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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와 사령관.

w. 던전

 

창에서 들려오는 함성. 왕세자 집무실을 둘러싼 사일런트.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아는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알베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케일이 팔짱을 꼈다.

 

케일은 얼마 전 온과 홍 그리고 라온에게 읽어주었던 동화책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케일은 소파에 앉아서 론이 평균 9세들에게 읽어주는 책의 내용을 건너 들은 것이었다. 이 시대에도 아이들을 위한 동화는 존재했으니까. 한 문장마다 토를 달며 저이들끼리 시끄럽게 떠드는 목소리를 들으며 케일은 테이블 위에 놓인 책을 읽고 또 넘겼다. 활활 돌아가는 능력 덕분에 셔츠의 맨 윗단추는 풀어진 지 오래였다. 다크 엘프의 역사, 그것은 특별히 타샤에게 부탁했던 책이었다. 영웅의 탄생에서 읽지 못한 부분을 채워 넣기 위함과 앞으로의 평탄한 백수 생활을 위한 대비였다.

 

‘왕자는 자신과 똑같이 거지와 옷을 바꿔입었습니다. 한 번이라도 진흙탕에 뒹굴어 보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왕자를 보며 거지는 흔쾌히 그의 부탁을 수락했습니다.’

‘그렇게 놀기만 하면 용돈 못 받는다!’

‘막내 말이 맞는 건데!’

‘하지만 똑같이 생겼으면 걔한테 공부하게 하면 되는데!’

 

놀고 일을 안 하면 용돈을 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하며 동화의 이야기를 반박하는 라온의 목소리를 들으며 케일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지난번에도 알베르가 케일의 말투를 닮아가는 라온을 보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 생각 나버렸다. 대체재가 있다는 것,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자유일뿐더러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희망이었다. 언제 죽어버릴지도 언제 굶을지도 모르는 거지에게 왕자가 뻗는 손은 한 줄기 빛이었을 것이다. 비록 그곳이 지옥이라고 해도 그는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상황은 전혀 다르지만, 그가 김록수였을 때 팀장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던 그 날과 같이. 희망조차 남지 않은 밑바닥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거지는 왕자가 되어 왕궁에 들어가 많은 것들을 꿈꿨습니다. 왕자는 거지가 되어 빈민촌을 누볐습니다. 하지만 거지는 이내 왕궁의 모든 것들이 허울 좋은 감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로운 지하 감옥만큼이나 어둡고 족쇄 같은 삶이었습니다.’

‘…내가 알고 있던 내용이란 말이 좀 다른 것 같은데.’

‘설마요.’

 

론은 아이들의 눈높이가 아니라 자신의 눈높이에 맞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케일의 반문에도 웃으면서 다시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마 전에 들었던 왕자와 거지 이야기가 다시 떠올라 케일이 씁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보면서 그 이야기를 들어두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왕자와 옷을 바꿔입은 거지는 호화스러울 줄 알았던 궁중 생활이 감옥 같다는 것을 알고 벗어나고 싶어 했지만, 자신과 역할을 바꾼 왕자가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어 괴로웠었던지. 뒷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아 잘 떠오르지 않았다. 나중에 국새가 있는 위치를 아는 왕자가 나타나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것만 최한의 등장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김록수와 케일은 조금 다른 이야기였고 케일은 창가에 기대어 밖을 바라보고 있는 알베르를 보며 생각했다. 왕세자와 사령관 정도로 번안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이런 자기 생각을 듣고 알베르가 지을 표정은 너무나도 뻔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표정을 상상하며 케일이 피식 웃었다. 케일의 웃음소리에 알베르가 뒤를 돌아보며 케일을 바라봤다. 잔뜩 날 서 있던 표정이 풀리기 시작했다. 정해져 있는 결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주인공처럼 왜 그리도 미련한 표정을 짓는지.

 

“웃어?”

“기왕에 마지막인 거 한번 웃는 게 어떻습니까?”

