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론 아딘은 인간으로 변한 채 자신의 신전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12지신 중 한 명인 아딘의 신전은 제국의 광장 중심에 있었다. 제국은 대대로 태양교를 섬기고 있어 아딘이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었다. 아딘은 여느 때와 같은 시찰을 나서던 도중, 나른하게 생긴 붉은 머리칼의 청년을 보았다. 그의 뒤로 검은 머리의 청년이 고양이 세 마리가 든 바구니를 품에 안고 따라가고 있었다.
'기분 나쁜 신력이군. 다른 신의 사제인가.'
아딘은 그들을 탐색하는 눈으로 바라보다 붉은 머리 청년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아.
사제 따위가 아니었군.
눈이 마주친 순간,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깨달았다. 아딘이 먼저 그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벌써 시찰을 돌고 있구나,"
"그러는 고귀하신 태양께서는 무슨 일로 지상까지 행차하셨나이까."
"내가 내 땅을 둘러보는데 무슨 문제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신경 끄시죠. 길을 잘못 들었을 뿐이니 금방 나갈 것입니다."
붉은 머리의 청년은, 사랑의 신인 에로스 케일이었다. 케일은 마주친 것이 상당히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최근 아딘의 만행을 모르는 신은 아무도 없었다. 아딘은, 본인이 잡은 피톤을 다시 제국에 나타나게 하였다. 커다란 뱀의 형상을 지닌 피톤은 사람들을 산 채로 잡아간다는 소문이 제국에 파다했다.
"도대체 피톤은 왜 풀어놓은 겁니까?"
"왜 그렇게 화를 내는가? 그저 유희일 뿐이야. 신이 유희를 즐기는 것에 이유가 있겠나."
아딘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그를 상대했다.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는지 케일의 미간이 더욱 깊게 파였다.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혹, 피톤을 이용해 신도를 늘릴 생각이라면 관두십시오. 신이랍시고 그렇게 치졸한 방법을 써서야 하겠습니까."
"치졸, 이라. 그대는 지금 신에게 그런 말이 통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난 고귀하고 유일한 태양이다. 그런 말은 나에게 통하지 않지."
더없이 더러운 웃음이었다. 하지만 후드를 쓰고 있어 케일에게만 그 얼굴이 보였다. 태양의 신이란 분께서 이렇게 더러운 빛을 뿜으시다니. 케일은 코웃음 쳤다.
"그렇습니까. 그럼 제게도 통하지 않겠군요. 최한."
"네, 케일 님."
"꺼내서 보여드리지."
케일의 뒤에 있던 검은 머리 청년은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내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이리저리 뒤지더니 이윽고 커다란 뱀의 머리를 꺼내었다.
"… 이게, 왜, 여기 있느냐."
"당신이 피톤을 풀어놓은 지 벌써 한 달입니다. 너무 많은 생명이 해를 입어서 제가 처리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가족을 잃은 슬픔에 잠겨 제 신력이 많이 쇠했습니다. 이제는 제가, 신력을 되찾을 차례이지요."
"하! 네가 하는 꼴이 예전의 나와 아주 같구나. 감히 내가 풀어놓은 피톤을 이리 만들어놓고 무사하리라 생각했는가!"
"당신이 무어라 하든, 이 일은 주신께서 제게 직접 명한 일이시니. 저는 그저 그 뜻에 따를 뿐입니다."
아딘은 혀를 찼다. 주신까지 이 일을 알고 있을 줄이야. 한 달이라는 기간이 길었나.
"피톤의 사체는 제 고위 사제가 저에게 바치는 공물이 될 것입니다. 피톤을 잡으라는 것이 제 뜻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당신이 아닌 저를 숭배하겠죠. 제 꾀에 속아 넘어간 꼴이 어떻습니까?"
"하, 기분이 더럽군. 네놈은 날 닮았구나."
"…닮았다는 말이 이렇게까지 제 귀를 더럽히다니. 저와 당신은 하나도 닮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당신보다 낫죠. 억지로 사람을 해하여 신도를 모으려는 당신과 그것을 저지하는 제가 어떻게 닮았습니까?"
