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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 가죽……이었던가요?>

 

 

먼 옛날-, 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어느 날, 헤니투스 백작가의 유명한 망나니, 케일은 생각 했습니다. ‘어라, 이렇게 살면 내 망나니 생활은커녕, 백수 생활도 망하겠는데.’ 하고 말이지요. 사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어느 해 어느 날 어느 시간을 기점으로, 그는 자각 하지 못한 채로 철이 들어 버린 것입니다.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들어 있는 것 처럼요.

어처구니없는 말이지만, 어쨌거나 그는 아주 조금 성실해졌고, 본인 입으로는 스스로를 망나니라 이야기 했지마는, 제법 많은 이들이 그를 이 영지를 이어갈, 백작가의 이름을 이어 갈 이라고 생각하기 시작 했다는 그러한 묘한 직감이 와버리고 말아서, 그래서 어느 날 밤, 케일은 다짐 한 채로 잠들었고, 아침식사를 하러 나가 이어진 것은.

 

쨍그랑,

하는 소리였습니다. 음, 생각 보다 격한 반응인데, 그런 무의미한 생각을 하며 케일은 고기 한점을 입에 물었고, 이내 가족들의 당황한 표정을 찬찬히 볼 틈새도 없이 자신의 계획이 첫 시작부터 막혔음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세요. 형님!”

“아니, 그냥 여행 좀 갔다 오겠다는데.”

“어디로 말이냐.”

“글쎄요, 아직 안 정했는데…….”

 

심드렁한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요, 백작은 절대 반대를 외치고 나섰고, 케일의 어머니와 형제자매들 역시 반대를 하고 나섰습니다. “내 귀중한 아들/형님/오빠를 어딘지도 모르는 위험한 곳에 내 보낼 수는 없다!” 로 의견이 결국 좁혀 졌고, 그 의견에 케일은 황당해졌습니다. 망나니인! 자신이! 나가서! 어떤 사고를 쳐서 이미지를 망칠 걸 걱정 한 걸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케일은, 나가야만 했습니다.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혼자서 아무의 방해를 받지 않고 돈 많은 백수 생활을 할 준비를 하러 나가야만 했기 때문이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였기 때문에 결국 케일은 한숨을 내쉬고서 한 가지 묘책을 떠올렸습니다. 어디선가 읽은 동화의 내용일지도 몰랐지요.

 

“그렇다면, 옷을 한 벌 지어주세요. 마음에 든다면 나가지 않겠습니다.”

“무슨 옷을 말이냐?”

“밤하늘의 별을 옷으로 지어 입고 싶습니다.”

 

누구라도 황당한 눈으로 바라볼 것을, 케일은 뿌듯하게 요구하고서 사흘을 걸었습니다. 그 정도면 아무도 해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깨끗하게 비운 접시를 앞으로 밀어내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여행 갈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고, 그러기 위해서 작은 요정 친구 하나를 만나기 위해서 이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여행을 도와줄, 먹보 친구를 말이죠.

 

그리고 케일은 자신이 얼마나 안일 했는지, 단 이틀 만에 깨달았습니다. 단 두 가지 이유였죠. 첫 번째는, 이 작고 귀엽고 깜찍하다 못해 한숨이 나오는 요정 친구가 여럿 친구를 데려 왔으며, 그 친구들이 하나같이 개성이 강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인정했습니다. 케일은 이것이 밤하늘을 그대로 떼어 놓은 듯, 검은 듯 짙은 푸른 천에, 촘촘하게 보석들을 수놓아 펼쳐 진 이것은 누가 봐도 별들로 지은 옷이었습니다. 단 이틀만에요! 아침에 여느 날과 다름없이 밥을 먹으러 나왔던 케일은 밥을 먹기도 전에 체할 뻔 했습니다. 아니 저게 뭐람.

 

“……사람을 얼마나 갈아 넣으신 겁니까.”

“어떠냐, 마음에는 드냐?”

