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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잘린은 종종 창문 밖으로 보이는 푸른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유모가 읽어준 ‘인어공주’ 동화책을 떠올리고는 했다. 동화책의 결말은 인어공주의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로잘린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름다운 인어공주님이 불쌍해. 자신이었더라면 그런 왕자보다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었다. 잠시 창가를 톡톡 두드리며 생각하던 로잘린은 이내 눈을 빛냈다. 왕자와 인어공주가 만나지 않는다면, 인어공주에게 왕자보다 더 좋은 친구가 생긴다면 그런 슬픈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아닐까?

로잘린은 침대 아래 숨겨둔 상자에서 검은색 로브를 꺼내들었다. 브렉 왕국에서 그녀의 상징인 화려한 적발을 로브 속으로 숨기고 로잘린은 창문 앞에 다시 섰다. 문으로 나가면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이 쫓아올 것이었다. 인어공주님과의 만남을 병사들에게 방해받을 수는 없지. 로잘린의 손길에 창문이 열렸고 바람과 함께 몸이 떠올랐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창문을 통과한 몸이 높이 올라 한 방향으로 날았다. 대륙 최고의 마법사를 목표로 하고 있는 자신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랜만에 맞는 바람에 기분이 좋아져 함박웃음을 지은 로잘린이 앞을 보았다. 목적지는 저 앞의 푸른색으로 일렁이는 바다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사람이 내려오면 사람들이 놀랄 수도 있으니 로잘린은 해변가의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 내려왔다. 그리고 조금 걸어 바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해변가의 한 쪽에서 반짝이는 바닷물을 닮은 푸른색의 머리칼을 가진 자신 또래의 한 아이를 볼 수 있었다. 로잘린의 눈이 커졌다.

 

“인어공주님……?”

 

근데 어째서인지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혹시 어디 다친 건 아닐까? 로잘린은 걱정하는 표정으로 다가갔다.

 

한편 로잘린에게 인어공주라 불린 존재, 위티라는 안 그래도 기분이 나빴던 찰나 인어라 오해를 받게 되어 더 기분이 나빠졌다. 검은색 로브 사이로 언뜻 보이는 적발을 보아하니 이 왕국 왕녀인듯 했다. 이름이 로잘린이었던가. 자신이 방금 인어공주는 아니지만 인어들을 어떻게 하고 왔는지 알게 된다면 동심이 산산조각날 것이었다. 어쩔까.

 

“혹시 어디 아픈가요?”

 

걱정스레 자신을 살피는 로잘린의 모습에 위티라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행동을 살폈다. 차마 함부로 손대지는 못하고 손이 갈 길을 잃은 채 허공에서 우왕좌왕했다. 방금 처음 본 상대인데 뭘 이리 걱정하는 것인지. 신기했고 궁금했다.

 

위티라의 상태를 살피던 로잘린은 그녀에게 다친 흔적이 보이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이내 울상이 되었다.

 

“혹시 벌써 왕자를 만난 건가요? 안 되는데……. 공주님, 제가 왕자보다 더 나아요. 왕자는 잊고 저와 놀아요. 저는 앞으로 제국에서 제일 유명한 마법사가 될 거거든요. 절대 심심하지 않을 거예요. 아, 제 이름은 로잘린이에요.”

 

자신이 인어공주면 어떻고, 만난 적도 없고 꼬리로 한 대 치면 죽어버릴 왕자 따위 알 게 뭔가. 이렇게 순수하게 자신을 어필해오는 왕녀, 아니 로잘린이 있는데. 위티라는 웃었다. 그리고 인어공주 뺨 칠 정도로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로잘린에게 말했다.

 

"전 위티라에요. 왕자랑 안 만날게요. 대신 로잘린이 저랑 친구해줘요."

 

"좋아요!"

 

양방향 미인계의 성공이었다.

 

 

 

* * *

 

 

 

그 후 위티라와 지속적인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어느 날은 위티라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고, 다른 어느 날은 로잘린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위티라는 사실 고래족이었다. 로잘린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왕궁 마법사의 실력을 뛰어넘을 수 있다.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은 무척이나 즐거웠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했던가. 로잘린의 외출이 잦아지자 이를 눈치 챈 국왕이 몰래 마법사를 붙였다. 왕궁 밖에서 로잘린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오라는 명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 마법사는 3일 간 로잘린의 뒤를 밟으며 그녀의 행적을 그대로 국왕에게 보고했다. 고래족의 후계자로 추정되는 이와 만나고 있다는 소식에 국왕은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로잘린을 불렀다.

 

"고래족이라니! 고래족은 흉포하기로 유명하지 않은가! 같이 있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당장 그 고래족과의 만남을 금하라. 아니, 바다 쪽으로 가지 마라!"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부름에 왕의 알현실로 왔던 로잘린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흉포하다니? 위티라는 절대 흉포하지 않았다. 그녀의 분노에는 이유가 있었고, 그 분노로 인한 행동은 정당방위였다. 이대로 붙잡히면 방에 구금되기만 할 뿐이었다. 일단 아버지의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다른 곳으로 피신해있자. 그렇게 생각한 로잘린이 자신을 방으로 데려가려는 병사들을 마법으로 저지하려 할 때 그녀의 손목에 마나 구속구가 채워졌다.

