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크로스만은 다급하게 숲풀을 헤쳤다. 음, 최대한 다급해보이게 뛰고 있으리라 본인은 자부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나. 제 팔을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가는 독묻은 단검에도 알베르는 힘겨운 표정을 보이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어쩌다보니 저를 급습하려는 수상한 흐름을 잡아냈다는게 시발점이었고, 배후가 들어나지 않으니 대놓고 자신을 노릴 환경을 만들어 준게 그 두번째로 도착한 부분이었는데.
....이거 언제까지 뛰어야하지?
전날, 타샤는 어딘가 부족하다고 해야할까, 모자란 지도를 보여주며 해맑게 웃었었다. 고대부터 소문이 흉흉했던 숲이라, 지도가 옛날 지도밖에 없어. ...지금은 괜찮은거 맞지? 아암, 괜찮고 말고! 하하하! 문제가 있으면 뭐 어때, '우리'는 괜찮을걸?
어둠의 숲이라 불렸던 곳이라며, 검은 마나가 발견된적도 있었다하니 괜찮을거라 호언장담하던 제 이모는, 책상 위에 펼쳐둔 그 허술한 지도 위를 대각선으로 휙 훑었다.
"여기부터 이쪽으로 쭉 우리 사람들을 배치해둘테니까. 넌 최대한 다급한 척하면서 달려. 알겠지, 알베르?"
"...돌겠네. 알겠어."
그 때, 그 때 물어봤어야했는데!
크악!
자신을 쫓아오던 인원 중 적지않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갔건만, 아직도 저에게 끈질기게 절 쫓아오는 복면들을 힐긋 바라본 알베르는 다시 고갤 돌렸다. 조금만 더 쫓아오면 도망이고 뭐고 그냥 자신이 직접 처리해야겠다 생각하며 또 하나의 덤불을 넘긴 순간.
"...?"
몸이,
굳었다.
어떠한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몸이 굳었다. 여전히 어둑한 밤이었고, 흐릿한 죽음의 기운을 가진 숲은 여전히 잔잔히 이는 바람 소리만 울리고 있는 와중에. 저 홀로 덤불을 헤치던 자세 그대로 멈춰있었다. ..혹시 역으로 당한 거였나? 이모가 이런 장난을 칠리가 없는데. 심장이 쿵, 내려 앉고. 무슨 마법인지 혹시 알아볼 수 있지않을까 싶어 고정되어 한정된 시야로 주변을 흝던 알베르는 이내 누군가의 발걸음 소릴 들을 수 있었다. 작금의 상황에선 달가울리 없는 발걸음인데.
..곧 아래로 향한 알베르의 시야에 고급스런 갈색가죽의 신발이 들어왔다.
"...이 마법이 아직도 남아있었어?"
어딘가 조금 귀찮음이 섞힌, 나른하면서도 태평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더불어 무언가 남자에게 맞장구라도 치듯 들려온 냐아앙, 하는 고양이의 울음에 알베르는 순간 저도 모르게 경계심을 놓았다. 뭐야, 이건?
"음... 온. 혹시 남은 꽃잎 가지고 있어?"
"여기, 주머니 안에 있다는데!"
"잘했어."
곧 무언가 뒤적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갈색의 신발이 저에게로 한발짝 더 다가왔다.
"...저기요. 들립니까?"
손가락도 아닌 것이, 가는 무언가.. 마치 나뭇가지같은게 알베르의 머리에 쿡 닿았다. ...지금 나뭇가지로 찌른거야? 순간 할 말을 잃은 알베르가 뻐끔거리며 입을 열자, 시야에 한 고양이가 불쑥 나타났다.
"저기, 혹시 안들리냐는데?"
"...아뇨. 잘 들립니다."
"다행이라는데!"
은빛의 꼬리가 살랑이고, 고양이를 몇번 쓰다듬은 남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그, 걸린 마법 풀어드릴건데. "
몇 번이나 당부의 말이 오간 뒤(대체로 얌전히 굴라는 말이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단순하게도 어떤 손이 제 어깨에 닿는 순간 알베르는 저를 묶어두던 무언의 힘이 흩어지는걸 느낄 수 있었다. 오래간 한 자세로 고정되어있어선가, 무릎에 힘이 풀려 비틀거리자 하얗다 못해 창백해보이는 한 곧은 손이 내밀어졌다. 손을 맞잡고, 고갤 들어 남자와 눈을 마주치자 든 생각은.
'목소리랑 참 어울리게 생겼군.'
였다.
여유로히 말하던 목소리처럼 나른하게 저를 향한 두 눈은 적갈색을 띄고 있었고, 태평한 어조로 중얼거렸던 선이 가는 얼굴은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멀리서도 눈에 띌, 묘하게 핏빛으로 비쳐보이는 화려한 붉은 머리칼을 빠르게 살핀 알베르는 이내 자연스레 눈가를 휘었다.
"감사합니다. 무슨 상황인진 잘 모르지만, 이렇게 위기에 처한 사람을 바로 돕는 그 선량한 마음이 저 하늘의 달보다 밝게 빛추는 것같아 행복하군요."
