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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애하는 아서 크로스만씨께.

 

 

 

케일입니다. 이 편지를 받으셨을 무렵에 저는 휘스로 가는 기차역에 올랐거나, 아카데미의 문턱을 넘고 있겠네요. 그제 로운 아카데미 입학장을 받았습니다. 귀하가 권유하신 입학 시험을 치르기는 했지만 정말로 국내 유수의 대학인 로운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만 고아원의 아이들에게 졸업을 마칠때까지 후원을 약속하신 것에 대해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귀하께서는 아이들을 후원하겠다고 결정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보은은 필요 없으며 몸이 좋지 않아 요양을 하고 있으니 학교 생활이나 소식들을 편지로 받아보며 적적함을 달랬으면 하신다고요. 사람의 호의를 믿는 편입니다만 적지 않은 금액을 지출하면서 바라시는 것이 그 뿐이라는 점이 여전히 잘 믿기지 않습니다.

 

원장님께서는 귀하께서 아주 부유하고 높은 신분을 가진 자선가시기에 호의를 베푸는 것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글쎄요. 귀하를 뵌 것은 먼발치에서 문틈 사이로 훔쳐본 것이 전부이지만 귀하가 높은 신분을 가진 교양있는 신사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습니다. 빈민에게까지 눈을 돌릴만큼 한가한 분은 아니시라고요.

 

귀하께서 사용인을 통해 장래의 계획이 어떻게 되는지 물으셨습니다. 제 차례가 왔을 때 저는 제 한몸 앞가림을 할 수 있고, 장래에는 평생 놀고 먹으면서 백수로 살겠다.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귀하께서 문 너머에서 웃음을 터뜨리셨지요. 그리곤 아카데미 입학을 권유하셨습니다. 농담이신줄 알았습니다만 아카데미의 입학 시험 일정이 적힌 서류와 교재가 도착했을 때 허투루 하신 말씀이 아니시라는걸 알았습니다. 그 뿐 아니라 함께 수학할 친구가 필요하다면 함께 지원해주시겠다고도 하셨습니다.

 

높은 성적을 유지하라거나, 학교의 명예를 빛내라는 조건도 없이 졸업을 무사히 마치면 원하는대로 평생 백수로 살게 해주시겠다고요. 대신 꼬박 편지는 보냈으면 한다 하셨으니 성실하게 편지할 생각입니다. 우등생이 될 생각도, 눈에 띄는 학생도 될 생각도 없으니, 소소하고 시시콜콜한 얘기만 전해드리게 될 것 같네요. 눈에 띄지 않고 조용한 학생으로 학교를 마치고 싶으니까요. 밤이 깊어 이만 줄입니다.

 

- 케일 헤니투스로부터. 」

 

 

 

케일은 편지를 적는 사이 심지 끝이 다 타들어가 있는 초를 불어 껐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것을 짐작했다.곧 방 안에 어둠이 찾아왔다. 침대에 풀썩 누워 하나 둘씩 빠뜨린 것은 없는지 더듬어보다가 그만뒀다. 이른 새벽에 나가 다시 돌아올 곳이 아니었지만 더 가지고 가야할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짐은 단촐해 갈색 수트 케이스 하나에 전부 구겨넣어졌다. 안에 들어있는 것중에는 부칠 편지지와 교복이 제일 귀하지 않을까. 편지 하단에 적은 이름은 아직도 어색했다. 케일, 헤니투스라니. 이래서야 진짜 귀족이라도 된 것 같잖아. 케일은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새벽이 멀지 않았는데 잠은 오지 않았다.

 

 

기차가 역에 멈춰섰다. 케일은 커다란 갈색 수트 캐리어를 꺼내 들고 휘스라고 쓰인 역의 간판을 올려다보고 시각을 확인했다. 아직 입학식까지는 시간이 있었기에 구경이나 할 겸 대로로 나왔다. 그리스풍으로 건축된 건물들을 늘어서 있는 고급거리. 신사들은 검은 수트를 입고 귀부인들은 풍성한 안감을 집어넣은 드레스를 입은 차림으로 거리를 지난다. 풍경이 퍽 어색하고 이질감이 느껴졌다. 섞일 수도 발을 들여서도 안되는 곳일뿐이었기에 곧 흥미를 지워냈다.

