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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맑다. 그는 리라의 줄을 만지작대며 음이 원하는 대로 나는지를 점검했다. 오랜 비 때문이었나, 얼마 쉬지 않았음에도 줄을 튕기는 감각이 다소 생경했다. 다행히 습기 머금지 않은 줄은 멀쩡히 소리냈다. 그는 의자의 팔걸이에 습관적으로 팔을 얹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가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언뜻 들린 것 같았다.

 

아무 것도 깔리지 않은 돌바닥은 신발을 신지 않고 밟기에는 썩 좋지 못했다. 그는 느낀 불편함을 가볍게 털어내고 밖으로 나섰다. 이상하게 온갖 것들이 새로웠다.

 

밖은 조금은 서늘했고, 조금은 화끈거렸다.

 

사랑하는 에우리디케, 들녘은 정말로 그가 있어서 아름다운 것 같았다. 정오를 지나 기운 해는 황금빛이다. 바람이 풀냄새를 싣고 밀려왔다. 이렇게 한적한평화로움이 얼마 만이었지, 그가 회고하려던 찰나에 다정한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부른다. ■■.

 

길고 흰 키톤 자락이 나부꼈다. 상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색 답게 그는 순간적으로 경탄을 금치 못한다. 긴 금발이 바람에 휘감겨올라 물결치는 것이, 오후의 빛과 뒤섞여 불타는 것처럼 찬란하다.

 

역광에 붉게 가려진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그는 그 아름다운 청년의 홍안을 알았다. 그를 바라보는 상대의 입매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것 같았다. 아폴론 신마저 사랑에 빠졌다는 금발의 아도니스가 저러하였을까.

 

그는 기쁘게 상대에게로 달음박질친다.

 

 

"천천히 와도 괜찮은데, 그러다 다치면 어떡하나."

 

 

그는 상대를 끌어안고서 웃었다. 설마 이 정도로 그럴까, 괜찮으니까 됐어요. 그래도. 그는 제 걱정을 하는 사랑스런 얼굴에 입맞춤한다.

 

유난한 날이다. 마치 행복하기만 한 이야기처럼.

 

 

 

____

 

 

 

그는 연인을 끌어안은 채로 몸을 뒤챘다. 침대는 조금 좁고, 삐그덕댔다. 이러면 애들이 올라오기 힘들 텐데. 더 나은 것으로 바꿀 필요가 있어 보였다.

 

.... 그는 잠시 멈칫했다. 그동안 잘 써온 것을 바꿀 필요가 있나? 아니, 왜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지? 침대는 둘이 누우면 꼭 맞았다. 비록 살갗을 붙이고 누워야 한다지만, 그마저도 좋은데. 그는 달빛에 뺨이 희게 물든 연인을 내려다보았다. 고른 숨소리가 편안했다. 상대의 약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능숙히 모아 넘겨 정리했다. 손끝에 머리칼이 부드럽게 감긴다.

분명 익숙한 행위였다. 그러나 무언가 이상한 것만 같았다.

 

그는 이전에 느껴본 적 없는 감각에 불안을 느꼈다. 기묘한 불안감에 휩싸인 얼굴은 살아나기 전의 갈라테이아처럼 희게 굳은 낯이었다. 아, ■■■. 분명 모든 것이 그대로였을 텐데도 괴리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

 

 

그가 느끼는 감각이 전염되기라도 한 듯 상대는 잠에 가물거리는 채로 이름을 부른다. 뻗어진 팔이 목을 두른다. 드리아스 특유의 서늘하고 온화한 체온이 맞닿은 피부를 타고 옮는다. 그는 목에 팔이 감겨 이불 속으로 미끄러져들어가면서 상념의 이유를 생각했다.

 

 

"...그냥... 고양이를 기르면 어떨까 해서요."

 

 

그는 머리속에서 뒤섞인 것들을 아무렇게나 꺼내 늘어놓으며 상대를 토닥였다. 상대는 그를 당겨안은 채로 그제야 편안하게 잠든다. 고양이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갰지. 그래, 그가 갑자기 침대를 바꾸고 싶어진 이유는 고양이를 기르고 싶어져서이다. 그는 옆에 누운 이의 숨소리를 들으며 잠든다. 고양이를 기르고 싶어한 적은 한번도 없어.

 

 

 

____

 

 

 

꿈은 없었다. 꿨다면 기억하지 못할 리 없을 텐데.

 

 

 

____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에 가보지 않겠나. 그는 당연하게도 그 제안에 응했다. 에우리디케는 그를 이끌고 걷는다. 그는 꼭 누군가가 써내린 활자 위를 걷는 마냥 모든 것이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뻑적지근하다. 작가가 억지로 이끌어가는 이야기처럼 엉망이야.

