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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다 자라지 않은 티를 물씬 풍기는 한 소년의 실루엣이 고급스러운 장식이 즐비한 테라스 위에서 일렁였다. 하늘은 어두웠고, 차게 가라앉은 밤바람이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이는 머리칼 사이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도 그 화려한 금발의 색은 여전히 빛났다.

낮의 하늘을 연상시키는 티 없는 벽안은 가만히 저 너머를 응시했다. 무엇을 담고 있을지 알 수 없는 눈을 천천히 깜빡일 때마다 길게 드리운 속눈썹이 팔랑였다. 그 방향에는 나름 밝게 빛나고 있는 달빛조차도 전혀 닿지 않는 깊은 숲이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먼 곳을 바라보던 그는 입꼬리를 올려 은은한 웃음을 보였다. 어딘가 장난기 섞인 미소 같기도 했다.

소년은 길게 쭉 뻗은 손가락으로 대리석 난간을 그러쥐더니 아주 가뿐하게 몸을 그 건너편으로 던졌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높이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기색조차 없었다. 아주 가벼운 몸놀림으로 테라스 아래에 있던 정원에 착지하자 조금은 둔탁한 소리가 나긴 했지만 이층 이상의 높이에서 뛰어내린 걸 감안하면 아주 조용한 수준이었다.

 

“왕자님!”

“왕자님!”

 

하지만 그 작은 소리를 누군가 들었는지, 뛰어내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반대쪽에서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이 소년을 부르는 것 같았다. 몰래 감행한 탈출이 너무나 빨리 들통났지만 소년은 당황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절대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 같았다.

 

“알베르 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꽤나 익숙했다. 몇 시간 전까지 알베르의 교육을 책임지던 대신이었다. 희미한 미소를 띄우던 아까와는 달리 소년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등지고 그 반대편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만개한 웃음은 수려한 외모 덕에 더욱더 빛을 발했다. 아마 내일 아침이 되면 궁이 발칵 뒤집히겠지.

 

성의 불이 꺼진 지 오래인 새벽 2시경, 로운의 왕자 알베르 크로스만이 가출했다.

 

 

성의 동쪽에는 숲이 있었다. 부지도 상당히 큰 편이었고, 그 숲을 끼고 흐르는 강이 있었기 때문에 과거부터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기 일쑤였다.

개발을 위해 답사팀을 꾸려서 나가면 항상 사상자가 발생하는 게 그 이유였다. 죽지 않더라도 숲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상한 기운이 흐른다며 도망쳐 나온 사람도 수두룩했다. 꽤 터무니없는 말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수긍했다. 애초에 숲의 외관부터 음습한 분위기가 풍겼기 때문이었다. 나무가 무성한데도 푸르기보다는 온통 어두웠고, 너무 우거진 탓에 햇빛이나 달빛이 제 역할을 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왕국 사람들은 그저 숲을 방치했다. 개발은커녕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날도 왔다. 그 후로부터 숲에는 ‘저주받은 숲’이란 별명이 붙었고, 이 모든 게 숲 안에 사는 마녀 때문이라는 말도 안되는 소문도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출을 감행한 알베르가 향한 곳이 바로 그 숲이었다.

 

저주받은 숲. 어느새 로운 사람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린 곳이었지만 알베르는 딱히 무섭지 않았다. 무섭기보단 호기심이 더 컸다. 죽음과 가장 가까운 종족이라 불리는 다크엘프가 ‘저주’라는 별명이 무서울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어쨌든, 이제껏 모두 이 숲의 출입을 말렸던 터라 한 번도 들어와 본 적이 없었기에 이곳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다들 기피하기 때문에 잡히지 않을 거란 점도 꽤 컸지만.

숲에 발을 디딘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이 말하는 이상한 기운이 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들어오기 전에도 어느 정도는 짐작했었지만 역시나 숲 곳곳에 죽은 마나의 기운이 흘렀다. 알베르의 기준에서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이 느끼기엔 충분했다.

알베르는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종종 들려도 괜찮겠다, 라고 느낄 만큼 생각한 것보다 숲의 상태가 훨씬 양호했다. 물론 다들 흔히 아는 숲의 모습은 아니지만 죽은 마나를 먹고 자라는 식물들은 그 어느 곳보다 잘 자라고 있는 상태였다. 아무도 살지 않는 숲인 것에 비해 상당히 깔끔하기도 했다.

 

“…….”

 

듬성듬성 자라있는 풀들을 헤치고 걷던 알베르가 돌연 멈춰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많이 어지럽혀지지 않은 모습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던 게 무색하게, 사람의 손길이 묻어난 곳이 있었다.

알베르의 눈에 보인 것은 일부러 이쪽으로 들어오라는 듯이 잘 쓸어놓은 길이었다. 정교한 솜씨는 아니었지만 의심할 여지도 없이 누군가의 관리가 있던 게 분명했다. 알베르는 그 흔적을 따라 조금 더 걸어갔다. 치워놓은 길옆으로 자라있는 무성한 나무들 사이사이로 서툴게 만든 화살표도 있었다. 흡사 어린아이가 대충 새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니, 애초에 사람이 사는 숲이 아니라 했고, 사람이 살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지식으로는 그랬다.

 

길은 길게 이어졌다. 꽤 오랜 시간을 걸었는데도 화살표는 계속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그려져 있었다. 그 끝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겁이 나지는 않았다. 물론 다크엘프를 쉽게 건드릴 수 있는 존재가 흔히 있겠냐 싶다만은.