 

뿌듯한 백작의 미소에 케일은 떨리는 손으로 레몬에이드 잔을 잡았습니다. 아무렇게나 외친 말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호응해서 이런 작품을 만들어 내다니, 도대체 이 영지에는 얼마나 많은 인재가 있어서 자신의 백수 생활을 방해하려 드는 걸까요. 그런 생각에 케일은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담.

 

“……마음에는, 듭니다만…….”

“그래, 그럼 여행은 그만 두는 거지?”

“……여행과 맞 바꾸기에는 조금 아까운 감이…….”

 

미안합니다, 영지의 모두들, 그러한 죄악감에도 케일은 <망나니>답게 굴었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케일에게는 중요한 일이었으니까요. 실망하는 가족들을 뒤로 하고, 흥미진진해 보이는 집사의 눈빛도 잠시 무시하고, 케일은 뻔뻔한 목소리를 한 번 더 내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요정들이 속삭여 준 계책을 말이죠.

 

“하늘을 끊어 만든 천으로 지은 옷과, 태양을 따와 옷을 지어 주면 포기 하겠습니다.”

 

이번에도 사흘을 걸었습니다. 케일은 생각보다 일이 정말로 안 풀릴 것을 알았고, 그래서 생각 했습니다. 아, 이게 갈림 길이겠구나, 하고요. 그리고 그는 방에 틀어 박혔습니다. 여행길을 생각 해 본적은 없었고, 발 닿는 곳으로 다닐 생각 이었습니다만, 그게 아니게 되어버렸으니까요. 케일은 오랜만에 조금 다급 해졌습니다.

 

그리고 또 정확히 사흘 뒤,

케일은 작은 두통을 느꼈습니다. 완벽하게 하늘로 지은 옷과, 태양으로 지은 옷이 찬란하게도 반짝이고 있었으니까요. 저렇게 청명하고, 부드럽고, 겹겹이 얇은 천으로 부드러운 선을 표현 해낸, 아침의 맑은 하늘을 표현 해낸 디자이너가 누군지, 마치 태양의 그 위대함을 그대로 담아 장황하게 빛나고 있는 더 옷을 만든 이는 누군지, 왕궁에서 모셔 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 할 정도의 옷 두 벌이 제 방에 있는 것을 보며, 케일은 다짐 했습니다.

 

“최한아.”

“예.”

 

언젠가 제가 맞지 않고 싶어 주워 왔던 검은 호위 무사를 불러낸 케일은,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고, 또 그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케일은 숨을 한번 고르고, 조심스레 그것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속삭였습니다.

 

“튀자, 저 옷들 챙겨.”

“예?”

 

그가 반문하였음에도 케일은 빠른 손동작으로 싸 놓은 짐과, 별과, 하늘과, 태양의 옷을 빠르게도 챙겨 창문을 열고 최한을 보았습니다. “나 여기서 혼자 뛰어내리면 죽어.” 그렇게 말한 케일은 정말로 저를 혼자 보낼 거냐는 듯이 보았고, 최한을 결국 케일과 함께……창문 밖으로 뛰어 내렸습니다. 뭐, 어떻게든 자신이 지켜 드리면 되지 않을까, 하는 심정이었기도 할 겁니다. 그는 정말 강한 소드 마스터였으니까요.

 

 

***

 

 

작은 마을은 정말로 평화로웠습니다. 공기 좋고 물 좋은, 누가 봐도 이곳은 휴가지 같은 느낌이라서, 케일은 이곳에 별장을 세울 곳을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백작가에서 떨어져 있어 귀찮은 일이 있더라도 자신까지는 오지 않을 것 같은 지리적으로도 완벽한 이곳에 대한 호감도가 죽 올라간 케일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뭐 어떻습니까. 자신에게 쓰라고 내어준 돈들 아니겠습니까. 이왕 온 휴가라면 돈 걱정 없이 써 줘야겠다고 생각한 케일은 크게 인심 써서 최한에게 여관을 고를 기회를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돌아본 순간, 케일은 곤란한 표정의 그를 볼 수 있었습니다.