국립 로운 아카데미

아카데미는 도심에서 떨어진 외딴 곳에 터를 잡았다. 수목이 우거져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아카데미는 왕족을 비롯한 고위 귀족들도 많이 입학하는 곳으로 왕가와 함께 명맥을 이어왔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몇백년의 전통을 가진 명문은 지금까지 유수의 인재를 배출해 왔으며 귀족 사회에서 로운 출신이라는 것은 꽤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몇 달 공부를 했다 손쳐도 이런 곳에 덜컥 붙을줄은 몰랐지.

킹스 칼리지.

공부하게 될 칼리지의 이름을 마저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름부터 왕을 달고 있는 칼리지는 로운에서 가장 오래된 칼리지 중 하나이다. 하필 붙어도 거길 붙었네. 지원은 다른 칼리지에 했던 것 같은데. 영 석연치 않았지만 케일은 곧 생각을 털어냈다.

조용히 살자.

졸업만 하면 되겠지. 눈꺼풀을 아래로 밀었다. 잠깐 한 눈을 판 사이에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 친애하는 아서 크로스만씨께.

 

 

 

입학식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도중에 차를 놓쳐 지각을 할 뻔 했지만 입학식이 끝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강당에 도착하니 신입생 대표의 선서 차례더군요. 올해의 신입생들이 날개를 달고, 찬란한 내일을 향해 발 맞추어 나가라는... 뭐, 그저그런 뻔한 내용이지만 대본을 외우던 학생의 얼굴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습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유명인사더군요. 그가 단상에 오르기 위해 계단을 밟아갈때 웅성이는 소리가 점차 커졌습니다. 몇몇은 눈치를 보며, 마주 보며 감상을 늘어 놓기 바빴습니다. 강당 위에 올라있는 저 사람이 알베르 크로스만이고, 올해 수석으로 입학한 신입생이며, 로운을 통치하는 여왕의 하나뿐인 조카라고요.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 맹새한 여왕이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했으니 다음 대의 로운의 왕위를 이어받을 사람이라는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습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선서를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오던 그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마치 오래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던듯한 착각을 느꼈습니다. 그래요. 착각일수도 있겠지만, 초승달처럼 곱게 휘어지는 눈꼬리를 보는 순간 그와 제가 어쩌면 비슷한 부류의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의롭고 공정하고 반듯한 겉모습과 달리 속 안에 숨겨놓은 비밀이 많은 사람 같았습니다. 귀족의 탈을 쓰고 칼리지에 입학한 저와 마찬가지로. 」

 

"케일 헤니투스 맞지?"

태양이 머리 위로 기울어진다. 찬란한 금발 머리칼이 빛을 받아 부서졌다. 알베르는 맑게 갠 하늘처럼 화사한 웃음을 머금은채 케일의 앞을 막아섰다. 금새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케일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읽고 있던 소설의 흐름이 갑작스레 걸려온 말에 끊겨버렸다.

"알베르 크로스만입니까?"

그가 한쪽 눈썹을 밀어올렸다.

"나를 그런식으로 부르는건 자네가 유일할거야."

“누가 이름을 알면서 물어보래요.”

“대뜸 케일, 하고 부를수는 없잖아.”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허물없이 대하시는데요.”

알베르는 대답하지 않고 케일이 읽던 책으로 눈을 가져갔다. 펼친 두툼한 양장본의 페이지가 반 이상이 넘어가있다. 알베르는 첫 문단을 눈으로 슥 훑었다.

"오, '오만과 편견'도 읽나?"

"보자마자 아네요.읽었어요?"

"얼마전에. 그보다 대화를 하고 싶어."

알베르가 어깨를 으쓱한다. 케일은 한숨을 푹 쉬며 읽던 페이지에 시선을 붙였다가 책을 덮었다.

아카데미에 적응하면서 고집을 부리면 피곤해지는 몇가지를 알게 되었다.