케일은 상당히 기분이 더러워 보였다. 싫어하는 상대와 닮았다는 소리라니. 그것도 본인 앞에서. 케일의 기분을 읽은 듯 바구니 안에 얌전히 있던 고양이들이 야옹야옹 울었다. 케일은 한숨을 푹 쉬고는 아딘에게 말했다.
"당신과 저는, 다릅니다. 인간을 우습게 보는 당신과 닮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태양께서 이리 더러운 빛을 뿜으시니 먼저 자리를 물리겠습니다."
"누가 뭐라 하던 네놈은 날 닮았다. 활 솜씨 따위는 모르겠으나, 그 교활한 성정만큼은 날 닮았구나."
"…오늘의 말씀, 후회하게 될 겁니다."
케일은 로브 자락을 펄럭이며 뒤로 돌아갔다. 그를 따르는 고위 사제 최한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케일 님. 저 분은 태양의 신입니까."
"그래. 앞으로는 어찌 될지 모르지만, 아직은 태양의 신이시지."
케일은 한쪽 입꼬리만 끌어올려 웃었다. 바구니에 있는 고양이 세 마리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고양이들은 아딘이 있는 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쟤 이제 큰일 났다는 건데."
"케일, 엄청 싫어하는 신한테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다는 건데!"
"저 신은 곱게 못 살 거다…."
세 고양이는 다시 바구니 속으로 들어갔다. 케일은 피식 웃고는 제 신전 쪽으로 향했다.
그날이 아딘에게는, 불행의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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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딘은 지난번 케일에게 피톤을 빼앗기고 난 후, 유유자적하게 지상을 내려보며 다음 사냥감을 찾는 중이었다. 그때 강가에서 물을 뜨고 있는 한 청년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흐응….
어디에나 있는…. 아니, 아니. 잠깐만. 뭔가 잘못 본 게 틀림없어. 어디에나 있는?
척 보기에도 미색이 뛰어난 청년이었다. 반듯한 이목구비며, 잘 잡힌 근육까지. 눈이 계속 가는 청년이었다.
"잘났군."
잘 나기도, 한참. 평소라면 눈에도 안 들어올 이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이상했지만, 뭐 어떠리. 저 청년의 고운 미색이 지기 전에,
"가져볼까."
저리 고운 미색을 그저 두는 것도 아쉬우니. 내가. 평소라면 남자를 건드릴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이번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생각을 마친 아딘은 빠르게 지상으로 내려갔다. 그가 내려가는 것을 더 위쪽에서 바라보고 있는 이가 있었지만, 아딘은 눈치채지 못했다. 케일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가장 행복할 때, 가장 괴롭게 만들어주지."
케일이 웃는 것을 보며 까만 고양이가 말했다.
"케일, 사악한 웃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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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딘은 슬그머니 나무에 기대어 젊은 청년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과 옷이 아름다웠다.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가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인다니, 진정 미친 것일까. 아니, 미친 걸로 하자.
"갖고 싶네…."
아딘은 씨익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처음엔 자연스러운 게 좋겠지. 청년은 힘이 드는지 물동이를 내려놓고 허리 운동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좀 도와드릴까요?"
"아, 안녕하세요! 괜찮아요. 혼자 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말을 걸었음에도 밝게 인사해주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거기에 정중한 거절까지 당했으니, 어쩌지. 거절당했음에도 웃음이 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여행객인데 그쪽 마을이 초행이라 길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 대신 물동이를 들어드리고 싶습니다."
"알려드릴 수는 있지만, 도와주시는 것은 정말 괜찮습니다. 그런 것으로 대가를 바라진 않으니까요."
아딘의 구구절절한 말에 청년도 밝게 웃으며 말했다. 얼굴만 고운 것이 아니라, 마음도 곱구나. 아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곁에 섰다.
"마을로 가는 길은 이쪽입니다. 좀 쉬었으니 바로 출발할까요?"
"네, 그러시죠."
두 사람은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나란히 길을 걸었다. 길을 걷는 동안 두 사람은 빠른 속도로 친해져 말도 놓게 되었다. 자연스레 나이를 물어보다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청년의 이름은 발렌티노, 강의 신의 아들이었다. 미모가 평범한 인간과는 다르다 했더니, 그는 님프였다. 님프가 남성체인 것은 드문데….