 

케일의 말에 조용했던 집무실의 분위기가 더 조용해졌다. 시종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알베르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빠져나갔다. 알베르와 케일 외에 누구도 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을 로운 왕궁 시종들은 지독하리만큼 잘 알고 있었다. 왕자와 거지 이야기에서도 그런 말이 나왔다. 왕자의 매를 대신 맞아주는 시종이 있을 만큼 왕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이 있었다. 거지였다가 왕자가 된 그는 그 시종을 불쌍하게 생각했지만, 그 시종은 정작 자기 일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왕궁의 숨 막히는 이야기가 동화에 녹아 있었다.

 

‘애들한테 들려주긴 좀 그렇지 않아?’

‘애들 아닌데!’

‘누나 말이 맞는데!’

‘인간아 론이 읽어도 된다고 했다!’

 

어련하실까. 케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론과 평균 9세들에게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짓을 했다. 정작 그 이야기에 발이 묶여 있는 것은 자신이었음에도. 케일은 뚫어지라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알베르를 보며 끼고 있던 팔짱을 풀어냈다. 또 불경하다고 할 것이 너무나도 뻔해서.

 

“한걸음 물러나시는 건 어떠하신지요.”

“…그것이 저들이 제일 원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

“원하는 것을 얻게 되면 누구든 방심하게 됩니다. 이 자리가 자신의 자리라고 안주하게 될 테니까요. 저희는 그것을 노리면 됩니다, 저하.”

 

우리가 하던 방식대로. 완벽한 덫을 놓고 그 덫을 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물론 덫보다 뒤통수를 치는 쪽이 더 성질에 맞았다. 꺼내 놓은 적이 없는 것을 꺼내 놓는다면 그들은 경계를 풀어내고 새로운 것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노리는 것이었다. 케일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생각했다. 왕세자만큼이나 그들의 이목을 끌기 좋은 사령관. 로운의 사령관 케일 헤니투스가 이곳에 있었다.

 

“무슨 꿍꿍이인지 들어나 보도록 하지.”

“간단합니다. 그들은 아직 다크 엘프인 저하의 모습을 모릅니다. 그러니 그 모습으로 잠시 궁에 파견 나온 전사들과 같이 빠져나가 주십시오.”

 

알베르가 턱을 괴고 있던 손으로 관자놀이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케일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모르는 모습으로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고 왕세자가 궁을 비운 것을 알면 눈앞의 반동분자들은 더욱이 날뛸 것일 뻔했다. 잠잠해질 때까지만. 케일은 잠시 궁을 비우고 다크 엘프의 모습으로 지내 달라고 부탁했다. 왕세자가 자리를 비운다고 하더라도 왕이 치아 대신 잇몸처럼 일을 할 테니까. 그다지 신임이 가지는 않았지만, 알베르는 케일의 눈빛에 숨은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케일을 올곧이 바라보고 있었다. 케일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빼꼼 열고는 최소한의 시종만을 남기고 타샤를 불러 달라고 시종장에게 전했다.

 

“그럼 케일 너는?”

 

시종장조차 어색한 표정으로 다크 엘프인 알베르에게 옷을 건넸다. 지난번 정글 회동으로 그도 알 만큼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난리였을 것이라는 생각에 케일이 피식 웃었다. 알베르는 시종장이 채근하는 눈빛에도 케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케일은 그런 알베르를 보며 괜찮다는 웃어 보인다. 알베르가 그 웃음에 불쾌함을 표하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타샤가 잠시 들어왔다가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보고는 시종의 어깨를 밀며 문 앞에서 기다리라 이야기하며 다시 방안에 사일런트를 가동했다. 문 앞의 마법사가 얼마나 속으로 욕하고 있는지 케일에게 들릴 정도였다.

 

“저하. 저하께서 잠시 잊고 있으신 게 계시는데.”