하나, 킹스칼리지의 학생대표는 알베르 크로스만이다.

둘, 알베르 크로스만은 교수님들의 신임을 받는 우등생이며 바르고 공정하고 원칙을 준수하는 학생이라는 것.

셋, 그래서 고집이 아주 세다는 것.

피하고 도망다닐수록 피곤해진다. 계산을 마친 케일은 적당히 대답하기로 마음 먹었다.

"옆에 앉아도 되지?”

“거기 서서 얘기해요.”

“태양이 뜨거워.”

 

알베르는 케일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아 붙지 말고, 저리 좀 가봐요.”

“그늘이 거기 밖에 없어.”

 

아무래도 알베르는 케일의 짜증에 내성이 있는듯 했다.

“무슨 볼일입니까? 한가해요?”

“손이 꽤 맵던데, 한 대 제대로 맞은 곳이 밤이면 욱신거린다니까. ”

“윽.”

“아이고.”

“괜찮습니까?”

“뭐 보다시피 멀쩡해. ”

볼래?하고 옆 얼굴을 돌려주기까지 한다. 뭐지. 저 실없는 인간은. 책망하는 눈치는 아니라서 케일은 슬쩍 눈을 돌렸다.

 

단상 위에서가 아니라 알베르 크로스만이라는 인간과 제대로 맞닥뜨린건 신입생 환영식을 겸한 디너파티에서다. 칼리지 중에서도 대단히 유구한 전통을 가진 킹스 칼리지가 유독 심한거지, 어디에나 그렇듯이 혈통을 중요시 하는 꼰대는 있었 다. 신입생은 강제 참여였기 때문에 케일은 조용히 시간을 떼우다 슬쩍 나가려고 했지만 화려한 외모가 도움이 안 됐다.

 

옆에 사람이 하나 둘씩 모이고, ‘헤니투스’라는 듣도 보도 못한 이름 뿐인 귀족성에 화두가 옮겨가더니,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평민 출신으로 후원금을 받아 학교에 들어왔다는 것까지 들통이 났다. 적당한 모욕이라면 귀족 나부랭이들이 다 그렇지. 하고 웃어 넘길까 했는데. 한 녀석이 음흉한 얼굴로 새끼 손가락을 흔들어댔다.

‘야, 너 그 귀족 노인네 이거냐?’

그러니까 속된 말로 케일이 아서 크로스만의 숨겨둔 애인은 아니냐는 의미다. 케일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귀족의 후원은 ‘그런’ 목적으로 많이 이루어진다는 것쯤은 케일도 안다. 적당히 아니라고 웃어넘기면서 구설수에 오를 일이 없도록 해야하는데 열이 받았다.

 

같은 방을 쓰는 최한이 케일님! 하고 험하게 굳은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케일은 빙긋 웃었다.

 

아카데미에 도착하고나서부터 꼬박 편지를 썼다. 물론 한 번도 답장을 받아본 적은 없다. 심지어 얼굴 한번 못봤다. 언제 내 소식만 알고 싶다던 말을 신뢰하게 된거지. 머리를 묶은 리본을 풀어낸 케일은 붉은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헤집었다.

 

 

 

당신 분풀이 겸 내 분풀이라고 생각하면 알아서 좀 수습해주겠지.

 

 

 

여차하면 학교 뜨는거고.

 

 

 

"너 망나니라고 들어봤냐?"

환하게 한번 웃어준 케일은 말 그대로 깽판를 쳤다. 건방진 턱주가리에 시원하게 주먹을 꽂아넣는 것을 시작으로 비오는날 먼지 나도록 두들겨 팼다. 난데없는 쌈박질에 학생 대표가 급히 달려오고 교수님들을 모셔온다,누가 좀 말려봐라하며 발을 구르는 학생들도 있었고 비명을 지르는 학생들도 있었다. 한 마디로 난장판이 됐다. 알베르가 도착한건 케일이 한창 건방진 녀석의 얼굴 가격하던 때였는데 녀석이 체면이라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있는 없는 힘 다 짜내서 주먹을 뻗었고, 하필 싸움을 말려보려고 막 케일을 어깨를 붙잡은 알베르가 얻어맞았다는 얘기다.

