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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스로 들어온 바람에 새하얀 커튼이 살랑였다. 아이들이 한참 재잘거리며 놀 시간에, 웬일로 방 안이 조용했다.

“마녀가 말했습니다. ‘나를 초대하지 않다니!’ 왕과 왕비는 다급히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조곤조곤, 부드러운 목소리로 읽어내리는 동화는 최한이 듣기에도 꽤 좋았다. 케일 곁에 둥글게 모여앉은 아이들은 이미 동화 속에 푹 빠져있었다.

“…그래서 왕자는 공주를 지키고 있던 마녀의 사악한 용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습니다.”

“왕자 대단하다는데!”

“왕자 강하다!”

“공주를 구해줘야 하는데.”

공주를 걱정하는 정 많은 은빛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은 케일이 잠시 끊겼던 동화 읽어주기를 다시 이어갔다. 차분하게 들려오는 동화를 곁에서 들으며 최한은 아득히 먼 과거를 회상했다.

자신이 살던 곳에도 아마 이런 비슷한 동화가 있었다. 왕국의 아름다운 공주가, 마녀의 저주를 받고 물레에 찔려 잠이 들고 마는.

“그렇게 공주와 왕자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재밌다!”

“정말 재밌다는데!”

“그래, 그래.”

그 나이대 아이들이 그렇듯 온과 홍, 라온이 동화 내용에 대해서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동화책을 덮은 케일은 어깨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 있습니다.”

“아.”

케일이 필요한 것을 기민하게 눈치챈 최한이 그가 자주 이용하는 머리끈을 건네주었다. 고맙다는 듯 최한을 올려다보며 눈을 몇 번 깜빡인 케일이 머리끈을 건네받아 머리를 묶었다.

“곧 2시인데, 너네 에르하벤님이랑 약속 있지 않았어?”

“맞다! 레어로 찾아오라고 했다!”

“가야 하는데!”

케일은 침대에 뒹굴뒹굴하며 동화책을 듣느라 엉망이 된 아이들의 차림새를 직접 매만져주었다. 비크로스표 샌드위치가 가득 담긴 바구니까지 아이들 손에 들리고 나서야 안심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케일의 모습을 보며 최한은 웃음을 삼켰다.

“다녀오겠다!”

“다녀오겠다는데~”

“이따 보자는데!”

큼지막한 바구니를 품에 안은 홍과 그 옆에 온, 라온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텔레포트로 에르하벤의 레어로 이동한 것이다. 아이들 없이 케일과 최한만 남은 방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케일은 슬쩍 테라스 밖을 바라봤다. 하늘은 구름이 잔뜩 껴서 비교적 흐릿했다. 비가 오려나.

“어디 나가시려고요?”

케일이 외투를 찾아 입자 구석에 서 있던 최한이 훌쩍 다가와 물었다.

“…….”

“케일 님?”

케일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최한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다가, 대뜸 그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가야지. 해리스 마을.”

“아…….”

“어차피 혼자서라도 가려고 했을 거 아냐.”

정곡을 찌르는 말에 최한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같이 찾아간 지 이번이 벌써 4번째인데, 최한은 영 익숙해지지 않는지 항상 어색해하곤 했다.

‘아니면 나에게 기대를 하지 않는 건가?’

사람 관계에 기대하지 않는 건, 그만큼 겁이 많다는 뜻이었다. 최한은 오래 살았지만 그렇다고 어른은 아니었다. 그는 어른이 되기에는 놓친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가자. 쓸데없는 생각 그만하고.”

일부러 최한을 휙 지나쳐 방을 나가자 뒤에서 허겁지겁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케일은 슬쩍 미소지었다.

 

***

 

비가 오기 전에 돌아가야 할 텐데.

최근 설치한 해리스 마을로 연결된 텔레포트를 이용하여 순식간에 마을에 도착한 케일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아까 출발할 때보다 먹구름이 훨씬 많아졌다. 어차피 비가 와도 텔레포트가 있으니까…. 뭐, 비 좀 맞는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닌데.

묘지로 걸음을 옮기며 케일은 뒤를 힐끔 바라봤다. 묵묵히 따라오고 있던 최한과 눈이 마주쳤다. 깨끗하고 순한 검은 눈동자. 처음 만났을 때 섬뜩함이 느껴졌던 그 눈을 떠올리며 케일은 시선을 돌렸다.

