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른의 실종자들에 대한 소고
w. 부재
붉은 머리의 남자는 서류철의 마지막 페이지에 제 이름을 써넣은 뒤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더는 꼴도 보기 싫어진 그것을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팔 옆의 서류더미 쪽으로 던지고 책상 위로 엎어지면 유능한 집사장 한스는 능숙하게 그것을 받아들며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절벽이라도 올려다보는 심정으로 엎드려서 지켜보는 그 풍경이 아찔하여, 케일은 곧 눈을 질끈 감았다. 젠장. 더는 기력도 없네. 형, 나 백수 시켜준다며. 혹시 나만 진심인가? 제법 합리적인 의심을 해보는 케일의 머릿속에는 수 일 전 마주했던 알베르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특유의 피로함으로 빛나는 미모에 미안하단 기색이 내비쳤을 때 바로 수정구 통신을 꺼야했는데. 간만에 기름 잘 발린 혀로 대응했던 것이 통한의 실수였다. 적어도 동생, 백수하고 싶지? 하는 그 달콤한 목소리에 걸려들어서는 안 되었건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라온이 수정구 너머의 그를 향해 또 그렇게 웃는다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망나니라는 이름이 아깝게 서류 작업을 때려치우지도 못했던 것은 실제로 이 서류들이 작금의 유일한 꿈인 ‘백수’로 향하는 길에 도움이 되는 탓이었다. 전(前) 왕세자 저하, 그러니까 지금 로운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 알베르 크로스만은 거짓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로운과 전 대륙을 구한 대영웅―짓궂게도 대(大)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며 대대대영웅 같은 유치한 소리를 하는 작자들도 있었지만 애써 이를 무시했다―이라고 불리는 것도 언짢을 지경인데 영주님 소리까지 들었다가는 정신이 남아나지 않겠냐는 말에는 조금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건 아니지.......’
일말의 고마움까지 갈아 넣어 버린 서류에는 기어코 사심과 진심을 담아 넣을 수밖에 없었다. 서류가 손에 들어오는 순간 알베르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돌아버릴 거라는 예측은 퍽 유쾌했다. 지난번의 갈색 눈동자에 빛이 없었던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나중에 헤니투스 영지 특산품이라도 보내어 달래보면 그만일 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얼굴 앞으로 서늘한 기운이 훅 끼쳐 케일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레몬에이드 위의 얼음이 덜그럭거리며 유리잔에 부딪히고 있었다.
부연 시야 너머로 유리잔 겉면에 송골송골 맺혀있는 물기가 제 땀방울을 닮은 것도 같다는 생각에 가볍게 눈살을 찌푸릴 뻔도 했건만, 옆에 서서 웃고 있는 론의 얼굴을 보면 절로 미간이 펴질 수밖에 없었다. 서늘한 것이 레몬에이드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서대륙 일 안 바쁘나? 그런 말은 익숙한 레몬에이드의 맛과 함께 목구멍 너머로 삼킨 지 오래였다. 어차피 당장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휴식에 몸을 맡기고 지내는 시기였으니 퍽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언젠가 보았던 생생한 악몽과는 달리, 하얀 별이 진 뒤의 세상은 유래 없는 평온함을 누리고 있었다. 가까운 사람들이 사라지는 일도 없이. 누구 하나 죽는 일도 없이. 이래도 괜찮을까 싶어질 정도로, 입사 동기 최정수가 좋아했을 법한 해피 엔딩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케일은 싫지 않았다. 애초에 싫어질 리가 없었다. 힘든 길만을 골라 걸어온 망나니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었다. 자잘하게 문제가 남아있다고는 해도 적어도 피를 토할 일은 더는 없었다. 이런 상황이 주변 사람들에게 기꺼운 일이 된다는 걸 인지하는 이상, 무리할 생각도 없고. 그래, 케일은 정말로 더는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대영웅이니 뭐니 알까보냐. 백수하기도 바쁜데. 다시금 속으로 다짐하며 호기롭게 레몬에이드를 반 정도 들이켰다.
레몬에이드의 신맛에 미미하게 찡그리지도, 차마 웃지도 못하고 있자 검은 형체가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왔다.
“인간아! 인간아!! 일 다 끝났나?”
“……어.”
모처럼의 긴 휴가인데 애들과 놀아주지도 못하게 만든 알베르를 향해 다시금 불평불만을 날리게 되는 순간. 이를 알아채지 못한 라온은 제 얼굴에 뿌듯한 웃음을 담뿍 담으며 케일의 얼굴 앞으로 흰 종이를 내밀었다. 막 떠나보낸 서류의 잔상이 맴도는 탓에 잠깐 그의 얼굴이 움찔거렸다. 다행스럽게도 내용을 확인해보니 케일이 돌아버릴 만한 일은 없었다.