손이 꽤 맵네. 엉겹결에 맞은 뺨을 움켜쥐고 알베르가 실없이 웃자 장내가 싸하게 식었다. 녀석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싸움판은 조용히 수습이 됐다. 결론만 말하면 케일은 안 잘렸다. 알베르가 그러길 원했고 왕자가 휘말려서 다쳤다는 구설수에 가문 이름이 올라가서 좋을게 없었으므로 이 난리는 조용히 넘어가는쪽으로 결론이 났다는 말이다.

 

며칠 전을 되짚어 보다가 케일은 문득 떠오르는 의문을 뱉어냈다.

“그때 일부러 맞은겁니까?”

“제법 예리하네.”

케일이 아무말 없이 물끄러미 보자 알베르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신분은 이렇게 써먹는거지.”

하여간 특이한 인간이다.

눈꺼풀이 내리 감겼다.

신분에 대한 소문이 아니더라도 차림새나 예절에서 고위귀족이라는 냄새가 풀풀 풍겼다. 대접받고 남 위에 군림하는 것이 당연한 인생들. 그런 사람들 속에 섞여 살았으니 기득권층이 그러하듯이 오만하고, 남을 얕잡아보고 장기말처럼 써먹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이어도 어쩔 수 없으리라 생각했었는데.

“그러는 너도 써먹을 수 있는건 다 써먹는 주의잖아. 우리 꽤 닮았어.”

케일은 풀 밭 어딘가를 향하던 시선을 끌어올렸다.

“뭐가 말입니까.”

“믿을 구석 없이 나설 인간은 아닌것처럼 보였거든. 모욕은 모욕이고, 그 후원자라는 인간이 알아서 막아주리라 생각하고 판 벌인거잖아.”

“예리하네요.”

한번씩 예리하다는 말을 주고 받은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웃었다. 나랑 똑같이 웃네. 저거 내가 판 벌일 때 짓는 웃음인데. 불길한 예감에 케일은 빠르게 눈을 돌렸다.

“그거 내가 막아줬으니까 나한테 빚이 있는건 맞지?”

“그래서 뭘 바라냐고요.”

“아마 네가 싫어할만한거?”

 

 

「 친애하는 아서 크로스만씨께.

 

 

 

얼마전에 중간 시험을 마쳤습니다. 성적은 좀 전에 발표된 참입니다. 얼떨결에 상위권에 들었네요. 아무래도 학교 생활이 순탄치 않게 흘러갈 모양입니다. 계획했던 것과 반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네요.

 

소식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디너 파티에서 사소한 시비가 있었습니다. 그 계기로 알베르 크로스만과 안면을 튼 사이가 되었네요. 결론만 말씀드리면 그 인간과 엮이고부터 인생이 단단히 꼬인 것 같아요. 난데없는 학생대표일을 떠맡게 되었습니다. 저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기도 했지만요. 그런데 학생대표가 하는 일이 왜 이렇게 많은 거였습니까? 이러고도 성적을 유지하다니, 이 인간 잠 잘 시간은 있는 거예요? 어쩐지 자세히 보면 눈밑에 다크써클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더라니. 하여간 머리를 맞대고 처리해야할 일이 많아서 붙어다니다보니 자연스럽게 시선의 중심에 서게 되더군요. 덕분에 귀찮은 일들만 잔뜩 생긴 참입니다. 일주일전 있었던 축제에서는 그의 파트너로 춤도 췄었다고요. 춤 같은건 춰본적 없다고 했더니 왈츠 기본 스탭만 속성으로 가르쳐서 기어이 끌고 가더라니까요.