 

상황, 행동, 말, 서술. 그들을 감싸고 지나가는 바람 한 점 마저도 낮설었다.

 

우리가 정말로 이 숲을 거닐었었나, 다프네와도 같이 숲을 살아가던 너를 인간들 사이로 내가 끌어낸 것이 맞아?

 

우리의 첫 만남은 이곳이 아니다. 그는 기억과 일치하지는 않는 확신을 가졌다. 바닥에 깔린 대리석, 부드러운 카펫, 벽면의 금촛대, 담소를 나누는... 아니, 제각기의 이해득실을 위해 웃는 사람들과 네 머리 위에서 빛나는 샹들리에. 이렇게 고요하지도, 신화같지도 않으며, 단지 야망이 들끓고, 정적을 밀어내기 위한 보이지 않는 전쟁터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곳에서 네가 동류임을 알았지.

 

그는 잠시 허리 아래에서 흔들리는 길고 아름다운 금발을 응시했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그 머리칼을. 님프의 그것은 꼭 명화의 한 장면을 그려놓은 듯 했으나 그는, 더이상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팔을 뻗어 상대를 자신을 향해 돌아서도록 끌어당겼다.

 

 

"■■■, 나를 봐."

 

 

마주친 눈은 동류의 그것이라기엔 순수했고, 정적이었으며, 아이 같은 천진함이 남아 있었다. 아, 네가 만약에 이곳에 태어났더라면 이렇게 고통이라곤 느껴본 적 없는 눈이었을까. 그러나 그는 이기적이게도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약간은 허탈하게 웃었다. 이렇게 해답이 옆에 있었군. 암갈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잠시의 꿈을 꾼 듯했다. 위화감을 느껴도 금세 흐름에 파묻혀버리는 것이 그랬다. 꿈에서 깨려면 자각하는 게 먼저겠지, 아직도 명쾌하게 깨어나지 않은 정신을 기록자의 능력이 헤집어 기억을 끄집어올렸다. 잠들기 전의 찰나마저도 흝어낼 수 있는 것이 이 눈이다.

 

태엽을 되감듯 기억의 필름이 빠르게 영사기에 감긴다. 시야가 가물댔다.

 

 

 

____

 

 

 

"케일, 그 책 재미있나?"

 

 

뜬금없는 물음에 케일은 부러 일반인들처럼 느리게 팔랑대며 넘기던 책장을 덮었다. 이미 한번 다 읽었던 내용이라 별 감흥은 없었다. 다만 지구에서도 신화로 읽혀졌던 고사가 이 곳에서도 있다는 것이 신기했을 뿐이지, 별달리 특이할 것은 없었다.

 

 

"글쎄요, 읽어보시겠어요?"

 

 

알베르는 마지막 서류에 서명을 하고 책상에 내려놓고는 자연스러운 걸음걸이로 걸어온다. 케일이 편하게 앉아있던 소파에 앉아 책을 건네받자마자 펼쳤다. 케일이 한참이나 뒤적이던 글이 궁금한 듯 했다.

 

 

"거 참, 별 거에 다 관심을 가지십니다."

 

"뭐... 가끔은 괜찮잖아?"

 

 

네가 읽던 거고, 생략된 뒷말을 읽어낸 케일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시던가요.

 

 

 

____

 

 

 

그는, 아니 케일 헤니투스는 좆같음을 느끼며 온전해진 기억 속에서 빠져나왔다. 아 그러니까 또 책빙의시라고요? 김록수 적 읽은 판타지 소설에서도 이따위 건 나오지 않았던 것 같은데. 심지어 혼자였으면 나을 걸 괜히 왕세자에게까지 권해서 일을 크게 벌렸다. 지구에 있던 이야기가 로운에도 있을 때 이상함을 느꼈어야 하는 건데. 이 정도면 지구의 책에 뭔가 있다고 봐야하는 게 맞지 않나?

 

어쨌거나, 상대를 깨워야 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로서는 할 수 았는 것이 없었으니까. 이 빌어먹을 이야기는 영웅의 탄생보다 악질적인 것이, 툭하면 로맨스 주인공다운 낭만에 정신을 밀어 자빠뜨리려 들었다. 소설에 몰입이야 잘하는 편이었지만, 이건 좀 아니었다. 청승 떨기나 좋지 당장 해결책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도움이 되지 못하니까.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 하기야 절망 속에서 나아가는 이야기보다는 사랑을 비극으로 이끌려는 이야기가 더 악질적인 것은 당연한지도 몰랐다. 아름다움으로 포장된 슬픔들. 그는 당연하게도 해피엔딩이 좋았다.

 

 

"알베르, 나를 봐."

 

 

일어나, 알베르. 알베르. 케일은 상대와 눈을 맞추고 이름을 거듭 불렀다. 그래, 나쁜 마법을 풀려면 이름을 알아야 한다던가. 신화 속에 들어온 것부터 이미 충분히 동화였으니 미신에 기대봐도 좋겠지.