 

“최한아! 여기 있었나!”

“케일도 여기 있다는 건데!”

“그렇다는데!”

 

드래곤과, 고양이 두 마리에게 공격받고 있는 최한의 모습에 케일은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최한이랑 친근해 보이기도 했거니와, 자신 또한 아는 것 같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드래곤과 고양이와 자신이 만날 일이 무어가 있었겠습니까. 백작가에서 술이나 퍼마시던 망나니가 말입니다.

 

“어디 가던 길이었나?”

“휴가를…….”

“그렇다면 같이 놀자는 건데!”

“여기 맛있는 것도 많다는 건데.”

 

아니, 왜 멋대로 정해지는 거지, 최한의 상사이자 물주인 케일은 황당했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안된다고 하기에는 저 아이들이 너무나 신나 보여서 조금 마음이 약해졌던 케일은, 이어진 대화에 머리를 짚었습니다. 그럼 그렇지. 자신의 팔자에 무슨 평화로운 여행이었겠습니까. 부디 조용히 있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할 지경이었습니다.

 

“조금 있다 왕세자도 온다고 했다!”

“그러니 여기 얌전히 있으면 된다고 하던데!”

“그렇다던데.”

 

왕세자와는 또 어떻게 아는 관계인지 궁금했지만 현명하게도 그걸 물어 보지 않은 케일은, 고민했습니다. 저 아이들도 데리고 다녀야 하는 걸까? 하는 것을요. 이미 그들이 말하는 것만 보면 제 일행인 것 같았지만, 케일은 직감 하고 있었습니다. 저들이 끼이는 순간부터 케일에게 있어 평안한 여행이란 없다는 것을요.

그러나 웃는 모습의 붉은 고양이, 홍이 냉큼 최한에게서 멀어져 제 발치를 빙빙 돌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결국 케일은 받아 들였습니다. 별 수 있겠습니까. 동화 속 주인공 인 이상, 그는 동물들과 친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요.

 

어쨌거나, 케일은 생각 했습니다. 이곳은 좋은 곳이기는 합니다만, 그가 계속 즐기며 놀기에는 ‘왕세자’ 전하께서 이곳에 오기 때문에, 이곳이 잠시간 시끌벅적 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그 평화로운 휴가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요. 이곳에 머무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는 정 반대의 흐름이기 때문에 케일은 지금 당장 짐을 다시 싸기로 결정했습니다. 여기만 여행지는 아니기 때문이고, 오기 전에 떠나야만 더 편하게 떠날 수 있음을 직감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지만 이루어 질 수 없었습니다. 그날 저녁, 짐을 싸서 다음날 출발하기로 마음먹은 케일이 이 마을의 영주에게 초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붉은 머리의 망나니, 가 돌아다니니, 그 방패 공자가 우리의 마을에! 하고 덥썩 초대 한 탓이었는데, 이에 케일은 조금 의문이 들었습니다. ‘방패 공자’ 가 누구길래 자신을 초대한 것이며, 왜 아니라는 말에도 오히려 농담도 잘한다는 말을 들은 것인지. 케일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케일은 이 마을을 어서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은 아주 충만하다 못해 넘쳐흘렀지만, 나이가 지긋하고, 인상 좋은 영주님을 차마 무시 할 수는 없어서 케일은 결국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비록 최한이 곁에서 가기 싫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으나, 오늘 처음 만났으면서 몇 년간 함께 해온 것처럼 구는 아이들이 맛있는 게 있냐고 묻는 것은 무시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별이 앉은 밤하늘에 걸맞게, 케일은 별이 수놓아진 정장을 입었습니다. 애초에 급하게 나온 터라 가지고 온 옷 중 가장 예의는 차리나 수수하다고 생각 되었던 옷이었고, 그는 이럴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화려하게 만들어 달라고 하지나 말걸, 하고 생각 했습니다. 그 정도로 그 옷은 모든 이들의 이목을 끄는 아름다운 옷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혹여나 해서,

정말로 혹여나,

아주, 혹시나, 해서 몰래 잠입했던,

왕세자,

 

알베르의 시선을 끌 만큼이요.

