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나라한 살인/상해/고어/사냥의 폭력 묘사가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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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고성은 불꽃과 함께 타들었다. 빛나는 대리석에 늘러붙은 피를 벅벅 닦는 게 일이었다. 내가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봄도 겨울도 없었다. 봄이 오고 정원의 나무에 복사꽃이 하얗게 피기 시작하면 직조된 태양이 바닥에 깔린 인공 잔디에 활기를 띄웠다. 날이 풀리면 새로운 사람들이 이삿짐을 가득 싣고 아름다운 상류사회의 진입을 꿈꾸며 도시로 기어들어 왔다. 겨울에는 진득한 핏물을 처리하는 게 관건이었다. 가로등이 켜지지 않는 골목골목마다 무영의 혼이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영을 기억하는가.
알베르 크로스만 X 케일 헤니투스
푸른 수염
사의 찬미
死의 讚美
나는 무영을 알고 있다.
무영은 그림자다. 정확히는 그림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영, 영이 없으므로 무영이다. 내가 무영을 무영이라 부르는 것은 내가 알고 있던 이들 중에 가장 먼저 그림자로 인해 죽은 이의 이름이 무영이었기 때문이다. 무영은 이름처럼 무영(無影)으로 인해 사라졌다.
내가 처음 무영을 본 것은 집 앞 슈퍼마켓을 건너 돌아가던 골목 넘어, 야트막한 전조등 불빛이 아슬아슬하게 파리며 나방이며 하는 것들을 꼬아내던 새벽이었다. 무영은 아무것도 아닌 채, 아무렇지 않게 거기 서 있었다. 나는 처음 무영이 보인다는 데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니까, 무가 아닌가. 왜 없는 것이 보이는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나타나는 것이고 있어야 하는 것이 없는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닳아버린 주색등이 불안하게 껌뻑거리는 전봇대 아래에 서 있었다.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니 술에 취한 것 같았다. 전봇대를 부여잡고 그 아래로 토악질을 해대는 늙은 남자의 아래에 무영이, 그러니까 불빛 아래인데도 그 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신음소리를 내며 전봇대를 손톱으로 박박 긁었다. 전날 내린 폭우로 인한 물비린내와 토사물에서 흘러나오는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밝은 골목으로 돌아가 층계참을 올라 나의 집으로 돌아갔다. 문에는 청테이프가 붙어있고 도어락을 열고 들어가면 좁은 방과 도서관에서 빌려온 소설책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나의 집으로.
다음날, 그 골목에는 시체가 있었다. 전날 새벽에 본 그 남자였다. 새벽에 본 것처럼 전봇대를 손톱으로 벅벅 긁다 자신의 토사물을 깔고 헐떡이며 죽어있었다. 태양 아래였는데도 그림자는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나는 경찰을 부르고 출근 시간에 늦지 않게 버스를 탔다. 천연가스를 내뿜으며 도시를 달리는 시외버스를 타고 시체와 멀어졌다. 길드에 가자 세 명의 무영을 더 있었다. 오후 여덟 시, 본부로 시신 세 구의 처리에 대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무영을 믿게 되었다. 수백 번의 무영을 쫓아다녔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림자가 떠난다는 것과 혼이 떠난다는 것은 별다를 것 없는 일이고, 혼은 일찌감치 죽음을 예견해 주위를 둥둥 떠돌다 떠나버린다는 것을, 영이 떠나버린 것은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 이후로 바닥을 바라보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바닥을 보지 않기로 한 첫날 이수혁과 최정수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영이 떠나버린 것인지, 아니면 떠나지 않았었는지에 대해 모른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돌아와서 삼겹살에 회식 한 번 하자고 팀장을 졸라대던 최정수와, 최정수를 무시하고 서류철을 나르던 이 팀장의 뒷모습뿐이다. 그 기억이 내 머릿속 한구석에 깊게 뿌리박혀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무영을 잊어버리기 위해 노력했다. 보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정체를 드러내는 무영에 몇 번이나 눈을 비볐다. 매일같이 갈아치워 지는 죽음이 무영 탓인지 아니면 죽음에 인접한 우리의 탓인지 몰랐다. 가능하면 왜 그리 빨리 떠나버리느냐고 멱살을 잡고 소리치고 싶었다. 당신의 몸에서 혼이 방금 떠났고 당신이 곧 죽는다는 말은 어디에서도 할 수 없었다. 무영은 보지 않으려고 하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수백 개의 그림자 사이에 딱 하나, 그림자가 없는 인간이 있다.
그러던 서른여섯의 새벽, 나는 다시 무영을 만났다. 사방에 피 냄새가 진동하던 밤이었다. 빗물에 쓸려 내려간 핏물 때문에 구두 굽이 미끄러웠다. 손바닥에 박힌 자갈을 빼내려고 아래를 내려다봤을 때.
거기에 무영이 있었다.
거기엔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고개를 드니 나를 떠나버린 그림자가 나를 보며 킬킬 웃고 있었다. 그 순간, 의식이 흐려졌다. 품속에 쥐고 있던 책의 페이지가 조금 찢어진 것 같았다. 통증에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그림자가 발목을 잡고 어딘가로 나를 질질 끌었다. 아스팔트에 갈려 나가는 피부가 비명을 질렀다. 품에 끌어안은 책이 찌익 소리를 내며 찢어졌다. 발버둥 쳐도 붉은 그림자가 나를 잡아당겼다.
이른 퇴원을 하고 집에 와서 찢어진 페이지를 테이프로 이어붙였다. 영웅의 탄생 5권 53페이지의 찢어진 페이지가 너덜거렸다.
나는 그림자가 되었다.
1
그날은 지독한 안개가 끼어있었다. 역에 늘어선 기관차들이 출발하기 전 허공으로 뿌려대는 석탄 연기보다도 짙은 안개였다. 밖은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어서, 창밖으로 고개를 아무리 내밀어도 가는 길에 무엇이 있는지, 또 우리가 어디로 어떻게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정해진 대로 직선으로 이어진 고가도로를 따라 달릴 뿐이었다. 바퀴가 돌부리에 걸려 덜컹거릴 때마다 창밖에는 짙게 낀 안개 사이로 간간히 우뚝 선 나무나 표지판 몇 개가 다가왔다 다시 멀어지길 반복했다. 로운, 태양의 도시. 크로스만가 18번지. 파란 표지판이 가르키는곳은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이상하게 가슴이 갑갑하고 등 뒤로 불길한 기운이 고개를 치켜뜬 것처럼. 나는 창밖에서 고개를 돌리고 짐 속에 넣어둔 편지를 꺼냈다. 붉은 인장을 찍힌 고급스러운 편지지에는 급하게 적은 것 같은 흘겨 쓴 글자들이 적혀있었다.
[조심해, 케일. 크로스만에는 벌써 공식적인 실종자가 여섯 명이나 나왔어. 나는 네가 위험에 처하지 않기를 바라. 기회가 된다면, 거기서 나가.]
나는 편지를 반으로 접어 옷소매에 넣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긴. 직선도로를 따라 한참을 달리고 있으니 오디오에서 일기예보가 흘러나왔다. [금일 오후부터 북상하는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 ---는 오후 23시까지 장맛비가 오겠습니다. 서해안과 일부 내륙에는 가시거리 2km 미만의 안개가 낀 곳이 있습니다. 남부내륙 지역에는 소나기가 오는 곳이 있겠고, 그 밖의 중부내륙에는 오후에 산발적으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곳이 있겠습니다. 도로가 미끄러울 수 있으니 교통안전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차분한 음성을 가진 기상캐스터의 말이 끝나자마자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정말로 콧잔등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라온, 이것 좀 봐. 나는 말을 마치고 나서야 아무도 함께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맞다, 지금 없지. 떨어지기 싫다는 아이들에게 금방 돌아올 거라고, 일주일 정도면 참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설득한 게 엊그제인데도 너무 익숙해서 그만 까먹고 말았다.
이런 시대에도 약혼이나 정략결혼 따위는 상류층 사이에서 빈번하다지만 이 건이 급작스럽고 어이없게 전개되었다는 세간의 시선에는 동의한다. 약혼이라기보다 오래된 사업 파트너인 –빌어먹을- 알베르 크로스만과 한 모종의 계약이었으니까. 그와는 벌써 5년을 좀 넘게 알고 지냈으며, 우연히 눈이 마주친 이후로 5년. 애초부터 속을 알 수 있었던 사람과 보내는 5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처음 크로스만에서 약혼서가 날아온 후로 절대 안 된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를 질러대는 데르트와 바이올란을 말리는 게 얼마나 힘들었던지. 정 설득이 안 되면 빌어먹을 사랑 핑계라도 댈 셈이었다. 자식이 가족사업의 이익을 위해 원하지도 않는 결혼을 덥석 해버릴 꼴을 보고 있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득인 걸 어쩌라고? 한동안 백수 노릇을 못하게 된 건 아쉽지만, 그러기엔 너무 좋은 조건과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런 조건은 받아들이지 말라며 화를 내고 자신을 바라보는 저 어리고 사랑스러운 가족들을 떼어놓는 게 이제까지 겪은 모든 일 중에 가장 힘든 일이었다. 지금쯤 까먹고 엎어져 놀고 있을 것이다. 애들은 원래 그러니까. 슬픔은 달래줄 사람만 사색을 끝내자 어느새 빗방울은 잘게 한두 방울씩 쏟아지더니 이내 안개 사이로 사라졌다.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찌르자 그 사이로 고성의 풍경이 나타났다. 나는 마차에서 내리면서 편지 속에 적힌 이름을 떠올렸다. 글린다, 에드워드, 저스틴, 오웬, 맥스, 카미유... 도시에서 탄 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2.
크로스만가 25번지에 위치한 그 집은 집이나 저택이라기보다는 확실하게 성에 가까웠다.
그곳은, 그러니까 그 집이 지어진 부지와 이어지는 거리에 다달이 붙어있는 넓은 주택가는 상류사회를 상징하는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강 너머에 위치해 매일 밤 비싼 샴페인이 터지는 소리와 주색 등의 현란한 불빛이 도심지를 꽉 메우는 곳. 집값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비싸고, 모두가 집안일을 대신하는 고용인들과 운전기사를 부리며, 정원에서는 하네스를 맨 개들이 널따란 부지를 뛰어다니는. 단순히 졸부들이나 조금 흥행한 벤처 사업가가 아니라, 조상에게서 내려오는 부와 오랜 착취의 역사를 등에 업고 금괴와 보석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사람들만의 거대한 군집이자 성이었다. 완벽한 인생이 예정되어있는 아이들이 나고 자라 지연의 끈으로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부의 기지. 매년 이 도시에는 많은 이들이 짐을 가지고 상류사회의 진입을 꿈꾸다 빚에 허덕여 쫓겨났다. 자녀를 둔 부모들이 교육 따위의 목적으로 겨우 집을 구했다가 나가떨어져버리고 말았다. 집값을 갈수록 치솟았고, 남아있는 이들은 이따위 부동산은 몇채나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으며, 수천만 원의 골프채를 쉽게 바꾸는 이들의 틈에서 제정신인 보통 사람들이 버틸 수 있을 리 없을 것이다. 다른 집들과 떨어져 그사이에 넓은 부지를 독차지하고 고고하게 서 있는 성. 집값이 상상을 초월하는 이곳에서도 어마어마한 유지비를 감당하고 있을 것만 같은 형체의 그 성이 크로스만의 것이었다.
나는 안개 낀 도시를 바라보았다. 성에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크게 뛰는 것 같았다. 도심 속으로 걸어들어가자 작열하는 은빛 태양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상하게 조금 전까지 온 도시를 메우고 있던 뿌연 안개가 언제 그랬냐는 듯 모습을 감춘 채였다. 내가 그 집 문앞에 당도했을 때, 거대한 철문에는 섬세하게 세공된 성경 속 태양의 형상이 깃들어있었다. 모든 담과 벽이 빈틈없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어서 불쾌할 지경이었다. 여기 있어서는 안된다는 묘한 직감이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옆을 둘러보니 뾰족한 담장에 엉켜있는 장미 덩굴들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여름 햇살을 머금고 자라 활짝 핀 장미들은 그 자체로 아가리를 활짝 벌린 짐승의 혓바닥처럼 보였다. 여기 있으면 안 돼. 끔찍한 곳이야. 무엇보다 집 안에서 풍겨오는 향을 태우는 냄새가 자꾸만 코를 찔렀다.
이스트 트와일라잇이라고 적힌 명패를 지나치고 그 집에 들어가자 넓게 트인 창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2층 난간이었을 것이다. 무시하고 지나치려는데 자꾸만 그것이 눈에 밟혔다. 적당한 체구의 남자였다. 그는 하얀 정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바짓단에 뭔지 모를 새까만 것들이 묻어있었다. 또 무슨 헛짓거릴 한건지, 멍청한 알베르. 눈이 마주치자 그는 이내 테라스 안쪽으로 사라졌다. 오랜만에 보는 푸른색이었다. 푸른색. 푸른 눈. 그러고보니 현관 계단을 장식하고 있는것도 푸른 수국이었다. 기묘한 느낌에 돌아보니 정원을 장식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이상하리만치 푸르거나, 파랗거나, 하여튼 파란 빛을 띄고 있었다. 분명 정신 사나운 어린 아이들이 여럿 있거나, 아니면 신경안정제를 복용하는 집주인이 있다는 뜻이겠지. 신경 쓰지 않고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열리며 사랑스러운 금발 머리의 이십 대 쯤 되어 보이는 사용인이 튀어나왔다.
“어서 오세요!”
그는 활짝 웃으며 들고 있던 짐가방을 빼앗더니 소리쳤다. 저하, 약혼자분께서 도착하셨어요! 저하? 요즘도 저하라는 호칭을 쓰는 곳이 있나, 왕족도 아니고? 나는 의아했으나, 의아함을 드러낼 틈도 없이 걸어야 했다. 자신을 에반이라고 소개한 사용인이 손을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지금 방을 정리해드릴 거에요. 이미 끝났긴 한데... 새 짐도 있고, 방이 준비될 때까지 잠시 응접실에 가 계세요.”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에반은 그 뒤로 한참을 조잘거리다가 나를 응접실에 앉혀두고 홀랑 빠져나갔다. 응접실을 빠져나가면서 에반은 다른 사용인이 차를 준비해드릴 것이고, 저하께서 곧 오실 것이라고 했다. 그러더니 그는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저하께서 곧 오실 것이라고 말했다. 왜 저렇게 긴장하는 거지. 무서운 사람인가, 아닐 텐데. 나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 멀뚱히 응접실 차창을 바라보았다. 맑게 갠 하늘에서 쏟아지는 은회색 태양이 분수대를 지나 내가 있는 소파까지 쏟아졌다. 저택 맨 아래층에 위치하고 있는 응접실엔 하얀 대리석 천장과 연한 민트색 벽지에 조화를 맞춘 황금색 소파와 오크나무 원목 테이블이 있었고 정 중앙을 차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불안하게, 그러나 견고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벽마다 박제된 짐승의 머리가 있었고, 마찬가지로 사냥에 사용하는 것 같은 머스킷과 사냥칼 따위가 과시적으로 놓여있었다.
집안 곳곳을 차지한 채 곧게 자란 식물들이 햇빛에 살랑거리며 타올랐다. 처음 이 집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진동하던 탄 내는 응접실에 들어서자 모란 같은 냄새로 바뀌었다. 거만하게 누운 채 고개만 돌려 둘러보니 곳곳에 향로 속에 넣어 불을 붙여놓은 얇은 나무막대 향들이 타오르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나이 든 사용인이 찻주전자와 간단한 간식을 가지고 테이블을 차리기 시작했다. 블루 멜로우와 마들렌, 곁들여진 생 초콜릿. 나는 속으로 기사의 첫 문장에 크로스만에서 처음으로 입에 댄 음식을 적을 생각을 했다. 가령 ‘내가 처음으로 그곳에서 느낀 것은 기이할 정도로 푸르고 창백한 돌담과, 사람. 그리고 정원에 핀 수국과 같은 색을 한 블루 멜로우 한 잔의 서늘함이었다.’ 따위의 문장을. 마른 장미꽃잎이 굴러다니던 찻잔 바닥에 뜨거운 찻물이 쏟아졌다. 맨손으로 생초콜릿 하나를 집어 입에 넣자마자 혀끝을 덮치는 텁텁하고 쓴 파우더에 조금 녹은 초콜릿의 단맛이 섞여들어 갔다. 반으로 깨물어 조각낼 때마다 차가운 내부의 온도가 입안을 식혔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늦으십니다?”
“이거 실례를 저질렀네.”
미안하다며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나타난 그는 여전히 하얀 정장을 입고 있었다. 바짓단에 묻어있던 얼룩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몸에서는 약간의 철 냄새가 난다. 그와 다르게 완벽하게 넘긴 금발 머리와 정원의 수국 같은 푸른 눈이 햇볕을 등지고 있다. 나는 낯선 얼굴에서 그에게서 나는 동류의 냄새를 단번에 맡을 수 있었다. 케일 헤니투삭 되기 전부터, 저런 종류의 인간이라면 수없이 봐왔다. 수없이라도 하기에도 매일 아침 눈뜨고 거울을 보면 그 앞에 서 있는 김록수가 바로 저런 인간인데. 얼핏 봐도 안다. 완벽한 껍데기의 짐승의 내면을 숨기고, 그러나 완벽하게 감추지는 않는. 타입을 압박할 만큼의 위험함을 무기처럼 두르고 상냥한 미소를 짓는 인간. 아둔하다면 눈만 마주쳐도 기뻐할 것이고 머리가 어느 정도 돌아가는 인간이라면 초면부터 불편해할 것이다. 그걸 노렸을 테니까. 나는 위아래를 한 번 훑어보고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드디어 뵙네요.”
“편히 하게. 어차피 가족이 될 사이에.”
웃기시네. 짧은 비웃음이 입가를 스쳤다. 결혼 따윈 상상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게 뻔히 보이게 저 소릴 해대니, 우습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알베르 크로스만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를, 그리고 첫 만남 때에도 단숨에 알아챌 수 있었던 정보들을 떠올렸다. 수완이 좋고 신경증 따위는 앓고 있지 않으며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할 유능한 장남이지만 형제와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의 어린 동생들은 동경하는 큰 형제 정도로 생각할 것이고, 가까운 형제들은 견제하면서도 유산싸움을 어떻게 유리하게 가져갈지 고민하고 있겠지. 아예 저편에 붙어버릴까도 생각 중일 것이다. 부모에게는 조금 불편한 자식이겠지. 지금의 권력을 넘겨주기는 싫지만 그에게 돈을 타 먹어야 할 테니까. 언제 자신을 위협할까 두려워하면서도 노후에는 덕을 보아야 하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함부로 명령을 내릴 수도 없는. 그러나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적자가 아니므로 무엇도 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유산도 자기 자식한테 주고 싶지, 남편이란 작자가 어디서 데려왔는지도 모를 사생아에게 주고 싶을까. 아비 쪽도 매한가지, 자신이 밖에서 낳아온 자식을 정말 숨만 쉬게 하며 기르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수치였을 테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서자가 욕심도, 야망도 있는 성격이라 짜져 살지도 않으니 목이 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태초부터 그런 성격을 가진 어린아이를 부추긴 것은 노골적으로 ‘네가 싫다’고 견제해온 당신들의 업보일 것이고.
“이런 식으로 만났다고 따로 통성명은 필요 없겠죠.”
“알베르 크로스만.”
그가 손을 내밀었다. 손톱 아래에 진흙 따위가 껴있었다. 아니, 말라붙은 핏물이 피부 사이로 스민 것이다.
“아시다시피, 케일 헤니투스요.”
무의미한 통성명이 이어졌다. 그는 더 이상 감추지도 않을 것이라는 듯이 입가에 미소를 지웠다가 찻잔을 두 번 두드렸다. 나는 내내 그 손톱 틈에 묻어있는 핏자국이 눈에 밟혔다. 적당히 식은 잔을 들어 입에 대려는 순간, 그가 말을 걸었다.
“놀랐어. 당연히 응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다.
“조건이 워낙 마음에 들어야 말이죠.”
“결혼, 할 건가?”
“당연히 아닙니다.”
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과 나는 그냥 그런 척만 하다가, 계약이 적당히 합의를 보고 나면 파혼이든 이혼이든 하는 거예요. 위자료는 단단히 물 테니까 그거나 걱정하시고요. 말을 잇자 단단히 일그러지던 얼굴이 웃음을 터트렸다. 난 자네가 마음에 들어. 정오의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로 떠올랐다.
“누누이 말하지만 전 댁이 마음에 안 들거든요.”
“참게, 얼마 얼굴 보고 살 일도 없을 것 같으니. 그리고 나도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고 싶거든.”
“그러길 바라야죠.”
알베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셀죽 웃었다. 무성 영화속의 죽은 배우들처럼 멀끔하고 재수 없는 얼굴이었다. 당신, 아는진 모르겠지만 검은 머리가 좀 있네. 나는 입에 닿은 찻잔 벽을 이빨로 긁었다. 물어야 할게 많았지만 지금 말을 할 타이밍은 아니다. 가령, 오래된 사업 파트너가 당신 여섯 명 죽었어요? 하는 소릴 해대면 미친놈 취급당하거나 칼을 맞을 테니까. 나는 마저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입가가 삐죽이는 것이 재수 없단 생각 중이군. 접시에 놓여있던 마들렌을 반으로 쪼갰다. 푸석거리는 시트와 촉촉한 속살이 차가운 기운과 함께 엄지손가락을 스쳤다.
피다.
피가 나고 있다.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새하얀 사기그릇과 이어져 있던 과자를 적셨다. 멀건 핏물이 질질 떨어지며 테이블을 적셨다. 놀라거나 당황할 틈도 없이 손가락은 베였고 핏물은 접시 위로 떨어졌다. 깊게 베인 것은 아니지만 떨어지는 혈액의 양이 그칠 줄을 모른다. 하얀 사기그릇을 적시는 것은 초콜릿 시럽이나 사랑스러운 생크림 따위가 아니라 핏물이다. 빗물도 아닌 핏물이다. 그가 가는 눈을 뜨고 허망하게 제 엄지손가락을 바라보자 알베르가 손수건을 꺼내어 건넸다.
