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나라의 라온미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인간, 재미있는 이야기가 듣고 싶다! "
아침부터 라온은 신이 나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간, 그리고 온, 홍과 함께 소풍을 가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케일은 전날 저녁부터 이어진 세 아이의 조름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심지어 깨우기 전에 일어나 무사히 아침 테이블에 앉기까지 했다. 역시 우리 약한 인간은 착하다! 응, 착하다는데! 그는 제 말에 맞장구를 치는 홍과 신나게 재잘거리면서도 케일을 힐끗 바라보았다. 기분 좋게 골골 소리를 내는 온을 쓰다듬는 무심한 손길이 다정하게만 보였다. 일단 밥 먹고. 그래야 나가지. 라온은 우리 약한 인간을 따라 고기를 콕 찍어 입에 넣었다.
소풍 장소는 멀리 갈 것 없이 헤니투스 가문의 후원으로 정해졌다. 우리 집 저택 예쁘다! 그렇다는데! 한 팔에는 돗자리를 끼고 다른 팔에는 도시락 바구니를 건 케일이 작게 하품을 했다. 인간, 졸린건가? 계속 자면 더 약해진다! 인간은 운동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런거 아니야. 그냥 나른해서. 홍을 따라가다 멈춘 라온이 고개를 갸웃하곤 다시 날개를 파닥였다. 그 뒤를 온이 유연한 걸음으로 따랐다. 곧 세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돗자리를 펴고 한 쪽에 바구니를 내려놓은 케일이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그런 그를 따라 뛰어온 세 아이가 반짝이는 눈을 빛냈다. 뜬금없이 던져진 말에 케일이 조금 미간을 좁혔다. 마치 귀찮은 문제를 직면했을 때와 같은 표정에 가장 먼저 말을 꺼냈던 라온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 ... 재미있는 이야기? "
" 책에서 봤는데! "
" 소풍에선 동화책을 읽어달라 하는거랬다! "
" 듣고 싶은데. "
대체 그런건 어디서 듣고 온거야. 끙, 앓는 소리를 낸 케일이 머리 속에서 그럴듯한 이야기를 떠올려보던 때. 흉터투성이의 거친 손이 라온을 안아 올렸다.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앳된 톤의 목소리가 차분한 빛을 띠고 울렸다. 쑥 높아진 시야에 눈만 꿈벅이던 라온은 휙 고개를 돌렸다. 온순한 표정, 작게 띄워진 미소. 아는 사람이었다. 함박 웃음을 지었다. 최한이다! 좋은 오후야, 라온. 온이랑 홍도. 케일의 손이 돗자리의 빈 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이리 와서 앉아. 네, 케일님. 자리에 앉는 최한의 무릎에 몸을 말고 자리를 잡은 라온은 만족스레 가르랑거렸다. 그 위로 일상적인 이야기가 오갔다. 날이 뜨거운데, 뭘 하고 계셨습니까?
“애들 놀아주고 있었지. 이야기를 해달라는데, 난 기억나는게 없어서. 네가 해줘라. 최한.”
귀찮은 듯 투덜거리는 케일의 말에 최한이 작게 미소 지었다. 저도 어릴 때 들은 것 몇 개 밖에 기억나는게 없어서 어떨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괜찮아, 얘들아? 괜찮다는데! 나도 괜찮다, 최한아! 곧장 튀어나온 대답에 다시 웃은 소년이 입을 열었다. 이건 라온이 좋아할 것 같은 이야기야.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세계로 빠진 앨리스라는 아이의 이야기인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투명해지는 웃는 얼굴의 고양이, 미친 모자장수, 사악한 하트 여왕, 늘 바쁜 시계 토끼, 갑자기 그 세계에 뚝 떨어진 파란 원피스의 앨리스가 라온의 머리 속에서 살아 움직였다.
그날 밤, 라온은 아주아주 끔찍한 악몽을 꾸었다. 우리 가족"인 온, 홍, 강한 최한, 착한 메리, 이상하게 웃는 왕세자, 금용, 그 무엇보다도 우리 약한 인간이 없는 세상에 갑자기 뚝 떨어지는 꿈이었다. 그곳에는 라온을 앨리스라고 부르는 이상한 토끼와 끝없이 티타임을 가지는 맛이 간 모자장수, 뜻 모를 이야기만 늘어놓는 고양이, 그리고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 여왕이 있었다. 그 누구도 라온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고, 라온의 이야기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 사이에서 위대한 용 라온 미르는 외로웠다. 새로운 세계를 보는 것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우리 약한 인간이 보고싶다. 마구마구 소리를 지르는 이상한 여왕을 본 순간 잠에서 깬 검은 용은 그렇게 생각했다. 꿈에서 빠져나와 돌아온 라온 미르의 세계는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곤히 잠든 은빛과 붉은 빛의 고양이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우리 약한 인간, 케일이 보였다. 라온은 케일의 옆구리를 파고들어 몸을 말고 누웠다. 왜 그래, 라온…. 잠에 푹 절여진 듯 가라앉은 케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위대한 나는 악몽 같은거 안꾼다. 훌쩍이며 내뱉는 라온의 목소리에 이불에 폭 파묻혀있던 몸이 쑥 들렸다. 그새 상체를 세워 앉은 케일이 라온을 제 품으로 끌어온 것이었다.