처음 숲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더 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길을 터놨고 저런 조잡한 표시를 해둔 건지, 도착하면 대체 뭐가 있을지. 그래서 계속 앞으로 갔다. 뭐가 있어봤자 설마 드래곤이라도 있겠냐 싶은 마음으로 계속 걸었다.

***

 

“……허.”

 

대체 여긴 어떻게 생겨 먹은 곳일까. 저주받은 숲이라더니. 아니, 저주받은 숲은 그렇긴 한데. 아니, 그….

대체 몇 번이나 놀라야 충분한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냐옹.”

 

고양이였다. 풀이 무성한 숲 한가운데에 고양이가 있었다. 새끼의 티를 벗지 못한 작은 동물이 알베르가 가던 길목 중간에 앉아 가로막고 있었다. 이 고양이 역시 사람의 손길을 탔다는 걸 증명하듯 온몸에 덮인 털에 윤기가 철철 흘렀다. 붉게 물든 빛을 띠는 색이 왠지 모를 신비감을 자아내기도 했다. 동물의 털로는 흔한 색이 아니어서 그런지, 점점 묘하게 빠져들었다.

 

“냐옹.”

“…여기 살아?”

 

동그랗게 뜬 눈으로 알베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소곳이 앉아 두 앞발을 모은 채 꼬리를 살랑이는 모습에 알아듣지 못할 걸 알면서도 입을 열었다. 알베르의 목소리에 고양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 번 더 울었다. 조용한 숲에 맑은 울음소리가 퍼져나갔다.

이로써 하나는 확실해진 것 같았다. 아마도 이 숲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 아니면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 고양이에게 다가가 몸을 숙였다. 손을 뻗어 머리에 갖다 대자 고양이도 고개를 내밀며 이마를 손에 부볐다. 싫지 않은 듯한 반응에 알베르는 손을 펴 손바닥으로 고양이의 머리를 쭉 쓸어내렸다. 잘 관리된 털 덕에 결을 따라 흘러내리는 느낌이 썩 좋았다.

 

알베르의 손길에 고양이는 한 번 더 길게 울었다. 자칫 섬뜩하게 들릴 수 있는 울음소리가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작은 동물은 가만히 붙이고 있던 다리를 움직여 몸을 일으켰다. 알베르가 잠시 손을 떼자 기다렸다는 듯이 휙 몸을 돌려 원래 알베르가 향하던 곳, 즉 길이 나 있던 곳을 향해 섰다. 소년의 얼굴에 의아한듯한 표정이 어리자, 고양이는 다시 작게 소리를 내며 긴 꼬리를 흔들었다.

 

“따라오라고?”

“야옹.”

 

마치 그 물음에 답하듯 앞발로 땅을 툭툭 건드리더니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알베르가 가만히 서 있는 걸 보면 자신도 멈추고, 그에 맞춰 한 발 걸어가면 고양이 역시 움직였다. 따라오라는 신호가 확실한 것 같았다.

그렇게 고양이를 따라나섰다. 왠지 이 아이를 따라가면 알베르가 궁금해하던, 그 호기심의 답을 알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가 멈춘 건 얼마 가지 않아서였다. 이제껏 온 것에 비하면 훨씬 짧은 거리였다. 알베르가 멈추면 함께 멈추던 고양이가 이번에는 힐끔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더니, 빠르게 앞으로 먼저 뛰어갔다. 고양이를 쫓아가던 알베르도 이번엔 마저 쫓지 않았다.

 

…어쩐지 조금씩 풍경이 바뀌더라 싶더니, 진짜 내가 별 말도 안 되는 것들을 보는구나.

 

알베르는 피식 웃었다. 감정이 섞인 웃음이라기보단 기가 찬 실소에 가까웠다. 그저 바로 앞의 길과 보고 걸었던 시선이 점점 위로 향했다. 넓은 시야에 담긴 더 넓은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단순히 숲속에 지어놓은 간이 오두막이라 보기엔 말도 안 되는. 꽤 그럴싸한. 아니, 크기가 크진 않지만 나름 견고하고 화려해 보이는 집이 있었다. 알베르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 집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때, 고양이는 아주 가뿐한 몸놀림으로 집을 향해 뛰어갔다.

저주받은 숲에 덩그러니 서 있는 집에, 신기한 색의 털을 갖고 있는 고양이에. 의심스럽기 짝이 없지만, 여기서 뭘 할 수 있겠는가. 이미 호기심이 일어버린 이상 저 소굴로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얼추 대문의 모습을 하고있는 아치형 구조물을 지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정원처럼 보였지만 일반적인 상식처럼 화사한 모습은 아니었다. 대충 터 정도만 닦아 놓은 듯한 앞마당을 지나 계속 걸음을 옮기니 굳게 닫혀 있는 줄로만 알았던 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까 잠시 이 집에 시선이 팔린 사이 고양이가 어디 갔나 했더니, 문은 작은 동물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틈새만큼 열려 있었다.

 

끼이익-

 

조심스레 손을 갖다 댄 채 문을 밀었다. 나무 쓸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고 나서야 원래라면 노크를 하는 게 예의라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늦어버린 것 같아 그냥 꿋꿋하게 나머지를 전부 열었다.

 

“야옹.”

 

익숙한 울음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렸다. 문을 모두 여니 보이는 넓은 로비, 적당히 기품있고 세련된 인테리어, 드높은 천장에 매달린 호화로운 샹들리에까지. 이 숲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들 사이에 있는 한 사람. …그리고 그 사람에게 안겨있는 고양이와, 그의 발치에 앉아있는 익숙한 고양이.