“그러니까…… 뭘 쓴 거야?”
“똑똑한 최한이 가르쳐준 거다!”
“아, 한글?”
애들 앞에서 아는 걸 모르는 척 하는 것도 힘들다. 적당히 각지고 둥글둥글한 김록수의 모국어를 잊어본 일이 없지만 케일은 이제야 알아보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를 받아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문자를 삐뚤빼뚤 쓴 모양이, 아이가 처음으로 글자를 배울 때를 연상케 하여 슬쩍 입 꼬리가 올라갔다.
돈. 황금. 사과 파이. 스테이크. 인간. 할배. 엄마. 온. 홍. 최한. 메리….
다른 것도 몇 가지 있지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한 권의 책으로 낸다면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전부 빼먹지 않고 썼을 정도로 수많은 이들의 이름과 애칭이 적힌 종이를 보고 케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자 공부를 한 건가 생각도 했지만 곧바로 돌아온 라온의 낭랑한 목소리에는 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 위대한 라온 미르가 좋아하는 것들 쓴 거다!”
구석에는 조금 큼직한 글씨로 ‘라온 미르’가 적혀 있었다. 잘 썼네. 잠시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인간의 모습을 한 온과 홍도 쪼르르 이쪽으로 다가와 서로의 종이를 바삐 들이밀었다. 우리도 좋아하는 거 썼다는 건데! 특별히 보여준다는 건데! 마찬가지로 좋아하는 음식과 물건과 다른 이들의 이름이 가득 적혀 있는 종이. 두 아이의 머리도 가볍게 쓸어주자 까르르 웃는 소리가 서재 안에 울려 퍼졌다.
이 서재에서 한글이 쓰인 것은 이로써 네 번째였다. 최한의 한글 교실이 열린 것이 벌써 세 번째라는 소리다. 첫 교실까지는 케일도 참가했었지만 이후 쏟아져 내린 서류 복으로 이후 참여는 하지 못했고, 다만 좋은 기억력을 이용하여 ‘외운’ 한글을 적당히 활용하고 있었다. 아이들처럼 제 이름 석 자를 쓸 일은 없으니 누군가 써온 것을 수업이 끝나고 소리 내어 읽어본다든가. 일단 뜻은 잘 모르는 셈이니 아이들의 해설을 열심히 새겨듣는 모양이 되었지만 이래서 표음문자가 편했다. 소리 내어 읽는 오늘도, 자신의 한국어가 영 생소하면서도 그립게 느껴졌다. 이 세계에 들어오자마자 적은 문서를 불태우고 다시는 한국어를 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었던 탓에 더더욱.
“케일님? 괜찮으신가요?”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동안 서재 저편에서 이리로 건너왔었나 보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순한 인상의 최한도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는 종이뭉치가 들려 있었는데, 얼핏 보아 한글로 적힌 이야기인 듯싶었다.
“아, 글자를 가르치려면 단어가 많은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슬쩍 보여준 종이에는 아이들의 것과는 다르게 보다 긴 줄글이 나열되어 있었다. 간단한 일상 회화도 보이고, 어디서 본 듯한 옛날이야기도 몇 장을 차지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오래 전에 보고 들은 것들이라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아서……. 참고용으로 몇 장만 추렸습니다.”
다른 것들보다 케일의 시선이 오래 닿은 페이지를 확인하고 최한이 씁쓸하게 덧붙였다. 내용상 상대적으로 가벼운 이야기만 나열되어 있었다.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그것은 최한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이곳에서 공식적으로 한글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최한이고, 그 페이지를 추린 것 또한 최한이었으므로.
“그래.”
그러니 ‘케일’은 저것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종이를 도로 건네주자 아이들이 산책을 나가기 전까지 이야기를 마저 읽어달라고 그에게 아우성쳤다. 조금은 곤란한 듯 웃어 보이는 최한에게 케일은 계속 읽어주라며 신호를 보냈다. 케일이 일을 끝낸 뒤 오후에는 다함께 밖으로 나가기로 했지만, 이야기가 중간에 끊기는 것도 맥이 풀리는 일이었다. 그랬기에 김록수도 휴일 책방에서 소설책 전권을 빌려오지 않았던가.
케일의 일이 끝나 더는 방해가 되지 않음을 확인한 최한의 목소리가 옆 책상에서 나직이 울렸다. 하멜른이라는 동네에 나타난 어느 이상한 사내에 관한 무척 오래된 동화였다. 이름도 모르는 먼 나라의 이야기에 눈빛을 밝히는 용 하나와 묘족 둘, 동시에 모국어를 입에 담은 최한의 입가에 웃음기가 번지는 것을 보고, 어느 책의 내용을 떠올린 케일은 어쩐지 그 풍경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빌어먹을 「영웅의 탄생」이 들려줄 리 없는 상냥한 이야기.