알베르의 입이 움직일수록 혀에 무슨 기름칠을 그렇게 했냐는듯 황당한 표정을 지은 남자는 이내 마찬가지로 환히 웃으며 맞잡은 손을 꽉 쥐었다.
"해야하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보다 저야말로 이렇게 한 밤중에 찾아와주신 태양처럼 귀하신 분께 염려된 짓을 하진않았을까 고민이 되네요."
"...."
급 오묘해지는 알베르의 표정에 씩 웃은 남자는 맞잡은 손을 놓으며 맞은편의 손에 있던 붉은 꽃잎을 들어올렸다. 남자의 조심스런 손길에 고양이의 목에 달린 작은 주머니 속으로 꽃잎이 사라지고, 알베르의 시선이 그 꽃잎에 향해있단걸 깨닳은 남자는 입을 열었다.
"이게 있어야 여기에 걸린 마법을 풀 수 있는데.. 자세한 설명은 내일 해드리겠습니다."
하아암.
제 옆에 빛구슬을 띄운 남자가 제 어깰 두드리며 눈을 끔뻑였다.
"자다가 나온거라서."
"...그렇군요."
힐긋 뒤돌아 보는 알베르의 모습에 남자가 느릿하게 손짓했다.
"한번 가보세요."
"다시 또 멈추는거 아닙니까?"
남자는 괜찮다는듯 고갤 젓더니 빨리 확인하라며 재촉했다. 남자의 재촉에 자신이 멈췄던 곳으로 딱 한걸음을 뗀 알베르는, 잠시 저도 모르게 멍청한 소릴 흘렸다.
자신이 방금전 스쳐 지나왔을 나무와 풀숲, 그리고 제가 서있는 그 사이에 무언가 투명한 벽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 봤어요? 이제 좀 자러가고 싶은데. 지금은 못나간다며 손짓한 남자의 뒤를 따라 허망한 걸음을 향하자, 이젠 도무지 숲이라고는 볼 수 없을듯한 광활한 초원이 알베르의 시야를 뒤덮었다. ...이게 마법인가? 알베르가 이 숲으로 향하면서 들은거라곤, 과거에 불렸던 숲의 이명. 그리고 사람이 걸음하지 않아 풀과 나무로 가득하다는 것. 그 뿐이었다. 이런, 이런 넓은 초원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는데.
다소 복잡한 기분으로 남자의 뒤를 좇는 사이, 남자가 우뚝 걸음을 멈추자 알베르는 남자의 등에서 그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남자의 앞. 그 앞에 흐릿한 달빛을 받아 조용히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거대한 저택이 있었다.
"...?"
알베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숲과는 어울리지 않을정도로 고급스런 외형을 가졌지만, 그 크기가 유난히 작은 것이.. 귀족 중 어느 누군가가 돈을 처발라 만든 별장쯤 되는 것같은데. 그 양식이 꽤나 독특하여서.
'이런 양식은 수백년전에나 있었던 양식일텐데..'
"온. 너는 들어가서 자."
"그, 혼자 있으면 조금 위험... 아."
알베르를 힐끔거리다 갑자기 허공을 향해 눈을 크게 뜬 고양이는 히죽 웃으며 문가로 총총 뛰어갔다.
"깜빡했다는데. 늦지않게 오라는데!"
"그래."
뭘? 뭘 깜빡해?
알베르가 궁금해하던말던, 고양이가 사라진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알베르를 이끈 남자는 구불구불한 둥근 계단을 올라, 그 앞에 자리한 방의 문을 열었다.
"저 안에 손님용 잠옷 있으니까, 그거 입으시고."
그거 입고, 여기서 씻고, 저기서 자라.
옷장부터 욕실, 침대를 대충 번갈아 가르킨 남자는 눈을 비비더니 열어둔 문 너머로 향했다. 그러다 문 밖에서 빼꼼, 고갤 내밀더니,
"그, 결계 안에 갇혔다고 불안해서 조사라도 하겠답시고 밤산책 나오시는 분들이 많던데. 하고 싶으시면 저택에서 나가서 하세요. 저택엔 경계마법 걸어둬서 제가 계속 깨거든요?"
하곤 불만스런 얼굴로 하품을 흘리며 사라졌다.
이게 뭐야.
그게 끝이었다. 남자의 말을 고려한 알베르가 창 밖으로 뛰어내려 결계를 살피던 말던, 밖에서 저택을 훑던 말던 남자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뜬 눈으로 밤을 지세워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문 밖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방에서 자고 있다고 했는데!"
"인간처럼 쿨쿨 자고있으면 어떡하나! 우리가 방해하는거 아닌가..?"
"... 이 자더라도 무조건 깨우라고 했는데. 아침밥 먹어야한다고 했는데!"
"그건 맞다. 인간이 잠은 죽으면 평생 잘 수 있지만, 밥은 죽으면 못먹는거라고 그랬다!"
죽음에 비유해가며 잠보단 밥이 중요함을 몇번이고 강조하는 살벌한 말들에 알베르는 지금 제가 자는 척을 해야할지, 아니면 일어난 척을 해야할지 고민하다 결국 앉아있던 자세를 유지했다.
"....깨, 깨어있다는데!!!"