 

물론 케일은 몰랐습니다. 알아서 곁에서 투명화 해서 들어온 드래곤이 “어, 저기 왕세자 왔다, 약한 인간아!“ 하고 속삭였을 때, 그는 당장 뒤돌아 나가고자 했으니까요. 빠르게 다가온 왕세자가 말만 걸지 않았어도, 케일은 냅다 나갔을 것입니다. 정말로요, 그는 밤하늘처럼 아름다운 별빛으로 찬란히 은하수를 만들어내며, 케일은 나가고자 하였으나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온 왕세자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해사하게 웃는 얼굴이, 아무렇지 않게 안부를 물어 오는 모습이 꼭 저와 동류임을 꼭 자랑하는 것 같아서 케일은 기분이 묘해졌습니다. 친근하게 구는 모습이, 제가 무언가를 잊고 있다는 것 같은 모습이라서, 저와 닮은 누군가, 바로 그 ‘방패 공자’의 친구셨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의 것인데 제가 잠시 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었습니다만, 케일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원래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요. 왜일까요?

 

피곤해 보였는지, 오래 잡고 있지 않겠다며 보내주는 손길에 케일은 생각 했습니다. 사실, 정말로 자신이 잊고 있다면, 그래서 지금 이들이 나를 찾아 온 것이라면? 하지만 케일은 케일이었습니다. 처음부터 헤니투스 영지에서 자라와, 지금까지의 기억이 빠짐없이 있었습니다. 하다못해 지금 제 곁에 있는 최한만 해도 직접.

 

“……어?”

 

최한을 어떻게 데려 왔더라? 그런 묘한 물음에 빠진 케일은 눈을 깜빡였습니다. 잊을 정도로 가벼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딘가 찜찜해진 기분에 케일은 그저 턱을 짚고서 고민 했습니다. 정말로, 무엇이었을까. 그런 생각을요. 어째서 자신이 생각을 못 하고 있는 것인지, 그런 고민에 빠져 들 때 즈음 제 발치를 맴도는 고양이들이 가볍게 울었습니다.

물론 말을 하는 고양이들은 묘족이라고 불러야겠죠. 분명 케일은 직감 했습니다. 이들 역시 자신이 끌어들였다는 것을요. 이 모든 것이 단 한사람 때문에 가져와진 균열이라니, 그것이 믿기지 않아 케일은 두 아이들을 안아 들고 물끄러미, 저 멀리서 왕세자가 아닌 척 이야기 하고 있는 알베르를 보았습니다. 아무래도, 대화를 조금 나누어 보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

 

 

알베르는 생각 했습니다. 저 옷은 대체 어디서 난 거지, 기가 막히게 붉은 머리에 어울리는 그 옷, 옷, 별이 박힌 것이 옷인지, 제 마음인지, 평생 이 별무리를 잊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서 알베르는 긴 한숨을 나 뱉었습니다.

 

 

***

 

 