 

열어놓은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붉은 머리칼이 살랑거렸다. 그는 푹신해 보이는 의자에 앉아 눈을 슬며시 내리깐 채 제 무릎 위에 앉아있는 작은 동물을 쓰다듬고 있었다. 알베르가 한 걸음 더 발을 내딛자 단단한 구두굽과 부딪혀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나자마자 잔잔히 움직이던 그의 길고 가는 손가락이 멈춰섰다. 느리게 눈을 한 번 깜박인 그는 내리고 있던 눈을 천천히 위로 들어 올렸다. 아직 시선이 채 알베르를 향하지 않았음에도 알베르는 그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불같이 타오르는 적안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나른한 듯 뜨고 있는 눈은 어딘가 모르게 묘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무심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모든 걸 보고 있는 것 같은 무언가. 그 붉은 눈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그를 처음 만났다. 그게 첫 만남이었다.

 

***

 

“…그, 당신이 그 마녀입니까?”

“마녀?”

 

피식, 알베르의 물음에 비웃음을 흘리는 그의 미소를 보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질문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화악 속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웬 마녀. 내가 그렇게 보여?”

“아니, 그….”

“밖에선 그런 시덥잖은 얘기가 돌고 있나보네.”

 

마녀, 마녀.

 

그는 계속 단어를 되뇌이며 키득거렸다. 웃으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자 어깨에 걸쳐져 있던 머리카락이 어깨선 아래로 자연스레 흘러내렸다. 길게 늘어진 붉은 머리가 흔들리자 무릎에 누워있던 고양이가 앞발을 뻗어 톡톡 쳐댔다. 그의 발 앞에 앉아있던 익숙한, 즉 저를 여기로 데려온 고양이는 알베르 쪽을 보고 있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절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안 들어와?”

“…예?”

“계속 그렇게 서 있고 싶은 거면 어쩔 수 없고. 그렇지, 온?”

“먀옹!”

 

아, 들어올 거면 문도 좀 닫고. 추워.

 

처음 보는 사이인 건 서로 마찬가지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딱히 당황한 눈치가 아니었고, 오히려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한 반응이었다. 그의 말대로 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딱 보니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건 압니까?”

“뭐, 얘네 울음소리 때문에 그렇겠지.”

 

그게 그와의 첫 대화였다.

 

이름은 케일이라고 했다. 그는 딱 봐도 귀족 같아 보였지만 성은 알려주지 않았다. 이름을 물어보니 그저 케일, 이라고 대답했다. 딱히 개의치 않았다. 말하지 않은 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케일은 함께 있던 고양이들이 온과 홍이라고 소개해줬다. 아까 길에서부터 알베르를 안내해준 붉은 고양이가 홍이었다. 홍은 케일의 맞은편에 앉은 알베르에게 다가와 그의 발치에 앉았다. 썩 마음에 들은 것 같은 눈치였다.

많은 걸 들은 건 아니지만 알게 된 것도 많았다. 예를 들면 고양이를 제외하면 혼자 산다거나, 아니면 귀찮은 걸 매우 싫어한다거나, 매우 백수가 되고 싶어 한다거나, 어쨌든 그런 거. 왕궁에 있을 땐 전혀 보지도 못했던 류의 사람이었다. 그 후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알베르는 케일에게 바깥의 이야기를 들려줬고, 케일은 꽤 흥미롭게 듣고 있는 듯 했다. 아마 숲 밖으로 나가지 않은지 꽤 되었을 거고, 궁금할 거라 생각했다. 온과 홍 역시 그 근처에 앉아 알베르의 이야기를 함께 들었다. 케일은 이야기를 들으며 이따금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렇게 새벽이 지나 아침이 되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슬슬 궁이 문득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마 어젯밤의 가출로 성이 발칵 뒤집혔을 텐데,

 

“…내일도 와도 돼요?”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만큼 시간이 지체된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가기 싫었다. 왠지 자꾸만 모든 행동이 밍기적거렸다. 아마 궁에서는 느낄 수 없던 기분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보다 자유롭고, 보다 신비하고, 보다 더 새롭다. 케일은 내 신분을 모르기에 더 편할 수 있었다. 살아온 15년 동안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왕자로 살아왔기에 평범한 소년으로서 지내는 이 시간이 더없이 즐거웠다.

왠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알베르의 물음에 케일은 알베르를 빤히 바라봤다. 손은 여전히 온의 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온은 기분 좋다는 듯 고롱거리는 소리를 냈다. 마주친 붉은 눈동자는 활활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저렇게 선명한 적안은 처음인지라 볼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오늘은 뭐, 누구한테 허락받고 왔어?”

“…예?”

“그러든가.”

 

케일은 무심하게 굴었다. 다시 고개를 숙이자 귀 뒤로 넘겨놓았던 긴 머리가 부드럽게 앞으로 흘러내렸다. 아직 상황파악이 되지 않은 듯 벙쩌있던 알베르는 잠깐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케일의 말을 한 번 곱씹고 나서야 웃을 수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초조한 마음으로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손가락이 멈췄다. 안도한 표정으로 문고리를 잡던 움직임에는 아까와는 다르게 망설임이 없었다.