 

한 곡을 추고나서는 피곤을 핑계로 테라스로 나왔습니다. 아마 그 때 밤 바람에 홀린 것이 틀림 없을 겁니다. 춤을 췄습니다. 남들 앞에서 보여주는 춤 말고 마음이 가는데로요. 스탭을 밟는 것은 서툴어서 시선은 발끝에서 머물고, 호흡은 가쁘고, 긴장으로 얼굴이 달아오르는것이 신경쓰이는 이상한 밤이었습니다. 홀에서 나오는 음악은 테라스까지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즉흥적인 콧노래를 부르며 그의 구두 위에 구두를 얹고 그가 리드하는대로 몸을 맡겼습니다. 맞잡은 손의 체온은 뜨겁고 포근했습니다. 그 밤 뿐이지만 어쩌면 그가 다정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정도로요. 춤을 마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나왔습니다. 알베르가 저를 보며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어떤 눈을 했는지 계속해서 떠올랐습니다. 이상한 기분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파티장에서 말도 없이 뛰쳐나간셈이니 그가 어떤 곤란에 처할지는 불보듯 뻔했지만 하얀 머리속을 진정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씻지도 못하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해보려고 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습니다. 아카데미로 향하던 그 날처럼요. 저는 잠 한숨 자지 못했는데 알베르는 멀쩡한 얼굴로, 언제나와 같은 얼굴로 인사를 하더군요. 그래서 알았습니다. 어제 그건 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고요. 그래서 서운하다고 물으신다면 글쎄요. 저는 아마도, 아니오라고 대답할겁니다.

 

곧 방학이 시작됩니다. 그에게서 연락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모두 무시할 생각입니다. 두 달을 보내고 나면, 그렇게 다음 학기가 시작되면 저를 잊어버리지 않을까요. 혹시 의문이 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베르 크로스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요. 결론만 말하면 저는 알베르 크로스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절대로요.

 

 

 

- 케일 헤니투스로부터. 」

 

 

 

케일이 편지의 마침표를 찍자 침대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케일이 뒤로 돌자 촛불이 흔들려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최한이 잠에서 깨어나 비몽사몽한 얼굴로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눈을 비비는것을 보니 잠이 덜 깬 듯 했다.

"미안. 잠을 깨웠네."

"괜찮습니다."

기숙사에서 편지를 쓰면 안되겠다. 최한이 잠들었을때는 괜찮겠지 싶어서 촛불을 켰더니 잠을 깨운 모양이었다. 번거롭긴 하지만 건물 밖으로 나가는 편이 좋겠다. 케일이 미안한 마음에 초를 끄려고 몸을 일으키자 최한이 손사레를 쳤다.

"그보다 케일님 그 소문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문?”

“킹스칼리지에 밤이 되면 유령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돕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남자라는데 검을 차고 돌아다닌다더군요. 마주치면 홀연히 사라져버린다는데 신입생들 사이에서 꽤 유명한 모양입니다.”

“그래?”

“밤 길 조심하세요.”

케일이 나가려는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최한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케일이 복도로 나왔다.

과학과 의학이 발달하고 말 대신 철도가 교통을 대신하는 시대에 유령은 무슨. 한쪽 귀로 듣고 흘릴 얘기였다. 소문의 유령을 맞딱뜨리기전에는 그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만 로브를 뒤집어썼다. 무시하고 가는게 맞았지만 호기심이 반, 남자가 향하는 방향이 저와 같았다는 이유가 반이었다. 케일이 발소리를 죽였다. 옥상에 다다르자 환한 달빛에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케일이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남자가 입을 틀고 몸을 끌어당겼다. 가슴에 손을 짚었다. 얇은 잠옷 안에서 닿은 맨살이 뜨겁다. 쉬이, 쉿. 좀. 귓가에 감겨오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이 인간이. 케일은 욕설을 삼켰다. 당신의 악력을 이런식으로 확인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미안, 들키면 내가 좀 곤란해서. 알겠어요.

한바탕 말씨름을 하고나서야 몸이 자유로워졌다. 케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종족 출신입니까? 아직 로운에 남아있을줄은 몰랐는데요.”

“절반은. 로운에 아주 소수만 남아있지.”

“그 모습은 어떻게 설명할겁니까? 알베르 크로스만은 금발에 푸른눈을 가진 남자였는데.”

“마법..이라고 할게. 지금은.”

“넘어가죠. 지금은.”