"우리 인간은 배 위에서 세 번 구르면 일어나니까, 이번 인간은 다섯번... 왜, 왜 지금 일어나있는건가!!!"
"진짜로 일어난거냐는데?? 눈 뜨고 잠든거 아니냐는데???"
혹 자던 알베르가 깨진 않을까 걱정했는지, 살짝 연 문 사이로 열을 지어 살금살금 들어오던 아이들이 문가에서 그대로 굳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외침에 저도모르게 입꼬릴 올리고 있던 알베르도 함께 굳었다.
은빛과 붉은빛의 털을 가진 두 묘인족. 그리고.. 드래곤? 진짜 드래곤이야? 살랑이는 털뭉치 사이에서 제 날개를 파닥이며 툭 뛰어오른 드래곤과 눈이 마주치자 절로 묘한 표정이 지어졌다.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지혜로우며, 위대하다는 드래곤이. 그 수많은 명칭 중 듣도보도 못한, 오로지 '귀엽다'만 충족하는 짜리몽땅한 앞발을 흔들며 제 앞에서 입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가짜금발아, 언제 일어났냐?"
"....어?"
"너 말하는거다, 가짜금발아!"
"가짜냐는데??! 완전 티 안난다는데!!"
"만져봐도 되냐는데?"
예상치 못한 호칭에 잠시 당황한 사이, 아이들이 알베르의 주위에 옹기종기 모였다.
"..만져봐도 돼."
"신난다!"
"하나 뽑아봐도 되나?"
"저기, 가짜 금발은 이름이 뭐냐는데? 나는 온이라는데."
"나는 홍이라는데! 막내는 라온미르고!"
"헉, 실수로 뽑아버렸.. 나, 나는 위대한 라온미르다!"
다시 심어주겠다며 제 머리에 닿은 차가운 앞발을 느낀 알베르는 속내 어딘가에 접어둔 '이곳은 적의 세뇌 마법 안이다'의 가능성을 접어버렸다. 제가 그런 마법에 당할리도 없다 생각했지만, 이런 광경을 만들어 낼 수 있었으면 상대는 필히 드래곤이리라. 아니면 그 이상이던가.
흐름을 따라가기도 힘든 재잘거리는 목소리에 잠시 달관한 표정을 짓고 있자니, 이 상황에선 제일 반가울 한 낯선 목소리가 닿았다.
"...뭐하냐."
"인간아!!!"
"가짜금발하고 얘기하고 있었다는데!"
"무슨 일이냐는데??"
"아니, 밥 먹게 손님 데려오라니까.."
"헉."
그제야 뒤늦게 남자의 말을 떠올렸는지 알베르의 곁에 모여있던 세 덩어리들이 우뚝, 굳었다.
"미..미안하다.."
"깜빡했다는데.."
"사과할 필요는 없고. 음식 식을라."
남자의 고갯짓에 문 밖으로 뽈뽈뽈 나서는 두 고양이와 한 드래곤을 본 알베르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설명은 밥 먹은 뒤에 해드리겠습니다."
"아, 감사합..."
"그리고, 말씀은 낮추셔도 됩니다."
하대가 더 편하실 것같은데.
씩 웃는 남자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을 담아 눈을 깜빡인 알베르는 이내 마찬가지로 환히 웃으며 화답했다.
"..그러지."
남자의 시선이 제 금발에 향해있었으니까. 금발에 청안이 상징하는 바는 뻔하지. 네가 누군지 알 것같지만, 굳이 입으로 꺼내진 않겠다는. 그 뻔뻔한 시선처리에 알베르는 두어번 고갤 끄덕였다.
문 너머엔 계단이 있고.
구불구불한 둥근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그 밑엔.
....쌉쌀한 냄새.
색색의 약초들이 들어차있다. 집안 곳곳에 알록달록한 색색의 약초들이 각자의 향을 흘려내고 있었다. 덕분에 새하얀 저택 내부가 자주색과 연한 벚꽃빛으로 가득했고, 또 뭔가 마음이 차분해지는 부드러운 향으로 넘쳐흘렀다. 남자가 내려가며 스치듯 약초가 많다고 입에 담긴했지만. 이 정도일거라곤 생각못한 알베르는 신기한듯 주윌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 거기 밟지마세요."
그 말에 바삐 돌아가던 제 고갤 멈춘 알베르가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남자가 가르킨 곳엔..금빛의 싹들이 새하얀 천위에 바지런히 놓여있었다.
"비싼건가?"
"별 거 아니긴 한데, 우리 애들이 직접 씻어서 말려둔겁니다."
별 거 아니라는 것치고는 밟았다간 좋지못한 꼴을 보게 될거란 기색이 읽혀서, 알베르는 얌전히 바닥에 시선을 붙박았다.
황금색.
하얀색.
푸른색..
난생 처음보는 약초들의 모습에 바닥을 향한 눈만이라도 바삐 돌아가고, 약초 특유의 달콤쌉쌀한 향에 코가 점차 마비될때즈음, 새로히 코를 자극하는 고소한 향이 주윌 덮자 알베르는 고갤 들었다.
"도착했습니다."
모인 인원은 적은데. 지극히 두 테이블은 채우고도 남을듯한 음식들의 향연에 알베르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집에 사용인이 있었나? ..몰랐군."