“악몽을 꿨어? …무슨 꿈이었는데?”
“…우리 집이 없었다. 이상한 세상이었다! 나는 라온 미르인데, 앨리스라고 부르고….”
훌쩍이며 더듬더듬 내뱉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케일은 이야기가 끝날 무렵 라온을 제 옆에 뉘이며 도로 누웠다. 몸을 조금 돌려 아이를 제 품에 안고 나지막히 속삭였다. 들어봐, 라온. 계속 바쁘게 뛰어다니는 토끼 말이야, 꼭 홍을 닮지 않았어? …그치만 홍은 묘족이다, 인간. 꿈 속인데 묘족이 토끼가 될 수도 있지. 맛이 간 모자 장수는 클로페 같네. …걔만큼 맛이 간 것 같긴 했다. 그리고, …그리고 마구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여왕은 꼭, 그 하얀 별을 닮은 것 같다. 그렇네. 그 외에도 네가 만나지 못한 사람들 중에는 온도, 최한도, 론도, 비크로스도 있을거야. 에르하벤님이나, 알베르 왕세자 저하도. 약한 인간도 있나? 물론 있겠지. 너희가 있는데. 무심한 듯 당연하게 건네지는 말이 좋아서 라온은 헤헤 웃으며 케일의 품을 파고들었다. 아직도 무서워? 아니다! 걔네들은 이상하지만 우리가 더 위대하다!”
케일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러니까 무서워할 것 없어. 그 담담한 목소리에 되려 안도가 되어서, 어린 검은 용은 악몽에서 막 깨어났을 때의 두려움은 잊고 다시금 평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새로운 꿈을 꾸었다. 그 이상한 세상에서 헤니투스 저택과 짱돌 저택에 있는 우리 가족들과 만나 나쁜 하얀 별 여왕을 무지르는 꿈이었다. 아무도 그를 앨리스라고 부르지 않았다. 라온, 하고 불러오는 목소리가 좋았다. 곁을, 뒤를, 앞을 지켜오는 든든한 존재감이 기뻤다. 라온 미르는 이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저 놈들의 목을 베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하얀 별 여왕에게 어린 용이 당당하게 소리쳤다.
“아무도 네 말을 듣지 않는다, 하얀 별아! 너는 나쁜 악당이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더 강하다! 라온 미르의 외침의 뒤에 케일의 웃음소리가 따라붙었다. 응? 우리 약한 인간이 웃고 있나? 내 말이 좋았나보다! 작은 용은 소중한 가족을 찾아 고개를 휙휙 돌렸다. 어느새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순간 덜컥 겁이 난 그가 다시 케일을 부르려는 차,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아주 다정하고 따스한 목소리였다.
“일어나야지, 라온.”
“맞다는데!”
“벌써 해가 중천에 떴다는데.”
케일이다! 그리고 온이랑 홍도 있다! 어제 소풍을 다녀왔다더니 피곤했나봅니다, 도련님. 그래도 애 밥은 먹여야지. 두런두런, 론과 약한 인간이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나도, 나도 이야기 하고싶다! 라온은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은 더 이상 이상한 세계가 아닌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헤니투스 가문, 케일의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양 옆으로 고개를 내민 고양이 상태의 온, 홍과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있는 케일이 보였다. 그 옆으로 순하게 웃고있는 최한과 다정한 얼굴의 론 역시 있었다. 일어났네. 투박하게 자신을 쓰다듬는 손길에 눈을 껌벅이던 라온 미르는 이어진 케일의 말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얼른 안일어나면 내가 스테이크 다 먹는다. 안된다! 나도 비크로스의 고기 먹고 싶다! 케일을 따라 나가려던 라온이 방을 문득 돌아보았다. 이상한 세계가 아닌 우리 집이었다. 우리 집. 나는 역시 우리 집이 제일 좋다! 그래도 다시 꾼 꿈은 재밌었으니까, 밥을 먹고 나면 약한 인간에게도 꿈 이야기를 해줘야겠다.
“라온, 밥 안먹어?”
“아니다, 지금 간다!”
날개를 파닥이는 라온마저 빠져나간 방에는 따스한 햇살만이 쭉 남아 온기를 전하고 있었다. 세 아이와 한 사람이 식사를 마치고 긴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