추모는 오롯이 최한 혼자만의 몫이었다. 케일은 최한 곁에 있을 생각도 마음도 없었다.

묘지로 최한을 보낸 케일은 언덕길을 올랐다. 사람이 잘 오지 않는 어둠의 숲 근처, 그 언덕길 끝에는 케일이 꽤 좋아하는 장소가 있었다.

“후우.”

마르고 허약한 몸은 언덕 좀 올랐다고 숨이 벅찼다. 목을 죄는 볼로 타이를 살짝 내린 케일은 잡초로 뒤덮인 땅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케일이 앉은 언덕 너머로 해리스 마을의 전경이 펼쳐졌다.

삶의 터전과 부모를 잃은 늑대족 아이들이 새롭게 살아가는 곳. 케일에게는 그저 평화롭기만 한 이곳이, 최한에게는 아직도 악몽처럼 느껴질까.

최한은 평소에도 말수가 적었지만,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는 더더욱 말을 아꼈다. 케일은 록수 시절에 읽은 영웅의 탄생으로 최한이 말하지 않은 부분도 알고는 있지만…….

‘이제 영웅의 탄생은 없다. 최한은 소설 속 등장인물이 아니야.’

무엇을 느끼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최한이 스스로 말해준다면 알게 되겠지만, 거짓을 말할 수도 있다.

케일은 그 사실이 꽤 반가웠다. 이제야 최한과 동등한 위치가 된 것이다.

“케일 님.”

“금방 왔네.”

케일이 이 언덕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긴 했지만, 아마 최한은 케일이 어디에 있건 찾아왔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신경 써주셔서.”

3월 28일. 혹독했던 겨울이 물러나고 따듯한 바람이 불어오는 시기. 메마른 땅에 샛노란 꽃망울이 돋아나고 흩날리는 나뭇가지에는 초록빛 향기가 감돌았다. 케일이 내려다보는 세상은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최한의 3월 28일은 그저 피비린내만이 흘렀다.

“동화.”

“네?”

“재밌었어?”

멍하니 마을을 바라보던 케일이 대뜸 물었다. 뜬금없는 대화 주제에 당황스러운지 최한은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가 겨우 대답했다.

“음, 네. 제가 살던 곳에서도 비슷한 동화가 있어서….”

“그렇군. 어쩐지 집중하고 있던 것 같아서.”

“아. 별 건 아닙니다. 그저….”

최한은 잠시 고민했다. 말해도 될까? 케일에게 제가 살아온 삶의 일정 부분을 털어놓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제가 느끼는 어둠까지 굳이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최한이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케일이 대신 입을 열었다.

“근데 그 동화, 진짜 웃기지 않아?”

“예?”

“하나부터 열까지 허술하잖아. 물론 애들 동화니까 그렇겠지만…. 얼굴 한번 안 본 공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용과 싸우는 왕자라든가. 그런 부분.”

“아…….”

확실히 그렇다. 케일이 아이들에게 읽어준 동화책은 9페이지 정도였고, 스토리가 매우 가볍고 빈틈이 많았다.

“네가 살던 곳에 있는 동화도 그래?”

“아뇨, 조금 더 자세하고… 몇몇 부분은 다릅니다.”

“그래? 어떻게 다른데?”

“공주가 물레에 손이 찔려 100년 동안 잠드는 것까지는 똑같지만 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공주가 있는 성까지 다양한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 동네 왕자도 얼굴 한번 안 본 공주 살리려고 꽤나 노력했네.”

신랄한 케일의 말에 최한이 푸스스 웃었다.

“워낙 오래돼서…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런 동화를 기억해서 뭐해? 물론 난 할 수 있지만.”

시큰둥하게 답한 케일이 물었다.

“공주가 100년 동안 잠들어 있었다는 부분이 신경 쓰이는 건가? 너랑 닮아서?”

“…….”

“100년 뒤에 깨어난 16살짜리 공주의 눈에 세상이 과연 어떻게 보일지 싶어서?”

자신을 사랑해준 왕과 왕비는 이미 죽었다. 얼굴을 알고 있던 시종이나 귀족도 없다. 어쩌면 자신은 이미 공주가 아닐 수도 있다. 바깥세상은 너무나도 달라져서 자신은 그저 이방인일 뿐이다.