 

알베르에게 눈을 맞추며 케일이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이내 왕세자 같은 웃음을 지으며 알베르를 보고 웃었다. 라온이 지나가는 말로 왕세자 표 웃음! 이라고 말하며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아니 용이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던 것이 생각나 알베르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 똑똑합니다.”

“말은.”

“이런 걸 꼭 제 입으로 말해야 아시겠습니까.”

“진짜 불경해.”

 

케일이 알베르가 있는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케일은 표현에 서툴렀다. 가지 말라고 말하는 것도 한번 안아달라고 말하는 것도. 알베르는 그런 케일을 묵묵히 지켜보는 편이었다. 참지 못하고 입 밖으로 나오는 케일의 포장 없는 감정이 좋았다. 그래서 알베르는 그런 케일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왜, 또, 뭐.

 

“검은 사막에서 기다리시고 계시면 찾아가겠습니다.”

“그래 몸조심하고, 동생.”

 

오래간만에 듣는 형과 동생 놀이에 케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안 그래도 왕자와 거지에 자신을 몰입하고 있던 케일이 그 감정이 우수수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알베르는 일부러 그렇게 하고 있었다. 케일을 살살 긁고 있었다. 어서 네 본심을 말해보라고 그렇게 보채고 있었다.

 

“형 목숨이나 잘 챙겨.”

 

케일이 알베르의 로브 앞쪽을 잡아 자신 쪽으로 이끌었다. 알베르의 입술이 케일의 얼굴에 닿기 직전이었던 것을 케일이 급히 막아섰다.

 

“케일.”

“형 동생 놀이는 그새 질리셨습니까?”

 

케일이 한걸음 물러나며 알베르의 시선을 피했다. 알베르는 케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지금 같이 가자고 한다면 케일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미쳤냐며 자신을 밀어낼까, 좋다고 자신의 손을 잡을까. 알베르는 케일을 바라보고 있다가 케일의 모습을 눈으로 훑었다. 케일은 갑자기 자신을 시선으로 훑는 알베르를 보며 손을 가슴 앞에서 교차하며 알베르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알베르가 케일의 그런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자네는 자네를 좀 더 소중히 하도록 해.”

 

케일이 아-하고 짧게 소리를 내었다. 언제부터 케일 자신을 챙겼었던가? 우리 편이 이기면 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케일이 어깨를 들어 올려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알베르가 그런 케일을 보며 케일의 코를 검지로 콕 눌렀다.

 

“그럼 작별 인사로 키스나 한번 해주시던지요.”

“정말…”

 

알베르가 케일의 허리를 훅 감싸고 제 쪽으로 당겼다. 왕세자를 이길 사령관이 여기 있었고 사령관에게 지는 왕세자가 여기 있었다. 바깥에서 계속해서 들려오는 타샤의 급한 노크 소리에 놀란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 어느 때보다 애잔하게 키스의 여운이 아쉬워 서로의 코를 비볐다. 알베르가 케일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데고 속삭였다.

 

“그럼 기다리지.”

 

알베르가 케일의 어깨를 툭툭 손으로 다독이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왕세자와 사령관. 케일은 알베르의 손이 닿았던 재킷 어깨 부위를 만지고 창가로 다가갔다. 궁 하나쯤은 날려도 제드 크로스만은 이해할까. 글쎄. 케일은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타샤와 함께 궁을 빠져나가던 알베르가 자리에 멈춰섰고 케일이 있는 집무실 쪽을 올려다 봤다. 혼자서, 그는 혼자가 아니었지만,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심 불안했다. 지금이라도 돌아간다면 이 다크 엘프들의 힘을 합친다면. 궁으로 돌아가던 그 날처럼 타샤가 알베르의 어깨를 붙잡고 몸을 돌렸다. 로운 수도가 반파되도록 크게 터진 굉음이 들리지 않을 때까지 알베르는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기다린다는 한마디 말을 남겼던 알베르에게 케일의 타버린 옷가지가 전해지고 알베르는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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