케일은 고민했습니다. 어제 밤 영주에게도 그렇고, 혹시 이 붉은 머리카락 때문에 착각 받는 것은 아닐까, 하고요. 그래서 라온이라는 드래곤에게 부탁하여 머리색을 바꾸었습니다. 꼭 당나귀 가죽 색 같은 칙칙한 회갈색임에도 잘 어울리는 것은 아무래도 그가 케일이기 때문일 지도 모릅니다. 케일은 고민했습니다. 이대로 도련님 같은 모습 보다는, 기왕이면 머리색을 바꾼 겸, 옷도 갈아입고, 그렇게 해서 알베르를 만나러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선도 좀 덜 끌고, 할 테니까요.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케일은 불편한 옷들을 다 집어 던지고서-최한이 기겁하든 말든-기어코 마을에서 사온 옷까지 걸치고서야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어쨌거나 장식이 많으면 움직이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많이 움직여야 하는 케일은 그것이 당연히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곱게 빗어 넘겼던 머리카락을 가볍게 풀어 질끈 아무 끈으로 묶고, 그러고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왕세자는 테라스에 앉아 있었고, 케일은 겁도 없이 드래곤과 묘족 아이들, 최한을 불러 일렀습니다. 가서 대화를 하고 싶으니 이야기를 전해 달라고. 그리고 금세 돌아온 답은 기다리고 있겠다는 답이었습니다. 그래서 케일은, 잠시 고민 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혹은 왜 찾아가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지 정리하기 위함도 아니었고, 그 어떠한 별다른 이유 없이, 그저 뜸을 들이기 위해서, 케일은 잠시 고민했습니다.

 

“가명은,”

“네?”

“잭이 좋겠어.”

 

무얼 그리 열심히 고민하시나, 고민했던 최한은 어쩐지 맥이 탁, 불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이거 즐기고 계신 것 아닐까, 역시 아무것도 모르시니 이렇게도 즐길 수 있으시구나, 하는 마음에, 또 죄송해지기도 했습니다. 항상 힘들어 보이시던 건 이런 평화를 바라셨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 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너무도 당연하게, 예상 했듯이 케일은 딱히 별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자신이 제법 유명한 인물인 것 같으니, 눈에 띄면 불편하겠구나 싶어졌을 뿐이었고, 그래서 케일은 대충 귀찮으니 이름도, 외관도 바꿔 본 것이었습니다.

 

“왔군.”

“왔습니다.”

 

상큼하게도 말한 케일이 냉큼 앞자리에 앉자, 알베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라보면서도, 종업원을 불러 달큰한 케이크 하나를 더 시켜 주었습니다. 뭐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건지 감은 잡히지만은, 어쨌거나 원하는 이야기를 이끌어 내고자 하니 뇌물을 먹이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우아하게도 포크를 집어든 케일은 얌전히 고개를 기울였습니다. 내 취향은 어떻게 아시는 거지,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뭐, 어쨌거나 자신이 “모르는” 일에 포함 된 것이겠죠,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쨌거나 폭신한 한입을 오물거리며 케일은 눈을 깜빡였습니다.

 

“케일 공자.”

“잭이요.”

“잭?”

“잭.”

 

그 순간 알베르에게 스쳐 지나간 표정이란, 분명 무슨 일을 또 꾸미고 있냐는 흥미 진한 표정이라서, 케일은 씩 웃었습니다. 무언지는 몰라도, 그가 알고 있는 ‘케일’ 역시도 동류라는 생각이 강했겠구나, 하는 생각 이었습니다. 또한 서로를 가장 달가워하면서도, 가장 달가워하지 않을 존재였을 것이란 것도요. 그래서 잭은 고민하며 손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살살 구슬려야 할지, 그는 천천히 고민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자네는 어디까지 기억 하고 있지?”

 

알베르의 그 말만 아니었다면요. ‘기억’ 이라니, 분명 제가 무어를 잊어버리고 있다는 양, 정말로 최한 과의 기억을 잊은 것이 필연이었다는 듯 이야기 하는 모습에, 잭은 입꼬리를 비죽 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답을 알고 있는 사람, 자신이 딱 원하던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어디까지 이야기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가능한 모든 것, 이라고 하면 믿을 텐가.”

“직설 적으로요?”

“원한다면.”

 

절대 원하는 답을 곱게는 얻어 낼 수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답이었기에 잭은 그저 웃었습니다. 원하는 답을 주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살살 구슬려 얻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잭의 기분을 알아차린 것인지, 뒤에서 조금 움찔, 하는 최한의 기척이 느껴졌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질문 해볼까요. 먼저, 저와는 무슨 사이이셨습니까?”

“궁금한 이유는?”