누구 하나도 희생하지 않고 이야기의 끝에 도달한다는 결말은 영웅의 탄생을 노래하는 책에서 다루기에는 부적합했다. 그래서 백수가 꿈이었던 김록수는, 케일은 이곳에서 이야기를 비틀었다. 원래 주어졌던 이야기가 형체도 남지 않을 정도로, 제멋대로. 그렇게 해서 이제는 마음 편히 쉬고 싶었을 뿐이다. 갑자기 잘 흘러가던 서사에 난입하여 난장판을 치다니 작가 입장에서 보면 이만한 망나니도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백수의 꿈이 상당히 멀어지기도 했으니, 영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처음으로 피리를 분 것은 자신이리라.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 뒤에는 백수 생활을 방해하는 것을 가까이 하지 않으려 오히려 발버둥을 쳤다면 쳤지, 무언가를 부추기는 행동은 딱히 하지 않았다. 비틀린 이야기가 온전히 뒤틀린 것은 다른 이들의 몫이었다. 그저 백작가의 망나니가 되어 쉬고 싶어 하는 자신을 따라 온 것도, 모두를 지키며 싸운 것도―정해진 이야기를 이탈한 것은―모두 그들의 선택. 자신이 시작했다고 하여 그 이후마저 자신의 몫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백수를 꿈꾸는 케일에겐 추호도 없었다. 그러니 어느 백작가의 서재에서 펼쳐지는 지금 이 시간은, 모두가 새롭게 써 내린 역사의 결말이자, 시작점이었다.
비현실적이라니, 영웅의 탄생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감상이지. 케일은 눈을 끔벅거리다 말고 고개를 가만 저었다. 어느새 이쪽을 소리 죽여 쳐다보던 서재의 사람들 전원은, 케일이 슬쩍 졸았다고 착각이라도 했는지 작게 웃는 소리를 내었다. 레몬에이드가 잔에 더해졌다. 아, 이게 아닌데. 조금 멋쩍어져서 헛기침을 하다 말고 레몬에이드를 마시니 최한이 들고 있던 종이를 책상 위로 덮었다.
“먼저 산책부터 다녀올까요?”
“더 있다가는 완전히 잠들 것 같다는데!”
“요즘 우리 인간 책상 앞에만 있어서 못 걸어 다녔다! 더 약해졌다간 큰일이다!”
얼씨구. 어이가 없다는 눈길을 주니 또 웃음보가 터졌다. 됐다. 애들은 많이 웃으면 좋지. 몸을 자리에서 일으키니 언제 준비해왔는지 론이 나갈 채비를 도왔다. 간만에 일어난 탓에 조금 휘청거렸더니 돌아오는 눈빛이 또 서늘했다. 정말 정정하네. 서대륙은 앞으로도 한참은 안전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듣고 있던 거, 아직 안 끝나지 않았어?”
“시간도 많고 나중에 마저 들어도 되는데!”
“그래그래.”
아이들은 종이뭉치로 뒤덮인 책상으로부터 멀어져 이쪽으로 다가왔다. 문 쪽으로 움직이니 쪼르르 따라오는 모양새가 조금은 우스웠다.
“인간아! 이제 우리 어디로 가나?”
“일단 나가야지. 어디로든, 너희가 가고 싶은 곳으로.”
이에 아이들이 일제히 방밖으로 뛰어나간다. 문득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으로 끝을 맺지 못할 어느 두 이야기의 주어진 결말을 떠올렸다. 어떤 엔딩이었을까. 이야기 밖으로 사라진 아이들은 어디로 간 걸까. 잠시 멈춰서면, 아이들의 뒤를 따라 나서던 다른 이들이 방을 나가다 말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아이들도 밖에서 재촉하는 소리를 내었다. 모든 이들의 목소리가 어우러지며 한때는 누구도 쓰지 않았을 서재를 가득 메웠다.
이제 정말로 빌어먹을 「영웅의 탄생」은 없다. 우리는 그것을 다시 쓰기로 했다. 만약 지금까지의 일을 글로 쓴다면 분명 두꺼운 책이 될 것이고, 다행스럽게도 앞으로의 백수 생활은 충분히 길고도 태평스럽게 이어질 것이다. 심지어는 지금까지 작성한 이야기보다 앞으로의 시간이 훨씬 더 길다.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니 더는 의미 없을 이야기를 제 발걸음으로 힘껏 지워나가며,
피리 불던 사나이는,
케일은, 현재의 이야기에 충실하기로 했다.
펠리스력 781년 3월 29일.
이 날을 기점으로 「영웅의 탄생」에서 수많은 이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들의 행방은 이제 아는 이가 없으나,
그들이 써내려가는 새로운 이야기는 분명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