 

 

"......케일?"

 

 

다행히, 알베르는 케일의 부름에 반응했다. 케일은 익숙한 눈동자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 당연히 이래야지. 그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알베르를 끌어안았다. 알베르는 멍한 상태로도 익숙하게 마주 안았다. 여전히 낮선 체온이었으나, 본질이 달라진 것만으로 안정감이 들었다.

 

 

"아니 그러니까, 이게...."

 

"책 기억하시죠? 거기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해결책을 찾아야 해요."

 

 

케일은 책빙의 2회차답게 빠르게 상황을 정리해버렸다. 알베르는 좀 유감스러운 듯 보였지만, 어쨌거나 익숙한 불경 아닌가?

 

 

 

____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원작에서 찾아올 죽음을 피하는 것이었다. 에우리디케는 빌어먹을 스토커를 피하려다 수풀 속의 뱀을 보지 못하고 물려 죽는다. 그렇다면?

 

 

"알베르, 그 몸으로 검 휘두를 수 있겠어요?"

 

"뭐?"

 

"다행히 창고에 검이 있긴 하더라고요. 오르페우스라 리라 밀고는 없는 줄 알았는데 이 시대의 필수품 쯤 되는가봐요."

 

"돌겠네."

 

 

알베르는 머리가 아플 상황에서도 훌륭한 파트너답게 대충 가늠해보나 싶더니 대답을 내놓았다. 가능은 할 것 같군 그래. 원래 몸과 근육 여부는 똑같아. 대신 다크엘프로서의 힘은 쓰지 못하겠지만. 케일은 흡족연한 대답에 한번 해봤던 대로 원작을 비틀 계획을 세웠다.

 

 

"알베르, 일단 살아보죠."

 

 

당연하게도 동류인 알베르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었다. 그놈을 패서 쫒아내라는 소리군, 괜히 위험하게 뱀이 있을만한 데 가지 말고.

 

 

 

____

 

 

 

와장창- 케일은 리라를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던져진 리라가집기를 넘어뜨리며 그 위의 약한 물건들이 깨져나갔다.

 

결과만 말하자면 실패했다. 스토커 놈을 쫒아내는 데는 성공했고, 당연하게도 둘은 그것이 성공인 줄 알았다. 적어도 길을 걷다가 산사태가 일어나서 머리 위로 집채만한 돌덩이가 떨어지기 전까진! 마을을 걸어가면 갑자기 마차에 매인 말들이 말뛰며 달려들고, 평원을 지나면 근처에서 활쏘기를 연습하던 사람의 화살이 잘못 날아오거나, 아니면 원반이거나 그랬다.

 

그놈의 원반! 이건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지 아도니스나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다! 젠장 오르페우스인지 케일인지 분간도 못하던 시절에 비유 한번 잘못 골라 썼다고 지금 시위하는 것도 아니고. 케일은 끓어오르는 짜증에 침대에 걸터앉아 속을 식혔다.

 

게다가 몸뚱이는 그대로인데 고대의 힘은 다 없어서 도움은커녕 방해만 되었다. 따로 떨어져 있어야 할 정도의 재액에 방도를 찾기 위해 잠시 들어온 참이었다.

 

 

쾅쾅쾅-

 

 

그때였다. 누군가가 집 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알베르는 아니었다. 케일은 나쁜 직감이 문을 두드리는 것을 느꼈다.

 

 

"오르페우스! 오르페우스-! 자네 안에 있나? 큰일났네, 에우리디케가!"

 

 

아, 케일은 약간 멍하게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럴 걸 모른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이야기를 완성시키겠다는 누군가의 기묘한 집념이 그들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고, 어제까지만 해도 계속 그러한 이야기의 진행을 위한 것들이 그를 짜증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는데. 그는 마을 사람이 전하러 온 대로 알베르를 찾으러 달렸다. 갔을 때는 이미 끝나있을 것이다. 숨이 가빴다. 그럼에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알베르."

 

 

에우리디케는 이미 죽은 것 같았다. 그 곳은 공교롭게도 호숫가였다. 뱀에게 발목을 물렸다고 했다. 아킬레우스가 절명한 위치는 에우리디케에게도 똑같은 결말을 안겼다.

 

알베르, 일어나. 알베르. 알베르. 그는 나쁜 마법을 지우는 대로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케일은 몸을 낮춰 사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짜증이 일었다. 이건 짜증이었다. 그는 상대를 끌어안은 채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원하는 누군가를 노려보았다.