“여기선 아무도 믿지 않는 게 좋을걸세. 아무 데도 들어가지 말고, 믿을 수 없는 건 먹지 말고.”
나도 그랬거든. 케일은 쓸모없는 사담을 덧붙인다고 생각했다. 손수건에 엄지손가락을 꽉 눌러 지혈하자 울컥울컥 터져 나오던 핏물이 손수건을 적시다 멎었다. 대각선으로 지문을 가로지른 칼날의 상이 흉흉하다. 한참 간 고개를 숙이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핏물로 축축해진 손수건을 건네주려고 했으나 팔을 뻗다가 그만 찻주전자를 쓰러뜨리고 말았다. 데굴데굴 구르던 하얀 자기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산산이 부서진 자기가 목재 바닥을 굴러다녔다. 유리파편이 바닥재의 구석구석에 박혀 샹들리에 빛에 반사되어 반짝인다.
“놔둬, 그쯤이야 알아서 치울걸.”
그것도 그냥 거기 둬. 치료는 적당히 아무나 붙잡으면 해줄 거야, 조심해. 알베르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여길 빠져나가려고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말해야 했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영영 말하지 못할 것 같았다. 엄지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핏물처럼 말이 입 밖으로 빠져나왔다.
“에드워드 크레이븐, 알아요?”
이 집에서 사라진 두 번째 실종자. 스물 여덟 살에 가정교사로 들어왔었죠. 키는 170 언저리였고 항상 갈색 옥스퍼드 화를 신고 있었던. 그리고 지금까지 행방불명인 그 사람. 나는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읊조렸던 정보를 내뱉었다. 알베르의 어깨가 잠깐 움찔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응접실을 나갔다. 철의 냄새가 콧잔등을 자극했다. 자세히 보니, 그의 아래에도 무영이 있었다.
“케일, 그냥 문이 파란 방에만 들어가지 마.”
자네가 기억할 건 단 하나야.
2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익숙한 철의 냄새와 깨진 유리 조각이 바닥을 나뒹구는 곳에 앉아있다간 미쳐버릴 것 같았다. 당장에라도 신선한 공기를 맡으며 햇볕을 쬐고 싶었다. 응접실을 나와 성을 두런두런 걷다 보니 뒤창으로 진 숲이 있었다.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숲으로 향했다. 분수대와 장미 덩굴, 신선한 공기와 상쾌한 바람이, 파릿하게 고개를 쳐든 식물들이 그곳에 있었다. 철의 냄새도, 깨진 찻주전자와 한입도 대지 않은 채 차갑게 식은 가향차도 없는 곳에 오니 그제야 조금 숨을 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제서야 베인 손가락에 통증이 느껴졌다. 아프지는 않고 맥박이 뛸 때마다 피가 빠져나간 곳이 욱신거렸다. 심장의 고동과 같은 방식으로 욱신거리며 빠져나간 만큼의 혈액을 공급하고 찢겨나간 피부를 재생시키고 있었다. 고개를 올려다보니 태양은 아직도 정오에 있었다. 이대로는 저택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 잠시 여기 쉴 곳이 없나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참 간을 걸어도 나오는 건 없었다. 정말 숲이라도 되는 모양인지, 직선으로 내리쬐는 태양을 울창한 삼림이 겨우 막아주고 있었다. 한참을 더 헤매던 끝에 작은 나무로 조잡하게 만들어진 오두막을 찾을 수 있었다. 문고리를 돌리자마자 문은 아주 손쉽게 열렸다. 힘을 들이거나, 잠겨있는 문을 핀셋으로 딸 필요도 없었다. 왠지 불길한 기분이 들었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문을 여는 순간, 핏덩이가 천장에서 떨어져 내렸다. 피 냄새와 섞여 오랜 기간 묵은 역겨운 냄새가 쏟아져나왔다. 나는 코를 막고 구역질했다. 부패한 사체에서 나오는 가스와 악취 섞인 후끈한 공기가 쏟아져나왔다.
고여져 있던 핏덩이였다. 문 안에는 축축한 고깃덩어리들이 말라 비틀어진 살갗과 보송보송한 털, 반쯤 벗겨진 가죽과 함께 아무 데나 던져져 있었다. 바닥을 기어 다니던 검은 벌레들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썩은 냄새를 풍기는 살덩이나 가죽이 벗겨진 것들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총탄 따위가 박혀 쓰러져 죽었거나 덫에 걸린 채 반 토막 났을 작은 시체들이 거기에 모여있었다. 바닥이며 나무로 만들어진 모든 기구는 피가 베여 눅눅한 얼룩을 그리고 있었으며 비싸고 고풍스러운 사냥용 칼 따위가 공구함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개중 하나는 토끼 사체의 갈비뼈를 가르고 깊게 박혀있었는데, 총탄이 나약한 육신을 토막낸 것 같았다. 서슬 퍼런 날 그대로 들어간 갈비뼈가 허파를 찌르고 토해낸 피는 진작 다 말라붙어있었다. 여기가 오래된 사냥터라는 것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마 어린 시절에 가족 단위로 사냥을 즐기고 몰래 숨겨온 사냥감을 해체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그건 교양이니까.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버려졌겠지. 확실히 문고리는 고장 났고, 낡고 퀴퀴한 것이 사용하지 않는지 오래되어 보였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토끼 사체는 완전히 말라 비틀어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발로 그것을 툭툭 건드리자 말라 비틀어져 바삭거리는 감촉이 신발 끝을 타고 넘어 들었다. 뒷걸음질로 나가려던 때,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당장에라도 말라 비틀어진 토끼 갈비뼈에 박혀있던 사냥용 칼을 빼낼 준비를 해야 했다. 날이 무뎌진 사냥 칼을 잡자 묵직한 그립감이 손을 타고 들어왔다. 칼날을 뽑아내자 뭉툭한 소리를 내고 오랜 시간 박혀있던 핏덩이와 내장, 살코기 따위가 달라붙어 딸려 나오다가 버석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침을 삼켰다. 긴장한 채 온몸의 털을 곧추세울수록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벅저벅 거리며 흙바닥을 밟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바위 하나 정도의 거리가 있었던 것이 지금은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오고 있었다. 귀를 기울였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그것은 어느새 내 등 뒤에 서 있었다. 나는 사냥 칼을 보이지 않게 꽉 쥐었다. 어깨 위에 부드럽고 차가운 손이 닿았다. 나는 움츠리지 않기 위해 칼을 쥐고 고개를 돌렸다.
크로스만이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처참한 내부에 어울리지 않게 울려 퍼졌다. 오두막 안에선 피 냄새가 진동을 했는데, 이 남자에게서는 부드러운 샤워코롱의 향밖에 나지 않는다. 부드러운 금발 머리를 단정하게 다듬고, 갈색 셔츠를 입고 있는 남자였다. 기억이 맞다면 크로스만의 셋째 아들이다. 사생아도, 배다른 자식도 아닌 이 집안의 친자이자 사랑받는 막내. 모든 걸 다 쥐어주고 싶어하는 부모가 있으나 장자의 빛에 가려 움츠리고 살아야 했던, 그러나 사랑만은 지독하게 많이 받고 컸을 막내. 그는 오두막 내부를 쭉 둘러보더니 활짝 웃었다.
“형의 약혼자분이시죠? 놀라셨겠다... 여긴 별것 아니에요. 그냥 토끼 같은걸 잡았을 때 들고 오던 곳이라.”
나오세요, 오래 있으면 냄새 베길걸요? 어릴 때 말고는 여기도 안 온 지가 한참인데...“
그는 웃으며 돌아가자고 했다. 여기 있어 봐야 좋을 건 없을걸요. 괜히 기분 나쁘지만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냥 칼을 바닥에 던지고 오두막을 나왔다. 산길을 걷는 동안 그는 끊임없이 떠들었다.
”좀 그렇잖아요? 어릴 때부터 사냥을 배웠는데, 아버지가 사냥감을 맡겨놓고 샴페인을 가지러 가시면 형들이 몰래 작은 토끼 한두 마리를 훔쳤죠.“
”저기서 해체하고요?“
”다 어릴 때 얘기에요.“
지금은 안그러죠. 사냥 자체를 안하니까. 어릴 때에나 말을 타고 나가서 여우 몰이 같은 걸 했지…. 그것도 낡은 머스킷 같은 걸로요. 웃기지 않아요? 그는 혼자 조잘거리더니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여름 햇살에 반사되어 깨끗한 피부와 연노랑 빛 머리카락이 반짝반짝 빛났다. 자세히 보니 알베르를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가령 콧잔등이라거나. 제드 크로스만의 유전자인지 뭔지.
”열두 살쯤이었나... 원래 저런 짓은 못하니까. 딱 저런데에 환장할 나이잖아요? 남녀노소 불문하고. 로빗 크로스만 알아요? 둘째 형님인데. 그쪽이 주도했죠. 다른 동생들은 나이 차가 꽤 나거든요. 당신 약혼자…. 그러니까, 첫째 형은 이런 데 관심 없었어서 거의 우리 둘이었죠.“
”당신들이 저 토끼 육편의 범인이었단 거죠?“
”...어릴때니까 좀 봐주세요. 그 뒤로 차마 찾아갈 생각도 못 했거든요. 솔직히 좀, 역겹잖아요?“
”많이 역겹죠.“
”그런데 근처에 있다가 문이 열려있길래 손님이 오셨나 하고 봤더니..“
”형 약혼자가 토끼 사체나 밟고 있는걸 봐버렸고요.“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런 셈이죠. 선량하고 멍해 보이는 인상이 낯설었다. 알베르 크로스만은 저런 표정을 하지 않는데. 그가 주머니에서 껌 하나를 건넸다. 포장지를 벗기고 입안에서 씹으니 달달한 복숭아 향이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역한 피 냄새가 순식간에 복숭아향에 가려질 수 있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씹을수록 혓바닥을 관통하는 단맛에 침이 고쳤다. 한참 간 입안에 껌을 넣고 우물거리며 걷다 보니 처음 들어온 그 입구가 보였다.
여긴 숲입니까?
숲이죠.
정원인 줄 알았는데.
정원이라면 정원인데, 숲이랑 이어져 있어서 까딱 이탈하면 또 큰일이 날지 모르니까.
조심해야겠네요.
그렇죠.
어느새 부지 안으로 돌아오니 에반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아둔한 눈동자가 뱅글뱅글 돌았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빽 소리를 지르는 목소리가 옆으로 스치더니 딸꾹질을 했다. 그는 고개를 잠깐 숙였다가 말을 이었다.
”방이 준비돼서 데리러 응접실에 갔더니 안 계시길래요. 찻잔은 다 깨져있고, 피가 떨어져 있지를 않나... 깜짝 놀라서 오만 곳을 다 돌아다녔는데 숲에서 나오시길래 뛰어나왔죠.“
에반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나는 도대체 그가 왜 이렇게까지 불안하고 초조해 보이는 눈으로 물어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전 가볼게요, 에반을 힐끔 살피던 크로스만이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나는 조용히 손을 흔들었다. 무슨 일이 있으신 거예요? 하고 물어오는 에반에게 나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대답했다. 믿지 못하는 얼굴을 한 에반이 무언가 저-까지 말을 떼려다가 다물었다. 알베르 크로스만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그럼...지금 모셔다 드릴게요. 따라오세요.“
3.
햇살이 잘 드는 방이었다. 얇은 녹색 커튼 건너로 새하얀 하늘의 빛이 그대로 쏟아졌다. 깔끔하게 꾸며진 방안에서 불쾌한 향초 냄새가 났다. 모란의 향이었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에반은 결혼 전까지만 쓰시게 될 거에요, 몇 주 안 남았으니 봐주세요. 하고 방을 나갔다. 다른 사용인이 차 한잔을 가져와 주었으나 마실 마음 따위는 들지 않았다. 햇살은 아직도 타오르고 창밖은 한낮인데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버린 것 같았다. 피로에 몸이 점점 바닥으로 기우는 것 같았다. 어깨가 무겁고 목부터 등허리로 이어지는 근육들이 통증을 호소했다. 쿡쿡 쑤셔오는 몸에 축 처진 눈꺼풀이 피곤했다. 정말로, 미친 듯이 피곤했다. 베인 엄지손가락이 다시 쿵 쿵 거리며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정신을 집중하면 모든 피가 유리조각이 박힌 엄지손가락으로 흐르는 것처럼 손가락에 감각이 집중됐다. 마치 엄지손가락이 분리되어서 단일하게, 그리고 유일하게 존재하는 또 다른 기관인 것 같았다. 심박에 맞춰 엄지손가락이 쿵쿵거렸다. 잠이 몰려왔다.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었다. 모란 향이 정신을 무의식의 세계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니 몸이 찌뿌둥했다. 도통 맑아지지 않는 정신이나 한참을 흐릿하게 있다가 겨우 초점을 맞추는데 성공한 시야가 불쾌했다. 땀이라도 잔뜩 흘린건지 온몸이 축축했다. 한참을 자고 일어난 것 같았는데도 여전히 방안에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맑은 햇살이었다. 커다란 차창을 통해 침대 옆에서부터 쏟아져내려오는 태양빛이 반질반질하게 닦인 원목 가구들에 반사하여 빛을 내고 있었다. 오한이 들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으나, 나는 우선 시계를 찾았다. 기껏해야 한시간 이나 삼십 분 정도로 눈을 붙인걸수도 있다.
PM: 12:40
믿고 싶지 않았지만 시계는 정확하게 오전 열두시 사십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창밖은 태양이 훤히 떠있는데 열두시라니. 나는 믿을 수 없어 눈을 비비적거렸다. 미친거아냐. 24시간 내내 인공태양이라도 띄워놓은 게 아닌 이상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 그런짓을 할 미친놈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도무지 믿을 수 없어 커튼을 걷고 창밖을 살펴보았다. 빛나는 태양 아래 명화 속 풍경같은 싱그러운 여름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둠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언제까지나 높은 명도와 화사한 채도를 유지하고 있는 여름이 있었다. 정원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렸고, 장미들은 싱그럽게 고개를 펴고 있었다. 하얀 구름들이 부드럽게 하늘을 유영했다.
왠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나는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주위를 둘러보려고 했다. 여기서 나가야한다는 불길한 예감이 마음속에 엄습해왔다. 다시 커텐을 치려고 손을 뻗자, 손에 무언가가 묻어있었다. 그것은 갈색이었다. 두 손바닥을 모두 채우고 있는 것은 쉽게 부스러지고 건조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살결을 따라 피부 곳곳에 스며들어 손톱 아래에까지 들어가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발을 내려다보았다. 입고있던 하얀 실크 잠옷에도 마찬가지로 뻣뻣한 갈색 무언가가 묻어있었다. 아니, 옷에 묻은 것은 축축했다. 그제서야 속옷 한 겹을 사이에 두고 피부에 닿는 천의 축축한 감촉이 느껴졌다. 군데군데 응고되거나 뭉쳐진 그것은 잠옷의 세로주름을 따라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발밑에 웅덩이가 생기고 있었다. 슬리퍼를 신은 발을 들어보니 벌써 피부에 떨어진 것이 번져 제 흔적을 공고히 하고 있었다. 침대로 이어지는 내내 축축한 핏물 웅덩이가 이어져 있었다. 내 몸에서 철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와중에도 무영을 확인했다. 아직 그림자는 발밑에 있었다. 나는 조심히 침대로 향했다. 무언가 거대한 악몽을 꾸고있는게 아닌가하는 예감이 들었다. 다시 잠들고 일어나면 모든게 바뀌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토끼가 있었다.
낮에 보았던 토끼 사체와 완전히 같은 것이었다. 새까만 눈을 뜬 채 죽은 산짐승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기를 가지고 뛰어놀거나 천적을 피해 필사적으로 달렸을 작은 짐승이 창자를 꺼내놓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토끼가 경직된 관절을 비틀며 이보게, 나는 이미 죽었다네. 그러니 그리 보지 마시게. 하고 말을 걸어올 것 같았다. 토끼의 귀를 잡고 들어올리자 차게 식은 핏덩이가 침대보를 적셨다.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던 핏덩이가 침대보를 적셨다.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얼굴에 묻은 응고된 핏물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거나 눈을 깜빡이기가 힘들었다. 피는 식었으나 뱃속은 따듯했다. 나는 다시 내가 또 무언가 거대한 악몽을 꾸고있는게 아닌가하는 예감이 들었다. 다시 잠들고 일어나면 모든게 바뀌어 있을 것이다. 해는 졌을것이고 악몽에서 깨어날 것이다. 그때, 창가에서 바람이 불었다. 열어놓은 창문을 타고 늑대가 달리는 것처럼 시원한 여름의 바람이 쏟아졌다. 입고있던 잠옷이 크게 흔들리더니 나를 향해 날아왔다. 상체를 가리던 잠옷이 바람에 휘날려 얼굴위로 바짝 다가왔다. 축축한 감촉이 서늘하게 닿았다. 갈비뼈에, 허리에, 쇄골에, 그리고 얼굴에. 새빨간 핏물이 얼굴을 질식시켰다. 그제서야 나는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현실감이 몰아닥쳤다.
토끼 사체를 천에 감싸 방 구석에 놓여있던 바구니에 던져 버리고 몸을 일으켰다. 시트를 걷어서 방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욕실로 들어가서 얼굴을 씻고 입고있던 옷을 벗어던졌다. 말라붙은 피가 잘 닦이지 않았다. 벅벅 닦고 비누를 문질러도 붉은 흔적이 피부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머리카락에 늘러붙은 핏물을 죽죽 짜낼때마다 세숫대가 흥건해졌다. 산채로 짐승을 뜯어먹고 오기라도 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나는 세숫대야에 고개를 처박고 숨을 고르쉬었다. 누군가가 자는 방 안에 갓 잡은 토끼 사체를 던져버리고 간 것이다. 그것도 사람 머리맡에 피를 죽죽 짜서. 대체 어느 미치광이가 그런짓을 하는지, 사실 이 집안에 사는 이들중에 숨겨놓은 미치광이나 싸이코패스가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좋은 협박거리겸 기삿거리가 되겠지만 그걸 위해 뱃속이 난자되는 것은 사양이다. 나는 머리를 식히고 옷을 갈아입었다. 옷장을 열어보니 가져온 옷 말고도 새것으로 보이는 셔츠와 면바지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조용히 방문을 열어젖혔다. 축축해진 매트리스와 토끼 사체를 두고 잠을 잘 수는 없었다. 뭐가 되었든 흔적을 좇아 도망이라도 쳐야 했다. 나는 복도로 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성은 넓은 만큼 무슨 용도로 사용하는지 모를 여러개의 방과 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밖은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고요하고 평온했다. 파란 새들이 정원 호숫가에 앉아 지저귀고 있었고. 넓게 뚫린 유리창과 장식된 스테인드글라스를 타고 오색의 빛이 복도를 환하게 비췄다. 성은 고요했다. 나는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에드워드 크레이븐과 글린다 오드월드도 이 복도를 지나갔을까? 나는 그림자를 보며 걸었다. 그림자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며 걸었다. 어디로 가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람이 있는곳으로 가고 싶었다. 부엌에라도 내려가서 차가운 물을 마시지 않으면 진정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그 사체더미와 핏물을 뒤집어쓰고서도 멀쩡히 일어나 씻고 옷을 갈아입고 자리를 정리할 생각을 했는지, 아까전의 행동이 스스로도 의아하게 느껴졌다. 부엌이 어디 있는지 찾기 위해 계단을 세 층 내려가고 또 다시 올라가고, 미로같은 복도를 헤매도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많던 사용인들과 사람들은 어떻게 된건지, 어디에서도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한참을 돌아다니며 정신을 가다듬자 문득, 낮에 크로스만이 말했던 파란 방이 떠올랐다. 여섯명의 실종자에 대한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으나 너무나 직접적인 함정이었다. 걸려드는것조차 기대하지 않을 정도로. 그 문안을 열면 네가 일곱 번째가 될 것이다, 뭐 그런 내용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방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거실 같은데 에서라도 하룻밤을 지새면 될 일이다. 그리고나서 방을 바꿔야지. 이만 고개를 들고 발걸음을 돌리려고 하는 순간, 나는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파란색 문이 있었다.
.
파란색 문이 있었다.
그것은 김록수가 자주 보던 칠이 벗겨진 대문이나 세 번째 골목 복덕방의 오랜시간 청테이프가 붙어있어 끈끈이의 흔적이 지저분하게 남아있던 다 닳아버린 문이 아니었다. 낡아빠진 철제계단을 아슬아슬하게 올라가야 나오는 촌스러운 파란 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적당한 사이즈와 우아한 형태를 가지고 그것에 이질적으로 존재하는, 고급 목재를 가공해 값비싼 페인트로 칠한 문이었다. 모든 것이 부유함을 상징처럼 존재하는 이 공간속에서도 이질적인 단 하나의 것이었다. 열쇠를 넣는 손잡이는 은으로 되어있었고, 그것을 쥐자 서늘한 감촉이 닿아왔다. 이국의 명화속에 나오는 가장 비싼 물감으로 칠해진 것 같은 문이 눈앞에 있었다. 케일 헤니투스의 눈앞에, 언제 왔는지조차 모르게, 자각도 못 한 사이에. 푸른 문이 그를 그 앞으로 이끌었다.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것은 함정이다. 문을 열어서 안된다는것쯤은 다년한 경험이 말해주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빨간 헤드라이트가 윙윙 위험을 알려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문고리를 잡고 손목을 옆으로 돌렸다. 철의 냄새가 났다.
철컹.
철컹?
철컹 소리가 나며 열린 것은 문이 아니라 떨어진 손목이었다. 쾅! 문을 여는 순간 누군가가 문을 당겨 닫았다. 둔탁한 소음이 귓전을 울렸다. 손에 닿는 온기에 케일은 주춤할 수 밖에 없었다. 유려하고 얄상한. 그러나 뼈대가 도드러지는 커다란 손이 팔을 잡아 끌었다.