"살면서 님프를 보게 될 줄은 몰랐어. 그것도 남성체 님프라니. 이번 여행에 행운이 있겠군."
"하하, 그런 말 많이 들어. 아버지께서도 그런 말을 많이 하셨는걸."
그는 근처 마을에 살며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다. 최근에는 태양이 너무 강하게 내리쬐어 마을의 강이 모두 말라버려 멀리까지 물을 떠 오는 길이라고 한다. 그의 말을 들은 아딘은 양심에 찔리는 구석이 있었지만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한 곳에 너무 머물렀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폴론 님께서 역정이 나신 걸까…. 아르테미스 님께서 아폴론 님께 노여움을 풀라 말씀드려주시길 간절히 기도드려야겠어."
"아르테미스, 님을 믿고있어?"
"그럼! 비록 남성체이지만 그분을 섬기고 있어."
순결 서약도 맺었는걸? 발렌티노는 맑게 웃으며 말했지만, 아딘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가져보려 했더니, 순결 서약이라? 순간 굳은 얼굴이 드러날 뻔했으나 가까스로 그것을 숨길 수 있었다.
"하, 하하…. 그렇구나."
"응. 님프의 수명은 인간과 달라 길다고 하니, 그동안 사람들을 보살피며 사는 것이 내 삶의 낙이야."
말을 마친 발렌티노가 가볍게 걸으며 앞장섰다. 아딘의 머릿속은 빠른 속도로 굴러가는 중이었다. 자신이 아폴론임을 밝히고 내 것이 되어라 할까. 마을의 햇빛을 줄여줄 테니 내 것이 되어라 할까. 아니면 그냥, 가져버릴까.
"…설득하는 것은 성미에 안 맞지."
"아딘?"
머리에 물동이를 인 발렌티노가 그를 돌아봤다. 하지만 뒤쪽에서 비치는 강렬한 햇빛에 손으로 눈을 가리다, 그만 물동이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물이…!"
"그깟 물에 신경 쓰지 말아라. 내가 보이지 않는 게냐."
깨진 물동이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바라보던 발렌티노가 그제야 얼굴을 들었다. 눈부신 햇살의 중심에 그가, 아딘이 서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의 정체를 안 발렌티노가 급히 무릎을 꿇었다.
"태, 태양을 뵙습니다."
"발렌티노, 강의 신 페이오스의 아들이여. 자리에서 일어나라."
아딘의 말을 들은 발렌티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눈은 미련이 남은 듯 깨진 물동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딘은 신력을 줄이고 발렌티노를 바라봤다. 그제야 조금 숨이 트인 듯 발렌티노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저 위에서 널 보고 이렇게 직접 내려왔다. 내 것이 되어라."
"예? 그게 무슨…?"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는 듯 발렌티노가 반문했다. 아딘은 그의 손을 잡아 가볍게 곁으로 이끌었다. 자연스레 그의 허리에 손을 얹고 눈을 맞추니 발렌티노가 고개를 숙였다.
"이런 의미지."
"…이러려고, 마을의 물을 모두 마르게 하셨습니까."
그건 아닌데. 아딘이 말하려는 순간 발렌티노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눈물에 굳어버린 아딘은 입을 뗄 수 없었다. 발렌티노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하, 치졸하시군요. 이런 식으로 협박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
"마을에서 아폴론 님의 소문이 좋지 않은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거기서는 왜 또. 아딘은 슬슬 머리가 아파져 오는 것을 느꼈다. 평소라면 저를 뿌리친 순간 죽여버렸을 텐데, 어째서인지 그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저 눈이 분노와 원망으로 저를 쳐다보는 것이 짜증 났다.
"그따위 눈으로, 날 쳐다보지 마라."
"…아폴론 님께서 하신 말은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더는, 저를 쫓아오지 마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발렌티노는 미련 없이 아딘에게서 등을 돌렸다. 멀어지는 그의 등을 보던 아딘은 천천히 그를 쫓아갔다. 안돼, 지금 놓치면. 아딘은 빨리 정신 차리고 그의 뒤를 쫓았다. 그는 발렌티노의 손목을 낚아챘다.
"발렌티노!"
"저는, 무리한 요구를 더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이만 물러나 주십시오."