 

알베르의 바람과는 다르게 다음날은 케일에게 가지 못했다. 한나절이 넘도록 이어진 왕자의 일탈에 궁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고, 말단의 하인들부터 대신들까지 발칵 뒤집혀 알베르를 찾아다녔더랬다. 케일의 집에서 나온 후 성으로 돌아오는 데에도 숲을 한참 동안 걸어야 했기 떄문에, 조금 흐트러진 모습으로 되돌아가자 알베르를 본 사람들은 너나할것 없이 입을 떡 벌리며 달려들었다. 결국 그날은 밤이 될 때까지 재상과 스승님에게 붙잡혀 잔소리를 들어야 했고, 수십 번의 당부를 들으며 내몰리듯 방으로 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 왕자의 두 번째 일탈을 걱정한 이들은 방 밖에서 알베르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듯 했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다시 나가는 것 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만, 알베르가 케일의 집에서 편하게 쉴 동안 잘못도 없이 왕의 눈치를 봐가며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마냥 그럴 수도 없었다. 결국 다시 케일의 집을 찾은 건 일주일 정도가 지나서야 가능했다. 처음 그를 찾아갔던 날처럼 어둠이 짙은 밤에 궁을 나섰고, 그때의 기억을 따라 숲을 걸었다. 케일의 집 앞에 다달았을 때, 잘못한 건 없었지만 왠지 멋쩍었다. 문에 노크를 하는 손길이 조금 망설여졌다. 아마 다음날 와도 되냐고 먼저 그렇게 물어봤으면서 일주일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못한 자신이 민망해서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알베르의 마음을 알고 있는 건지, 닫혀 있던 문이 끼익소리를 내며 열렸다. 고개를 내리니 그날처럼 홍이 얼굴을 내밀고 나와 알베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케일은 일주일만에 얼굴을 비춘 알베르를 처음과 똑같이 맞이했다. 반가운 듯한 태세는 아니었지만 싫은 모양새도 아니었다. 덤덤한 것이 여전히 똑같았다. 케일을 만난 건 고작 이번이 두 번째지만, 알베르는 케일이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큰 감정 기복 없이 언제나 잔잔한 상태를 유지하는.

그날도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가려는 알베르에게 케일이 말했다. 다음에 오면 재밌는 게 있을 거라고. 알베르는 궁금했지만 굳이 지금 캐묻지는 않았다. 그때 말해주겠거니 싶으면서도, 전처럼 알베르가 먼저 나중을 기약하기 전에 먼저 케일이 나서줬다는 사실이 티를 내진 않았지만 내심 기뻤다.

 

세 번째 찾아간 날에는 처음으로 말을 하는 온과 홍을 볼 수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케일의 품에 안겨있는 온과 제 발치에 와있는 홍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데, 흔히 알던 울음소리가 아닌 말소리가 그 작은 입에서 튀어나왔을 때는 진심으로 당황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전혀 생각조차 못 해본 상황에 표정따윈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아마 꽤나 우스운 표정이었을 것이다. 그런 알베르의 얼굴을 보며 케일은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내가 재밌는 게 있을 거라고 했잖아. 숨기지 않고 한참을 박장대소하는 그의 모습에 온과 홍은 중얼대며 케일이 이상하다는 말을 해댔다. 그때까지도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가늠이 가질 않았다.

케일에게서 온과 홍이 묘족이라는 말을 듣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케일의 집을 나와 궁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도 놀라움이 가시질 않았다. 셋이서 알베르의 반응을 보며 재밌어하고 쉴 새 없이 입을 열고 있느라 쏙 팔려있던 정신이 혼자 숲을 걷고 있자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잡아먹는 마녀가 산다는 허무맹랑한 소문의 이유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생명체라곤 살 수 없을 것 같은 기묘한 분위기의 숲에서 들리는 어린아이들의 목소리와, 머리와 눈이 온통 붉은 긴 머리의 인영까지. 아마 누군가 우연히 케일의 집이든 뭐든 그 흔적을 봤더라면 충분히 그런 생각을 했을 법한 광경이었다.

 

그렇게 그들에겐 다음날이 있었고, 또 다음날이 있었다. 알베르가 몰래 궁을 나가는 횟수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아지자 여전히 걱정이 태산인 유모도 처음보다는 덜 걱정하는 듯 했고, 궁의 사람들도 그러려니 하려는 것 같은 눈치였다. 때문에 알베르도 보다 자유롭게 궁밖을 오갔다.

온과 홍이 묘족인 걸 알게 된 후엔 아이의 모습으로 있을 때도 있었고, 고양이의 모습으로 있을 때도 있었다. 그 아이들은 알베르를 꽤 잘 따랐고, 넷은 전보다 훨씬 많이 친해졌다. 거의 반년 가까이 계속 서로를 만나며 함께 시간을 쌓았다. 알베르는 케일에게 말을 놓았고, 케일도 처음엔 자신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알베르를 보며 기가 찬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것도 반복되다 보니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알베르에게 이곳은 안식처 같았다. 궁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격식과 신분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을 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제나 떠받드는 사람들이 아닌, 내가 누군지 모르는 이들 앞에서 진정 내가 누군지 알려줄 수 있는 모순적인 감정이 좋았다. 가끔 피곤하거나 짜증나는 일이 있을 때 투정 부리듯 털어놓으면 그에 반응해주고 가끔은 더 격하게 반응해주는 이들이 있는 것도 좋았다. 알베르는 그렇게 점점 물들어갔다. 물들고 싶었다. 왕자 알베르가 아닌, 알베르 크로스만도 아닌 그저 ‘알베르’ 그 자체의 사람으로서 있고 싶었다.

 

***

 

“케일은?”

“나갔는데!”