”알베르?“
케일은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등뒤에 바짝 붙어선 남자가 초췌한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등을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갔다 풀렸다. 문이 열리려던 순간 쿵! 소리를 내며 뒤로 밀려났다. 그는 이내 쥐었던 손을 놓고 한참 케일을 바라보았다. 무어라 말을 떼려는 순간 시선이 교차했다. 케일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키에 바짝 붙은 숨결이 코앞에서 느껴졌다. 한뼘의 거리조차 나지않을만큼 달라붙은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문득, 기민하고 초췌한 얼굴을 철에 베인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내리고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옅은 숨이 아주 조금의 간격을 두고 섞였다. 케일은 어깨를 움츠리고 손잡이에서 때내어진 손바닥을 뒤에 숨긴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어깨가 풀렸다.
”거긴 들어가면 안돼.“
”여기 뭐가 있는데요?“
”자네가 알만한게 아냐.“
”웃기고 자빠졌네.“
내가 당신에 대해 알만하지 않은건 없어. 케일은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구둣발로 발을 밟아버리면서 똑똑히 경고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케일은 속을 앉히고 한 번 코웃음치고는 옷에 손바닥을 문지르며 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라오던 알베르를 무시하는 일이 그는 우습게 여겨졌다. 불안함을 숨기지않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계단을 오르내린다. 케일은 그에게 방 꼴을 보여주며 당장 다른 방을 달라고 할 셈이었으나 케일이 다시 그 방문을 열자,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사방을 적신 핏자국도, 피바다가 되어버린 욕실도, 축축하게 젖어들었던 매트리스와 철의 냄새도.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방안은 고요하고 깨끗했으며 여전히 모란 냄새가 풍겼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어 있었다. 고요속에서 까만 하늘에 별들만이 성성하게 하늘에 박혀있었다. 시간을 확인하려했으나 어디에서도 시계를 찾을 수 없었 다. 당황한 케일이 헐레벌떡 방안을 뒤졌지만 아까전의 끔찍한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바구니안에서 겨우 찾은 피가 말라붙어 죽은 토끼 사체 하나만이 그것이 꿈이나 망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2.
그리고 해는 뜬다.
시계는 여섯시 반을 가르키고 있었다. 본래 느즈막히 일어나는 그로써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여섯시 반이라니, 김록수로 살면서는 더 일찍이도 일어나본적이 여럿이지만 케일 헤니투스가 된 이래로는 일찍 일어나 본 기억 자체가 전무했다. 차라리 잠을 안 잤으면 또 모를까. 케일은 한숨을 쉬고 미간을 꾹꾹 짚어 눌렀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새하얀 햇살이 불길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면 침대보에 파묻혀 점심까지 늘어지게 잠을 자다가 집에 돌아가서 온과 홍, 그리고 라온을 보고 싶었다. 간식을 챙겨주고 따끈한 몸을 꼭 안아준 다음 가족들에게 인사하고 뜨거운물에 목욕을 하고 싶었다. 크로스만에 온 이후로 케일은 자꾸만 김록수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생각했다. 몸을 혹사해야하고, 일찍 일어나야하고, 언제나 수상쩍고,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반드시 해야만하는것들은 넘쳐나던 김록수의 삶으로. 달라진 것은 비싼 유기농 채소와 공정무역, 무항생제, 동물복지 1등마크 따위가 적힌 식재료로 만들어진 음식을 먹는다는것과 금액을 가늠할 수 없는 고가의 가구들이 있다는 것 정도를 제외하고는 정말 돌아와버린 것 같았다. 김록수가 듣는다면 코웃음 칠 소리인 것을 안다. 그러나 케일은 몸을 일으켰다. 눈가를 벅벅 비벼대는 것으로 잠기운을 겨우 떨쳐내야했다. 가벼운 가디건을 차려입고 머리를 빗었다. 적당히 단정한 꼴을 하고는 살금살금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던지고 온 사냥칼을 가지러 갈 생각이었다. 손바닥을 적시며 쏟아지던 내장의 온도를 기억한다. 서늘한 날붙이에 아주 오랫동안 달라붙어, 그러다가 완전히 말라 바스라질 지경이 되었을 내부를 기억한다. 배를 가르고 갈비뼈를 찌른 날붙이를 생각한다. 그런것들을 생각할수록 적갈색 나뭇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챙그랑 소리를 내던 사냥칼을 그곳에 그대로 두고 올 수 없었다.
넓게 트인 정원을 나오자 물이 졸졸 흐르는 분수대가 보였다. 화창한 하늘에 띄구름이 떠다녔다.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른 아침은 이상하리만치 하얀 빛을 내고 있었다. 케일은 조심히 뒷창의 숲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새벽 이슬의 서늘한 공기가 피부를 스쳐지나갔다. 기억대로라면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오른쪽으로 몇 걸음 틀어서 산길을 타면 얼마 걸리지 않는다. 케일은 한참 기억에 의존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오두막은 여전히 삐거덕거리며 새벽공기에 어울려 음산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우뚝 서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도 없는 새벽에 나와서 칼을 찾아 모른척 돌아가자는 케일의 계획은 장렬하게 실패했다. 이른 새벽부터 남의 방 문을 처 두드려대다 케일이 사라진걸 눈치채고 온 사방을 뛰어다닌 에반의 공이었다. 빌어먹을 한량새끼라고 욕이라도 퍼부어주고 싶었으나 그럴 기운마저 남아있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날붙이를 챙겨 돌아올 수 있었던 케일의 계획은 꽥하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온는 열성적인 사용인 탓에 좌천 되었다. 발목에 묻은 진흙을 적당히 털어내고나서 그는 예의 그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지었다. 에반은 헐레벌떡 여기서 뭘하고 계셨냐고 물었고,케일은 굳이 대답해주지 않았다. 이이상 캐묻는 것은 월권이나 다름 없었으므로 에반도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케일에게는 훨씬 신경쓰이는 것이 있었고, 에반은 케일 헤니투스의 눈치를 보느라 딱딱하게 굳은채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정원에 알베르가 있었다.
있다가 아니라 있었다. 장미덩쿨이 우거진 아치와 벤치들이 늘어선 오솔길 아래로 그가 있었다. 여전히 예민한 인상을 하고 무표정하게 허공을 바라보던 알베르 크로스만이 있었다. 케일은 어깨가 조금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고, 그 다음으로 눈이 마주쳤다. 이미 에반이 저 멀리서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을 즈음이었다. 그는 아무런 얼굴도 하지 않더니 걸음을 돌려 사라져버렸다. 처음, 테라스 난간 위에서 바짓단에 얼룩을 묻힌채 눈을 마주쳤을 때처럼. 알베르 크로스만은 여전하고 유구하게 도망쳤다. 케일은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입안이 쓰고 불쾌했으나 위벽부터 치고 들어올라오는 불쾌감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딱딱하게 굳어가는 표정을 보며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에반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또 저러시네.“
”또?“
”대체로 늘 저러세요. 익숙해지시는게 좋을거에요. 저하는 그러니까... 무서워요.“
무서워? 나는 잠자코 에반의 말을 듣기로 했다. 새벽 하늘 사이로 어스름하게 뜬 달이 저물고 있었다.
”뭐랄까.. 비정상적이에요. 제가 이런 말을 하는걸- 그러니까, 이런 얘기를 나쁘게 듣지 마셨으면 좋겠어요. 실제로 여러 가지 일들이... ...에드워드를 알죠?“
에반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케일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가정교사였어요. 항상 갈색 옥스퍼드화를 신고 다니던 스물 여덟살짜리였죠. 에드워드 크레이븐...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몰라요. 아마 죽었을거에요. 태양을 보지도 못했겠죠. 그 뒤로도 여러명이 왔고 전부 끔찍해져서.. .. 이전에도 약혼자분 정돈 계셨어요. 스물 세 살밖에 안된 남자였는데... 모두 사라졌어요. 저는 그러니까- 저하는..모르겠어요, 제가 이런 말을 했다는걸 아무에게도 알리지 마세요! 조심하시라고 알려드리는거에요. 저도 무서우니까“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겁에 질린 듯이 허공을 돌아다녔다. 그는 계속해서 이상하고 알베르 크로스만이 뭔가 다르다는 말을 했다. 그는 달라요. 이상해요. 그러니까 그건 정말 이상해요. 케일은 에반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다는 말은 있어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없다.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 뿐이다. 웃기시네, 케일은 혀를 찼다.
”그런데도 약혼자분에게까지 그럴줄은...“
웃기시네. 쟤 안그래.
아침식사로는 토끼 고기가 나왔다. 두툼하게 칼집을 낸 뒷다리살과 향신료를 친 염통이었다. 어릴때에는 심장을 먹는다는 것이 좀 더 로맨틱하고 낭만적이며 문학적인 일일거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깨진 것은 시장에서 산 순대 조각에 들어있던 돼지 염통이 돼지 심장이란 사실을 깨달았을 때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심장은 푸슬거리고 아무 낭만도 없었다. 케일 헤니투스는 고깃조각을 입에 넣으며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알베르 크로스만, 제드 크로스만. 그 안주인과 로빗 크로스만. 그리고 사냥터에서 만난 셋째. 그리고 비서실에서 자주 보았던 익숙한 검은 머리가 한 명.
”입맞에는 좀 맞나?“
”원래 고기를 좋아하거든요.“
제드 크로스만이 물어왔다. 이후로도 몇차례 따분하고 상식적인, 이런 자리라면 당연하게 있을법한 대화들이 오갔다. 대화는 무슨 청문회처럼 안부인사를 주르르 주고받더니 케일 헤니투스에게 각자가 한 가지씩의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듣고, 다시 저들끼리 이야기하는 식이었다. 얼핏보면 화목하고 사이좋은 가족인 척 하지만 아니군. 부모는 자식들의 삶에 대해 아무런것도 모르고, 아마 자식들은 부모의 재산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알려주지 않고 꽁꽁 숨겼겠지. 그걸 죄다 캐내서 야금야금 매입한건 알베르 정도밖에 없었을것이고. 케일은 고기를 씹으면서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서는 그따위것보다 속이 뻔히 보이고 노골적이며 교묘한 인간들을 파악하는 것이 이 더 중요했다. 형제들은 견제하면서도 유산싸움을 어떻게 유리하게 가져갈지 고민하고 있다. 크로스만의 명의에 있는 부동산과 재산도 재산이지만 하필이면 셋 다 야망이 있는 타입이라 경영권을 노리고 있다. 알베르 크로스만의 의도는 경영권을 취득하고 몇 년 굴리다 사임한 이후, 크로스만의 이름을 팔아 정계에 뛰어드는 것이다. 지금부터 밑작업을 해야겠지. 그렇다면 로빗 크로스만은? 제 형에 대한 열등감에 똘똘 뭉쳐 뭘하든 빼앗고 싶어할 것이다. 하지만 똑똑해. 주주들도 많이 붙어있었고, 대체로 떼내기는 했지만 방해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셋째는? 하필이면 지금 모친의 유일한 친자이고 가장 사랑받고 자란 주제에 쉽게 휘둘린다. 제 부모에게 평생 휘둘려살다가 원하는 결과를 내지 못하면 버려지겠지. 비참하네. 나는 눈을 깜빡였다. 로빗 크로스만이 최근에 매입한 휴양지의 별장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개발이 들어서면 크게 뛸거에요. 좋은 정보를 입수했거든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
”그렇게 될거에요.“
집값은 크게 뛸것이다. 근데 그게 네 것이 아니게 될거란게 문제지. 어떻게든 아득바득 자신이 해낸 것을 인정받으려는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괴물도 아니고, 부모에게 동생 정도로 사랑받지도 못 할텐데. 자꾸만 말을 걸어오는꼴이 귀찮게 느껴졌다. 알베르에게 눈짓했지만 그는 예의 그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지으며 식사에 집중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저새끼가. 케일은 포크를 꽉 쥐고 웃으며 제드 크로스만을 바라보았다. 야망이 있고 자신의 몫을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길 원하지 않는 부모의 전형이다. 가질만한건 다 가졌지만 그래도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고 있군. 나는 모친쪽의 지친 듯한 눈매를 보았다. 완벽한 가정을 원했을 완벽한 사람이지만 하필이면 쓰레기같은 남편덕에 산산히 부숴졌고, 희망인 셋째아들은 형을 이길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깟 이유로 압도적 사회지배층의 자리에 불이익을 가져오려고 하지도 않고. 야망이 있는 인간인데 아들의 성향은 왜 저렇게 다른지 모르겠네. 마음속으로는 서른번 정도는 찔러 죽였을 것이다. 제드 크로스만을. 그리고 알베르 크로스만과 로빗 크로스만은 사고사로 위장했겠지. 제드 크로스만은? 말 할 것도 없다. 숨이 다 빠진 독사는 신경 쓸 가치조차 없다. 케일은 입맛을 다셨다. 어디부터 손봐야할지 모르겠지만 어렵진 않을 것이다. 제드 크로스만이야 의례 자식을 개처럼 기른 늙은 부모들이 그렇듯이 거머리로 살다 몇 해 못 버틸 것이다. 자신이 밖에서 낳아온 자식을 정말 숨만 쉬게하며 기르고 싶었을텐데, 위치가 아슬아슬해졌다고 불안해하고 있겠지. 자신의 수치가 날고 기니까.
식사가 끝나자 제드 크로스만이 케일을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이 또 있나, 그러고보니 기쁜일 어쩌고를 언급하지 않았나. 하면서 케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 일이 남았습니까?“
”우리가 좀 독실한 집안이네. 강요하고 싶지는 않지만 기도나 드리고 가지. 가족이 될텐데.“
기도? 케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베르를 바라보았다. 노골적으로 눈을 피한 알베르 크로스만이 발걸음을 돌렸다. 한참을 따라 걷자 해가 잘드는 온실이 나왔다. 보헤미아산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유리에 비춘 햇살이 일곱가지 색으로 반사되며 허공에서 부숴졌다. 빛나는 먼지처럼 사라지는 태양이 모든 것을 여울처럼 빛나게 했다. 돔 형태로 온실을 둘러싼 유리 벽들의 중앙에 동상이 있었다.
동상.
오래된 석고를 조각해 만든 것 같은 기괴한 형태의 동상이었다. 반질반질한 석고가 빛처럼, 재처럼, 스파클처럼 눈을 깜빡일때마다 반짝이고 있었다. 형태를 뭐라고 말 할 수 없었다. 곳곳이 뾰족했고 군데군데에 한 번 부숴졌다 다시 붙인것같은 오돌토돌한 균열이 나있었다. 둥근 원을 감싸고 사방을 찌를 듯이 조각한 것이 태양같다고, 막연히 케일은 생각했다. 온실에는 풀이 하나도 없었다. 바닥은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군데군데 깨진 곳에만 흙바닥의 잔해가 보였다. 푸석하고 축축한 흙이었다. 잡초가 몇 개 피어있는 걸 제외하면 정말로 기도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 같았다. 멀리서 봤을때는 여김 없이 온실이었지만 가까이서 들어오니 온실이라는 말을 붙여서는 안될 것 같았다. 본래의 기능을 전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제드 크로스만은 동상의 앞으로 나아가 두 손을 모았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비나니 태양의 눈꺼풀을 붙잡아 죄를 사하옵고 부정한 이들을 태워 진노하시라 어둠만이 나의 벗이 되나니, 태양의 아래에 우리는 살갗을 잘라내고 비로소 구원하여 영광이 있으라. 빛이 있으라, 영광이 있으라.“
케일은 제드 크로스만이 웅얼거리는것의 반 이상을 듣지 못했다. 그는 반복적으로 웅얼거리며 기인한 느낌을 주는 문구를 읊었고, 그것은 김록수가 교회에서 밥을 얻어먹고 대충 한귀로 흘려듣던 경전의 내용과 별다르지 않았다.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 기도하는 이들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고개를 숙이고 손을 맞대자마자 향로에서 피어져 나오는 탓내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가 그들을 뒤쫓으며 거침없이 나아가는데 미처 발이 땅에 닿지도 않는다.“
마지막 구절이 끝나자 하나 둘 고개를 들었다. 한참을 이어지던 기도가 끝나는 소리였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정리하자 제드 크로스만은 이제 가보아도 된다고 했다. 우리는 항상 이런다네. 누리는 모든 것에 감사해야지. 기도를 하는 집은 꽤 흔하지 않은가. 하면서. 그들은 유전적으로 내려오는듯한 불쾌한 미소를 지으며 온실을 나섰다. 자네가 여기에 익숙해졌으면 좋겠어. 발자국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일순, 수십개의 향로속에서 피어오르던 초가 꺼졌다. 불꽃은 재를 남기고 재는 바람을 타고 허공을 부유했다. 알베르는 답지않게 서늘한 얼굴을 하고있었다. 케일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저기요, 하고 부르자 그는 이제 문이 파란곳은 어디든 들어가지 않는게 좋아. 어제도 위험했어. 하고 웃었다. 일이 끝날때까지 무사하다면 내 황금패라도 하나 쥐어주지. 순식간에 바뀌어버리는 표정이 이질적일 지경이었다.
”이건 뭐에요?“
”...동상?“
알베르가 고개를 기웃거렸다. 동문서답하긴.
”그거 말고, 진짜로 뭐고 왜 있냐고.“
”비즈니스 관계에 대답해야 할 이유는?“
”내가 당신을 신뢰하지 못하니까.“
알베르는 와핫, 하고 웃었다.
”알 수 없을걸세. 알 필요도 없을거고. 그냥 잊어버려, 오래 여기 있을 것도 아니지 않나.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거야.“
”전 이해해준단 말 따위는 한 적 없는데요.“
”날 신뢰하지 못하겠다며?“”꽁꽁 숨기는데 어떻게 신뢰를 해요?“
어차피 그쪽 속 따위는 다 보이는데. 케일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숨을 골랐다.
”용케도 이런 집에서 버텼네요.“
”무슨 뜻이야?“
”당신은 문제를 제거하는 사람이지 고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 집안은 죄다 문제 투성이더군요. 부모부터 형제까지. 하나같이 댁한테는 없애야 할 문제이고 방해물일텐데. 용케도 하나도 안죽였네요? 못 죽인건지, 아니면 안죽인건지. 내가 그정도 자리를 만들어줬으면 넷중에 둘은 이세상 사람이 아닐거라고 생각했는데. 케일이 덤덤하게 말을 이어갈수록 공기가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알베르는 예의 그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집어치우고 대놓고 킥킥거리고 있었다. 저 인간.
”내가 아무도 안죽여서 아쉽다는 뜻인가?“
”당신은 나쁜 쪽으로는 훌륭하잖아요.“
”난 어느 방면으로나 유능해.“
알베르는 케일이 노골적으로 지어 보이는 재수없는 새끼라는 표정에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입꼬리가 계속해서 올라가는게, 5년을 봤어도 종잡을 수 없는 망아지였다. 그럴수록 케일 헤니투스의 표정은 점점 썩어나긴 했지만. 고작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거면 그만둬. 나는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아니야, 그건 내 몫이 아니라고. 자네도 충분히 알잖아. 케일. 알베르 크로스만은 이만 가보겠다며 등을 돌렸다. 그건 내 몫이 아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지만 그건 내 몫이 아니다.
”깨끗한 사람도 아닌데 깨끗한것처럼 구시네요. 프린스라서 그런가?“
”프린스?“
”다들 그렇게 부르잖아요. 우리 왕자님, 요즘 세상에 이런 재벌 없다. 프린스 알베르.“
”그건 또 어디서 주워들은 호칭이야? ...사람 민망하게.“
그거랑은 별개로 다짜고짜 남의 가족에 대고 아직 아무도 안죽였네요. 같은 소릴 하면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 것 같나? 나원 참... 알베르는 혀를 쯔, 차고 말했다. 이제야 성격이 나오네. 케일은 눈을 반만 뜨고 캐물었다.
”이런 질문을 받기 싫으면 그냥 묻는대로 대답 하셨어야죠.“
”난 자네한테 심문받는 입장이 아냐.“
”심문이 아니라 약혼자의 사랑스러운 질문이니까.“
”뭐? ...이래서 처음부터 여기 오지 말라고 했잖아.“
”애초에 약혼 얘길 꺼낸건 당신이에요.“
”그건 그냥 계약이지. 헤니투스에 있다가 형식만 차리고 헤어졌어도 문제는 안생겼-“
”당신 가족들은 그렇게 생각 안하는 것 같던데.“
그리고 난 열성적인 종교인 집안 별로거든요. 귀찮아서. 삼개월이든 일년이든 나도 똑같은짓을 해야한단거 아냐? 케일은 그렇게 말했다. 겉보기에는 단순히 결혼사기를 당한 약혼자의 추궁 수준이었지만, 그 눈에는 명백한 의도를 담고있었다. 불어라. 나는 당신을 믿을 수 없다. 더군다나 사업 외적으로는 더더욱. 나는 절대 너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과 내가 쌓은 오년간의 신뢰는 기껏해야 비즈니스 파트너로써의 정도니까. 침묵이 이어졌다.
”...아무것도 신경쓰지마. 내가 처리할 일이니까... 가지 말아야 할 곳은 한 군데밖에 없고, 정말로 거기만 들어가지마. 네게 아무런 일도 생기게 하지 않을거야. 이건 내가 보증하지.“
”그것 참 감사하네요“
그깟 아무런일이 뭐 얼마나 대단한지.
태양에 그림자가 졌다.