버려진 숲 깊은 곳에 숨겨져있는 별장같은 저택.
인기척도 전혀 들리지 않았고, 사람들이 있다면 오가야할 복도까지도 약초로 가득차 있으니 누구라도 저 남자와 그 아이들만 사는 곳인가 짐작할 것이고.
누구라도.. 이런 호화로운 음식이 나오리라 생각치 못할텐데.
마법같다기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마법따위 없었으니, 동화같은 일이라 말하는 편이 좋으리라 생각하며, 알베르는 고갤 젓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없습니다만."
"뭐?"
남자는 조용히 손가락을 들어 3단 스테이크 탑을 하나씩 무너뜨리고 있는 아이들을 가리켰다.
"온, 홍, 라온. 그리고 저."
그리고..
남자는 잠시 고민하다 저를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을 옮겼다.
불청객, 너까지.
"딱 이 5명밖에 없는데요."
저에게 꼿꼿히 고정되어 삿대질중인 손가락이 유난히 불경해보인다 생각하며, 알베르는 식탁 위를 꽉 채운 음식들로 다시금 눈을 돌렸다.
황금빛 꿀을 흘려보낸, 갓 구운듯 폭신말랑해보이는 핫케이크에, 새하얀 크림 아래에 두툼하게 놓여있는 수플레 팬케이크. 흐릿하게 옅은 김을 흘리며 고소한 향이 그득한 콘소메 수프에, 식빵조각들과 베이컨으로 그 위를 수놓은 감자수프. 투명한 유리병에 얼음을 동동 띄워 반짝이는 물과, 반짝이는 얼음이 달그락, 녹아내린 유채빛 레모네이드.
묘하게 큰 갈래가 겹치는 음식들과, 그 외에도 아이들이 먹고있는 3단 스테이크 및 그 외의 수많은 것들을 포함해 식탁 위엔 무려 로운의 왕세자도 호화롭다 여길 정도로 화려하고 훌륭한 음식들로 가득했다.
....저건 누가 한건데?
황당한 시선을 옅은 웃음으로 넘긴 남자는 한마딜 툭 내뱉곤 아이들이 손짓하는 식탁으로 향했다.
"우리 요리사가 좀 합니다."
더 없다며??
"가짜 금발아!!! 너도 빨리 와라!!!"
"사람은 밥심이라고 그랬는데!! 나중에 얘기하라는데!"
반박할 타이밍을 잃은 알베르는 눈을 깜빡이다 이내 드래곤이 탁, 탁 내려치는 의자로 향했다.
만족스러운 식사가 끝난 후(알베르는 식사 내내 저 남자가 했던 말이 혹시 이 훌륭한 요리사를 자신에게 뺏기지 않기 위함은 아닌가 고민해야 했다.), 알베르는 전날 밤 미리 정리해둔 질문 중 하나를 입에 담았다.
"이 결계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뭐지? 바깥에서 사람이 기다리고 있어서, 되도록이면 빨리 나가고 싶네만."
눈 앞의 마법사는 곤란하다는듯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음... 사실 지금당장 바깥에 나가는건 불가능합니다."
"왜지?"
남자는 제 손에 들린 붉은 꽃잎을 보였다. 남자의 머리칼을 닮은, 묘하게 밝은 붉은 꽃잎. 어젯밤에 봤던 그 꽃잎이다.
"이 곳을 나가려면 이 꽃이 필요하거든요. ..제가 걸어둔 마법이 아니라서."
"그럼 누가 걸어둔거지? 그 사람만 풀 수 있는건가?"
"제 스승님이요. 네. 그 분이 게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나갈 수 있겠지만.. 지금은 멀리 가 계신지라."
"....그렇군."
의문에 찼던 시선이 암담하게 내려앉는건 금방이었다.
지금껏 집을 둘러보며 봐온 수많은 약초와 꽃들사이에 저 꽃잎과 비슷한 것은 없었으니, 그만큼 구하기 힘든 꽃이라는 뜻 아니겠는가.
점점 굳어지는 알베르의 얼굴을 힐긋 본 마법사는 느긋하게 고갤 저었다.
"그렇게 구하기 힘들다는 건 아닌데.. 음. 라온, 보름이 몇 일 남았지?"
그 질문에 조금 떨어져서 마법교본을 읽고 있던 작은 드래곤이 검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왔다.
"기다려봐라, 인간아!"
꼼질꼼질.
통통한 앞발의 앙증맞은 손가락이 몇번이고 접히더니,
"8일... 7일이다!!"
이내 쫘악 펴지며 작은 드래곤의 미소를 가져왔다.
"이 꽃은 보름달이 뜨는 날에 짧은 시간동안 핍니다. 재배하고 시간이 좀 지나면 이렇게 빨간 꽃잎 한장만 남아요."
남자는 손 위의 꽃잎을 조심스레 내려놓더니, 옆에서 열심히 파닥이는 라온을 가리켰다.
"이 한 장으론 이렇게 작은 애들이라면 모를까, 우리같은 인간들은 택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꽃이 피는 일주일만 기다리면 된다는건가?"
"네."
남자가 레모네이드로 목을 축이자,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라온이 입을 열었다.