“혼자 어디 갔는데!”

 

이제는 특별한 날이 아니었다. 그저 그 날 또한 숲을 찾아간 아주 흔한 날 중 하나였다. 알베르가 자연스럽고 아무렇지도 않게 잠금장치가 없는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가자, 평소와는 다르게 케일이 아닌 온과 홍이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나가? 어딜?”

“아마 집 뒤쪽에 있을 건데!”

“뒤쪽?”

“케일은 거기 가는 거 원래 좋아했는데!”

 

이제 꽤 익숙해진 고양이들의 말투를 요령껏 흘려넘기며 적당한 정보만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원래라 하는 걸 보니까 케일이 좋아하는 곳이 있었구나. 생각해보니 케일이 어딜 나가 있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물론 만사에 귀찮은 티가 아주 많이 나긴 했지만 그래도 일 년 내내 집에만 있지는 않을 텐데.

뒤에? 대충 손으로 집 뒤쪽을 가리키며 제스쳐를 취하자 온과 홍은 발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에는 가끔 사소한 호기심에 그쳤던 문이 하나 있었다. 집을 간간이 돌아다니며 보긴 했었지만, 창고려니 생각하며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문이 알고 보니 뒤쪽으로 나 있는 문이었나보다. 알베르는 그 방향으로 걸어가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주로 쓰는 앞문에 비해 출입이 적어서인지는 몰라도 더 낡은 나무의 소리가 났다. 그래도 미는 데에 힘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

 

집의 뒤쪽은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문을 완전히 열자 그곳에는 서툴게 만들어놓은 길이 보였다. 역시 길이라기보단 그저 많이 밟아 풀들이 우그러진 흔적에 가깝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나름 길의 역할은 잘 수행하고 있었다. 알베르는 케일이 어느 쪽으로 향했을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우거진 풀들 사이를 걸었다. 큰 나무들도 보였다. 곧게 뻗기보단 구불구불한 길들이 많아 앞의 풍경을 쉽사리 예상하지 못한 채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딱히 멀지는 않을 것이다. 케일은 많이 움직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 이유와 더불어, 어두웠던 숲에 점점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걸 보고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게 기약 없이 걷던 알베르가 멈춰선 곳은 작은 호수 앞이었다. 발길이 닿은 흔적이 멈춘 곳이기도 했다. 이전과는 다르게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달빛이 내리쬐며 수면을 밝히고, 저주받은 숲이라고 불리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면모였다.

사람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불빛 하나 없이 그저 하늘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상상해본 적이나 있었던가. 바람에 물이 흔들리면 그에 따라 일렁이는 빛의 입자가 얼마나 황홀한지 그려볼 수나 있었던가. 우거진 숲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동화 같은 연못, 그 모든 것을 비추는 달. 세상에서 화려함에 있어 둘째라면 서러울 장식품들을 수도 없이 봐온 알베르지만 그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만들 수 없기에 아름답고, 옮길 수 없기에 눈부셨다. 이 두 눈으로 보지 못한다면 절대 그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못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하고 있었다.

 

풍경을 눈에 담으며 제 기준에 뒀던 아름다움을 생각하며 꼬리를 물던 알베르의 생각이 뚝 하고 멈춰버린 건, 케일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붉은 머리의 실루엣을 대충 확인한 후 그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열었던 입은 그저 뻐끔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알베르의 파아란 벽안이 잔물결 마냥 흔들렸다.

 

“아, 알베르.”

 

긴 머리가 수면 위로 흩어진 채 일렁였다. 붉은 눈은 알베르를 바라보고 있었고, 수려한 이목구비 아래로는 타지 않은 새하얀 피부가 쇄골 언저리까지 드러나 있었다. 살갗이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저 대리석같이 투명하고 깨끗한 피부에 빛이 닿으면 부서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케일이 제 이름을 불렀는데도, 알베르는 쉽사리 정신을 차리려는 기색이 없었다.

케일은 아주 잔잔하게 연못 안에 제 몸을 담그고 있었다. 아름답다. …황홀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체 누가 지금 이 모습을 보고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그래, 그럴 거다. 달과 물, 나무, 어둠, 밤, 그리고 케일. 어디 하나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마치 원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함께 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그래서 매료되었다. 어렴풋이 케일 또한 알베르를 발견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지만,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말에 대꾸를 할 수도 없었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모든 것을 둘러보던 시선은 이제 오롯이 케일을 향했다.

 

“알베르?”

“…아,”

 

케일이 의아한 목소리로 알베르의 이름을 두 번째 부를 때에야 놓고 있던 정신을 붙들었다. 여전히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알베르를 보며 케일은 고개를 약간 옆으로 기울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왜 그러고 있냐며 묻는 듯 했다.

알베르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언제나 하얀 피부를 고수하던 얼굴이 불그스름해졌다. 허둥지둥하며 케일에게서 시선을 떼어내고 눈을 둘 곳을 찾다가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왠지 훔쳐보는 것 마냥 되어버린 상황이 다소 부끄럽고 어쩔 줄 몰랐다. 안절부절 못하는 알베르를 빤히 보고 있던 케일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 같았으면 여유롭게 받아쳤을 테지만, 지금은 달아오른 얼굴을 가라앉히는 데에 급급했다. 벌써 뜨거워진 두 뺨은 쉬이 돌아오질 않았다.

 

“애들이 알려줬어?”

 

대충 자신을 어떻게 찾아왔냐는 질문인 것 같았다. 케일이 슬쩍 화두를 돌려주자 알베르는 기회이거니 생각하며 덥썩 잡았다.