나는 그날 에반에게서 무영을 보았다. 간밤새에 그는 비명을 질렀다. 앞의 몇가지것들을 생략하고 뭉뚱그려 이유를 물으니 그는 이 집이 두렵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여긴 이상해요. 제가 왔을때부터 이상했어요. 그러니까- 알베르 크로스만은, 씨발 존나 이상하다고요. 나는 글린다도 알고 에드워드도 알고 카미유를 오웬도 알았어요! 근데 다 없잖아요. 맨날 심장에 총탄이 박힌 짐승 가죽들이나 바닥에 굴러다니는거. 오늘은 씨발 당신 방을 청소하는데 벽지에서 핏물이 고이잖아요. 손을 세 번이나 다쳤어요. 에반의 목소리는 거의 갈라질 지경이어서 처량해보이기까지 했다. 불쌍한 등을 두드려주고 이만 가보라고 하니 그는 덜덜 떨며 방을 나갔다. 빛이 있어도 영이 없는 것을 어쩌면 좋을까? 바짝 일어선 그림자는 그와 떨어질 듯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에반을 보내면서 나는 로빗 크로스만을 만났다. 그는 여전히 미숙하고 쾌활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는 로빗 크로스만과 쓸데없는 잡담과 농담 따먹기를 하다가 파란 문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 파란 문? 여기에 그런게 있어요? 하고 되물었다. 알베르 크로스만은 그곳에 가지말라고 하지만, 여기에서 파란 문을 아는 사람이 그와 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 같았다. 나는 방으로 돌아오는 내내 이 빌어먹을 집구석에서 가능하면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론, 온과 홍, 라온... 그리고 또 누가 있더라. 기억이 이상하게 뿌연 재처럼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희끄무리하게 누군가가 떠오르지만 그건 제대로된 기억이 아니었다. 희멀건 형체와 입안이 텁텁한 감각 사이로 덩어리친 색이 보였다. 초점 나간 폴라로이드 사진기로 찍은 것처럼. 기억나지않는 이름을 발음해보려고 애썼지만 입안이 뭉개져 나오지 않았다. 익숙한 감촉을 생각했다. 따끈한 오뎅국물 봉지를 안은 것 같은 감촉. 북실거리는 털과 매끈매끈한 등. 탕탕 내리치는 꼬리와 입가의 오돌토돌한 수염. 그것만은 확실하게 기억이 났다. 살아있는 생명의 것은 죽은 토끼의 뱃살보다 훨씬 따듯했으니까.
나는 짐가방을 뒤적였다. 기억해야했다. 내가 기억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무엇이든 이용해야했다. 나는 한참을 뒤적이다 숨겨놓은 편지봉투를 찾았다. 봉투 안에는 발자국과 사진 몇장, 그리고 적어놓은 이름이 있었다. 그제서야 머릿속의 안개가 걷히듯이 그들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온과 홍, 라온. 데르트와 바이올란, 바센과 릴리. 혈육. 최한과 로잘린, 론과 비크로스. 메리와 라크... 그리고 김록수. 이것들을 잊지 말아야했다. 나는 기억나는 이름들을 모두 되짚었다. 론, 최한, 로잘린, 비크로스, 라크, 온과 홍, 메리, 하나와 잭, 위티라, 버드와 그렌... ... 알베르와 김록수.
글린다, 에드워드, 저스틴, 오웬, 맥스, 카미유... ...
그 방의 문을 열어야한다.
3
계획은 천천히 이루어졌다. 김록수는 본래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인간이었으므로, 성급하고 감정적인 실수로 일을 그르치는 것 따위는 용납조차 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이었다. 가장 많이 만난 사람은 놀랍게도 타샤였는데, 타샤는 매일 아침 일찍 출근을 하면서도 케일과 자주 마주쳤고, 케일은 타샤를 보기 위해 부러 일찍 일어나기도 했다. 언젠가 그녀는 여기에 와줘서 고맙다고, 그 애는 아직 스물다섯밖에 되지 않았으니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나흘이 지나는 동안 케일은 여덟 가지 종류의 고기를 먹었다. 소와 양, 돼지와 토끼. 개중에는 오리나 닭, 거위도 있었다. 매일 아침 식사가 끝나고 가면 익숙하게 기도를 하고 익숙한 경전을 읊었다. 그가 그들을 뒤쫓으며 거침없이 나아가는데 미처 발이 땅에 닿지도 않는다. 케일은 모든 일상을 연기하는 내내 그 구절을 떠올렸다. 종교에 대한 이해 따위는 없었지만, 노련한 사냥꾼을 묘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누굴 사냥하는 걸까, 크로스만은. 케일은 자신이 아는 셋과 자신이 모르는 나머지 셋을 떠올렸다. 웃으면서 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고, 사랑스러운 약혼자를 연기하는 일에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다행히 알베르 크로스만은 연기에 능한 편이었으므로, 익숙한 사업 파트너가 팔짱을 끼고 어리광을 부려와도 첫사랑에 빠진 스물다섯 살 짜리를 쉽게 불러올 수 있었다. 의아함을 느꼈을 만한 인물은 기껏해야 첫날에 쌀쌀맞던 꼴을 본 에반 정도일 텐데,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알베르 크로스만을 두려워하니까.
지금 케일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권력과 관계는 얼핏 파악했으니 남은 것은 집의 구조를 아는 것이다. 단순히 어디에 뭐가 있고 따위의 생활하기 위한 구조가 아니라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한 상세한 구조. 대체로 이런 오래된 고성들은 각자의 비밀을 숨기고 있는 법이다. 본래 인간이란 자신의 가장 위험한 비밀을 가장 가까운 곳에 숨겨두고 싶어 하니까. 때때로 그것은 증거이거나 차마 폐기하지 못하고 잊어버린 더러운 서류, 매트리스 사이에 숨겨놓은 살해당한 알러지 환자의 에피펜 같은 것처럼. 멍청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대체로 그런짓을 하는 사람은 멍청해서가 아니라 과시욕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다. 내가 이정도로 대놓고 드러내는데도 나는 잡히지 않았다는 과시욕. 오만과 기만, 피식자가 아닌 포식자가 된 것 같은 기분. 우월한 범죄자인 나와 우매한 너희들. 대체로 그런 오만 때문에 공소시효가 지나기 전에 의심을 사고, 어이없게 철창신세를 지게 되지만. 나는 제드 크로스만이, 혹은 알베르 크로스만이 분명히 그런 비밀을 숨겨두었을 거라 확신했다.
욕실에서 손을 씻던 케일은 지난 5년간 집무실만 재수없게 들락날락했지 그의 가택에 머문적이 없다는 사실에 다소 의아해했다. 인근에 출장을 온 적이 몇 번이나 있는데도. 대체로 비즈니스 사이에선 서로 집을 내주지 않는다고 의아해하겠지만, 그들은 비즈니스라고 퉁쳐버리기엔 너무 많은걸 내포한 관계였다. 케일 스스로도 보여주고싶지 않은 가족 내력 따위로 퉁치고 말았지만. 억지로라도 몇 번 왔으면 이런 고생을 할 필요도 없었을텐데. 하지만 자신도 알베르가 동북부에 온다고 헤니투스에 방을 내주는 짓 따윈 하지 않았을것이다. 케일은 한숨을 쉬고 수건에 대충 손을 문질렀다. 부드럽고 푹신거리는 캐미솔이 얇은 피부를 스치고 지났다. 집 안이야 한 바퀴를 도는 정도면 전부 외울 수 있을 것이라고해도 인근 거리까지 살피다 길을 잃으면 개망신이니까. 더군다나 케일 헤니투스의 몸은 누가 보기에도 만만하니 더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특별한 정보와 무력을 대체할 몇가질 가진것과는 별개다. 푸른 수염에게 불시에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구조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방심하는 순간 언제 갈비뼈에 칼이 들어올 줄 알고. 그렇다고 혼자서 돌아다니면 귀찮은것들이 따라붙을 것이고, 며칠씩이나 투자할 여유는 없다.
”-해서... 갑자기 시간을 내라고. 자네가 나랑 붙어먹고 싶어할 일이 다 생기고,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케일.“
그렇다기엔 오래 만날 것도 아닌데. 알베르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제 앞에선 가릴 생각도 하지 않는 갈색머리와 어두운 피부가 반질거렸다. 웃기고 자빠졌네, 스물 다섯짜리 어린애가. 제앞에 있는게 스무살짜리가 아니라 마흔에 가까운 아저씨란걸 깨달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러고 있어도 됩니까?“
”내 방인데 뭐 어때?“
”말은 잘하지. 누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그건 자네가 처리해줄거고.“
”여하튼, 일주일이든 한달이든 난 내 마음대로 돌아다닐거고 불편을 겪을 생각은 없거든요. 이게 당신 일 아닙니까? 잔말 말고 에스코트나 해요.“
”그러게 오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말하자 알베르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기각.“
나 원 참, 그는 한숨을 쉬면서 욕실로 들어갔다. 씻기까지 하시게요? 약혼자를 소개하는데 불결한 꼴로 돌아다닐 순 없지. 인근을 다 돌고 싶다며?. 케일은 군말하지 않고 푹신한 소파 위에 엎어졌다. 나태하게 뒹굴고 있으니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닫은 문틈으로 수증기를 타고 온 물 냄새가 났다. 그걸 냄새라고 할까, 공기라고 할까. 습기가 가득 찬 공기가 흘러들어왔다. 샤워부스안은 훨씬 축축하고 습할 것이다. 샤워기에서 물줄기가 쏟아지는 소리와 욕실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물기가 찰박이는 소리가 났다. 나태하게 누운 몸을 옆으로 뒤집자 소리가 더 적나라하게 고막을 타고 드는 것 같았다. 방음이 잘 안 되나.듣고싶지 않아도 정신을 차려보면 물소리를 타고 들어오는 소음들에 집중하고 있다. 갑자기 왜 씻고 지랄이지. 그냥 잠깐 나갔다 오면 되는데. 이런데에도 자잘한 체면을 지키는 그가 싫었다. 목욕은 하루에 한번이면 된거아냐. 가만히 누워있으니 이질감이 느껴졌다. 익숙하게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 같은 느낌. 정신을 집중하니 알베르의 방 안에서만은 모란 향이 나지 않는 것이 느껴졌다. 몸을 반쯤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니 사용하지 않은지 오래되어 보이는 향로가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아무것도 타지 않고. 케일은 기회를 틈타 발걸음 소리를 줄이고 주위를 관찰했다. 협탁과 마호가니 탁자, 서랍 따위를 가볍게 둘러보니 처리하지 않은 서류들과 아침 댓바람부터 커피를 몇잔은 마셔댄 자국이 고스란힌 남아있는 다기들 정도가 전부였다. 케일은 귀를 기울인채로 탁상서랍으로 손을 옮겼다. 첫 번째와 마지막은 잠겨있는데 두 번째는 잠겨있지 않다.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걸 보니 샴푸질을 하는 모양이다. 케일은 재빨리 서류철 더미 옆에 놓여진 클립 하나를 비틀었다. 잠긴 문을 따는 것 쯤은 쉬운 일이다. 다시 욕실을 가득 채운 찰박이는 물소리와 샤워핸드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몇 번 열쇠 틈에 철사를 넣고 구부리니 달칵이는 소리와 함께 서랍이 열렸다. 첫 번째 서랍 안에는 두꺼운 서류철과 열쇠 하나가 들어있다. 케일은 빠르게 열쇠를 뒷주머니에 넣고 서류철을 펼쳤다. 읽지도 않고 일단 기억을 저장했다. 노란 파일안에 가득 찬 고용계약서와... 케일? 파일을 넘기려던 순간 욕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빠르게 서류철을 넣고 서랍을 닫았다. 왜요? 거기 있어? 그럼 있지 없습니까? 아니, 무슨 소리가 들려서. 공명하는 목소리가 전동 칫솔의 웅웅거림으로 바뀌었다. 찰박이는 물소리와 욕실의 적나라한 소름이 귓가를 찌르는 사이 케일은 세 번째 서랍을 열었다.
알베르는 가운 차림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나왔다. 힐끔, 케일은 나태한 자세를 고쳐앉아 낮은 협탁을 발로 꾹 밀었다. 드드득 소리를 내며 밀려난 나무 협탁이 기울어졌다. 다 닦이지 못 한 물기가 발수건 아래로 투둑 떨어졌다
.
”좀 가리고 다니죠?“
”맨몸을 보여주면 날 좀 믿어줄까 싶어서.“
알베르는 곧바로 방과 이어진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물기가 남아 질척이는 몸에 속옷이 달라붙는다. 적당하게 다려진 셔츠와 암갈색 바지가 살에 스친다. 물기로 축축해진 수건이 적당히 빨래 바구니로 던져지고, 손목시계까지 차고나온 모습에 유일하게 맞지 않는 것은 덜 마른 머리 뿐이다. 케일은 드라이기 소음이 들리는 동안 긴장을 곧추세우고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깔끔한 가죽장식이 달린 고리 하나에 대여섯개의 열쇠가 달려있었다. 이중에 어느게 그 방의 열쇠일까.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한심한 수작이었지만, 케일은 기꺼이 알베르의 그 수작에 넘어가주기로 했다. 확실하게 머릿속에 외워둔 페이지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별볼일없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하나하나가 선명한 증거물이다. 헤어 드라이기의 소음을 틈타 서랍을 다시 잠궜다. 서랍안에 들어있던 신경안정제와 뭔지 모를 약통이 신경 쓰였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서는 파고들지 않기로했다. 내 알 바도 아니고, 정신병이 없으면 그건 현대인이 아니다. 로봇이나 다른 차원에서 온 외계인 비슷한걸로 봐야한다. 케일은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겼다. 케일의 그림자가 알베르 크로스만의 얼굴에 닿았다. 그는 이내 뒤에 서서 알베르의 손에 들려있던 드라이기를 빼앗아 강도를 높였다.
”뭐가 그렇게 오래 걸려요? 머리도 짧은 주제에.“
”아무렇게나 하면 안되니까.“”사람을 부르던지요.“
”네가 날 보려고 아침부터 방안에 숨어들지만 않았어도 그랬을거야.“
인간이 미쳤나보다. 케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바싹 마른 겉머리와 아직 마르지않는 속머리를 헤집었다. 축축한 물기가 손 끝에 닿을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 만큼이나 드러나지 않는 인간의 머리를 헤집고 있다니. 건조한 외면 아래에 축축하고 끈적이는 내면을 가진 인간.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크로스만에 대해 캐묻고, 에드워드와 글린다에 대해 묻고, 오스틴의 시체가 묻힌곳을 캐물어 파내고싶었다. 당신이 살인마냐고 칼을 들이대고 증거를 요구하고 싶었다. 나의 믿지않는다는 말 한 마디에 흔들리길 바랬다. 왜냐하면 우리는 동류고, 본래 같은 사람들은 서로를 난도질하고 싶어하면서도 절대로 잃고 싶어하지 않는 법이니까. 케일은 드라이기의 풍력을 줄이고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훑으면서 생각했다. 말랑거리고 부드러운 두피가 만져졌다. 우리라는 인간들이 두피의 반만큼만 부드럽고 말랑거렸어도 좋았을 것을. 알베르는 익숙한 타인의 손길이 간지러운 듯이 답지않게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인간들이 아니다. 비밀은 공유하지 않고 정작 중요한 것은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것은 ‘여기까지는 괜찮다’고 판단된 것들 뿐.
케일은 어쩌면 자신이 그가 던지는 증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머리를 만지는 손길이 점점 빠르고 거칠어졌다. 이해관계에 관련없이, 케일 헤니투스의 신뢰를 얻기 위해 던지는 증거. 감정적인 머저리들이 흔히 저지르는 것. 오롯이 동류의 신뢰를 얻기 위한 바보짓. 범인이든 아니든, 그따위것과 관계없이 신뢰를 사기 위해 기꺼이 공범이 되겠냐며 던지는 증거가 가지고 싶었다. 자신을 믿으라고 던지는 미끼로 저울질이 하고 싶었다. 그것들을 낱낱이 파헤쳐서, 죽여 마땅한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죽여선 안될 나약하고 착해빠진 것들을 건든 일이었는지 판단하고 싶다. 어쩌면 케일은 이해관계에 따라 이 집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들을 모두 눈감아 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저는 본래 착한 사람이 아니다. 세상엔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에게까지 소중한 생명이란 말을 붙일만큼 올곧은 인간이 아니다.
어쩌면 그런 인간이었을수도 있었겠지. 그가 멸망한 세상에서 죽어마땅한 인간들을 상대하며 아득바득 살아남은 김록수가 아니었다면. 강변에 지어진 고층 아파트에서 사랑받고 자란 철부지였다면. 남들이 건내는 호의가 자본과 자본에 기반한 조잡한 권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몰랐더라면, 그것이 없는 사람들이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몰랐더라면 아마 김록수는 그런 소리를 하는 인간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더없이 도덕적이거나. 하지만 김록수는 그런 인간이 아니고, 그것은 알베르 크로스만도 마찬가지다. 저가 괜찮다는 반응을 해와도 그럴줄 알았다 정도로 넘기겠지. 케일은 그새 바뀐 짧은 금발머리를 빗으며 생각했다. 부드러운 반곱슬이 손가락에 걸려들어온다. 어쩌면 내가 지금 욕심을 내고 있나. 왜, 증거가 아니라 신뢰를?
그런짓을 해줄 리가 없지. 그건 케일 헤니투스도 하지 않는 짓이니까. 그와는 오랜 공범이었다. 동업자보다는 공범, 그편이 맞는 말이다. 우리는 자신이 저지른 죄의 증거를 동류에게 넘기는 멍청한 짓거리를 할 인간이 아니다. 축축하고 질척이는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고, 오히려 김록수일적을 떠올리면 푸른수염은 크로스만이 아니라 자신이다. 뒷머리를 아무렇게나 흩트리자 알베르가 아..! 하는 탄식을 내뱉었다.
”두피가 성감대에요?“”너, 돌았냐?“
”반응이 세내요.“
”이 미...하...“
”또 욕나오지. 녹음해서 기삿거리로 쓸까 고민되네요.“
미친 불경한놈. 알베르는 중얼거리다 조용해졌다. 파운데이션을 바르는 손이 바쁘게 움직인다. 분 냄새, 케일은 가만히 어깨에 손을 짚고 거울 너머로 색이 바뀌어가는 피부를 바라봤다. 화장을 저정도로 하니까 세수 한번에 그정도 시간이 걸리지. 무의식중에 올려놓은 손에 체중이 실어져서 알베르는 어깨가 꾹 눌리는 압박감을 느끼며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어깨에 닿은 마른 손가락이 천 위로 무게감있게 문질러졌다. 검은색 넥타이를 서스럼없이 묶어주는 손이 기묘했다. 손가락이 가슴팍과 쇄골에 스쳐지나갈때마다 근육이 미세하게 경직되는 것 같았다. 볼에 닿는 부드러운 적색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간지러워, 저런 모습이라면 머리가 부숴져서 피가 흘러도 눈치채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
케일은 한참 괜한 짓을 한건가, 하고 후회했다. 손을 잡고 고개를 어깨에 비벼가면서 데이트인척 주위를 탐문하는 것은 지긋지긋하고 따분한 일이었다. 날은 더워 죽겠고 태양은 저렇게 쨍쨍하게 내리쬐는데 손은 잡아야한다. 종종 팔짱도 껴야하고, 차이나지도 않는 키를 가져다 교묘하게 허리를 숙여 사랑스럽게 굴어야하고. 그러면 하나로 묶은 머리가 목과 쇄골에 달라붙어서 끈적거린다. 비슷한 일이야 얼마든지 있었지만,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땐 질색하고 구역질이 터져나오는걸 겨우 참는 그 표정이 재밌었는데 지금은 그정도 반응도 보이질 않는다. 케일은 애시당초 알베르가 자신의 의도를 모를것이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알면 쟤도 알겠지. 그런데도 당사자에게 부탁한 것은 마찬가지로 쟤가 알면 내가 알고, 나한테만은 숨기고싶어도 무엇도 숨기지 못 할 것이란 확신 때문이었다. 당신은 절대 나를 해치지 못 할 것이라는 확신. 케일은 그 확신이 있었으니까. 알베르 크로스만의 자리를 위협하는 짓이야 오 년 내내 해왔는데 그간 견제 하나 없이 꾸역꾸역 자신을 붙들어 놓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리라고, 당신은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게 된 것 이라고. 그리고 그 이유는 자신을 잃는 것이 당신이 계산한 모든 리스크중 가장 큰것이기 때문이라고. 케일은 짐작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은 전부 알면서도 모른채 이런 짓을 하고 자빠진 거다. 입에서 바람 빠지는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
좋아서.
웃기시네.
저거저거, 사람을 비웃네. 케일은 유려한 미소에 인상을 찌푸렸다. 화려한 금발머리에 태양이 닿아서 거의 하얗게 보일 지경이다. 한 번 하는거 제대로 해보자는 심보인지 맞잡은 손은 놓아주지도 않는다. 손바닥 안쪽에서 땀방울이 맺혀서 불쾌했다. 케일은 막연히 오래전, 알베르 크로스만이 했던 말을 기억한다. 자네를 잃는 것은 나를 잃는거야. 내가 뭐가 아깝겠나. 그때가 언제였지, 위퍼 연구기관을 인수한다고 150억 언저리를 받아갔을때였나. 모고르 대표이사를 빵에 처넣었을때의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축하주를 들고 진탕 취해 데려간 호텔 방에서 또 샴페인을 땄을 때였다. 작작 마시지. 서너 병을 연달아마셔도 약간의 취기를 제외하면 감흥도 없는 자신과 다르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취한 그가 소파에 누워있었다. 룸서비스를 시키고 와인과 치즈가 연달아 나왔다. 남의 돈으로 사먹는 술이 최고다, 하면서 케일이 신나서 혼자 잔을 가득 채우고 있을 때 알베르가 한 말이었다. 아무 채널이나 켜놓은 벽걸이 tv에서 흘러나오는 드라마의 소음 사이로 목소리가 섞여들어서 하마터면 드라마속 대사인줄 착각할 뻔 했다. 나를 잃는 것은 당신을 잃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을 잃는 것은 나를 잃는것인가. 케일은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서로에게 최적의 말이 아닌 알베르 크로스만과 케일 헤니투스는 필요 없을테니까. 우리나 동류라는말은 결국 서로가 쓸모없게된다면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는 뜻이다.