16살 공주님은 그저 잠을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빗방울이…….”

볼에 차가운 것이 닿는다 했더니 금세 비가 쏟아졌다. 최한은 케일의 손을 붙잡고 비를 피하기 위해 언덕을 내려갔다.

툭툭, 머리를 두드리며 떨어지던 비는 순식간에 시야를 가릴 만큼 내리기 시작했다.

결국, 둘은 마을까지 가지도 못한 채 큰 나무 아래에 섰다. 최한은 입고 있던 로브를 벗어 케일에게 걸쳐주었다.

“고마워.”

외투를 입고 있었다고는 하나 얇았던 터라 외투는 물론이고 블라우스까지 푹 젖어서 살결이 비췄다. 밀려오는 한기에 몸이 떨렸는데 로브를 걸치니 한결 나았다.

쏟아지는 비에 주변이 어두웠다. 이럴까 봐 빨리 돌아가려고 했던 건데.

“…케일 님 말씀이 맞습니다.”

“어? 뭐?”

“동화 속 공주요.”

아. 아까 전 대화를 이어가는 건가? 마주 선 최한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정확한 숫자를 가늠하지 못할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처음 사람을 마주했을 때의 기분은… 솔직히 참담했습니다.”

“…….”

“이곳 문화는 제가 살던 곳과 많이 다릅니다. 어둠의 숲에서 수십 년을 괴물들과 마주하고 살아오며 저는… 포기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알 수 없는 곳에 와버렸고, 행복했던 그곳으로는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고.”

그런 최한은 어느 날 괴물들만이 가득했던 숲을 벗어나 사람을 마주하게 된다. 도저히 한국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외모, 차림새, 언어. 최한은 닳고 닳아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희망이 다시금 무너져내리는 것을 느꼈다.

“해리스 마을에 적응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저는 수십 년간 문명을 접하지 못했고 언어가 달라 소통조차 힘들었으니까요. 그래도 결국은…… 네. 결국은 적응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최한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 눈가에 닿는 체온이 뜨거웠다.

“동화 속 공주도 마찬가지겠죠. 깨어나니 세상은 100년이 흘렀고, 자신이 기억하는 그 어떠한 것도 남아있지 않을 겁니다. 공주 그 본인마저도 말입니다.”

“…최한.”

비에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쏟아지는 비에 찬 기운이 감돌아서 그런지, 눈앞에 서 있는 최한에게서 열기가 느껴졌다.

“공주에게서 왕자의 존재는 예전의 저로 따지자면 해리스 마을과 같습니다. 저주를 풀어주고 새로운 세상을 보여줬으니까요. 그 세상이 잔인한 현실을 품고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

“아…….”

공주는 자신에게 현실을 살아갈 기회를 준 왕자를 사랑한다. 어쩌면 그것은 공주에게 있어서 어찌할 수 없는 흐름과도 같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기회를 준 이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케일 님. 저는 해리스 마을을 잃었습니다.”

케일 님과 늑대족 아이들의 도움으로 다시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지만, 제가 처음 사랑했던 해리스 마을은 영영 볼 수 없을 겁니다.

마주한 최한의 새까만 눈동자가 일렁였다. 케일은 아까까지만 해도 순하게 느껴졌던 그 검은 눈이, 어째서인지 지금은 보고 있을수록 뜨거운 긴장감이 올라왔다.

“그리고 케일 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세 번째로 얻어낸 소중한 집. 두 번째보다 더욱 힘겹고 무거운 마음으로 마주한 곳이었다. 살인을 저질러 피로 물든 손과 복수만이 점철된 머리를 가진 저를 받아들인 케일이다. 그 뒤로도 주변을 맴도는 최한을 내치지 않고 곁을 내주는 다정한 사람.

공주는 왕자를 사랑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기회를 준 하나뿐인 존재.

그리고 최한은.

맞닿은 입술이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절박하게 매달리는 몸짓이 안쓰러워 케일은 기꺼이 제품을 내주었다.

비에 젖어 미끈거리는 손을 최한이 잡아 왔다. 부족한 숨에 헐떡이던 케일은 최한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3월 28일. 최한은 사랑하는 해리스 마을을 잃는다.

3월 29일. 김록수는 케일이 된 자신을 마주한다.

그리고 지금. 둘은 함께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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