 

“…어.”

 

아하. 케일은 그럴 것 같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팔을 움직여 제 몸에 붙어있는 붉은 머리칼을 떼어내자 움직임에 따라 수면에 잔잔한 파동이 일었다. 꽤 우아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 정적이 흐르고, 알베르의 얼굴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상황이 대충 진정되었을 무렵, 케일이 툭 말을 던졌다.

 

“이렇게 자주 오면 성에선 뭐라 안 하나?”

“…….”

 

뭐?

 

그 말을 이해하는 데는 평소보다 조금 더 긴 시간이 걸렸다. 자주, 성? 지금 성이라고 한 건가? 알베르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히 굳어갔다. 겉으로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무척 애썼지만, 딱히 효과적이지는 않았다. 소년은 아직 서툴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었어?”

 

무슨 말이냐고 다시 되묻는 것도 선택지에 있었지만, 어차피 바보같은 질문일 게 뻔했다. 화법은 궁에서 배우고 또 배우기에 굳이 쓸모없는 말들에 시간을 버릴 필요는 없다. 대체 어떻게 알았지? 내가 말하다 흘린 부분이 있나? 나도 모르게 뱉어버렸나?

 

“이 근처에 그런 옷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아주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무덤덤하게 말하는 케일의 목소리에 알베르는 잠시 벙찔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성 밖으로 나가본 적이 손에 꼽기 때문에, 성 밖의 사람들이 옷차림만으로도 성안의 사람을 구별할 수 있을 줄은 상상한 적도 없었다. 물론 왕자의 옷이 다른 이들보다 고급이긴 하겠지만.

 

“언제부터 알아챘는데?”

“처음에는 그냥 의심 정도였고. 뭐, 네가 자주 왔으니까. 그래도 최근이야.”

 

내가 안일했던 건가? 알베르는 꾹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알베르가 이곳에 오고 싶어한 건 왕자의 신분으로서가 아닌, 그저 ‘알베르’라는 이로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왕자라는 편견과 선입견 없이 그저 서슴없이 말하고 대할 수 있었기에 더더욱 편하고 좋았다. 만족스러웠다. 내가 모르는 얘기를 듣는 것이 좋았고, 나라의 이야기를 그저 어디서 들은 소문인 척 얘기할 수 있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케일은 알고 있었네. 그렇구나.

그 간극에서 찾아오는 거리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서로 아무 것도 모르는, 그저 알고 있는 거라곤 이름이 고작인 사이.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서로 모르는 사이일수록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기도 하다고. 알베르는 자신과 케일이 그런 관계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케일은 그게 아니었다. 케일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정말 처음엔 몰랐을까? 최근에 알았다는 건 사실일까. 사람이 쉽사리 다닐 수 없는 숲에 혼자 다니는 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인간이 아닌 걸 들켰나?

 

“꽤 재미있는 나라였네.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줄 알았는데.”

“…뭐?”

“그냥, 왕자는 이렇게 밖에 나와서 마녀랑 얘기하고 있고. 마녀는 알고 보니 말할 줄 아는 고양이 두 마리랑 같이 살고 있고.”

 

그런 거 있잖아. 큰 비밀을 가진 사람 앞에서는 괜히 밝히고 싶고, 까발리고 싶고 그런 거지 뭐.

 

조용히 읊조리는 케일의 입. 그 때 알았다.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케일은 알베르가 다크엘프라는 사실조차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큰 비밀을 가진 사람 앞에서. 밝히고 싶고 까발리고 싶은. 아마 날 앞에 둔 온과 홍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둘은 그 때부터 알고 있었나? 하긴, 묘족들은 감각이 예민하다고 들었으니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알베르의 눈빛은 조금 가라앉았다. 모든 패를 들킨 이상 전처럼 희희낙락하며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다크엘프인 사실은 왕위계승에 있어 지금까지 어떻게든 숨겨가고 은폐하며 버텨온 단점이자 치명적인 흠이었다. 알베르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물론 지금까지 봐온 케일은 어디에 얘기하거나 퍼뜨릴 성격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당장 성으로 다시 돌아가거나, 아니면….

 

“딱히 관심 없어. 네가 왕자든 아니든.”

 

아까보다 눈에 띄게 경계적인 알베르를 알아차린 듯이 케일은 다시 입을 열었다.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알베르는 물러나려는 다리를 멈췄다.

 

“네가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신기하듯 나도 꽤 신기했거든. 안 그래? 나도 왕자랑 만나는 건 처음인데. 근데 그냥 그게 다야. 너도 나에 대해 궁금했던 건 사실이잖아. 나도 너한테 나에 대해 알려주진 않았지만 또한 궁금해하는 걸 말리지도 않았고.”

“…….”

“그냥 계속 모르는 척 하고 있으려고 했는데, 그것도 마냥 답답해서. …근데 그렇게 당황하고 금방이라도 도망갈 것처럼 굴 줄은 몰랐네. 알리고 싶지 않은 건 알겠는데, 나에 대한 신뢰가 이 정도였어?”

 

어리긴 아직 어리구나. 케일은 그렇게 생각했다. 감정을 숨기려고 노력하는 게 눈에 보이긴 했지만 효과적이진 않았다. 아니, 애초에 노력하는 게 티나는 건 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서툴고 또 서툰 모습에 더 관심이 간 지도 모르겠다.