두사람은 낮 동안 걸어서 갈 수 있는 모든곳을 돌았다. 태양이 가장 높게 떴을때엔 쇼핑센터에 들르기도했고, 남들에게 사이좋아 보이기 위해 손장난을 치거나 안어울리는 옷을 일부러 대보고 깔깔거리기도 했다. 실크가운과 몇벌의 새 옷을 샀고, 계획중인 파티에서 입겠다며 가벼운 여름용 정장을 사기도 했다. 서점에 들러서 책을 고를때마다 알베르가 자꾸만 그거 서재에 있을걸. 그것도 있고 저것도 있어. 찾아보면 다 나올텐데, 찾아줄까. 하고 말을 걸어와서 케일은 저놈의 서재는 서재가 아니라 출판사 직통 도매장인건 아닌가하고 의심하기도 했다. 읽지도 않을 책을 왜 사모으는건가, 하면서. 기본 소득이 높은 동네라 그런지 동네 쇼핑센터 주제에 가격대가 높고 고급스러운 것들 투성이였다. 쇼핑센터라기보단 백화점에 가까웠지만. 지난 오년을 케일 헤니투스로 살면서도 느낀것이지만, 헤니투스의 돈지랄이-지랄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아니기도 했다- 지역의 예술가를 지원하는 방식이었다면, 이동네의 돈지랄은 대체로 읽지도 않는 책을 인테리어로 꽉꽉 채우거나, 관리가 필요한 악기를 사모으고 그걸 관리하는 사람까지 돈으로 사고, 한두번 입을까말까한 옷을 사모은후에 파티 따위를 열어서 과시하는 방식이었다. 마치 인생에서 재미있는 일이라고는 사고 팔고 늘어나는 돈을 보는것밖에 없다는 듯이 생기없는 눈으로 가지지 못 한 것들을 향해 끝없는 갈망을 느끼는 이들은 산다는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끝없이 고민했다. 마치 예술가의 위대한 작품처럼 삶에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듯이. 살아야 할 이유는 자신이 죽어버리면 곤란해질 상속 문제나 소유하고 있는 회사, 그아래의 수많은 노동자들, 토지와 부동산 아래의 세입자들만 생각해도 충분할텐데. 그따위것은 낭만적이지 않기 때문에 삶의 의미로 치지 않는 것이다.
케일이 쭉 빨아들인 차가운 아메리카노가 식도를 타고 넘어갈때마다 고급 원두의 풍미가 몸안으로 퍼졌다. 얼음이 녹아 표면에 생긴 물기가 손바닥을 축축하게했다. 둘은 주기적으로 손을 번갈아 좌우 위치를 바꿔가면서 잡긴 했지만 손을 놓지는 않았다. 지긋지긋하고 그만하고 싶어 죽겠단 표정일 때 셔츠에 대충 물기어린 손을 닦으면 알베르는 한숨을 내쉬며 핀잔했다. 그러지 말라니까. 뭐 어때요? 본인이 빠는것도 아니면서. 케일은 알베르를 한 번 바라보다가 잡은 손의 바닥을 손톱으로 쭉 긁어올렸다. 쇼핑백속의 검은색 실크 가운이 흔들렸다. 둘은 팜플렛도 보고 인근 극장에서 하는 연극 티켓을 끊으려다가 매진됐다는 소리에 허탕을 쳤다며 털레털레 나오기도 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흔한 데이트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케일은 긴장을 낮추지 않으면서도 많이 웃었고, 알베르는 케일이 그 집에 오기 전처럼 케일을 대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땀을 닦으면서도 절대 잡은 손을 풀지않는 약혼자들은 충분히 로맨틱해 보일테니까. 케일은 한손에 마늘 샌드위치를 들고 씹으면서 생각했다. 왜 이러고 있지.
돌아오는길에 주택가를 걸으면서 알베르가 이웃이랍시고 소개시켜주는 사람들은 대부분 케일이 이미 알거나 만나본 사람들이었다. 하다못해 연회나 은행 주주총회 따위에서 얼굴을 몇 번 마주친 이들이었다. 부자들은 대체로 그림자가 안정적으로 매여있었다. 미움은 많이 사도 죽을 일은 없겠지. 그들은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런 사이 같았다니까요. 라거나 상상도 못했어요, 라거나 어쩐지 기류가 이상하더니. 같은 이야길 하면서 웃었다. 개중에는 유명한 셀럽도 있었고 못해도 신문 1면에 얼굴 한두번쯤은 비춰보았을, 나름 이름만 들어도 아! 하고 알만한 사람들도 있었다. 부는 명예를 타고 늘어나니까. 돈이 많으면 돈이 많다는 사실만으로도 유명해질 수 있고, 돈이 많다는 사실만으로 돈을 벌어들일수도 있으니까. 알베르가 사교활동의 일원으로 이웃간의 안부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계약을 하나씩 떼내는 동안 케일은 뒷주머니에 넣어둔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입가에 빛나는 미소를 지우지 않는다면 뭔가를 뜯어낼 수 있을 것이다. 집안에 들어갈즘에 알베르는 무언가 소득이 있느냐고 물어왔다. 케일은 고개를 돌리면서 조용히 아니요, 하고 말했다. 쓸데없는 짓이었어요. 그 시간동안 집이나 돌아다닐걸. 알베르는 웃음을 흘렸다. 옷까지 차려입고 집안을 돌아다니면 우스워. 당신은 항상 차려입고 다니잖아요. 내가? 예. 우습게 보이면 안되니까. 집이 아니라 직장이네요. 반은 맞잖아? 실없는 농담이 이어졌다. 사용인들이 짐과 겉옷을 능숙하게 벗겨가고나서도 둘은 텅 빈 계단을 올랐다.
제 집을 탐험하는건 처음인데요.
사실 아니다.
비밀은 항상 가까이에 있는 법이지.
어두운 복도가 끝없이 이어졌다.
케일은 뒤늦게야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아니. 혼자서 할 수도 있었다. 결국 알베르는 성안 곳곳을 돌면서도 케일이 봐도 ‘되는’ 곳이 아니면 알려주지않았고, 그곳이 존재한다 정도로만 어물쩡 넘어갔다. 낮 동안에 바깥을 돌아다닌것도 쓸데없는 짓이었다. 왜 그랬을까. 왜 그런데에 아무 의심없이 응하고 웃음을 흘렸을까. 케일은 고작 몇시간전의 일이 납득이 되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뭔가에 홀린 것 같다, 고 그는 생각했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도 알지 못하고 분위기에 휩쓸려 즐거워하지 않았나. 아니, 내가 즐거워했나? 정말 머릿속이 뿌얘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동관과 서관으로 나눠진 성안은 대부분이 사용하지 않는 방이었고, 사용하는곳들 마저도 왜 있는지조차 모를, 자리만 차지하는 넓은 공간들이었다. 넓은 공간에 안정감을 부여하기위해 쓸데없이 많은 가구들이 들어서있었다. 사용하지 않는 넓은 식탁, 무슨 종인지도 모를 화분들, 무의미한 액자들과 명화들. 집 한번 비과학적으로 지어놨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옆에서 날아오는 시선에 케일은 헛기침을 몇 번이나 삼켜야했다. 층마다 넓은 복도를 걸으면서 서너개의 방을 지나쳤고, 긴 복도를 건넜다. 서재에 들렀을때엔 정말로 서점에서 뒤적거렸던 책의 대부분이 고스란히 책장에 꽂혀있었다. 내가 말했잖아? 알베르가 재수없는 미소로 키득였다. 재수없어. 케일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의래 그렇듯이 낡은 저택의 비밀을 밝혀줄 일기 따위가 있지는 않을까 기대했으나, 현실은 다 둘러보기도 어려울만큼 넓은 서재에 인테리어 전문가가 추천해 쓸어담았을법한 전집 따위가 끝이었다. 주인공은 항상 기막힌 운명을 가지고 다니고, 자신은 주인공이 아니니 별 수 없나. 이곳에서의 연쇄 실종사건도 따져보면 주인공이 할만한 일이 아니었는지도. 케일은 아무 생각없이 책장을 손으로 훑다가 집히는 것을 펼쳤다. 오래된 모고르어의 원서를 휘리릭 넘기자 무언가가 끼워져있는 페이지가 펴졌다. 오래된 한 장의 그림이었다. 여자의 얼굴을 그린 그림. 피부와 머리가 모두 갈색인 여자가 하늘하늘한 셔츠를 입고 나른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알베르 크로스만을 닮았다.
케일은 그 얼굴을 한 번 대조해 보았다가 다시 사진을 책 틈에 끼워넣었다. 정말 똑같이 생긴 것 같은데. 가까이에서 보자 오랜 세월이 지나 흐릿해지고 번진 연필선의 빈공간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알베르 크로스만의 친모라면 대충이나마 알고 있다. 왜 죽었을까, 알베르가 왜그래? 하고 물어오자 케일은 고개를 도리 저었다. 당신은 알 거 없어요. 좋아할 줄 알았는데. 내가요? 네가. 뭐를? 서재를. 책 읽는 취미 없는데요. 여긴 소설도 많아. 소설도 귀찮아요. 판타지도 있고. 대리석 바닥에 구두 굽의 다각 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뚫린 창으로 마른 피 같은 노을이 스며들었다. 햇살이 폭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텅 빈 무도장은 먼지가 너무 쌓였고, 사용인들이 사용하는 곳에는 방해되니 가급하면 가지 말라는 이야길 들었다. 무도장에서 터져 나오는 먼지에 콜록이는 케일을 보고 알베르는 의연한 표정을 셸 위 댄스? 하고 손을 내밀었으나 케일은 꺼져요. 하고 대답했다. 제드 크로스만과 양어머니의 방은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가까이에 있으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냥 내 침소로 와. 아무리 오래 걷고 찾아도 푸른 문이 있던 방만은 찾을 수 없었다. 분명히 그 문이 있던곳을 기억하고 있는데. ‘열어선 안될’ 방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평범하게 녹슨 원목 문 하나가 자리잡아있었다. 케일은 왔던 길을 되돌아 걸으면서 계속 낮 동안 본 풍경에 대해 생각했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 그리고 곳곳에 자리하던 기묘한 형상. 그것은 매일 아침 지긋지긋하게 본 태양의 형태였다. 하지만 태양신이라니. 태양교가 메이저한 종교인줄이야 알지만 태양을 그런식으로 모시는 것은 처음 본다. 5년동안 모고르에서 구를때에서조차 그런 종류의 태양은 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내려오는 태양신의 모습이 아니라 난생 처음보는 기묘한 형태였다. 신이 아니라 행성을 섬기는것처럼. 케일은 눈을 꾹꾹 눌렀다.
10년전의 사고가 불현 듯 머리를 스치고 갔다. 열다섯살의 알베르 크로스만은 뭘 알고 있었을까.
*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정적속에서 열쇠가 짤랑거렸다. 김록수는 오래전에 죽은 동료들을 떠올렸다. 5년동안 이어진 실종사건이 끝을 맺은 것은 일곱 명째가 사라진 후였는데, 정보를 다루는 사람들은 너무 많은걸 알고있었고, 너무 많은 걸 안다는 것은 쉽게 타겟이 된다는 뜻이었다. 길드와 던전이 넘쳐나는 세계에서 죽어나는 사람들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므로 누구도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김록수는 매일 밤 그림자와 함께 잠을 잤다. 피웅덩이에 처박혀 딱딱하게 말라붙은 머리카락을 만지다보면 철혈의 냄새가 난다. 주인을 떠나버린 무영의 영혼들이 김록수를 중앙에 두고 빙글빙글 돌았다. 강강술래를 하는것처럼 돌고 돌다가 아주 멀어져서 영영 사라져버렸다. 김록수는 그것이 무서웠다. 죽음조차 보지 못한다는 것. 5년내내 시신조차 발견되지 못한채 잊혀진 동료들을 마주하는게 괴로웠고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죽음에 무뎌진다는 것, 사라진다는 것이 익숙해진다는 것이 두려웠다. 영영 잊어버리게되면 죄악속에 빠질 것 같았다. 현영이 사라지고나면 현영의 책상이 사라지고 새 책상이 들어오면 현수가 그 자리에 사진이며 필기구며 간식같은것들을 가져다놓고 현수가 사라지면 다 먹지도 못한 초콜렛바며 심이 닳아버린 볼펜 따위가 박스 하나에 넣어진채 이름표가 붙어 유족에게 전해졌다. 유족이 없는 사망자는 사무실 한켠의 철제 캐비넷에 이름표들을 달고 차곡차곡 쌓아올려졌다. 현수의 자리는 일영이 대체하고 일영이 사라진지 넉달이 지나면 다시 다른 누군가가 일영의 의자에 안자 빙글빙글 돌며 점심으로 뭘 먹을지 고민했다. 대체로 반년이상을 버티지 못했다. 험난했기 때문이다. 괴물도 험난하고 사람도 험난했다. 김록수는 차라리 무영을 보게 된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림자가 옅은 사람은 사랑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 그만이니까.
처음 크로스만가의 실종사건에 대해 들었을 때, 케일의 머릿속에서 이곳과는 관계없는 세계의 재난이 머릿속에서 오버랩됐다. 자본이 물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면 무엇도 잡아낼 수 없다. 사람을 죽이고, 있던 사람을 없게 만드는 것 쯤은 쉬운 일이다. 여섯명은 어떻게 죽었을까. 죽었을까. 아니면 아직 살아있을까. 살았다고 말해도 되는 상태로 살아있을것인가. 가까워질수록 혁혁한 철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케일은 그간 조사해온 알베르, 제드 크로스만과 기업으로써의 크로스만 컴퍼니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여섯명에게는 모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고 이상하게 아무도 그들을 찾지 않았다. 아마 자본의 힘일 것이다. 자본은 광기도 정상으로 만들어놓는다. 케일은 철재파일속에 들어있던 에드워드와 글린다, 카미유에 대한 기록을 떠올렸다. 비밀은 아마도 크로스만의 머리맡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크로스만의 머리인가, 푸른수염은 누구인가.
5.
”대낮부터 무슨일이에요?”
케일이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깔끔한 정장에 단정하게 묶은 머리가 흐른다.
“늘 똑같지. 맨날 열리는 파티.”
“여는 이유는요?”
“그냥 번개로?”
돈 허투루 쓰는데 이유가 필요해? 알베르가 물어왔다. 케일은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 리허설도 있고.”
“...설마 .저랑...”
“그래 너랑 나.”
“귀찮은 짓을 잘도 하네요.
케일은 결혼 리허설이라니, 우습지 않나. 요즘이 어떤 시댄데. 하는게 서약 외우고, 서약에 대답하고, 반지 끼워주고. 키스하고. 끝 아니에요? 그걸 연습까지 해야해요? 하고 물었다. 알베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의레있는 그 비즈니스적인 미소로 일관했다. 하여간에 재수없긴. 그것과 별개로 테이블을 들여놓고 주방에서부터 음식들을 나르는 일손이 분주했다. 나무 테이블 위에 하얀 식탁보가 닿기 직전에 마찰하는 정전기가 손끝으로 짜릿하게 올라오는 느낌, 무게감, 악기들을 옮기는 덜걱이는 소리, 보글보글 끓는 물과 터진 샴페인처럼 튀는 분수대의 물방울. 바쁘게 움직이는 그림자. 케일은 기본적으로 소란스러운것들이 거추장스럽다고 여겼으나, 빛나는 정원과 풀잎의 생명력 틈에 서자 나쁘지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부산스러움이 아니라 활력있는것이라고.
시간이 지나고 대충 준비가 끝나자 하나둘씩 간소한 예복을 차려입은 방문객들이 찾아왔다. 초청한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잔디 사이를 가르고 퍼졌고, 적당히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방문객들중엔 익숙한 얼굴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얼굴도 있었으며 대체로 주최자인 제드 크로스만보다 늙거나 한 세대를 더 산 것 같지는 않았다. 케일은 이 모든게 조용한 섬에서 보내는 휴가같다고 생각했다. 일련의 사건들과 복잡한 모든 일은 잊어버릴법한. 소나무숲에 바람이 불때마다 가벼운 여름용 정장과 밑단이 떨어지는 고급 면직의 보풀이, 하늘하늘한 흰색 드레스가, 숲과 어울리는 반투명한 레이스들이 세계의 어떤 세계의 경계를 긋는것처럼 하늘거렸다. 저멀리서 어설프게 머리를 반으로 넘긴 빛나는 금발이 십대 소년 다운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 케일이 마주 손을 흔들고나서 시선을 돌린곳은 로빗 크로스만이 있는 곳이었는데, 거기서 로빗은 수줍은 얼굴로 어린 연인의 손을 잡고 있었다. 회장 곳곳을 비춘 선명한 금발머리들이 푸른 수국에 맞물렸다. 케일이 한참 간식따위를 입에 집어넣고있자 크로스만의 안주인이 다가와 ”음식이 좀 입에 맞나봐?“ 하고 말했다. 소라색이 너무 짙어서 눈을 찡그릴 뻔 한 채 케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그랬는걸요, 여기 온 이후로 한 끼도 굶어본 새가 없네요. 그녀는 눈가 주름을 훔치고 웃더니 그럼 다행이라고 말했다. 자네가 여기에 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얼마전 로빗이 좋은 사람을 데리고 왔거든. 헤니투스와의 사이도 대면대면해졌고... 그래서 한참 걱정하던새에.. 이렇게 좋은 사람이 와주니 얼마나 축복이겠나. 위엄있고 다정한, 그러나 칼을 가진 사람의 말투였다. 케일은 그녀의 무영을 보려다 고개를 돌렸다. 태양이 정오에 있었고, 당장이라도 제드 크로스만의 방에 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았고, 옆에서 히히덕거리는 알베르 크로스만을 떼놓을수가 없었다. 케일은 스테이크 몇조각을 더 집어먹다가, 알베르가 건내는 스파클링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무슨 꿍꿍이야?“”꿍꿍이라뇨?“”뭐 다른 생각 하고 있잖아.“
”제가 여기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겠어요?“
케일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가련한 맹수의 눈을 뜨고 웃었다. 그 순간, 하필이면 온갖데에서 알베르를 불러대는 통에 그는 몇 번 뒤를 돌아보다가 자리를 떠야했다. 케일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숲으로, 우회하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물건 따위를 가지러 가는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가볍고 유려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오르고, 벽지를 손으로 쓸며 제드 크로스만의 침실 문을 따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곳은 큰 창이 트여있는 것이 무색하게 암막커튼이 쳐져 어두웠고, 고급스러운 금실이 놓인 것 이불과 값비싼 원목 가구들 사이로 몇권의 책이 쌓여있었다. 케일은 도자기 몇 개를 들추다가 그중에서 가장 낡아보이는 책 한권을 집었다. 단추를 풀고 재빠르게 페이지속의 글자들을 머릿속에 집어넣으면서 유유히 방을 돌았다. 몇 개의 팜플렛과 일정이 적힌 쪽지 같은것들이 잠긴 서랍장안에 담겨 있었다. 아날로그 하긴. 그래도 특별한건 없는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훑은 일기장을 다시 있던 곳에 집어넣고 문을 열자 열쇠가 짤랑거렸다. 돌아가면 필사를 해야지, 왔던 길을 돌아오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돌아오자 알베르는 어디에 다녀왔냐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케일은 테이블 위에 반쯤 남은 와인을 보다가 말없이 손을 잡았다. 천천히 바뀌어오는 음악에 발을 맞추자 실크 장갑을 낀 손이 손바닥 안에서 자꾸만 미끄러졌다. 선율은 단조로웠고 움직임은 복잡하지 않았으나 동시에 우아한 왈츠라기엔 너무 간소했고 적당한 블루스라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동작이었다. 한쪽 발을 내디디면 다른 발이 따라왔고, 그 틈을 파고들면 한 걸음 뒤로 물러나야했다. 단순한 동작 사이로 케일은 눈을 내리깔고 동태를 살폈고, 알베르는 눈을 맞추는 척 하면서 소곤거리는 가십들에 귀를 기울였다. 가까운 주식과 채권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고, 개미 투자자들에 대한 이야기나 치부인것같아보이면서도 더 한 자랑을 품고있는 이야기들이 작고 나직한 연인의 속삭임처럼 정원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팔에 딱 달라붙는 모직과 셔츠의 레이스가 살을 간지럽히는 내내 햇빛에 붉은 스커트 자락이 반사되어 타오를것처럼 빛났다. 팔을 움직이고 허리를 뒤틀고 턴을 하는 사람들 틈에서 케일은 아주 단순하게, 단순하게 달라붙어서 약간의 다리를 엇갈리게 움직이고 이마가 거의 닿도록 숨이 닿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들개처럼 신경을 곤두세웠다.
대부분은 흘려들을만한 이야기었다. 그 사이에 돌고 도는 정보는 이미 케일이 가지고 있거나, 케일이 만들어낸 결과물에 대한 이야기였으며 그 외에 난잡한 추문이나 고의적인 스캔들 따위였다. 개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그러니까, 태양에 관한 이야기일 수 밖에 없었는데 지나가는 말로는 다음 정권이 누가 될 것이며 어느 라인을 타야하는지 계시가 내려왔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는 꽤 총명한 유명 학자집안의 장남이었고, 명문대학의 젊은 전임교수였으며, 정계에도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었다는데에서 케일은 조소했다. 사회적 지위가 총명함의 증명이 되어주진 않는다. 맞은편에서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쪽 역시 그 이야기를 깊게 믿고있는듯한 절박한 눈을 하고 있었다. 잃을게 많은 사람들이 가장 멍청한 선택을 하고, 그게 맞다면 그들은 꽤 진지하게 자신이 계시를 받음으로써 소위 ‘라인’을 타는 일 따위에서 이익을 점유할 수 있을것이라 믿는 셈이었다. 주식이나 채권, 부동산이나 자산을 결정하는 모든 것들은 운이 아니라 정보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는 것을 아는 이들인데도. 케일은 콧방귀를 뀌고 알베르 크로스만을 바라보았다. 이런걸 믿지 않으니까 그렇게 죄 한심하다는 눈빛을 숨기고 있는거겠지.