"인간아! 나도 질문해도 되나?"
"하던가."
"가짜금발아!! 이름이 뭐냐?"
가짜금발. 알베르의 시선이 절로 남자에게 향했다. 여기서 자신의 정체를 유일하게 알고 있으니, 뭔가 놀란...
"뭘 봅니까?"
...남자는 빨리 애 말에 대답이나 하라는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알베르라고 하네."
"알베르! 가짜금발아, 7일간 잘부탁한다!!!"
통통한 앞발이 쑥 내밀어지자 자연스레 그 발을 맞잡은 알베르는 환히 웃으며 답했다.
"내가 할 말이지. 세상의 그 어느 집보다도 위대한 드래곤의 집에 머물러볼 기회를 얻다니, 다시 없을 영광이야."
그 말에 라온이 꼬릴 빙빙 흔들며 알베르를 극찬하는 사이, '네가 누구든 알 바 아니고. 밥 먹여주고 재워줄테니까 7일간 얌전히 있다가 집가라.'는 속뜻을 환히 비추던 마법사의 미소가 어이없다는듯 일그러졌다.
그렇게.. 반강제적으로 알베르의 일주일 휴가가 결정됐더랬는데..
"...잠깐만! 자네 이름은 뭐지? 통성명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서로의 이름이 오가야하는거 모르나?"
"모르는데요."
마법사는 깔끔하게 비워진 레모네이드 잔을 내려보더니, 불경하게 고갤 까딱였다.
"마음대로 부르십쇼. 어짜피 7일만 볼거."
"....허."
알베르가 그에 할 말을 잃은건 당연한 일이었다.
방으로 가는 길정도는 기억한다는대도 혹시 모른다며 쫑쫑 뛰어온 아이들의 마중을 받은 알베르는, 바깥에 서신정도는 우리가 전해줄 수 있다는데! 하는 홍의 말에 곧장 책상에 앉았고. 이내 알베르에게서 밀봉된 서신을 받아든 홍과 온은 빠르게 결계 너머로 사라졌다.
...저녁쯤 되었을까, 조금 어둑해진 하늘 아래 돌아온 아이들은 알베르의 방에 다시 툭 튀어들어왔다.
"....어땠어?"
혹 제 이모가 어디 다치진 않았을지, 그럴린 없지만 괜히 걱정되는 마음에 아이들에게 받는 사람이 어디 아파보이는 곳은 없는지 좀 봐달라고 말해뒀었다.
"어디 다친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렇다는데. 그런데 조금 활동적으로보여서, 우리 쿠키도 같이 놓고 왔다는데!"
고양이랑 드래곤 모양 쿠키라며 조잘거리는 아이들을 앞두고, 알베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다행이군. 어디 다쳤을까 많이 걱정했-..
"맞아! 그래서 조금.. 무서웠다는데."
홍이 작게 중얼거린 말에 온과 홍이 밖에서 사온 과자를 우물거리던 라온이 되물었다.
"왜 무서웠나??"
"그.. 쿠키 두고 나오는데 막 소리지르고 있길래 좀, 많이 무서웠다는데.
'알베르, 이 망할 자식 다치고 돌아오기만 해봐!!!!!!!'
하면서 막 벽 내리치고 있었다는데!"
그 말에 세 쌍의 눈이 알베르에게 향했다.
"....가짜금발아.. 원한이라도 샀나..?"
"...!!! 원한 산 것 때문에 도망친 거였냐는데??"
"아냐!! 자, 잠깐만, 돌겠네!"
주춤, 주춤 미묘한 얼굴로 물러서는 아이들에게 열심히 변명을 한 알베르는 저녁식사로 나온 초콜릿 쿠키까지 상납하고 나서야(사실 쿠키를 건네는 제 모습을 보며 고갤 절레절레 젓는 마법사의 반응에 진즉 노려졌던건가 의심했지만, 이미 쿠킬뺏긴 뒤였다.) 오해를 풀 수있었다.
"알베르, 알베르. 길 잘 기억해두라는데."
"내일부턴 우리가 안데려다줄거라는데! 데리러오기는 하겠지만!"
"가짜금발도 이제 우리의 품에서 독립할때가 됐다!"
"...고맙다.."
아이들을 품에 앉은채 어느덧 제 임시 방에 세 번째 도착한 알베르는 하루를 일주일마냥 떠드는 아이들을 내려주었다.
...꿈에서도 저 재잘거리는 목소리에 시달릴 것같은데.
일주일이면 저 재잘거림에 적응할때쯤 나가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에 누웠다.
하루.
아.
알베르는 빠르게 통감했다. 자신은 적응할 시간따위가 없는게 아니라, 그냥 적응할 수 없으리란 것을.
"...아침 맞는데."
시계는 분명 제가 평소 일어나는 시간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거늘. 창 밖의 하늘은 새벽의 어스름한 하늘이 아닌 칠흑같이 어두운 한밤 중의 밤하늘이었다.
시계가 고장났나? 내가 중간에 깬건가?
지극히도 이성적인 경우를 떠올린 알베르는 이내 문 앞에서 들려오는 작은 인기척에 고갤 들렸다.
"좋은 아침인데!!"