“그에 맞게 대접 해 드리려고요.”

 

무어가 잘못 건드렸을까, 누가 봐도 묘한 표정에 케일은 손을 저도 모르게 모으고 말았습니다. 어라? 분명히, 분명히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의식적으로도 이렇게 미안해질 만큼이나, 이것만큼은 꼭 기억해야하는 그런……그런 것을 잊은 기분에……잭은, 숨을 한번 들이켰습니다.

 

“첫눈에 반한 사이지.”

“어떤 면에 있어서 입니까?”

“그런 걸 따지지 않을 만큼.”

 

가볍게 웃는 웃음이 이어졌습니다. 농담인가, 싶을 정도로 가벼운 웃음소리라서, 잭은 순간 의아해지기 시작하고……, 아, 그래요, 어떤 감정이든 상관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거예요.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를 찾아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필요하다고 하면 믿어 줄 텐가?”

“왜 필요 하십니까?”

 

놀랍게도 잭은 이 문장을 입술위에 얹기도 전에 답을 알고 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는 분명 자신과 같은 이유 일겁니다. 그 이상한 결과에 잭은 두통이 찾아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기분만입니다. 전혀 아프지는 않았습니다. 이마를 짚고서 잭은 앞을 보았습니다. 당황하는 표정이 볼만하다고 생각 하는 그 순간에도, 잭은, 케일은, 잭은, 무언가 벗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무엇을?

 

“케일, 듣고 있나?”

“……예.”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기억 하지 못하는 건, …….”

 

솔직히 말해서, 잭은 너무 갑작스러웠습니다. 이 상황도, 이 모든 것도요. 분명 처음은 약간의 호승심, 조금의 장난, 혹은 비현실적인 것에 대한 반항심, 따위로 이곳에 왔건만, 왜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휘말리고 있는 것인지. 손 안에서 굴러지지 않는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아니었으나, 다만 당혹스러웠습니다. 대체 왜 이러는 것인지.

누군가에게 휘말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더 당황스러웠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냥 그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되는 것이나,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휘말리는 것은 정말로 어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잭은 숨을 한번 들이 쉬기로 했으나, 닥쳐오는 것은 도리어 더 묘한 기분이었습니다.

 

“케일,”

“잠시만요.”

“케일, 눈 뜨게, 나를 봐.”

 

지나치게 무겁습니다. 무거운 게 눈이었던가요? 아닌 것 같은데. 케일은 숨을 한번 들이켰습니다. 갑자기? 이 사람으로 인해서요? 잭은 이를 악물고 비틀거리며 일어났습니다. 요정들의 목소리가 아우성치는데 조금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게 언제부터 들렸던가요, 잭? 정말로 요정이기는 했던 걸까요? 잭, 들어봐요,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었던가요?

케일이 당신이긴 한 걸까요? 최한이 당신의 호위였던가요? 언제부터? 왜 다른 이들은 다 기억 하면서, 당신이 곁에 두어 살리고자 하는 이들은 잊은 건가요? 왜 오늘에서야 들어와야 하는 왕세자의 마차, 혹은 그것들이 왜 아직도 들어오지 않고, 왕세자는 이곳에 앉아 있나요? 당신이 사랑했던 이는 저렇게 금발을 찬란하게 원래도 빛내고 있던가요?

 

“시끄, 러워.”

“케일? 어디 안 좋은가? 케일? 눈을 떠! 의원을 불러, 어서!”

 

잭, 기억 해내요, 당신이 이곳에 있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당신은 무엇을 지키고자 했었나요? 생각해보면 그랬어요, 애초에 그 연미복들이 어째서 며칠 만에 완성 될 수 있었는지. 그것이 가능한 것은 단 한 가지 가능성뿐이었어요. 당신을 잘 따르던 아이들마저 지워버릴 순 없잖아요. 그렇죠, 잭? 자, 그럼 이제 숨을 들이키고,

 

“빌어먹을.”

