

“들어오게.”

 

허락을 표하자 문이 열렸다. 궁 안의 사람들에게 감정을 보여 좋은 일이란 없으므로, 알베르는 부러 서류를 들여다본 채 사무적으로 말했다.

 

“오후 회의 안건이라면 왼쪽 협탁에 두고 가게. 나중에 검토할 테니.”

“뭘 검토까지 합니까. 왜, 연애하겠다고 공표라도 하게요?”

 

...이런 미친.

목소리를 듣자마자 알베르는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 했다. 꽤 큰 소리를 내며 뼈와 나무가 부딪혔다. 그러나 통증을 느낄 새도 없었다. 아픈 건 모르겠고, 수치심이라면 꽤 크게 느껴졌다.

 

“오.”

 

고개를 들어올리자, 꽤 놀랍다는 얼굴을 한 케일이 서 있었다.

 

“살다 보니 이런... 광경도 보는군요.”

“이런 광경이 뭔데.”

“어... 왕세자가 돌겠다며 머리 싸맬 때보다 더 귀엽게 구는 광경?”

 

귀엽...

순간 열이 확 밀려올라왔다.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인 것만으로도 정신이 나갈 지경인데, 거기에 대고 케일이 선택한 어휘는 알베르를 아주 뒤흔들어 놓았다. 처음 만날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제 이성을 마비시키는 데엔 탁월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알베르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말이라도 하고 오지.”

“아. 아직 말해야 하는 사이인가요?”

 

케일은 담담한 얼굴로 더한 폭탄을 떨어뜨렸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바로 이해하지 못해서 반응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아니, 어쩌면 이해는 했지만 단지 믿을 수 없었던 건 뿐인지도 모른다.

아, 케일..!

알베르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표정이 갈무리되지 않아 몹시 곤란했다.

 

이야.

케일은 조금 감탄했다. 어리네, 어려. 이제 보니 알베르는 정말 필사적으로 억눌러 온 거였다. 물론 자신이라고 안 그랬던 건 아니지만,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일부러 이러는 거지?”

“조금은요.”

 

조금이 아닌 것 같았다. 알베르는 케일을 짐짓 흘겨보다가 숨을 고르더니, 금방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케일은 조금 아쉬웠다. 앳되고 서툴러도 사랑스럽다. 연애에 있어선 그저 평범한 이십 대 청년의 모습이라도 나는 여전히 당신을 좋아할 텐데, 뭘 그리 완벽해지고 싶어 하는지. 물론 그렇게 애쓰는 모습도 좋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그런 면조차 알베르라는 개인을 이루는 한 부분이니까.

 

그러나 케일의 표정이 흐뭇함으로 밝아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알베르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뭐야, 왜 이래? 케일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알베르의 입이 열렸다.

 

“갑자기 든 생각인데.”

“말씀하십시오.”

“만약 내가 네 이름을 말하게 되면, 네가 사라져 버린다거나...”

 

알베르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이야기의 결말을 미처 생각하지 못 했다. 동화 속 룸펠슈틸츠헨은, 여인이 이름을 내뱉는 순간 파멸한다. 왕비에게는 좋은 결말이었을지 모르겠지만 도깨비를 사랑하게 된 알베르의 입장에서는 완벽한 비극이다.

 

“만일 그런 거라면 나는.”

 

알베르는 말을 잇다가 멈추었다. 케일의 입가가 실룩이고 있었다. 잠시 후, 케일은 기어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거 아닙니다. 뭐야,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어요?”

 

아니구나.

알베르는 그제야 안도했다. 언제 떠날지 모른다는 사람에게 필멸 따위를 운운한 게 무색하게도, 막상 그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눈앞이 캄캄했었다.

 

“그것만 걱정한 건 아니었어. 어쨌든 다행이군.”

“간밤의 당당하던 모습은 다 어딜 갔는지 모르겠군요. 그래서, 또 뭐가 더 있습니까?”

 

오랫동안 고민해 온 선택지에 마침표를 찍은 탓인지 케일은 훨씬 후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거침없이 책상을 빙 돌아 옆에 선 그를 향해 알베르는 줄곧 연습해 왔던 이름을 내뱉었다.

 

“김록수.”

 

이번에는 케일의 움직임이 멎었다. 불시에 공격당한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잘못 말한 것 같지는 않은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다. 알베르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분명 그렇게 들었는데. 김록수...라고, 네가 말했던 이름 그대로 정확하게 불러 주고 싶은데 연습을 해도 잘 안 되더군. 그래서.”

“아니... 정확해요.”

 

알베르의 말을 자르며 케일, 아니, 김록수가 대답했다. 마주한 그의 얼굴은 웃음과 울음이 섞여 이상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지만 동시에 존재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이었다. 알베르는 그를 말없이 끌어안았다. 사라져버린 도깨비와 금빛 실타래 대신 가장 원하던 것을 얻었다. 서로에게 들려 주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 많았다.

으레 동화들이 그렇듯, 행복한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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