이 나라의 왕자. 세상에 하나밖에 없을 존재가 자신의 신분을 숨겼을 거라 생각하며 내게 마음을 열었다. 거기다가 다크 엘프. 아주 비밀투성이인 이 소년을 보며 처음엔 그저 몇 번 상대해주면 알아서 관심을 끊겠지 싶었는데, 질리지도 않는지 찾아오고 또 찾아왔다. 이 소년이 원하는 건 뭘까? 과연 알베르는 왜 여기에 오는 걸까.

 

“알베르.”

“….”

“…괜히 어른인 척 하는 것 같아서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알베르의 눈에는 당혹감이 서렸다. 소년은 평소보다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케일을 바라봤다.

 

“네 진짜 모습을 누구에게 보여준다는 게 아마 네 생각만큼 나쁜 건 아닐걸.”

 

케일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알베르는 자신을 숨기는 데에 익숙해진 동시에 신물이 나고 있다는 것. 물론 이해할 수 있었다. 성에서 다크엘프인 걸 들키는 순간에는 바로 그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테니까. 아마 감정 하나를 숨기는 데에도 서투른 소년은 절대 실수해서는 안 되는 크나큰 비밀을 숨기는 데에 온 기력을 쏟아붓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제 신분을 모르는 사람 앞에서라도 조금은 자유롭고 싶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만약에 종족이 탄로나더라도 큰 화는 미치지 않을 테니까.

 

여전히 알베르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케일을 보고만 있었다. 한동안 푸른 눈동자가 반짝였다. 케일도 가만히 알베르를 응시했다.

 

“뭘 걱정하고 있는지는 알겠지만 안 해도 돼. 귀찮은 짓은 질색이니까.”

 

케일도 알베르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과는 상당히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는 사실이 더 흥미로웠다. 저 눈에 보이는 총기나, 완벽하고 빠짐없는 것 같아도 어딘가 서툴고 부실한 부분들이 재미있었다. 그래서 이 정도면 서로 꽤 친해진 것 같아 한 번 무리수를 둬봤는데, 실패인가 보네.

 

“난 케일 헤니투스. 넌, …아마 알베르 크로스만일 거고.”

 

계속 잔잔한 감정상태를 유지하던 알베르가 동요한 것이 느껴졌다.

 

“서로의 이름을 알았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아닌가? 넌 이제 내가 싫어?”

 

여전히 알베르의 입에서 소리라 할 만한 것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계속 침묵을 고수했다. 하지만 경계는 아까보다 확실히 누그러진 것 같았다. 케일은 딱히 재촉하지 않았다. 여기서 제일 좋은 방법은 그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다음에도 와. 편히. 항상 그랬던 것처럼 네 마음대로.”

 

케일의 입이 닫히자 다시 정적이 흘렀다. 숲에는 침묵만이 가득했고, 이따금 바람에 잎들이 흔들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케일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알베르의 속마음이 궁금했지만, 이 이상 말을 더 많이 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 하려는 말은 다 했고, 이제 딱히 할 말도 없었다.

 

냐옹-

 

그때 저 멀리서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케일이 그에 반응하며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전에 몸을 담그고 있다가 깜빡 잠들어 날이 샐 동안 돌아오지 않았던 날 이후 온과 홍은 케일이 너무 오래 보이지 않는다 싶으면 그를 데리러 이쪽으로 왔었다. 시간이 이렇게 많이 지났었나? 이 꼬마랑 얘기하느라….

 

“…알베르?”

 

다시 소년이 있던 곳으로 눈을 돌리자 원래 우두커니 서 있었던 알베르는 이미 없어진 후였다. 사라지는 뒷모습이 보인 것도 아니었다. 정말 말 그대로 사라졌다. 눈으로 쫓을 수도 없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흔적도 남지 않은 채 텅 비어버린 곳을 보고 있으니 저절로 멍해졌지만, 케일은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 그 후 소리가 들린 지 머지않아 온과 홍이 케일이 있는 곳에 도착했고, 그제야 케일은 몸을 일으켰다.

 

“그 꼬마는 어디 갔는데!”

“케일 보겠다고 이쪽으로 왔는데!”

“걔 갔어. 실패했어.”

 

물 밖으로 나와 대충 옷을 걸쳐 입고 발치 앞까지 다가온 고양이들을 안아 들었다. 이전과 다르게 꽤 묵직해진 무게감에 작게 외마디 신음을 흘렸다.

 

“너네 살쪘어.”

“…살이 찐 게 아니라 큰 건데!”

“그게 맞는데! 우리 키 큰 건데!”

“아냐, 살찐 거 맞아.”

 

살이 쪘든, 키가 컸든. 어쨌든 이 아이들도 많이 컸구나,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작디 작은 생물이었는데 이제 두 팔로 들기에는 꽤 벅차다. 반년 정도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래, 반년 전까지만 해도 아니었지.

문득 처음 문을 열고 들어오던 알베르가 생각났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걔도 많이 컸지. 원래 어린 애들은 이렇게 쑥쑥 크나? 키도 꽤 자란 것 같고. 나이대에 비하면 성숙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어린애답지 않게 철이 가득 들어선 귀여운 구석도 없었고, 어른 같은 모습이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했다.

 

결국 알베르는 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가장 긴 텀이 처음온 날 이후의 일주일 남짓이었는데, 그 시간을 훌쩍 넘길 동안에도 알베르는 오지 않았다.

 

역시 괜한 오지랖이었나보네.