”익숙한가봐요?“”뭐가?“
”이런 일.“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헤니투스가의 장남이 그런 소릴하면 의심받아.“
”전 망나니잖아요.“
”난 배우자 될 사람이 망나니라 큰일이지.“
”웃기시네...“
배우자 삼을 생각도 없으면서. 어차피 오래가지 못하거나, 서로를 위한 아름다운 이별로 파혼기사가 날 관계다. 케일은 천천히 블루스에 몸을 맡긴채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고싶다는 한심스러운 소리를 하던 알베르를 떠올렸다. 저정도 위치에 앉은 사람이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남들이 듣겠어.“
”들으라고 해요. 할 말이 있으면 면전에서 해보라지.“
”남이 못 할 거란걸 뻔히 알면서 괜히 그러는건 그만둬.“
”배우자에 대한 추문정도는 감당하세요.“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할거아냐?“블루스의 선율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케일은 거의 숨 닿을 거리에서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는 알베르의 눈을 보고 조소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요?“
*
이후로도 케일은 한참을 시달려야했다. 그는 수십명을 만나고, 인사하고, 이런 자리에서 뵙게될줄은 상상조차 하지못했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해야했으며 입가에 경련이 일 정도로 웃어야했다. 방문객들이 모두 돌아가고 난 후에는 웃으며 예복을 갈아입어야했고, 로빗 크로스만이 자신의 연인의 볼에 사랑스럽게 입을 맞추고 뺨을 붉히는 꼴을 우연히 보게되었으며, 알베르와 팔짱을 끼고 입을 맞추고 골백번은 외운 결혼 서약을 읊어야했다. 오후부터 갑자기 떨어진 기온으로 날씨가 쌀쌀했고, 비가 내리기까지 했으며 실내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리는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이 사방을 잠식했다. 반지와 정장을 차려입고 사전에 준비된 주례에 맞춰 반지를 교환하거나 면사포 너머로 입을 맞추는 동안 케일은 스물아홉에 갔던 옆 팀 장사원의 결혼식을 떠올렸다. 예식장에서 사랑을 서약하고 사랑스럽게 서로를 바라보던 신혼부부에게서 멀리 도망쳐 떠나가던 그림자가 있었다. 들려오는 소식으로, 휴가를 내고 여행을 떠났으나 신혼여행지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터졌고, 자국민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는 기관과 담당 공무처의 태만으로 제대로 수습되지 못 한 채 아름다운 휴양지에서 고립되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면사포 위로 말랑거리는 입술이 겹쳐지고 낯뜨거운 숨이 얽혔다. 오 초도 이어지지 않은 키스 속에서 케일은 입을 맞댄채로 도망치고 싶지 않으냐고 물었다.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너 대체 뭐야.
뭐긴 뭐야, 푸른 수염이지.
맞닿은 채 쭉 올라가던 입꼬리가 떨어졌다. 시선이 교차하자 케일이 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알베르는 답지 않게 유약한 얼굴을 하고 웃었다. 너는 다 알고 있구나. 비즈니스 파트너시절,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소리를 진지하게 해대는 알베르 크로스만을 보고 조소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말한 당신은 지금 사랑을 표방하고 있어.하고 비웃어주고 싶었다. 빗소리가 점점 커지는 게 날씨가 많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슬비였던 것이 어느새 굵어진 빗줄기로 바닥으로 투신하며 얇은 뼈가 부러지는 톡,톡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반지를 빼서 다시 케이스속에 넣고 돌아가려는데 정원 어디선가 꺄아악, 하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알베르는 뻣뻣하게 굳은 손을 잡고 정원으로 뛰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건가, 하고 정원에 가보니 정원에는 빛바랜 시체가 있었다. 그걸 분명히 시체라고 불러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살아있다고 부르기에는 뱃속이 관통되어 거의 죽은것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으며 잡힌 손가락의 근육을 통해 등과 어깨의 근육이 뻣뻣하게 경직된게 느껴졌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다잡을 수 없었다. 나는 무영을 보았나? 언제? 하지만 아까까지만해도 붙어있었는데. 그 순간, 낯선 뺨에 입을 맞추던 로빗의 그림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던게 떠올랐다. 그림자는 그렇게 한참동안을 떨어지거나 그러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다가 종국에는 도망쳐버린 것이다. 눈에 피가 몰리고 혼란스러웠다. 비가 계속 추적추적 내리는데 로빗 크로스만이 입에서 피를 울컥울컥 토해낼때마다 꺾인 풀잎이 젖어들었다. 얼굴과 가슴께부터 하복부까지가 온통 피범벅이었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것처럼 계속 꺽,꺽.. 꺼억 거리는 소리를 반복하다가 가쁘게 호흡했다. 헐떡이는 소리가 고스란히 귀로 틀이박혔다. 몸을 뒤덮은 새까만 핏자국위에 새빨간 새 피가 쏟아져나올때마다 헛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온몸이 비에 젖어 옷 따위가 죄 미끌거렸고, 정장 재킷의 안쪽으로 반질반질하게 핏덩이가 고여있었다. 목을 덮던 크라바트는 색을 잃은지 오래였다. 태양 아래서 반짝이던 금발머리는 핏물이 말라붙어 따갑고 건조한, 아주 새까맣고 형편없는 것으로 바뀌어있었다. 마치 크로스만이 아닌 것처럼. 케일은 주먹을 꽉 쥐었다. 수줍게 연인의 볼에 입을 맞추던 발그레한 뺨은 혈색없이 창백하고 뻣뻣한 고무처럼 바뀌어갔다. 입에서도 피를 토했고 부숴진 나무토막이 관통하고 지나간 뱃속에서도 내장이 움직일때마다 울컥울컥 피가 쏟아졌다. 구급차를 부르는 수신음이 들렸다. 다급하게 경찰과 구급차를 부르는 동안 크로스만 부인은 뛰쳐나가서 쏟아져내리는 핏물을 닦았다. 화사한 소라색 정장에 핏물이 먹어 번졌다. 미끄러지는 핏덩이가 소라색 안감을 적셨다. 빗물에 닦여나갈때마다 뱃속에서 새 피가 쏟아져내렸다. 어떻게든 막아보려 꾹꾹 누를때마다 박힌 나무 가시가 장기를 찌르고 비집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더없이 비참하고 끔찍한 꼴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일이, 대체 어떻게.... 옆에서 구역질을 하는 소리가 들려 보았더니 형의 죽음을 목격한 그 애였다. 그러고보니 며칠째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저런 꼴을 봐야했을까, 하고 케일은 비참함을 느꼈다. 제드 크로스만은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숨을 헐떡였다. 동공이 커지고 피가 몰린것처럼 거친 숨을 내쉬며 심장을 부여잡았다. 점점 빗줄기가 거세게 내렸다. 피가 더 많이 쓸려내려왔고, 그럴수록 소라색 정장을 물들이던 검은 핏물이 잔디를 타고 발밑으로 다가왔다. 수십명의 사용인이 그녀를 끌어내려고했다. 팔을 잡고 어깨를 흔들고 이제 그만하시라며 소리를 질렀다. 사람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목소리가 그르르하고 비명을 질렀다. 알베르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경찰차와 구급대원들이 시신과 패닉 상태의 양친을 뫼시는 것을 도운 후에야 집안으로 돌아왔다. 아무렇지도 않아보이는 얼굴로, 사실 아무렇지도 않지 않은 멍한 눈으로 비틀거리며 층계참을 오르는 얼굴이 젖어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옷을 급하게 벗자 자꾸만 피부에 물기가 달라붙었다. 실내에서는 오래전에 죽은 스타의 재즈송과 딱딱한 목소리의 일기예보가 나오고 있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제정신이 아닌데 이상하게 웃음이 나서 목을 틀어막고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빗소리에 통곡소리가 더해져서 아무것도 구분할 수 없었다. 이것은 무엇이고 저것은 무엇인가. 라디오에서 일기예보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 [금일 오후부터 북상하는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 ---는 오후 23시까지 장맛비가 오겠습니다. 서해안과 일부 내륙에는 가시거리 2km 미만의 안개가 낀 곳이 있습니다. 남부내륙 지역에는 소나기가 오는곳이 있겠고, 그밖의 중부내륙에는 오후에 산발적으로 빗방울이 떨어지는곳이 있겠습니다. 도로가 미끄러울 수 있으니 교통안전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
시간은 무료하게 흘렀다. 하늘은 꾸준히 맑았지만 그날 이후로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면 밖에 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성안은 암전이었다. 고요하고 눅눅한 기운이 카페트까지 죽죽 눌러놓았다. 창을 열어놓지 못하니 죽음의 냄새는 반지하의 군내처럼 쉽사리 빠지지 않았다. 그때의 살인 이후로 에반은 덜덜 떨며 찾아오지 않았다. 습기가 꽉 찬 눅눅한 방 안에서 케일은 필사를 완료한 제드 크로스만의 일기를 천천히 손끝으로 훑었다. 대부분이 진부한 사랑 이야기로 시작해서, 진부하게 죽음으로써 끝났다. 날카로운 필체로 적힌 연서는 열여덟살부터 시작되어 알베르의 친모가 사망한 15년전을 끝으로 더 이상 이어지지않다가 5년전부터 다시 쓰여지기 시작했다. 그 뒤는 일기가 아니라 일지에 가까웠지만. 케일은 알베르의 서류철에서 나온것들과 같은 이름이 있는지 집중하며 일기장을 넘겼다.
팔월 구일, 나는 여지껏 그런 인간들 본 적이 없다, 팔월 십오일,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구월 이일, 목걸이를 선물했더니 고맙다고 해주었다. 연극을 보러 가기로 했다. 십일월 삼일...그사람의 부탁을 어떻게해야 들어줄 수 있을까... ... 이월 팔일, 일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사월 구일, 청혼하려고 했으나 약혼을 파기할순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외에도 조잡하게 말하자면 어울리지않게 감상적인 일기였다. 일기보다는 시집이나 산문집에 가깝다고 해야할지도 모른다. 적나라한 감정들 틈으로 아이가 태어났다거나 이대로면 괜찮을지 모르겠다거나 하는 안도가 나왔고, 종종 젊은날의 제드 크로스만이 느꼈을 기묘한 불안이 흘러나왔다. 그중에서도 케일을 멈추게 한 것은 하나의 문장이었는데, 거기에는 ‘당신과 결혼하지 못 할 것 같다고 말하는 나에게 그녀가 누가 감히 우리가 사랑을 한다고 생각하겠어요? 하고 말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그 눈에서 본 것이 진짜가 아니기를 바란다,’ 라고 적혀있었다. 그 한 마디가 뭐 대단한 절망이라도 되는양 적어놓은꼴이 우스웠다. 불륜관계가 뭐 얼마나 떳떳하다고. 사랑하기 때문에 필요한것과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사실 본질적으로 같을텐데 그것이 아주 거대한 비극이고 절망인양 구는 것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그 책 사이에서 나왔던 그림도 제드 크로스만이 그린 것이라면, 케일은 쉽사리 본 적도 없는 여자를 상상할 수 있었다. 적당히 까무잡잡한 남부의 미인, 죽음에 가까운 집단에서 살다가 양지로 나온 사람. 아마도 알베르 크로스만을 닮았을 것이다. 케일의 머릿속을 15년전 벌어진 의문사 건이 불현 듯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제드 크로스만의 정부, 내연관계의 연인, 아마 지금의 아내보다도 오랫동안 사랑을 속삭여온 사이로 대외적으로는 드러나있지 않지만 알만한 사람은 모두 다 아는 비극적인 로맨스의 주인공. 그와 가까운 사람들중에 제드 크로스만의 마음과 자금이 어디로 새는지를 모르는 이는 없다. 기질이란 것이 유전되는것이라는 알베르를 보아 제드 크로스만은 지긋지긋한 로맨티스트였고, 관계를 숨길 마음조차 없는 듯 공공연한 내연관계를 유지했다. 돈은 뒤로 줄줄 빠져나갔고, 알베르가 태어났을때엔 호적에 올리고 후계자 삼은걸로도 모자라 별장을 지어 환희 따위의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이미 첫 아내가 있었지만 그쪽이 따로 신경쓰지 않은 이유는 그쪽 역시 외도 상대가 있었기 때문일테고. 남에게 보여지는 사이좋은 부부의 이미지만 있다면 상관 없었을테니까. 이혼절차를 밟고나면 그 쪽에게 청혼할 셈이었겠지만 안타깝게도 15년 전의 겨울, 폭설이 내리던 날 그녀는 죽었고 알베르가 받던 총애와 애정은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죽음에 추문은 많았으나, 두 사람이 내연 관계였던 만큼 크로스만은 깊이 관여할 수 없었다. 코트를 껴입고 인근 거리에서 홍차를 마시던중 쓰러졌고, 몇 달을 앓아눕다가 사인을 모르는채 사망했다. 사인을 몰랐던건지, 아니면 숨긴건지조차 불분명한 죽음이었다. 당시에 떠돌던 낭설로는 그로부터 1년 전, 남부계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사망한 사건과 관련이 있다 따위가 떠돌아다녔으나 대기업 후계자의 내연녀라는 사실에 묻혀 그따위는 화자 되지 않았다. 케일은 제 앞으로 놓인 아침 식사의 커피를 마시며 서류를 곰곰이 떠올렸다. 알베르의 서랍 속에 있던 서류철엔 에드워드 크레이븐의 5년 전 고용계약서가 들어있었는데 제드의 15년 전의 일기장에도 크레이븐씨가 진찰을 맡아주었다. 라는 문장이 적혀있었다. 시기도 의문사한 그때의 겨울이었다. 글린다는 두 개의 서류가 있었는데, 하나가 3년 전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가 꽤 오래되어보이는 것이었다. 시기상으로 15년전에도 이집에서 잠깐 일을 한 전적이 있다. 그리고 오웬은... 그 순간, 챙그랑. 하고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케일이 방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자 깨진 도자기와 크로스만 부인이 손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다. 허둥지둥 달려가 그녀를 일으키는 사용인들이 손이 억세게 움직였다. 괜찮으세요, 하고 몸을 부축이니 괜찮아. 하는 답변이 돌아왔다. 제대로 말을 이을 수 없는지 목구멍에서 뭔가가 콱, 막혀버린것같은 소리였다. 말을 이을 수가 없어서 겨우 바람 빠진 말을 뱉는 소리. 며칠간 슬플 틈도 없이 장례를 치르고 조문객들을 받느라 지칠대로 지친 몸은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에반에게 뒤처리와 따듯한 차를 부탁하고 그를 부축해 방에 데려다놓으니 제드 크로스만이 이게 무슨일이냔 얼굴을 한 채 바라보았다. 뜨거운 레몬차에서는 김이 폴폴 쏟아지고 있었고, 손을 소독하고 그 위에 거즈를 바르는 일련의 행위들이 이어졌다. 그녀는 내내 어떻게 나무토막에 뱃속이 꿰뚫려 죽은 사람 앞에서 베인 상처 따위를 소독하고 치료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깊게 그인 상처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이 부조리의 상징 같았고 그녀는 계속해서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냐고 말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야. 그러니까, 원래 큰일은 작은 균열 아래에서 생긴단다. 그러니까 그 작은 균열 아래서 생긴게 큰일이 되고 하나를 내버려두면 더 큰 것으로 돌아오는데 어떻게 이런일이 벌어지냔 말이야. 아무것도 내버려두지 않았는데 이렇게 돼버리는 게 말이 되느냐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사람의 소리로는 들리지 않았다. 케일은 한참을 바라보다가 약간의 위로의 말을 전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닫고 나가 복도를 걷는 내내 세계에는 고요와 빗소리라는 개념만이 남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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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도 종일 비가 내렸다. 사냥칼은 날이 조금 무뎌지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쓸만했다. 그는 조용히 움직였다.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고개를 낮춘채. 하늘하늘한 흰 블라우스를 챙겨입고 머리를 늘어뜨렸다. 그가 그들을 뒤쫓으며 거침없이 나아가는데 미처 발이 땅에 닿지도 않는다. 물을 한껏 먹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잡아서 짜낼때마다 물기가 후두둑 떨어졌다. 젖은 흙에서 비린내와 퀘퀘한 냄새가 났다. 좀 더 신중해야했다. 손끝이 저리고 오한이 들었다. 몸 곳곳에 긴장이 쌓여있었다. 대리석 계단을 오르고 은은한 주색광이 켜진 장서관을 기웃거리자 그가 있었다. 몇권의 책을 가져가려다가 뒤를 돌아보길 반복했다. 열 걸음을 걷다가도 뒤를 돌았고 다시 다섯걸음을 걸어 계단을 오르다가도 뒤를 돌며 의아해했다. 코너를 도는 순간 손을 뻗었다. 턱을 잡아서 거꾸로 꺾자 아아악, 하고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급하게 입안에 돌을 틀어넣어 막자 우웩,하는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숨이 차올랐다. 칼 같은걸 써서는 안된다. 가능하면 깔끔하게. 온 몸의 힘을 실어서 머리를 난간쪽으로 향하게 한 채 몸 전체에 힘을 실었다. 퉁, 하는 소리가 날때마다 저항하던 팔의 힘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두 손으로 목을 잡고 가능한 힘을 죄 싫어서 엄지손가락 두 개로 쇄골 중앙의 윗부분을 꾹꾹 눌렀다. 헐떡이는 호흡과 치켜뜬 눈이 왜,하고 원망을 비추고 있었다. 물에서 나온 물고기처럼 가쁘게 헐떡이던 숨은 목을 세게 조를수록 짧고 간혈적으로 바뀌었다. 어깨 너머로 한기가 몰려왔다. 딸꾹, 딸꾹 소리를 내며 벗어나려는 힘이 거세서 이어갈수록 몸의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견갑골과 슬개골 사이에 칼날이 깊게 파고들었다. 묵직한 그림감이 손을 타고 들어왔다. 총탄이 나약한 육신을 토막낸 것처럼. 칼날을 뽑아내자 뭉툭한 소리를 내고 울컥울컥 핏덩이가 떨어졌다. 뿜어져나오는 핏물이 날에 고스란히 묻었다. 물컹한 살 따위가 달라붙어 딸려나오다가 반고체정도의 상태로 바닥에 떨어졌다. 텅 소리가 네 번 정도 이어지자 그제서야 반항이 멈추었다. 난간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물이 손끝을 적셨다. 그는 몸의 힘을 쭉 빼고 눈을 감은채 쓰러져있었다. 책을 품에 고스란히 안긴채 힘 빠진 육신을 계단 끝 칸으로 질질 끌고갔다. 겨우 몸을 세워두고 뒤에서 걷어차니 통,통 소리를 내면서 아래로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피가 줄줄 새던 깨진 머리가 딱딱한 대리석 계단에 부딪힐때마다 텅, 텅 하고 핏줄기가 쏟아졌다. 핏방울이 더럽게 튀면서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졸졸 새던 핏줄기는 마지막 칸에 가서야 쿵, 하고 멈춰섰다. 깨진 머리에서 찔끔찔끔 흘러나오던 것들이 갑자기 늘어난걸보아 뒷통수를 크게 깨먹은 모양이었다. 오래된 고서의 페이지로 핏물이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손에 남은 핏물은 아직도 따끈했다. 천천히, 여유로운 걸음으로 장서관의 불을 끄고 입고있던 점퍼를 벗어서 세탁실에 처박았다. 화장실에 가서 물과 락스를 뿌린 행주로 난간을 닦았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죽다니, 모자란 놈 소리나 듣고 말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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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일은 슬슬 부패하기 시작한 토끼 시체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땅에 묻어주기로 했다. 이걸 쓰레기봉투에 담아서 버리는것도 이상하니까. 비에 쓸려 축축한 땅에 고기 썩은내가 섞여들어 불쾌했다. 축축하고 반질거리는 감촉과 곳곳을 기어다니는 지렁이. 한참간 맨손으로 흙을 팠더니 어느새 손톱 틈으로 새까만 흙더미가 가득 들어차있었다. 잘 몰랐는데, 땅을 판다는건 생각보다 쉬운일이 아니었다. 습기를 머금어 단단해졌고 부드럽다기보다는 주먹 두 개만큼의 크기로 뭉쳐져 단단했다. 뱃속이 뻥 뚫린 토끼의 귀를 잡았다가 두손으로 부드럽게 묻어주었다. 불쌍한 얼굴을 한 앙증맞은 수염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계속, 계속 피가 몰린 눈 뒤쪽을 탕탕하고 두드리는 느낌이었다. 빗물이 머리카락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게 느껴졌다. 얼굴이 묻은 빗물을 닦아내려고 소매를 비빌때마다 소매에 묻은 젖은 흙이 고스란히 얼굴에 떨어져서 거슬렸다. 벅벅 긁는다. 벅벅. 내가 계속 벅벅 긁자 갑자기 비가 우뚝 멈췄다. ”여기서 뭐해?“하고 황당하게 내려다보는 표정의 알베르가 얼굴에 묻은 흙을 손으로 벅벅 닦아내었다.
”좀 지난일인데, 새벽에 온몸이 피투성이더라고요.“
알베르의 몸이 움츠려들었다. 알아챌 수 없는 흔들림이었으나, 케일 헤니투스만은 알아챌 수 있었던 균열이다. 그는 얼굴에 묻은 흙을 대충 떼내어주던 손은 이내 우산을 대충 걸치고 앙증맞은 토끼의 사체 위로 흙더미를 계속 쌓아올렸다.
”간밤에 칼이라도 맞았나 했는데... 아픈데가 없는걸 보니 내 피는 아니더라고. 근데 그럼 내
가 누굴 찔렀나 했더니 그런것도 아니고요. 축축하고 불쾌했는데 느껴지지도 않았던지 커튼에 묻은 핏자국을 보고 알았죠. 욕실 세면대를 통해서 보니까 온몸이 핏물로 목욕을 한거나 다름없는 꼴이더라고요.“
”그래서?“
”그래서 뒤져봤죠. 손도 빡빡 씻어내고. 옷도 갈아입고. 그런데 침대 위에서 뭘 찾았는지 아세요?“
”뭘 찾았는데?“
”죽은 토끼 시체 한 덩어리.“
이게 왜 여기 있나 싶었죠. 누군가가 고약한 장난을쳤나. 내가 여기 있는걸 싫어하는 사람이 말이에요. 가령, 당신의 약혼자 자리를 차지해버린 내가 마음에 안들었다던가. 비슷한 이야기들을 많이 있잖아요? 괴롭혀서 쫓아내려고 악령이 들린 척 한다던가, 괴롭힌다던가. 일부러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한다던가.