"잘 잤냐는데??"
"....아침이라고?"
멍한 눈길이 창가에 닿았고, 이내 농담이냐고 묻는듯 그 푸른 눈이 도르륵, 고양이들에게 향했다. 알베르는 보지 못하겠지만, 알베르의 어이없다는 표정을 본 두 고양이가 히죽 웃었다.
"저 반응이 보고싶어서 빨리 왔다는데."
"아침 맞다는데~ 컴컴하고 별도 보이지만 아침이라는데!"
얄궂은 두 고양이에게 밀려 방 밖으로, 이어 저택 밖으로 나온 알베르는 넓은 하늘로 고갤 돌렸다.
하늘은 부딘히도 어두웠고, 그랬기에 하늘에 맺힌 보석들은 평소보다도 더 눈에 띄었다. 밤하늘을 꽉 채운 별들의 향연.
마법으로 만들어졌다 할지언정, 그것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아이들의 재촉에 급히 발걸음을 옮긴 알베르는 그 자리에 붙박힌듯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그 무수한 빛을 따라 지평선까지 천천히 시선이 흘렀고, 곧 알베르의 눈에 한 인영이 들어왔다. 여전히 눈에 익지못한 낯선 색을 지닌, 하늘이 어쩌다 이렇게 변한건지 잘 알고 있을 마법사.
"좋은 아침입니다."
뒤늦게 걸음한 알베르에게 인사를 건넨 마법사와 알베르 사이에, 잔잔한 바람이 불었다. 마법사의 머릴 곧게 묶은 검은 벨벳리본이 옅은 바람에 흔들리고, 알베르가 바람에 눈을 깜빡이는 사이 남자의 손엔 반짝이는 빛구슬이 떠올라 있었다.
"...마법때문에 이렇게 된건가? 하늘이?"
"아, 네. 제 껀 아니고."
마법사의 눈이 아래로 향했다.
"미안하다...."
마법사의 품엔 제 눈을 통통한 두 손으로 가린 드래곤이 폭 안겨있었다. 손에 있던 빛구슬을 공중으로 떠올린 마법사는, 그 손으로 라온을 쓰다듬으며 별거아니라는 투로 입을 열었다.
"위대한 용이 뭘 이런걸로 사과를 해. 괜찮아."
"그래도..."
"나 보여주려고 연습하다가 이렇게 된거라며. 하늘 봐. 충분히 마음에 드.."
"...인간아. 빛구슬 때문에 안보인다."
"....."
어느새 본인이 만들어낸 빛구슬에 둘러쌓여있던 마법사는 주윌 둘러보다가, 아무것도 아니라는듯 대충 허공에 팔을 휘적이곤 다시 하늘을 가리켰다.
그 움직임에 여기저기로 튕긴 빛구슬 중 몇개가 알베르의 앞까지 날아왔다가,
퉁,
알베르에게 튕기곤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뭐 이런.."
뭐 이런 마법사가 다 있지?
별다른 주문 없이 이런 것들을 해내고, 아무리 어린 드래곤이라 해도 제 잘난 맛에 살아간다는 이기적인 드래곤을 제자로 두고.
눈을 돌리자 하늘을 바라보며 훌쩍이는 드래곤과 잔잔하게 웃는 남자가 보였다.
"....혹시 드래곤님이십니까?"
그 말에 마법사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오묘한 표정이었다가, 갸우뚱거렸다가, 이내 다시 오묘한 표정을 짓는데.
내가 왜? 진심으로 황당해하는 기색이 훤히 비췄다.
"아니다! 인간은 드래곤처럼 위대한데 조금 허약한 인간이다!"
"저같은 망나니가 왜 드래곤입니까?"
"케... 인간은 똑똑하고 착한 인간이라는데!"
알베르의 앞 뒤에서 동시에 말이 터져나오고, 마법사의 시선과 아이들의 시선이 교차했다.
"내가 왜 똑똑하고 친절해?"
"도대체 인간이 왜 망나니라는건가!!!"
"이해가 안된다는데!!"
"나정도면 충분히 망나니라니까. 안그렇습니까?"
갑자기 저에게 몰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않고 남자를 바라본 알베르는 당황한 얼굴로 고갤 저었다.
"...혹시 망나니 뜻을 잘 모르는거 아닌가?"
망나니는 좀, 많이 폭력적인 편인데.
너는 좀 아니지않느냐는듯 물끄러미 쳐다보는 알베르의 시선에 마법사는 네가 아직 잘 몰라서 그렇다는듯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 곳에 들어온지 얼마 안되셔서 잘 모르시는 것같은데, 제가 망나니인 이유는..."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반박이 시작되고, 이내 알베르의 옆으로 다가온 두 고양이는 물론이요, 마법사의 품에 안긴 드래곤까지 제 앞발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자 무언갈 느낀 알베르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하루종일 집에서 뒹구는데 그게 망나니가 아니면 뭐-"
"아침 먹을 시간 아닙니까?"
"아."
"배, 배고프다는데!"
"꼬르륵..꼬륵.."
홍이 입으로 힘없이 내뱉는 꼬르륵 소리에 더불어 온의 외침까지 합세하자 남자는 자연스레 말을 멈추며 배고프면 안되지. 하고 빛구슬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야외 테이블로 발을 옮겼다.