 

이젠 괜찮겠지 싶어 꺼내 봤는데 내 욕심이었나보다. 괜히 애를 겁먹게 만든 것 같아 미안했다. 경계심 가득하던 얼굴을 생각하면 꽤 속이 쓰렸다. 그 정도로 반응할 줄은 몰랐으니, 이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지. 그러니 아마 다신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케일이 성으로 직접 찾아갈 일도 없을 테니 말도 안 되는 운이 따르지 않는 이상 나라의 왕자와 만날 수 있는 확률은 없다고 봐야 했다. 알베르가 오기 전부터 원래 셋뿐이었는데도 한 명이 빠져버린 지금이 뭔가 허전했다.

하지만 뭘 어쩌겠는가. 새로 만난 누군가와도 익숙해지듯이, 다시 새로이 생겨버린 빈자리에도 익숙해져야만 했다.

 

***

 

온과 홍은 4살이나 더 나이를 먹었다. 물론 그건 케일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지낸 시간이 4년이나 더 흘렀단 소리였다. 묘족들은 아직도 철이 없었고, 여전히 애 같았다. 나쁘진 않았다. 생각해봤을 때 얘네가 갑자기 성숙해져버리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당황스러울 것 같았다. 딱히 변하지 않고 급하지 않게 흘러가는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그래서 이 조용한 휴식이 좋았다. 홍은 잠깐 산책을 가겠다며 밖으로 나갔고, 온은 케일의 무릎 위에 앉아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별 탈 없이, 특별히 좋은 일도 없지만 특별하게 나쁜 일도 없는 아주아주 평범한 일상. 케일은 이런 생활에 무척 만족하고 있었다.

 

홍이 밖으로 나간 후엔, 언제든 들어올 수 있게 문을 조금 열어놓는다. 한 번 산책을 나가면 대개 늦은 저녁은 되어야 돌아오기 때문에 늦은 시간에 문을 열러 나가는 것도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할 무렵, 집 밖에서 홍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꽤 가까이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오늘은 꽤 일찍 들어오네. 하긴, 몇 년을 여기서 살았으니 더 둘러볼 곳도 없긴 하겠지. 그냥 이 정도 생각뿐이었다. 조금 빨리 들어오는 것에 대한 의아함이 다였다. 야옹, 홍은 한 번 더 울었다. 나른하게 의자에 앉아 책에 시선을 두고 있다가, 홍의 두 번째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굳이 집에 다 와서 울 이유가 없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다. 케일은 제 무릎 위에 있던 온을 바닥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홍은 작게 한 번 더 울었다. 케일은 뭔가 일이 생겼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조금 열어놓은 문을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은 점점 더 빨라져만 갔다. 뒤이어 바로 울어대는 네 번째 울음소리에 케일은 거의 달려가다시피 발을 움직여 문고리를 잡아 확 문을 열었다.

 

“…….”

 

예상대로 홍은 집 앞 마당에 앉아있었다. 그건 딱히 놀랄 일이 아니었다. 야옹. 홍은 기분 좋다는 듯이 길게 울었다.

 

“…이게 무슨….”

 

홍의 바로 뒤에 어떤 남자가 서 있었다. 케일이 올려다 볼 정도의 키를 가진 남자였다. 옷에는 금색의 화려한 장식들이 달려 있었고, 하얀 천 위에는 금빛과 푸른빛의 실들로 세밀한 자수가 놓여 있었다. 옷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옷을 보면 단번에 화려하다, 라고 생각할 만한 그런 옷이었다. 케일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당황과 놀람. 사실 경악에 제일 가까웠다.

 

“너…….”

 

새하얀 피부, 바다를 옮겨 놓은 것 같은 파란 벽안, 우뚝 솟은 코와 장난스런 미소를 짓고 있는 입, 적당히 붉은 기가 도는 입술. 잘 정돈된 선 좋은 눈썹과 날카로운 얼굴선. 그리고 밝게 빛나고 있는 화려한 금발까지. 케일은 잊을 수 없었다. 절대 잊지 못했다. 기억 속의 누군가와는 많이 달랐지만, 너무 많이 비슷했다. 괴리감 속에서 느껴지는 익숙함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케일.”

 

4년. 무려 4년이었다. 4년 동안 얼굴은 물론이거니와 목소리도 까먹은 줄 알았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기에 애초에 다시 볼 수 있을 거란 기대조차 하지 않았고, 그게 기정사실이었다. 사는 세상이 너무 달랐으니까. 그건 케일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 하하.”

 

그 예상을 보기 좋게 박살내며 다시금 내 삶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 왔을 때 허락 따위 받지 않고 왔듯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당당히 자리를 잡고 들어와 케일을 바라보며 미소짓는 그 얼굴에 케일은 그저 허탈한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알베르가 눈앞에 있었다. 알베르 크로스만이었다. 이 나라의 왕자였다. 얘가 왜 여기 있지? 아직 케일의 얼굴은 정리되지 못한 채 수많은 표정을 오갔다. 4년의 시간 동안 서툴고 어른스러우며 어리숙했던 소년은 많이 자라있었다. 이제 19세. 케일의 기억에 존재하는 소년은 없었고, 한 명의 어엿한 청년일 뿐이었다. 여전히 당황스러운 듯한 케일의 표정을 보며 알베르는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환히 올리며 미소지었다. 알베르의 모든 행동이 기대에 차 있는 것만 같았다. 케일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자연스레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케일의 고개가 조금 더 올라가고, 알베르의 시선이 조금 더 내려갔다. 알베르는 입을 열었다.

 

“나랑 같이 수도로 가자, 케일 헤니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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