”사실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확인해보지는 못했고. 그런데 뱃속을 만지자마자 알겠더라. 피는 뜨겁고 뱃속도 뜨거웠는데 그안에 든게 창자가 아니더라고. 아, 이거 돼지고기구나.“
그리고 이건 내가 그날 아침에 간 사냥감 저장소에서 딱딱하게 말라붙어가던 그 거죽이구나. 알베르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래서 지금 그걸 묻어주고 있었냐 따위의 멍청한 소리는 하지 않았다.
”당신이 한거죠?.“
케일이 말했다. 여전히 뻣뻣하게 굳은 얼굴에서 물줄기가 떨어졌다. 손에서 떨어진 우산이 팡, 소리를 내면서 흙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래도 글린다는 알겠죠“
마흔여섯이었어요. 나이가 좀 있었고, 이 집에는 개를 산책시켜주러 왔죠. 부업으로요. 그리고 당신이 열 살 언저리일 때도 만난적이 있었을거에요. 그때도 잠깐 여기서 일했던 사람이니까. 어깨에 닿아 흔들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흐늘거렸다. 흔들흔들, 얇은 잠옷의 밑단이 걸음마다 모호한 종아리와 발목의 사이 부분에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는 배부른 포식자같은 얼굴을하고 웃었다.
”금발 머리 왕자님 코스프레는 언제까지 할 생각이에요?“
”너 진짜-“
”됐고, 아냐고요. 글린다, 에드워드, 저스틴.“
그리고 나머지 세명. 당신도 알고있지? 확신에 가득 찬 말투였다. 알베르는 쭈그려 앉은채 케일을 주시했다. 엇나간 우산 때문에 빗물이 얼굴 위로 고스란히 쏟아졌다. 케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었다. 잠옷 사이로 보이는 하얀 피부가 달처럼 빛났다. 근육이 빠진 마른 몸이 흙투성이였다.
”얘기를 좀 해보자고요.“
그렇게 뭐 마려운 개새끼처럼 내빼지 말고.
*
눈 위로 뜨끈한 스팀타올이 올라왔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욕조에 몸을 퐁담 담그자 금새 살갗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뜨거운 물에 담궈진 피부가 간질거려서 케일은 몇 번이나 팔을 긁으며 온몸에 묻은 흙더미가 떨어져나간 욕실 바닥을 바라보았다. 뻐근한 목을 좌우로 돌리면서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자 우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뜨거운 욕조안에서 입욕제가 부르르 부숴지며 푸른 거품을 내뿜었다. 케일은 답지않게 가라앉은 눈을 하던 알베르 크로스만을 기억한다. 빗물이 추적여서 자꾸만 발이 미끄러졌다. 당신이 열 살쯤에 어머니의 간병인으로 잠깐 일을 맡아줬죠. 두달쯤 이후에 죽어버렸고요. 오웬은... 고등학교에 다닐 때 같은 클럽 활동을 했다가 돈을 빌리러 왔고. 그를 키운 양부가 16년전에 모고르에서 다수의 밀입국 남부인이 산재로 사망한 게나스 중공업의 전임이사로 일하고 있었죠. 케일은 쫄딱 젖은 머리카락을 목 언저리에 비비며 웃었다. 알베르의 얼굴이 굳어가는게 즐거웠다. 허벅지에 숨겨둔 사냥용 칼의 서늘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는 알베르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점이 마음에 들었으나, 마찬가지로 모든걸 말하지 않는다는점에서 불쾌했다.
”그냥 들어오지 그래요?“
케일은 문간의 서성이는 그림자를 보다가 말했다. 이 샤워기 수압 좋네.
”수건을 가져다 주려고....아!“
케일이 샤워기를 문간에 가져다 대고 쏘았다. 갑작스럽게 쏟아진 물벼락에 쫄딱 젖은 알베르가 뭐하는짓이야? 하고 물었다. 당황스러워하긴, 완전 비맞은 생쥐꼴이구만. 비를 맞은건 사실이니 틀린말도 아니다.
”안 뜨겁죠?“
”그게 문제가 아니라ㅡ“
”안 씻을거에요? 그냥 들어오지, 넓어보이는데.“
”됐거든.“
”그럼 말고.“
욕실안에 건조한 목소리가 공명했다. 백색 조명이 은은하게 욕실을 비추고, 느리고 축축하고 습기에 꽉 찬 물소리와 비린내가 둥둥 떠다니는게 어색했다. 상아색 욕조에 발갛게 달아오른 피부와 마른 등뼈가 들어쳐있는게 어색했다. 조명 아래서 유유자적하게 떠다니는 암갈색 눈동자나 굳은 턱, 반짝이는 속눈썹 따위가 흙바닥에서 사체를 묻던, 온몸에 거무튀튀한 흙덩어리를 묻히고 물비린내를 풍기면서 맹수같은 웃음을 짓던 사람과 같은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케일은 입욕제의 거품을 입으로 후, 하고 불더니 안나가고 뭐해요? 하고 눈길을 돌렸다. 씻을거면 벗던가. 안씻을거면 두고 나가던가. 불경하긴. 그래서 어느쪽이에요? 빨리 나와.
케일이 푹신한 목욕 가운을 걸치고 대충 수건에 머릴 둘둘 말고 나오자 알베르는 곧장 옷을 챙겨 들어갔다. 다 빠지지 않은 욕조의 물과 흥건하게 떨어진 바닥의 물기가, 따끈하고 습한 공기와 바디워시 냄새가, 닦이지 않은 발바닥 자국 따위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잠깐 후, 알베르는 빠르게 욕실에서 나왔고, 케일은 나태하게 침대위에서 이불을 둘둘 만채 제멋대로 간식을 까먹고 있었다.
”뭐해?“
”과자 먹고 있잖아요?“
”딴청 피우지말고.“
”진짠데.“
침대위에 늘어져있던 새하얀 맨발이 카펫 위로 내려왔다. 케일은 알베르의 그림자가 제자리에 돌아와있는 것을 보고 조소했다, 떠난다고 다시 못 오는 법은 없다 이거지. 침대 위에 과자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그래서 어디까지 알아봤어요?“
”어디까지라니?“”딴청 피우지말고.“
이리와 봐요, 케일이 팔을 앞으로 쭉 내밀고 까닥였다. 덜 마른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떨어져 나왔다. 히죽이죽 올라가는 입꼬리나 보송보송해진 새하얀 손 따위가 어서 달라는 듯이 조르고 있었다. 알베르는 케일의 이런 행위가 낯설었으며, 이에 휘말려버리는 자신 역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케일 헤니투스는 불명확하기 때문에 명확했고 아무말도 안하기 때문에 속을 알 수 있었다.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내민 순간 케일이 그 손을 양 손으로 꾹 눌러 잡았다.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가죽이 부드럽게 마찰되면서 차가운 금속성의 감촉이 느껴졌다.
열쇠였다.
케일은 유려한 미소를 짓고 손을 풀었다. 알베르가 고개를 아래로 숙이자 제 손바닥 위에는 제 방에 있던것과 비슷한, 그러나 다른 조각이 새겨진 열쇠가 들려있었다. 너 이걸 어떻게, 하고 말을 하려고하자 케일은 손가락 끝을 양손으로 잡고 베시시 웃었다. 잘 봐, 이새끼야. 하는 눈. 필시 제드 크로스만이 숨겨둔 것이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그러니까... 눈을 굴리자 그 아래로 세 번째 열쇠에 거무튀튀한 얼룩이 묻어있었다. 잉크가 묻은 것은 아니다. 이건 확실하게 무언가가 눌러붙은 자국이니까. 시답잖은 것일리 없다는걸 알면서도 시답잖은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이게 설마 눌러붙은 핏물만은 아니기를, 설마 그곳에 진짜 가버린것만은 아니기를. 하지만 거기 붙어있는건 선명하게 말라붙은 핏자국이었다.
”그건 진짜에요.“
”진짜라니?“
”진짜라고요. 당신이 만든 가짜가 아니라.“
”내가 만든-“
“아까 말했잖아요. 당신이 날 쫓아내고 하고싶어하는것쯤은 진작 알고있어.”
케일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른 발이 카페트를 밟고 천천히 다가왔다. 한발짝, 두발짝. 가까워질때마다 몸을 뒤로 빼야했다. 미간이 찌르르하고 아파오는 것 같았다. 속이 울렁이고 불쾌감이 엄습했다. 가슴이 막힌것처럼 갑갑했다. 케일은 코앞에 다가와서 고개를 옆으로 갸웃거렸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랬겠죠. 불길한 분위기를 풍기고, 이상한 소릴 하게하고, 일부러 ‘무언가’가 있는것처럼. 죄없는 사용인 아이를 덜덜 떨게하고요.”
그리고 내 얼굴에 속을 꽉 채운 토끼 사체를 던져놨겠지. 일부러 가짜 방에 대한 이야길 만들어내서 내가 거기로 가게 유도하고, 계속해서 가지 말라는 말을 반복하고 막는척하다가 열쇠까지 쥐어주고요. 그리고나서 그 방안에 돼도않는 ‘가짜시체’를 늘어놓았겠죠. 어디서 많이 들어본 동화처럼 말이에요. 아닙니까? 사람을 바보취급해도 유분수지. 그는 거의 숨이 닿을 거리까지 다가와서 말했다. 콧대가 거의 닿기 직전에 와서야 케일은 치켜뜬 눈을 내리고 웃었다.
“그래서 제드 크로스만의 방에 갔죠. 당연히 증거 삼을것들이야 다 불태우거나 처리했을거고, 이일을 터트려봐야 묻힐게 뻔하고. 청산이란게 원래 안되는거잖아요, 그죠? 더군다나 크로스만은 당신이 물려받을 명예인데.”
알베르는 침을 삼켰다. 무슨 말을 하려는거야.
“그렇다고 나쁜놈들 살려두기는 좀 그렇고요.”
당신에 대해서는 조금 더 고민해봐야겠지만... 저는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항상 선한 사람만이 죽어 마땅한 사람들을 죽이는건 아니에요.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 죽어 마땅한 사람을 죽이죠. 무슨 소린지 알겠어요? 케일은 어깨를 으쓱이며 발꿈치를 들어 알베르를 내려다보았다. 내리깔리는 시선에 압도당하는 것 같았다. 코 끝에 부드러운 바디워시 냄새가 닿았다. 잘 만들긴 했던데. 어떻게 했습니까? 오밤중에 문을 열자마자 핏물이 쏟아져나와서 놀랐어요. 형상은 한 번 불에 태워서 거의 진짜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보일만했고요. 그렇게 많은 시체가 방안에 처박혀있다니... 슬리퍼에 핏자국이 다 남아서 그걸 지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손에도 묻고 열쇠에도 묻고요. 철의 냄새가 너무 나서... 그런데 그것도 진짜는 아니었고. 진짜는 쉽게 달라붙고 흔적으로 남아버리잖아요. 당신은 사람 살이 얼마나 쉽게 부스러지고 물러지는지를 몰라. 방부제를 뱃속에 채워넣어도 오래가지 못해요. 그러니까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밭이라는건 애초에 불가능한거에요. 썩은내가 풀풀나고요. 당신정도 되는 사람이 목을 그으면 균열은 생기지도 않아요. 악력이 몇이 나왔다고 했더라... 어설픈 구석이 너무 많았지만 그래, 넘어갈게요.
“거기 묻어있는건 그러니까 진짜에요.”
댁이 조잡하게 만든 가짜 피나 시체가 아니라 진짜. 욕실을 빌려주신 덕분에 좀 더 일이 수월해졌어요. 케일에게서 철의 냄새가 났다. 부드러운 바디워시의 향기와 덜마른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기가 바닥을 적셨다. 금속성의 한기 위로 온기가 남은 손이 겹쳐졌다. 맥박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뛰는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데도 머릿속은 싸늘하게 식었다. 무슨짓을 저지른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답은 들을 필요조차 없었다. 숱하게 해왔던 일이며 숱하게 침묵해온 일이다.
“그럼 네가 떨어져나갈 줄 알았지.”
“누누이 말하지만 사랑도 포기 못하면서 멍청한 약혼을 제안한건 그쪽인데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압니다, 난 존재만으로도 위협적일테니까.”
완벽한 당신편이라고 못을 박아야지. 헤어질때도 비운의 연인처럼 굴고.
“...어디까지 알아?”“대충은요. 당신 아버지가 푸른수염이고, 친어머니의 의문사 건은 사실 수사받지 못 한 피살사건이며, 실종자들중 반은 15년전의 그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 정도요. 단순한 복수극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게 아니죠?”
“...너.”
“그러면 구태여 쓸모없는 종교를 만들어낼 필요도 없었겠지. 태양 말이에요, 로운이 왕정제 국가였던 시전에 크로스만에게 모든 행위의 정당성을 쥐어주던 태양. 태양을 찾아야했겠지, 그럼 그 단순한 머리색 하나만으로도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으니까... 당신은 16년전 남부인 이민자 다수가 산재로 사망했는데도 산재인정이 나지 않은채 흐지부지 사라진 건을 쭉 좇고 있었고,”
“언제부터 알았어?”
“안지는 얼마 안됐어요.”
“정확히는 그쪽 방에서 약간의 절도를 한 이후였고, 여하튼...”
쿵, 말을 끝내자마자 케일은 빙글 돌아서 침대위로 엎어졌다. 이런 짓을 할 줄은 몰랐는데. 빠르게 반대편으로 돌아간 허리와 묵직한 손아귀 힘에 뒷통수에 압박감이 들어찼다. 푹신한 베개가 볼에 닿아 광대뼈가 부숴질것처럼 눌렸다. 아, 젠장. 머릿속에 기름 냄새가 가득 차는 것 같았다. 부스럭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푹신한 쿠션 위로 나약한 케일의 육체가 부유했다. 허벅지와 갈비뼈 언저리를 누르는 손이 위압적이었다. 찍힌 근육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심장이 쿵쿵 뛰고 머릿속이 차게 식었다. 제 심장보다 빠르게 뛰는 손목의 동맥이 우습게 느껴졌다.
“야”
서슬푸른 철의 냄새가 났다. 알베르의 손에 들린 사냥칼에 차가운 전등빛이 반사했다. 베개에 숨겨둔 것이다. 저건 또 어느새에 눈치챘대. 8cm가량의 거리를 두고 내리꽂히지 않은 사냥칼을 든 손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떨리고 있었다. 날이 새끼손가락을 향하고 있다. 칼을 쥐는 폼조차 어색했다. 긴장이 풀리는 동시에 웃음이 났다. 빳빳하게 경직된 근육이 힘을 풀고, 우악스러운 악력 아래에 접힌 근육과 관절의 통증을 제하면 심장은 뛰지 않는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가, 케일. 이이상 아무것도 건들지마. 지금이 끝나면 전으로 돌아가는거야.”
나가? 오히려 다른 종류의 흥분이 몸을 감쌌다. 머릿속에서 빠르게 피가 돌고 차게 식은 심장에서 안정적으로 피가 빠져나갔다. 덜덜 떨리는 손이 마음에 들었다. 갈곳을 잃고 방황하는 동공이 겨우 정면을 응시하는 것이, 그러면서도 실수로 날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칼을 부숴질정도로 쥔 손이 좋았다. 팔을 크게 뒤로 젖혔다 내리찍는 동작을 하면서도 일정 이상으로는 다가오지 않는다. 후들거리는 팔과 딱딱하게 굳어진 턱, 암담할정도로 검은 눈. 케일은 제가 잡아먹힐 상황에 닥쳐서도 눈앞의 포식자가 가련한 피식자로써 존재하는 상황을 구경했다. 읽을 수 없을만큼 새까만 눈을 마주보고있자 머릿속에 현기증이 일고 핑핑 도는 것 같았다.
“칼을 원래 그런식으로 잡아요?”
아래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케일은 태연하게 눈을 깜빡였다. 컥, 하는 소리가 나더니 단번에 몸을 제압하던 손이 떨어져나갔다. 케일은 사냥칼을 쥔 손을 두 손으로 붙잡고 제 목에 닿기 직전까지 끌어당겼다. 서슬퍼런 칼날이 직전에 닿자 근육이 움찔거렸다. 쏟아져내리는 빗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숨통을 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겠지. 케일은 칼날 위쪽을 잡고 돌렸다. 안쪽을 향하던 날이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손바닥 안쪽에서 흐른 땀으로 미끄러웠다.
“고작 장갑을 끼는 정도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란거 알죠?”
이런건 흉터가 크게 생기니까. 진짜 살아있는걸 죽여본적도 없으면서 왜 이런 무모한짓을 하느냐는 눈으로 바라보자 알베르의 좁혀진 미간에서 땀이 흐르고 있었다. 추적거리는 빗소리 사이로 벵글 돌아간 날에 파인 살에서부터 핏방울이 떨어졌다.
“당신 아비도 참 징해. 15년전에 죽은 사람 사진을 그렇게 대놓고, 벽 한면에다가 걸어놓을정도로 대담하고.”
알베르는 정말로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하다 칼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나무장판에 부딪힌 칼이 챙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땀으로 흥건한 얼굴을 쓸어내리자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 나왔다. 창백한 달빛이 고스란히 비춰 오래된 흑백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있던 얼굴이 저렇게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을까. 조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제발 더 이상 관여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케일의 위를 둔중하게 압박하고 있던 신체가 옆으로 벌러덩 쓰러졌다. 거의 움크리듯 무너진 몸을 보면서 케일은 머리를 살살 쓸어넘겼다.
“이만 나와요.”
“...”
케일이 알베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타샤, 이제 그만 가봐. 수고했어.”
말이 떨어지자 검은 옷을 입은 남부인이 픽, 하고 웃으며 걸어나왔다. 타샤다. 오랫동안 만나온 알베르 크로스만의 친인척이자 보좌.
“언제부터 알았어요?”
“처음부터?”
“진짜로?”검은 머리가 어깨로 흐른다. 갸우뚱한 얼굴이다.
“당신이 없는데 알베르가 무슨 일을 저지를 리가 없죠. 제가 없으면 지가 뭘 어쩌려고.”
나 참, 그럼 알아서 잘 해봐요. 이미 다 아는 것 같은데. 타샤는 유유자적하게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경계를 늦추지 않는 시선이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크로스만이고 뭐고 다 망해도 상관없어. 여지껏처럼 파트너로 행동해요, 해가 끼치면 용납하지 않아. 같은.
“로빗 때는 고마웠어요. 하마터면 들킬뻔했는데.”
“지하실에 쌓아둔 시체덕에 경찰 조사를 건성으로 시킨게 다행이었죠.”
타샤는 셀죽 웃고 방을 나섰다. 얼떨떨해보이는 얼굴의 알베르를 구경하는일이 케일은 퍽 즐겁게 느껴졌다. 푹신한 이불을 끌어당겨 안자 선선한 감촉이 고스란히 피부에 닿았다.
“그래서 뭐에요?“
”나는 네가 이일에는...“
”죽을 짓은 이미 저질러서 지금와서 손 봐야 걸려요.“
그 자식, 돌아가는 루트로 당신을 터트리려고 야금야금 준비하고 있더라고요. 알베르는 한참간 머리를 쓸어넘기다 말을 이었다.
“...모고르를 파낸게 화근이었어. 이정도로 촘촘히 엮여있을줄은 몰랐고...”
“태양도?”
“얼마나 오래됐는지 몰라.”
“갑자기 만들어진건 아니란거군요.”
“내 기억으로는 내가 어릴때부터 쭉 있었어. 종교는 가장 좋은 화합의 장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세 번 정도만 어느 당이 다음 정권을 잡을지. 딱 그정도만 알아맞히면 돼. 운이든 뭐든 상관없어. 몇천만원씩 바치면서 제발 결과를 알려달라고 매달려올테니까.”
“그걸로 오랜 세월동안 부자들 돈을 뜯어먹었겠네요. 틀리면?”
“신앙심이 부족하다고 하는거지.”
“나쁜놈들 돈을 뜯어먹으니 이건 뭐... 망나니라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다들 제정신이 아닌것처럼 굴었군요.”
“잃을게 많으면 그렇게 돼.”
알베르는 침대위로 풀썩 쓰러졌다. 움푹 파인 눈가를 쓸어내린다. 이상한 기류는 오래전에 눈치 챘지만, 훨씬 더 모든게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오래전에 죽어가던 어머니를 기억한다. 정상적인 관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칠수도 없는 관계였다. 가까이 갈 수는 없었지만 가끔, 타샤를 통해서 몰래 들어간 침실에 불투명한 고무같은 뺨을 하고 잠을 자고 있었던 사람. 까무잡잡한 피부와 갈색 머리로 태생을 결정해버린 여자를 기억한다. 알베르는 어머니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괜히 마음 한구석이 괴로워졌다. 많은 추억을 가진것도 아니지만 불현 듯 애틋했고, 사람을 그 상태로 방치한 제드 크로스만에게 살의를 느꼈으며, 그 죽음에 맞아떨어지는 수백개의 인과를 떠올릴때마다 심장이 갑갑해졌다. 참여 할 수도 없었던 장례식이 치뤄졌다는걸 들은 날 이후로부터 순식간에 돌변한 태도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자신이 처음으로 제드 크로스만의 방에 숨어들어간 밤, 녹색 커튼 뒤로 걸려있던 죽은 친모의 초상과 눈을 마주친날을 기억한다. 커다란 그림이 지독하게 생생했다. 마른 물감과 쏟아져나온 사진, 연필선이 죄 번진 그림들이 살아있는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모고르의 바이러스 연구실험에 저소득 로운민을 빼돌려서 공급한게 기예르뿐일 리가 없지. 알면서도 입을 다문거야. 독단적인 행동이긴 했지만, 이정도 규모가 되는데 안보이는 구석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제드는...”
“모든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들이 죽을 이유는 없었을텐데요.”
“경건히 예배하면 들키지 않을거라고 한거야. 당신은 회개했으며 전능한 신의 아래에 누리는 모든 것들을 잃지 않게 해주리라고...”
“그 방의 문을 열었군요.”
“처음은 복수였겠지. 시체 처리 정도야 쉽게 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고.”
“과시였겠죠?”“모르지.”
“16년전은 어떻게 된거에요?”“산재처리도 못받고 죽어나간 남부인 열여섯이 전부 어디로 사라졌겠어?”