 

누가 네 말 대로 한다는 거야. 케일은 입을 꾹 다물고 앞으로 노려보았다. 지나치게 당황한 얼굴이 다른 무표정한 이들과는 달랐다. 알베르의 당황한 얼굴을 향해 손을 뻗어 그 턱을 부드럽게도 감싸고서 케일은 겨우 입을 열어내었다.

 

“전하.”

“케일, 자네, 상태가.”

“기억해 냈어요.”

“……무엇을.”

“첫눈에 반하기는, 거짓말을 해도, 정도껏 하셔야죠.”

“하필 기억 해내도 그걸 먼저.”

“그러게, 말을 왜 그렇게……하세요.”

 

지끈 울리기 시작하는 머리가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케일은 기어코 머리를 짚고서 끙끙 앓으며 몸을 일으켰다. “젠장.”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에 비틀 거리며 숨을 한번 들이마신 케일은 눈을 깜빡였다. 이대로 일어나면 너무 쉽게 흘러가지 않나, 하는 한숨을 조금 내뱉고서 그는 주먹을 두어번 쥐었다 펼쳤다.

 

“아 골 울려. 원래 이거……동화 같은데. 완전 섞여 버렸네요.”

“동화? 이런 동화가 있었나?”

“당나귀 가죽이라고, 있었는데……어쩐지 갈색으로 염색하고 싶더라니…….”

“이 머리색도 이유가 이었던 거군.”

“그거 알아요? 잭도 당나귀 에게 붙여주는 이름이에요.”

 

한숨을 길게 내 쉬고서는 케일은 다시 이마를 짚었다.

 

“그런데, 어찌 동화대로 이루어진 모양인데…….”

“동화가 어떻게 끝나나?”

“뭐 동화가 항상 그렇죠, 주인공이 다른 주인공과 연인이 되면…….”

“자네도 나에게 반했나?”

“……아.”

 

드물게 낭패한 표정을 지으며 케일은 주춤했다. 아니, 왜 이야기가 그렇게 이어지지 싶으면서도, 아니지는 않은 게, 정확히는, 기억이 떠올라서 다시금 반했다가,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케일은, 분하게도 이미 인정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에 좌절했다.

 

“이럴 때는 모른 척 해주는 겁니다.”

“언젠가 자네 스스로 알아차리는 것 보다는 덜 민망하지 않겠나.”

 

낮은 웃음소리에 케일은 그저 혀를 찼다. 하여튼,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안 봐주고 비집고 오지. 그 묘한 분함에 어깨를 작게, 한번 파르르 떤 케일은 다시 붉게 타오르는 제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고서 한숨을 내 쉬었다. 그와 동시에 새하얀, 붉은 자수가 촘촘히 놓인 태양과도 같은 옷이 손끝에서부터 감겨들기 시작했고, 케일은 낮은 숨을 내 뱉었다. 나가지 않으려고 하니 기어코 쫓아 보내려는 모양이군.

 

“전하.”

“그래.”

“밖에서 얌전히 기다려요. 금방 나갈 테니까.”

“왕족을 이렇게 배웅 하는 이는 자네 뿐 일테지.”

“그러나 제 연인 아닙니까,”

 

“얌전히 기다리세요.”,“상 줄텐가?” 코웃음으로 답한 케일이 들쩍지근한 크림이 묻은 입술을 부벼 주었다. “됐죠? 나가서 또 해 줄 테니 얌전히 기다려요.” 그러고 무슨 답을 받았더라, 분명……, 분명 헛웃음과 동시에 정말 대단하다고 소리를 들었던지, 혹은 돌아버리겠다는 답을 들었는지. 먹먹한 귀를 한번 털어내고서 케일은 웃었다. 자, 이제 금발의 그 대신, 다른, 더 사랑하는 이를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케일은,

케일은.

눈을 뜨고서,

숨을 들이켰다.

 

 

 

“……일단 양치 좀 하고 와도 되나요?”

“돌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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