밤 중에 힘을 뺐더니 기운이 없었다. 바닥에 털썩 앉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선선히 부는 바람과 피부 위로 기울어지는 달이 환하고 곱다. 그 날 같네. 달빛이 춤사위처럼 넘실거렸다. 감상이 짙어질즈음 알베르가 옆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뭘하나?”

“보면 모릅니까? 별 봅니다. 기운을 뺐더니 힘도 없고요.”

“케일 자네는 체력을 기를 필요가 있어.”

“아 됐습니다. 잔소리는 데리고 살 사람한테나 하세요.”

케일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알베르가 미묘한 얼굴로 쳐다봤다가 금새 표정을 지워냈다.

“킹스 칼리지에 유령이 있다더니, 그게 학생대표라고하면 꽤 재밌는 화두가 될 것 같은데요. 뭐하러 밤에 돌아다녀요.”

“갑갑해서. 넌 여긴 뭐하러 왔는데?”

“아. 편지쓰러요. 룸메이트가 빛을 불편해해서.”

이해를 못하는 눈치라 케일이 설명을 더했다.

“날 후원하는 귀족이 요구한겁니다.”

“별난 후원자네. 다른 건 요구하는거 없고?”

알베르가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케일과 눈이 마주쳤다.

“수상쩍어요.”

“......”

“이상하지 않습니까? 다른거 필요없이 편지만 꼬박 써 보내라니,요즘 세상에 누가 이런 자선활동을 해요? 시비 건 놈이 악질이긴 했지만 ‘이거’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닙니다.”

 

케일이 새끼 손가락을 알베르 앞에 들이밀었다.

“얘가 못하는 소리가 없어.”

알베르가 뺨을 붉히든 말든 케일이 코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보통 이런거 바라거든요.”

“아닐수도 있지...”

“같은 귀족이라고 편들어요?”

“아니, 내말은 그런 의미가, 그보다 너무 가깝네.”

“보기보다 순진하시네요.”

케일이 몸을 뒤로 조금 빼자 알베르가 뒤로 넘어간 몸을 일으켰다. 얼굴이 터질것 같네.

“졸업만 마치면 평생 백수로 살게 해주겠다는 약속도 신경쓰이고요. 학교를 마쳤으니 내 7번째 첩이 되지 않겠나? 백수로 살게 해주겠네 소리 하는건 아닌지 모르겠네.”

“보통은....”

“뭐요.”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나?”

“다르게 생각할건 뭡니까? 애초에 불공평한 관계인데요.”

“그렇군.”

침묵이 찾아왔다. 말을 내뱉고나니 기분이 이상해져서 케일은 화두를 돌렸다.

"까만 유령이라고 불릴만하네요. 머리카락도 검고, 눈동자도 검고, 피부도 검고. 입술만 색이 좀 옅은데. 아. "

 

케일은 반듯한 이마와 콧날을 지나 입술로 향하던 시선을 떼어냈다. 알베르가 선선히 웃고 있었다.

"밤에 돌아다니면 눈에 안 띌 색이긴 하지."

이 상황이 불편해졌다. 케일은 애꿎은 달만 쳐다봤다. 달이 밝아서, 밤이 소란스러워서, 어둠이 짙어서. 떠오르는 이유들을 짚어봤다. 오늘따라 신경쓰이는것이 많았다. 케일은 여전히 밤 하늘에 눈을 둔 채 한 가지 덜그럭거리는 의문을 골라냈다.

"그 모습 보여줘도 괜찮은겁니까? "

"괜찮아. 널 믿으니까. "

"믿는다는 말 함부로 하는거 아닙니다. 내가 비밀을 지키지 않으면 어쩌려고요."

"안 그럴거잖아."

"그런것도 자신하면 안되는거 아닙니까?"

"자신하면 안되나?"

"그걸 말이라고...."

또 눈이 마주친다. 오래도록 케일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처럼 눈이 고정되어 있다. 변함없는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덜컥거렸다. 케일은 입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안되나?"

"알베르."