발렌티노는 잡힌 손목을 뿌리치고 강가로 뛰어갔다. 느리게 걸어온 길을 뛰어가니 금방이었다. 강에 빠지면 아버지께서 숨겨주시지 않을까. 발렌티노는 숨을 헐떡이며 강가로 갔지만, 어느새 뒤쪽에서 아딘이 쫓아오고 있었다. 발렌티노의 이성으로는 그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아르테미스 님을 섬긴다고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발렌티노는 강에 닿을 수 있도록 열심히 뛰었다. 만만치 않은 속도였지만 아딘은 빠르게 따라왔다.
"발렌티노!"
"헉, 그만…, 그만 쫓아오십시오!"
마침내 발렌티노의 발이 강가에 닿았을 때, 그는 강에다 대고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저를 숨겨주세요! 아버지!"
하지만 강은 묵묵부답이었다. 저 밝은 태양 아래 어느 강이 흐를 수 있을까. 그래도 제 자식이건만! 발렌티노는 강가에 무릎을 꿇고 다시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저를 저 태양에 보내지 마세요, 제발!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리 끌려가게 두시는 겁니까! 차라리, 차라리 그가 저를 데려가지 못하게 만들어주십시오…. 저를 이리 저버리지 말아 주세요…!"
아르테미스 님이시여…. 그가 기도하는 소리에 응답하듯 그의 손과 발이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손가락은 나뭇가지로 변하고, 그 끝에서는 이파리가 하나둘 생겨났다. 그의 손톱 끝에서는 월계꽃이 황색의 꽃이 우아하게 피어났다. 온 몸이 뻣뻣해지는 감각에 발렌티노는 눈물을 흘렸다.
"차라리, 이렇게 되어 살아갈 수 있다면."
"안돼!"
뛰어온 아딘이 나무로 변해가는 그를 껴안았으나, 그를 멈출 수는 없었다. 발렌티노는 아름다운 나무로 변하며 아딘과 눈을 마주쳤다.
"당신 때문이야…. 난, 난…."
"난, 이렇게, 널 보낼 수 없어. 넌 오롯이, 내 것이어야 해."
광기가 어른거리는 눈을 보며 발렌티노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미쳤어."
말을 마친 발렌티노는 서서히 나무가 되었다. 마침내 얼굴까지 나무가 되었을 때, 아딘은 잡고 있던 이성마저 놓아버렸다. 강가에 오롯이 선 나무 한 그루 아래 미쳐버린 신만이 존재했다.
"하, 하하, 하하하…."
누구에게 향해야 할지 모를 분노와 풀리지 못한 욕망으로 아딘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나무로 변해버린 발렌티노에게 매달려 미친 듯이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얼마가 컸는지 강물이 흔들릴 정도였다.
"네가, 나무로 변한다고 해서, 내가 포기할 성싶으냐."
아니, 안된다. 일그러진 감정이 한가득하였다. 아딘은 나무를 부여잡고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그 순간의 그는 고귀한 신이 아닌, 한 마리의 짐승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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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미쳐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위에서 바라보는 이가 있었으니, 에로스 케일이었다.
"…알아서 파멸하는군."
"저 신, 굉장히 인간스럽다!"
신에게 인간스럽다고 하는 것은 아주 심한 욕이었지만, 케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일은 그가 파멸하기까지―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금화살과 납화살을 사용해 그를 파멸로 이끌 수 있었지만, 타이밍을 보고 있다가 놓쳐버렸다.
"애초에 운명이었던 거야. 저 신의 욕망은 채울 수 없고, 님프의 주장은 너무나 강력했기 때문에. 둘은 이어질 수 없었어."
스스로 파멸을 자초한 꼴이지. 신이라는 작자 주제에 아주 우습게 되었어. 고양이 세 마리를 무릎에 얹은 케일이 그들을 쓰다듬었다. 한 신이 파멸하는 순간을 보는 것은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바는 아직 이루지 못했으니, 좀 더 지켜봐야지. 직접적 개입이 없었으니까, 아직 '후회'라는 감정은 모를 테니. 그 감정을 배울 때까지 지켜봐야지.
높은 구름 위에서 아딘을 내려다보며 케일은 활짝 웃었다.
아딘의 불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