"오늘은 밖에서 먹는겁니까?"
"네. 하늘이 예뻐서요."
그에 다시 올려다본 하늘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영상구로 남기고 싶다는데! 하고 재잘거리는 웃음소리와, 분위기있게 잔잔한 빛을 흘리는 빛구슬과, 맛있는 식사.
...
발목을 스치고 지나가는 부드러운 바람에 알베르는 조용히 테이블 위로 눈을 돌렸다.
이틀.
"놀아달라는데."
"심심하다, 인간아!"
나른한 햇살에 담요에 파묻혀 졸던 마법사는 제 배를 꾹 누르는 아이들의 손에 괴로워하다가, 바들거리는 손을 들어 알베르를 가리켰다.
"날도 좋은데 같이 약초 캐러 가."
"어? 나?"
"약초 캐본 적 없죠?"
"...없는데."
"들었지? 너네가 저 사람 선배니까 가서 가르쳐줘. 사람이 살면서 약초캐는 법 정도는 알아야지."
"...잠깐만. 난 별로 안궁금한-"
"가자, 가짜금발아!!!"
"에헴, 우리가 약초 좀 캔다는데!"
"우리만 믿으라는데!!"
잘 다녀와, 하며 손을 흔들곤 나른하게 하품을 흘리며 다시 잠에 빠져드는 마법사의 모습에 알베르는 입을 쩍 벌렸다.
"저, 저, 저런..!"
"뭐하나, 가자! 빨리 일어나라!"
"흠흠, 알베르야, 마법계엔 이런 말도 있다."
"...뭔데."
"'약초 캐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
누구한테 들었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툭, 건드리자 이상한 소릴 흘리며 쇽 튀어나오는 금빛의 약초를 잡아채며 라온의 바구니에 집어넣은 알베르는 헛웃음을 흘렸다. 어쩌다 제가 이런 상황에 놓인건지 고민하다 담요 사이에서 얄궂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눈을 감던 불경한 마법사가 떠오른 탓이었다.
"왜 웃는거냐! 내 말이 웃긴가??”
"막내 명언이 마음에 든거아니냐는데?"
"...흠흠, 그런건가!! 우리 인간이 많이 가르쳐줘서 열심히 외워뒀다, 알베르야! 흠흠. 더 듣고싶어하는 것같은데, 더 말해주자면-"
알베르는 그 날 듣도보도 못한 마법계의 명언과, 짧은 용생(위대한 용님은 무려 6살이었다.)에서 얻어낸 격언들을 하나하나 들어주며 약초를 캘 수 밖에 없었다.
사흘.
"인간아, 심심하다!!!"
가는 선의 여상한 손가락이 누군가를 다시금 가리켰고,
"아이고, 아이고.. 근육통이.."
그 손가락이 가리킨 끝에 서있던 남자는 힘없이 소파에 주저앉으며 제 다릴 콩콩, 두드렸다.
"아니, 겨우 약초 하루 캤다고 근육통이 올리가.."
"익숙하지 않으니까 그럴수도 있다고 했다! 내 앞발만큼 강한 가짜금발이지만 그럴 수도 있다!!"
"그게 말.."
"오늘은 우리랑 놀아달라는데!"
"오늘도 잠만 잘거냐는데?"
"...알겠으니까 좀 내려가봐."
놀아준대!! 아이들의 환호성에 비척거리며 일어난 마법사가 담요를 갈무리하며 알베르를 힐끗 바라봤다.
히죽.
테이블에 놓인 레모네이드 잔을 들며 한쪽 입꼬릴 올리자 반전된 상황에 황당한 표정을 지은 마법사가 아이들에게 질질 끌려나갔다.
"나도 같이 놀고싶은데. 자네가 이렇게 부러운적은 처음이야."
돌아선 아이들에게는 보이지않게, 멀쩡한 다릴 들어 얄밉게 허공에 휘젓자 미간을 구긴 마법사는 제 옆구리에 끼고있던 담요를 던졌다.
힘없이 날아가는 담요는 누구나 피할 수 있을정도로 느렸지만, 담요를 던진 마법사의 빈 손에 불덩어리가 나타나는걸 본 알베르는 얌전히 날아오는 담요에 맞았다.
"인간아, 좀 제대로 걸어라!"
"뭐하고 놀지 빨리 생각해보라는데!”
곧 바깥으로 나오겠다 싶어, 케일이 앉아있던 창가로 신난 걸음을 재촉한 알베르는 곧 제 입꼬리가 조금씩 내려앉는걸 느낄 수 있었다.
숲에 가려져 저택에선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던 약초밭이, 이 자리에선 훤히 보여서.
어제 자신과 아이들을 내내 지켜봤단 뜻이었다.
그래, 경계하는게 당연한 일이긴 하지. 왜 경계치 않는지에 대해 자신도 몇 번 고민을 해본 찰나였다. ...저같은 이방인이 종종 이 곳에 들어오나, 싶어 대충 이해했었는데..
침묵 끝에 조금 어색하게 뒷목을 쓸어내렸다.