침묵이 길었다. 겨우 목 안을 빠져 나온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눈 안에 머물지 못하고 흘러넘치는, 목을 바싹 조이는 감정을 이제는 모르지 않았다. 겨우 꺼낸 말을 알베르가 막아섰다.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요."

"너를 사랑하냐고 물어보고 싶은 거라면, 그게 맞아."

"....."

"하지만 내가 널 믿는건, 너를 사랑하는것과 별개의 감정이야."

"알베르."

"케일."

"알베르, 알베르, 그러니까. "

"되돌려 달라는 말은 아니야. 그저, 형편없는 고백일지라도 말하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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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온 손끝이 붉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가 떨어졌다. 눈 안에 담긴 감정이 애처로웠다. 케일은 머리 끝까지 물에 잠기는 것 같았다. 살기 위해 허우적거리듯이 쏟아지는 감정 속에서 버둥거렸다.

 

억울해졌다.

 

당신이 그렇게 굴면 나는 어디로 도망쳐야 할지 알수가 없잖아. 내가 당신을 사랑해도 될리가 없잖아. 당신은 저 멀리 손 닿지 않는 곳에 서 있는데, 내가 그걸 받아들여도 될리가 없잖아. 케일은 혀 끝에서 맴도는 말을 억지로 눌러 삼켰다.

 

“미안해요.”

“그래.”

달리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이거 케일님 앞으로 온 우편물 같은데요?”

“나한테?”

최한의 말을 들은 케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편물을 보낼만한 곳이 없었던 탓이다. 최한에게서 넘겨받은 편지에 찍힌 크로스만 인장을 확인하고나서야 몇 가지 깨닳음이 튀어나왔다. 후원자에게 온 편지라는 것을 암과 동시에 크로스만 왕가의 것이 분명한 인장이 존재감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러고보면 똑같은 가문 이름을 사용할리가 없는데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알베르 크로스만. 아서 크로스만. 두 사람 사이에 연관성을 따져봐야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왕족을 앞에 두고 다른 왕족의 험담을 한 셈인데 잡혀가는건 아니겠지...

 

지난 일은 어쩔 수 없지. 생각을 털어내고 편지의 밀봉을 뜯었다. 고급스런 문양이 그려진 편지지에 정갈한 필체로 적힌 글자들이 보였다. 한 학기의 끝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에서 처음으로 받게 된 편지가 낯설었다.

「 친애하는 케일 헤니투스에게.

 

 

 

그동안의 소식은 잘 받아보았단다. 학업에도 좋은 성적을 보이고 스스로 장래를 준비하며 학교 생활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니 아카데미의 입학을 권유한 것이 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시시콜콜한 이야기만 전하게 될 것 같다는 말은 보았다면 네 소식을 받아보는것이 적적한 삶의 기쁨 중 하나란다.

 

일전에 시비가 붙었다는 일은 대략 얘기를 전해들었단다.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만 그것과 관련해 한 가지 정정해주고 싶은 것이 있어 이제서야 소식을 전하는 것을 부디 용서해주길 바란다.

.

 

.

 

.

 

 

 

아서 크로스만으로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나서도 내용을 믿을 수 없어 케일은 몇번이나 편지를 다시 읽었다. 정리하자면 졸업 후에 어떠한 것도 요구할 생각이 없으며, 불순한 의도는 더더욱 없다는 말을 고급스럽게 포장한, 변명이었다. 케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생각을 편지로 적은 기억은 없었던 것 같다.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될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건 둘째치고 아무래도 말을 전한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짚이는 구석을 떠올리는데 한 사람이 걸려나왔다.

 

알베르 크로스만.

그 날 이후로 거리가 벌어졌다. 바라던 바기는 했지만 마음이 쓰이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옆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이 떨어져나간 자리가 신경쓰이지 않을리 없었다.

오랜만에 도서관이나 갈까.

 

케일은 드문 감상을 정리했다.

“오랜만에 오셨어요.”

“바빴어.”

아카데미 도서관을 관리하는 메리가 인사를 건넸다. 케일은 씁쓸하게 웃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알베르와 붙어다녔으니 한동안 안 오긴 했다.