 

그는 이 다음의 이야기를 알았다. 오르페우스는 아르고 호의 전우들을 통해 저승의 입구를 찾아가 리라를 연주하고, 저승의 두 지배자를 감화시켜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에 불안감에 동굴 밖으로 나오자마자 뒤를 돌아보고, 아직 길을 벗어나지 못한 에우리디케는 다시 저승으로 추락한다.

 

그는 그래서, 그대로 따라해보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가 집어든 리라는 흠집 하나 없이 그대로였고, 케일은 그 점에서 또 누군가의 억지를 느꼈다. 그러나 일단 리라를 연주하는 것 말고 방법이야 있겠는가?

 

 

 

____

 

 

 

"케일, 케일. 잠시만. 케일!"

 

 

그는 부름을 무시하고 걸었다. 걸음은 거의 강박적이었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저 밑으로 집어넣어? 방법이 이 것 뿐이라고 해도 그렇게 호락호락히 내 줄 수는 없었다. 알베르.

 

 

"케일, 잠시만. 잠시만 멈춰 봐."

 

 

뒤에서 단단한 팔이 뻗어나와 그를 감쌌다. 케일, 이미 밖이야. 주변은 밝았고, 또 약간은 어슴푸레했다. 해가 떠오를 녘이든 저물 녁이든 하나는 하는 것 같았다. 귓가에 들이쉬고 내쉬는 것에 따라 뜨거운 숨결이 스친다.

 

케일, 등 뒤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약간은 지친 듯 했고, 약간은 안타까워 보였다. 체온이 느껴졌다. 원래의 그의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됐건 망자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갑자기 지독한 피로를 느꼈다. 케일. 이야기를 끝내야 해. 알잖아. 케일?

 

 

"이야기를 끝낼 방법이 그것밖에 없을 것 같아요?"

 

"모르지."

 

"만약에, 만약 이야기를 끝내도 돌아가지 못한다면 어쩌려고요."

 

이건 이야기가 종막에 거의 다다른 이후에야 치밀어오른 불안이었다. 이전에도 느끼지 못하던 불안은 아니었으나 결국에 터져나온 것은 지금이다. 죽음은 늘 최후의 방법이었다. 살아있으면 좋았다. 당연하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배웠다.

 

 

"알베르, 실수든 착오든 죽으면 끝이에요."

 

"나도 잘 알아. 너도 알잖아."

 

"그럼 다른 방법을 찾아야죠. 위험 부담을 줄입시다."

 

 

알베르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케일, 그 전에 조금만 침착해. 저는 지금 침착해요. 너는 타인의 죽음 앞에서 침착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 아냐. 진정해. 알베르는 느리게 케일을 다독였다. 이렇게 계속 걷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건 알잖아. 케일은 서서히 귓가에서 느껴지는 맥동에 맞춰 숨을 골랐다.

 

 

"이건 책이에요."

 

"적어도 그랬지."

 

"아뇨, 글이에요. 누군가가 읽는."

 

 

단호한 말에 알베르는 케일과 눈을 맞췄다. 그게 무슨 소리야? 눈동자에서는 확신이 전해져왔다. 알베르는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이해를 얻은 기분이 들었다.

 

 

"이건 누군가가 우리를 주인공으로 삼아서 원하는 이야기를 보고자 하는 거고, 책은 독자를 위해 존재해요."

 

 

케일이 어떤 말을 하려는지는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그 누군가를 만족시키는 결말을 내기만 하면 돼요."

 

"독자를 만족시키는 결말이 필요하겠군."

 

 

다음은 간단했다. 알베르는 고개를 숙였고, 케일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맞물리는 것은 순간이었다.

 

세상이 무너져내렸다.

 

 

 

____

 

 

 

"케일, 나는 알베르 크로스만으로 살거야."

 

 

케일은 잠자코 그 말을 들었다. 로운이 가장 찬란할 때 그 위에 서도록 하겠다는 약조는 가볍지 않았다. 로운이 없는, 왕세자가 아니고 다크엘프가 아닌 알베르 크로스만은 오직 그의 앞에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알았다.

 

물론 그와 함께하는 이상 단순히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는 있겠지만, 왜 그것을 위해 알베르의 야망과 책임을 버려야 한단 말인가?

 

그것이 그가 이야기를 벗어나도록 만든 동력 중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뭐, 새드엔딩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해두지.

 

세상이 무너지는 파편들 너머로 저 멀리에서 바쿠스의 광신자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리라는 옆에 팽개쳐져 있었다. 이 리라가 별자리가 되는지는 이제 알 바가 아니었다.

 

 

 

_____

 

 

 

케일은 깨어나자마자 알베르의 뺨에 키스했다. 집무실은 여전히 한낮이었고, 찻잔은 식지 않았다. 입술이 살갖과 맞부닺히며 나는 파열음은 어쩌면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닮았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는 끝났다. 그러나 케일과 알베르는 여전히 존재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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