 

“방으로 데려가라!”

 

“아버지!”

 

로잘린은 자신의 방으로 옮겨졌다. 방 전체에 마법진이 걸려 있었다. 자신의 방이었지만 지금은 감옥이 되어 버렸다. 로잘린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소파 밑에 손을 넣어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편지지가 들어있었다. 원하는 상대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는 일회성 아이템이었다. 로잘린은 위티라에게 편지를 썼다.

 

[외출을 금지 당했어요. 그냥 나가버리고 싶지만 방에 걸린 마법진과 손에 채워진 마나 구속구 때문에 당장은 어려울 것 같아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다시 만날 때까지 왕자와 만나지 말기로 해요.]

 

곱게 접어 봉투에 넣자 편지가 허공에 뜨더니 창문 틈으로 쏙 나갔다. 위티라에게 무사히 가길 바라며 로잘린은 머리를 하나로 묶었다. 그리고 종이와 펜을 꺼내들었다. 감히 날 이따위 마법진으로 막아? 5일, 아니 3일 만에 이 마법진을 파훼시킬 것이었다. 로잘린의 적안이 투지로 매섭게 일렁였다.

 

그리고 그 후 3일 째 되는 날, 브렉 왕국에 비상 경보가 울렸다. 저 멀리서 큰 파도가 하늘을 향해 뛰어올랐다. 모두들 그 광경을 보고 놀라 굳어버렸다. 파도는 끝도 없이 위로, 위로 올랐다. 파도 속으로 거대한 고래의 형상이 슬쩍 보였다.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고래…… 고래의 분노……."

 

잠시 후 파도 위에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그리고 큰 물장구와 함께 뛰어올라 단숨에 궁 안으로 들어와 가볍게 착지했다. 푸른 머리가 가볍게 휘날렸다. 위티라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자들을 쳐다보았다. 눈높이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으나 어쩐지 위티라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거대한 존재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만 같았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국왕이 화를 내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멋대로 들어오는가! 기사들은 어서 이 자를 잡지 않고 뭐 하는가!”

 

눈치를 보던 기사들이 주춤거리다 움직이려 할 때 위티라의 손에 들린 채찍이 크게 파공음을 내며 바닥을 내리쳤다. 바닥이 움푹 패어 들어갔다. 그에 모두가 질겁할 때 위티라는 입을 열었다.

 

"내 친구가 억울하게 구금을 당했다고 해서 구하러 왔는데 뭐가 문제지?"

 

"……."

 

“고래의 분노를 원하는가?”

 

국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위티라는 지금 굉장히 화가 난 상태였다. 겉으로는 차분해 보였지만 금방이라도 이 궁을 쑥대밭으로 만들만큼 짜증이 나 있었다. 로잘린에게 마나 구속구가 채워져 있다고 했다. 자신에게 마법을 보여줄 때, 그토록 즐거워하던 로잘린이었는데 자신을 못 만나게 한 것도 모자라 마법까지 금지했다?

첫째 날에는 로잘린의 편지를 보고 브렉 왕국에게 분노했다. 둘째 날에는 애쓰고 있을 로잘린을 생각했다. 그리고 셋째 날에는 그녀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로잘린이 나올 수 없다면 내가 가면 되는 거 아닌가? 마음에 들지 않는 브렉에게 경고도 할 겸 위티라는 직접 몸을 움직인 것이었다.

아무도 입도 벙긋 못하고 있을 때, 누군가 달려왔다.

 

“위티라!”

 

로잘린이었다. 양손이 자유로워진 로잘린이 위티라를 보며 반가움을 숨기지 못하고 뛰어오고 있었다. 로잘린을 본 위티라의 표정도 밝아졌다.

로잘린은 결국 처음 자신의 다짐대로 3일 만에 마법진을 파훼시키고, 마나 구속구까지 풀어냈다. 이것은 로잘린이 마법에 대한 모든 것이 크게 성장했음을 알려주었다. 그녀의 실력은 이제 브렉 왕국의 마법사 중 최고일 것이었다.

그것을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위티라는 알 수 있었다. 위티라는 로잘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로잘린. 나와 함께 세상을 보지 않을래요?”

“세상이요?”

“네. 지금 로잘린을 보니 브렉 왕국 최고의 마법사라 생각해요. 하지만 로잘린의 능력은 여기서 끝이 아니잖아요? 예전에 저한테 제국 최고의 마법사가 될 거라고 말했죠. 나와 함께 세상을 보고 최고의 마법사가 되기로 해요. 저는 옆에서 그런 성장하는 당신과 항상 함께할게요. 나에게 왕자는 필요 없으니까.”

 

로잘린은 웃었다. 행복을 쥔 자의 웃음이었다.

 

“좋아요!”

 

위티라에게도, 로잘린에게도 왕자는 필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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