 

뭘 읽을까 고민하다가 크로스만왕가의 계보를 골랐다. 모르던 정보를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첫 페이지를 펼치자 메리가 말을 붙였다.

 

“최신 약력은 들어있지 않은데 괜찮으신가요?”

“최신약력?”

“여왕님 즉위 후부터는 정리 되지 않았거든요.”

“아.”

 

처음부터 메리에게 물어볼걸 그랬나보다.

“메리, 혹시 아서 크로스만이라고 알아?”

“크로스만의 유령 말씀이신가요?”

“유령?”

“종종 후원이 들어오곤합니다. 발신인은 항상 아서 크로스만이라고 적혀있어요. 그래서 그 분을 크로스만의 유령이라고 부릅니다. ”

“그게 왜? 로열패밀리가 쓰는 가명일수도 있잖아.”

“그럴겁니다.”

그런데 왜. 케일이 미간을 좁히자 메리가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아서 크로스만 왕자님은 백일을 채 넘기지 못하고 열병으로 돌아가신 여왕님의 남동생이십니다.”

케일의 입이 서서히 다물렸다.

“그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니까요.”

그럼 나를 후원하고 편지를 보낸 사람은 대체 누구인데. 케일은 자신에게 판도라의 상자를 주어진 기분이 들었다. 열어보고 싶은데 열어서는 안될 것 같았다. 텅 비어버릴 상자 안에 무엇이 남게 될지 그것이 잠시 두려워졌으나. 어쩔 수 없지. 지금이 용기를 내야할 때라면.

 

미안해 메리. 나중에 다시 올게. 케일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친애하는 아서 크로스만씨께.

 

 

 

케일입니다. 처음 뵙던 날이 떠오르네요. 놀라운 소식을 들은 참입니다. 아서 크로스만 사람의 행적에 대해서요. 그간 이상했던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는 것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이 편지를 받아보실즈음이면 저는 킹스 칼리지 기숙사의 3층의 계단을 오르고 있을 겁니다. 그간 편지를 배달했던 기숙사장을 통해 모든 전말을 들었거든요. 수업이 없는 시간이면 방에 틀어박혀 서류나 처리하고 있을테고 눈치를 채고 도망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예고 없이 방에 쳐들어가는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당신이 무슨 변명을 늘어놓을지가 아주 기대되네요. 아무것도 바라는게 없다고? 같은 감정을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그 말들 앞 뒤가 하나도 안 맞는건 알아요? 그럼 내 앞에서 사랑을 속삭이지 말았어야지. 그래야 아귀가 맞는 말이잖아. 바보같은 알베르 크로스만 」

 

 

 

편지는 그 곳에서 뚝 끊겨 있었다. 알베르가 편지지를 내려놓는것과 케일이 문 손잡이를 돌린건 간발의 차였다.

케일은 문에서 등을 돌린 채 두 팔로 책상을 짚고 서 있는 알베르와 마주쳤다. 케일이 들어온 것을 알았을텐데도 말이 없던 알베르가 등을 돌렸다. 케일의 의기양양 얼굴이 알베르를 향했다.

“무슨 말부터 하고 싶어요?”

“글쎄. 이렇게 빨리 들통날줄 몰랐다는 말?”

“그거 말고는?”

“그 날 네 입에서 다른 말을 듣고 싶었다는 말? 네가 쓰는 편지에서처럼 솔직한 네 진심.”

“가령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었겠네요.”

“그래.”

며칠 사이에 수척해진 얼굴로 알베르가 대답했다.

“이제 키다리 아저씨 노릇을 그만 둔다고 하면요.”

케일이 발을 뗐다.

 

“내가 바라는건 후견인따위가 아니니까.”

 

한 걸음씩 발을 옮겨갈때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마지막 한 걸음을 두고 알베르가 웃음을 띄웠다. 그의 손가락이 케일의 마른 등을 짚었다. 따스한 체온이 느껴졌다. 반동 탓에 책상위에서 쌓인 편지들이 무너져 바닥으로 가라앉았으나 둘 중 아무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건 이제 신경쓸 이유가 없는 기록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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