“...그때 모고르를 더 조졌어야 하는데.”
증거를 가지고 있었구나. 그가 그들을 뒤쫓으며 거침없이 나아가는데 미처 발이 땅에 닿지도 않는다. 케일은 알베르의 그림자를 보며 웃었다. 당신이 이 일과 관련 없다는 물증을 만드는게 제일 먼저겠지. 목에서 보송보송하고 사랑스러운 바디 워시의 냄새가 났다. 이불에서는 푹신거리는 섬유유연제의 향이 코를 찔렀다. 나는 그래도 네가 이런일엔 끼지 않기를 바랬어. 하는 얼굴이라니. 다르게 말하면 네가 죽을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케일은 금발이 흐드러진 얼굴을 구경하는게 즐거웠고 알베르는 모든일이 두려웠다. 죽는 사람보다는 죽이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진실은 죽음을 불러오고 그것은 알베르 크로스만이 몇 번이나 독을 마시고 병원에서 위를 통째로 개워내는 작업을 하면서 경험한 사실이었다. 애초부터 그런 제안을 하는게 아니었다. 말이 비즈니스지 사실은 어리광이 아닌가. 이런 지옥에서? 어떤 종류의 어리광? 케일 헤니투스가 여지껏 골머리를 썩혔던 모든 사건들처럼 이 일을 해결해주길 바라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합니까? ”
케일이 고개를 반으로 기울였다. 저 인간은 쓸데없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한다.
“당신은 그냥 나한테 구해달라고 하고 싶었던거야. 그리고 계속 그렇게 말해왔고요.”
쾅, 소리가 나면서 창밖이 번쩍였다. 천둥이 치고 있었다. 거세진 빗줄기에서 후두두, 하는 소리가 났다. 붉은 머리카락이 은식기처럼 번뜩였다. 석고상같은 피부나 암갈색 눈이 완전한 백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가라거나 여기서 그만하자거나 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냥 구해달라고 하세요.”
의심하지는 말고, 그럼 죽어.
*
십대 소년의 시체는 다음날 아침 곧장 발견되었다. 그때와 같은 통곡과 비명소리가 온 집안을 잠식했다. 거의 죽을것처럼 소리지르고 괴로워하는 모습에 케일은 조소했다. 로빗 크로스만때보다 더하네. 아주 데굴데굴 굴겠다, 이러다가. 사실 그는 사흘전부터 무영이었으므로 굳이 손대지 않아도 죽였을 것이다. 굳이 시기를 앞당긴 이유는... 사랑스러운 둘째를 잃고서 멀쩡해보이는 알베르 크로스만을 의심했으니까. 케일은 집안을 잠식한 통곡을 뒤로하고 유유히 온실로 향했다. 뒤집어쓴 후드 위로 빗방울이 미끄러졌다. 손에 두꺼운 망치를 쥐고 사선으로 내리치자 돌이 사람의 머리처럼 쉽게 부숴졌다. 이렇게 쉽게 부숴지는게 뭐라고. 돌가루가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글린다, 에드워드, 저스틴, 오웬, 맥스, 카미유... 소문이란 용의하다. 나머지 셋은 이곳에서 죽지도 않았는데 그냥 크로스만과 미팅을 했거나 잠깐 들렀다가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거기에 간 외부인들이 죄 실종되었다는 소문을 내 귀에까지 들리게 하다니. 어린 애들에게 쓸모없는 짓을 시키고 싶지 않아서 말하지않고 독단적으로 진행한 일들까지 괴담이 되어오니 기분이 이상했다. 부숴진 석상의 머리를 걷어차고 나오니 여전히 폭우속이었다. 빗물이 햇살처럼 떨어지고, 핏물처럼 온몸을 뒤덮었다. 얼굴을 대충 문질러 닦아내니 멀리서 알베르가 다가오고 있었다.
“뭐에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알베르는 홀랑 우산 아래로 들어오는 케일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다 젖었는데 이게 다 무슨소용이에요? 하고 케일은 희게 웃었다. 알베르는 그러니까, 사람의 웃음이 그럴 수 있나. 하고 생각했다. 사람이 저렇게 웃을 수 있나. 그러니까 저렇게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저렇게 석고같은 얼굴을 하고, 저렇게 살인을 저지르고 어리고 사랑스러운 천사처럼 웃는 것이 과연 가능한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다면 자신은 가능한것인가. 눈앞에 동생을 죽인 사랑스러운 살인마를 대면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게 가능한것인가. 반밖에 섞이지 않은 피라고해도 25년을 내내 보고 온 혈육이었다. 뱃속에 나뭇가지가 고스란히 박혀서 비료가 된 것처럼 피를 토하던 로빗 크로스만을 기억한다. 계단 아래서 피를 흘린채로 관절이 어긋나 죽은 아직 어린 십대를 기억한다. 알베르는 그러니까, 계단을 내려오다가 저 바닥에 아마 자신의 동생이 남겼을 핏덩어리와 핏자국, 그리고 핏물 웅덩이를 보면서도 별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얌전히 반대편 계단으로 향하면서 누가 가장 먼저 발견한지, 형제가 다 죽어버렸으니 돌지도 모르는 찌라시는 어떻게 처리해야할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어떻게 케일이 그 작고 마른 몸으로 저와 키가 비슷한 십대 소년을 죽일 수 있었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아무리 그래도 걔는 운동도 안해서 근육은 쭉 빠졌고, 제 동생은 승마부터 각종 스포츠는 물론이고 폴로클럽까지 다니던 몸이다. 멍이 들거나 다치지는 않았을까. 어젯밤에 본 바로는 멀쩡했던것같은데. 우스운 일이다. 죽은 혈육보다 건사해보이는 파트너가 걱정된다니. 케일은 의레 그렇듯 나른한 얼굴을 하고 하늘하늘 거리며 걷고 있다. 갑작스럽게 어젯밤에 닿았던 뜨끈한 등의 온기가 떠올라서 알베르는 목울대가 뻣뻣해졌다. 안전바 없이 고장난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것 같다. 평화로운 마음으로 추락하는것처럼.
“계획은 있어요?”
케일은 바싹 달라붙어서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축축한 옷깃 너머로 살갗의 열이 그대로 전해진다. “계획이라면...”
“어떻게 터트릴것인가. 당신 성격에 대충 묻지는 않을테고요. 하지만 부모의 명예가 자식의 명예가 되고 기업의 명예가 되는 입장이니 그렇게 공개적으로 굴고싶지도 않겠죠. 이해해요. 게다가 사적인 복수고. 하지만 크로스만이 모고르의 인신매매 사업을 눈감아주고 있었다-까지 가버리면 곤란해지겠죠.”
그건 당신한테 가는 타격일테니까. 정계에 진출할거라면 부모의 범죄를 직접 알린 양심적인 사회지도층 소리는 들을 수 있어도 파문이 따를거에요. 눈 감아주고 유통로를 열어주었단 얘기가 들리면 어떻게 같은 집안 식구를 믿느냐고 사임 얘기도 나올거고. 그러니까 저는 당신이 자기 자리를 포기하면서까지 정의를 찾는 일 따위는 바라지도 않아요. 당신 앞길을 방해할만한 건덕지를 겸사겸사 처리한건데, 이일도 내버려두면 방해가 될거고요. 그런 세상이니까. 아무라고 무슨짓이도 되는 시대가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너를 죽이고 싶어해.”
알베르는 딱딱하게 굳은 석고상같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맑은데도 비가 내렸다. 귓가에서 노이즈가 징징, 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멍청하긴, 왜 헤니투스가 완벽하게 무결할것이라 생각했을까?
“비슷한 시기에 자네 어머니가 돌아가셨지. 나도 모르던 이야기지만, 젊을적에는 꽤 사이가 좋았던 모양이야.”
모든 치부를 감추고 싶었겠지. 헤니투스라면 몰라도, 여긴 정말로 더럽게 커온게 맞으니까.
하지만 알아버렸고... 그리고 그 사람은 자신이 받지 못 한 사랑을 받은 모든 이들을 증오하는군요. 케일은 입을 벙긋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렇게 미친놈처럼 굴었어요?”
“미친놈처럼이라니...”
“맞는말인데 왜.”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가련한 종류의 것이었다. 이것마저도 질투 때문이라니, 어쩜 이렇게 똑같을까. 케일은 김록수일적, 수갑을 차고 잡혀 들어가면서도 소리를 질러대던 멍청한 인간을 떠올렸다. 비가 너무 많이와서 슬리퍼를 신으면 양말로 물이 다 들어오고, 웅덩이에 발이라도 빠지면 발목 전체가 풍덩하고 축축하게 젖어버리는 날이었다. 하늘은 잿빛이고 초저녁부터 술집이며 노래방 따위의 간판이 형형색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는데 퇴근길 도로는 꽉꽉 막히고, 빗물에 반사된 붉은색과 초록색의 신호등 불빛이 도시를 비추던때 사옥 앞에서 농성을 하던 사람이 있었다. 이 씨발 공무원 새끼들아, 니들이 일을 안했잖아. 니들이 일을 좆같이해서 죽은거야. 죽인게 아니라 죽임당한거야. 던전 같은게 터지면 수습하라고 나라에서 니들 돈을 주는데 사람을 죽게 방치하면, 이 씨발 새끼들아. 너희 때문에 죽었어. 너희 때문에 죽은거야. 얼마나 여리고 마음 약한 사람이었는데, 얼마나 겁이 많았는데.. 공무원이란 새끼들이... 관할구청 관리도 똑바로 못해서.... 사람을 죽게 만들고.... 악바리를 쓰는 목소리가 절절했다. 누군가가 한 신고로 금새 경찰차가 오고, 경찰차의 붉은 사이렌과 푸른 사이렌이 빗물 웅덩이에 비춰서 삐뽀삐뽀거리는 소음과 함께 고성은 사라졌지만 김록수는 그 목소리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외국에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길드나 각종 공무기관에 테러를 자행하는 일이 빈번했으므로 김록수는 어쩌면 이미 같은 일이 벌어진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앙심을 품고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죽어야하는 사람들이라니. 이 자체로 부조리하지가 않나. 사라진 여섯명이 단순히 고작 그런 이유로 죽었다면 최소한 죽음으로는 갚아야하지 않나. 그런다고 이미 없는 사람이 돌아오는것도 아닌데. 목숨정도로 갚을 수 있는것도 아닌데. 하면서.
“고작 그런 이유로 죽기도 하는거죠, 사람은.”
고작 그런걸로 죽이고 싶어하기도 하는거고.
케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베르는 무슨 소리를 하느냔 듯 한 눈으로 케일을 한참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죽을 생각이 있다는건 아니고요”“그래도 여기 있는건 불안해.”
“이제와서 손 뗄 수도 없잖아요?”
“잘하면 모를거야.”
“죽은게 적자에요. 그쪽 어머니 친자. 애착 얼마나 강한지 알면 그 소리 안나올텐데.”
“아무리 그래도...”
“그리고 이미 던지고 왔거든요.”
“뭘?”
“열쇠.”
침대위에 던지고 왔죠. 지금쯤이면 찾지 않았을까 싶은데... 딱딱하게 굳어가는 얼굴에 초조함이 드러났다. 어쩌고 싶은걸까. 통곡 소리에 빗소리가 묻혀서 시끄럽게 귓가를 웽웽 멤돌았다.
“우리는 기다리기만 하면 돼.”
*
그가 그들을 뒤쫓으며 거침없이 나아가는데 미처 발이 땅에 닿지도 않는다. 케일은 속으로 구절을 읊으며 복도를 걸었다. 대리석 바닥으로 쏟아진 노을이 세상을 붉게 물들였다. 저게 날이라면 그대로 분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케일은 생각했다. 한걸을 한걸음 내딛을때마다 그림자가 일어서서 반대편 벽에서 함께 걸었다. 많은것들을 맡겨버렸지만 어쨌던간에 타샤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오랜 세월 이 집에 있으면서 몰래 많은것들을 숨기고, 지켜봐온 사람. 필요한걸 찾아내려면 자신보다는 저쪽이 유리하다. 알베르는 아마도 지금까지처럼 해야 할 일을 해주고 있겠지. 케일은 익숙하게 몇 번이나 찾아들어간 방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노을이 질때만 푸른색이 되는 녹슨 문.
문 손잡이를 옆으로 돌리자 딸깍,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한채 온몸의 털을 곧추세울수록 발자국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각거리는 구두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옆으로 틀어진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것은 함정이다. 머릿속에서 주홍색 헤드라이트가 윙윙 위험을 알려대고 있었다. 문 안에서는 철의 냄새가 났다. 심장이 쿵쿵 뛰고 긴장이 곧추선다. 코앞으로 다가온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어깨에 손이 올라왔다.
“여기서 뭐하나?”
“애인을 많이 사랑하셨나봐요.”
노을에 비춘 붉은 머리카락이 형형하게 반짝였다. 케일은 바닥을 바라본채로 말을 이었다. 제 아래에 바싹 붙어있는 그림자가 신호등 불빛처럼 깜빡였다.
“그래서 숨겼겠죠. 사랑스러운 내연녀의 출신지를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았고, 산재로 인한 사망인데도 보상을 받지 못했다- 따위로 기사가 나가게 두고. 연락책이 남아있는 줄도 모르고 안타까운 일이 생겼다며 위로했겠죠. 미움받고 싶지 않았을테니까. 돈도 많이 받았을거에요, 그렇지? 고향 식구들이 사실 산재로 인한 사망이 아니라 오랫동안 가담해온 모고르 중앙 연구소의 생체실험에 이용됐고, 크로스만이 암암리에 그걸 눈감아주고 있었단걸. 100%는 아니더라도 한 사람을 실망시키는덴 충분한 사건이잖아요.”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그런데 어떤 계기로 그녀가 그걸 알아버렸죠. 아, 역시다. 싸늘하고 정적인 얼굴에서 갈곳잃은 동공이 흔들린다. 케일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아니. 모른체 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주변에서도 알고 있었어요. 혹여나 한마디라도 하게되면 타격이 어마어마할테니까. 차라리 그냥 죽여버리자고 한거죠. 하지만 독살같은건 티가 나니까. 원래부터 좋지 못한 건강을 트집 잡아서 잠깐 쓰러지게 만들고, 나아질 기미가 보일때마다 링거액에 약을 주입했죠. 미약한 양을 몇 달동안 집어넣으면 충분히 의문사 할 수 있으니까.
“대체 무슨 소릴 하는지 전혀-”
“그런데 어느날 알아버린거에요. 주치의랍시고 부른 사람이 투여하고 있었던게 사실은 마비약이었다는걸. 갈수록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던게, 그리고 끝끝내 재가 되어서 작은 함 안에 들어가게 된게 전부 계획된 범죄였단걸.”
제드 크로스만은 거의 풀린 눈으로 겨우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범행을 들켰다는데에서 나오는 놀라움보다는 겨우 잊고 있었던 것들을 헤집어내진것에 대한 공황사태처럼 보였다. 목에서 신음인지 흐느낌인지 모를 그르렁소리가 들렸다.
“미친새끼, 그래서 네깟게 뭘-”
제드 크로스만과의 거리는 채 한 뼘이 되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총이라도 쏜다면 꼼짝없이 머리가 날아가야 하는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정당방위를 만드는 것 정도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손해가 따라올테니까.
“이해는 해. 나도 알베르가 그딴일로 죽으면 관련된 놈이며 관련된 놈의 자식이며 싹 다 죽여버릴테니까. 근데 어째 부진하네요, 기껏해야 세명밖에 처리를 못하고.”
에드워드는 의사의 아들인데 안타깝게 아버지가 죽어서 그 꼴을 당했죠. 글린다는 16년전에 거액의 돈을 받고 직접적으로 살인에 가담했어요. 간병인으로 일하면서. 내연관계라고 하기에 단순한 불륜인줄 알았겠지, 틀린말도 아니지만. 오웬은 애초에 문제의 시초인 게나스 중공업 이사의 자식이고... 그런데 역시 가장 죽이고 싶었던 사람은 따로 있었지. 말을 마치자 제드 크로스만이 울그락푸르락한 얼굴로 입닥쳐, 입닥쳐 이 씨발새끼야. 하고 우악스럽게 턱을 잡아챘다. 컥컥 거리면서 막힌 목으로부터 헛기침이 올라왔다. 기침을 타고 침이 입술과 턱아래로 떨어졌다.
“진짜 죽이고 싶었던건 당신 셋째 아들인가? 그게 당신 아내가 가장 사랑하는거니까.”
그런데 먼저 죽어버려서 너무 아쉬웠구나. 그렇다고 당신이 미친 로맨티스트인것도 아냐, 결국에 무서웠던건 당신네 큰아들이 하필이면 모고르를 건드려버리는 바람에 인신매매건이 화두돼버리고, 그때의 일과 관련된 것들이 하나, 둘 밝혀질까봐 불안해서 본보기 삼은거겠지.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있지 않아요? 케일은 조소했다. 목을 조르는 손에 우악스럽게 힘이 들어갔다. 가장 소중한것부터 천천히 무너뜨리고 싶다는 것은 김록수가 가장 잘 아는 종류의 마음이었다. 이수혁과 최정수가 죽었을 때, 김록수는 고통을 겪지않고 ‘곱게 죽는 것’이 오히려 축복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갈수록 관절이 부숴질 것 같았다. 단단한 턱뼈에 강한 압력이 가해졌다. 번들거리는 동공은 거의 공황상태에 빠진 환자처럼 풀려있었다. 숨이 거칠고 흥분에 가득찬 얼굴이 어긋나 있었다. 케일은 잡고있던 손잡이를 뒤로 젖혀 열었다. 당기는 문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그가 그들을 뒤쫓으며 거침없이 나아가는데 미처 발이 땅에 닿지도 않는다. 등을 뒤로 확 밀치자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란 제드 크로스만이 앞으로 쓰러졌다. 피가 뛰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 케일은 빠르게 사냥칼을 내리찍었다. 왼쪽 어깨에 가까운 쇄골 언저리를 내리찍자 얼굴에 핏물이 튀겼다. 꺼걱이는 소리를 내면서 제드 크로스만은 일어섰다. 하얀 셔츠에 핏물이 들어 거의 비를 맞은 사람처럼 꿀렁였다. 콸콸, 바닥에 휘발유를 쏟는 소리가 들렸다. 휘발유 냄새가 머리끝까지 울렸다.
”그래서 알베르를 보는게 힘들었을거야. 당신 애인은 죽어서 잿더미가 됐는데, 사랑받은 아들은 멀쩡히 살아있으니까.“
라이터 휠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홧홧한 열감이 발목을 감쌌다. 핏물이 스며든 목재바닥 위로 검푸른 커튼이 펄럭였다. 창백한 남부인의 초상이 푸른 눈을 드러내고 퀘퀘한 시체더미 사이로 창백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거의 살아있는 것처럼.
”그런데 당신은 한번도 사랑받아 본 적이 없구나.“
죄다 사랑받고 싶어서 한 행위였는데. 사냥칼이 쇄골을 깊게 파고들었다. 금새 솟아오른 불길이 거의 제 키만큼 치솟아 올랐다. 케일은 쇄골에 꽂힌 사냥칼을 발로 콱, 밟아버리고 불길속에서 손을 잡았다. 마주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뜨끈한 체온이 좋았다. 우리는 불길을 피해 한참 복도를 내달렸다. 노을이 완전히 지고 난 하늘은 어두컴컴한 빛을 하고 있었다. 일부러 곳곳에 부딪힌 자국을 만들며 달리는건 별로 어려운일이 아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한거야?“
알베르가 물었다. 생략된 말은 아마도 왜 나를 위해서.
”당신이 구해달라고 했으니까.“
케일은 헐떡이면서 말했다. 내가? 알베르는 여전히 모른다는 얼굴을 손을 잡았다. 영웅의 탄생 4권 중반즈음에 얼핏 나오던 하나의 회상 장면, 열다섯의 겨울. 알베르 크로스만이 지나가는 장면으로 했던 한줄의 독백에 김록수는 마음을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완벽한 인물로 직조되어 분신하는 별 아래에서 구원을 바라지 않는 열다섯은 김록수가 열다섯에 편의점 알바를 끝내고 돌아오던 놀이터의 그네에서 했던 종류의 것이었다. 감정은 쉽게 물러지고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사치품이었다. 쉽게 물러지는 것이 어찌나 좋았는지 정말 썩은 과일 냄새라도 맡고싶었다. 사랑받는 삶은 이해할 수 없고 팔게 있다면 불행을 팔겠다고. 김록수는 단조로운 한 문장의 독백밖에 가지지 못한 주조연의 인물이 가엽고 애처로워서 어쩔 수 없었다. 정말로 어쩔 수 없었다. 손을 잡고 뛰는 내내 속에서 무언가가 뱃속에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달릴때마다 그림자가 함께 달렸다. 아슬아슬하게 달라붙어있던 그림자는 이제 완전히 자리를 잡아서 떨어질줄을 몰랐다. 허파를 뚫고, 척추를 기고, 뱃속을 뻥 하고 둘러서 밖으로 나올 것 같았다. 한참을 달려 성안을 빠져나오니 그새 옷을 갈아입은 타샤가 몸에 생채기 몇 개를 낸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와요? 나머지는? 상관없는 사람들은 다 나간지 오래에요.
태양의 머리가 정원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탄내와 휘발유 냄새가 났다. 정원의 모란꽃이 바람에 흐늘거렸다. 아름다운 고성은 불꽃과 함께 타들었다. 빛나는 대리석에 늘러붙은 피를 벅벅 닦는게 일이었다. 내가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봄도 겨울도 없었다. 봄이오고 정원의 나무에 복사꽃이 하얗게 피기 시작하면 직조된 태양이 바닥에 깔린 인공잔디에 활기를 띄웠다. 날이 풀리면 새로운 사람들이 이삿짐을 가득 싣고 아름다운 상류사회의 진입을 꿈꾸며 도시로 기어들어왔다. 겨울에는 진득한 핏물을 처리하는게 관건이었다. 가로등이 켜지지않는 골목골목마다 무영의 혼이 멈춰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