아이들이 하루를 일주일처럼 보낸다고 했던가, 아이들에 저까지 포함인걸 뒤늦게 깨닳았다.
겨우 3일 보낸 것치고는, 한달동안 지낸듯 굴었던 것같아서.
나흘.
"알베르."
꾸우우욱.
네 앞발이 알베르의 가슴을 눌러왔다.
"알베르, 일어나보라는데..!"
"알베르..!"
몇 번이고 묵직한 앞발로 꾹,꾹 누르며 속삭이던 두 고양이는 귀찮아서 자는척하는건지, 아니면 진짜로 자고 있는건지 모를 인간을 내려다보다 결국 몸을 일으켰다.
"...할 수 없지. 홍. 배에 올라가서 한번만 점프하라는데."
"알겠다는데!"
"잠깐만!!! 일어났어!"
홍이 앞발을 들기 무섭게 알베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방금전까지 죽은듯이 자고있더니? 온이 곱지못한 시선을 흘렸다.
"왜 자는척 했냐는데."
"......."
뚱한 눈빛으로 절 바라보는 온의 모습에 알베르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엑, 자는척이었냐는데??!"
"..어제부터 은근히 우리 피하던데, 갑자기 왜 그러냐는데?"
"피했냐는데??!? 피한줄 몰랐다는데!!!!"
"....홍. 가서 작전이나 다시 생각하고 있으라는데."
"알겠다는데..."
"...무슨 작전?"
시무룩해져선 꼬리를 축 내린채 터덜터덜 멀어지는 홍을 뒤로 하고, 흐지부지 넘어가려는듯 말을 돌리는 알베르의 모습에 온이 어둠속에서 삐뚜름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곧 집간다고 그렇게 낯설게 구는거냐는데? 벌써 3일밖에 안남았지만 그래도 재밌게 놀았는데 갑자기.."
"아니, 그게 아니라.."
"뭐냐는데?"
평범한 인간의 배는 살았을 하프엘프와 이제 막 12살이 된 고양이 사이에 영겁과도 같은 침묵이 흘렀다. 말할때까지 기다려주겠다는듯 불만스러운 뜻이 담긴 온의 꼬리가 탁, 탁.. 다섯번쯤 내려쳐졌을까, 뒤늦게 알베르의 입이 열렸다.
"너희가 불편할까봐."
"우리가 불편해보였냐는데??"
알베르가 고갤 저으며 부정하려는 순간, 저멀리서 창문을 내다보던 홍이 총총 뛰어왔다.
"누나! 지금 가야한다는데! 지금 안가면 늦는다는데!"
"...알았다는데. 알베르, 우리 따라오라는데."
"...뭐하는데?"
조금 괜찮아졌나? 분위길 살핀 홍이 히죽 웃었다.
"몰래 간식 가져올거라는데!"
꼬불꼬불한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가며 온과 홍이 설명한 '작전'은 정말.. 위대했다.
달에 몇번씩 회의를 통해서 아이들끼리 '간식 몰래 가져오는 날'을 정하는데, 높은 선반위에 간식상자들을 놓아둔 탓에 유일하게 날 수 있는 라온이 빠질래야 빠질 수 없었건만. 하필 오늘 마법사가 라온을 꼭 안고 잠들어버리는 탓에 온과 홍만 겨우 방을 빠져나왔단 것이다.
"이런 날만 따로 자면 안되나?"
그 말에 아이들이 전혀 생각치 못했다는듯 눈을 크게 뜨다가, 머뭇거리며 답했다.
"여기 온 이후로 한번도 그런 적 없다는데."
"그런거 생각도 안해봤다는데!"
"
소곤거리는 아이들에 맞춰 살금살금 걸음을 떼자, 머지않아 곧 알베르의 눈에 식료품 창고가 들어왔다. 그리고 정확히 그 창고의 건너편 선반 위에, 천국이 있었다. …저정도면 어지간한 디저트가게 못지않겠는데.
사탕, 초콜릿, 젤리, 쿠키.. 거기서 초코쿠키, 곰돌이젤리, 딸기초콜릿, 레몬맛 사탕. 여러 종류의 간식들이, 다양한 맛으로 구분되어 커다란 유리병 수십개를 그득 채운채 반짝이고 있었다.
"저, 저번보다 더 늘어났다는데!"
"뭐부터 가져가지..? 저 잼쿠키도 맛있고, 저기 빨간색 사탕도 맛있다는데.."
"..저기 파란색 쿠키도 애들이 좋아하는걸 본 것같은데."
...억겁같은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더는 늦으면 안된다며 온이 입을 열었을 때,
"뭐하냐?"
"..!!!!!"
"!!!!!"
"!!!!!!"
신나서 붕붕 흔들리던 꼬리가 팡 터지고, 밤늦게 간식거릴 뒤적이던 고양이와 인간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어, 어떻게..."
"한 번 자면 잘, 안깨는데..!"
입을 쩍 벌린 두 고양이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 알베르를 보곤 고갤 절레절레 흔든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저택에 경계 마법 걸려있다고 얘기했잖습니까. 이게 쓸데없이 장소별로 걸려있는거라, 손님들이 갈만한 곳만 마법을 꺼뒀는데.."
"...내가 문제였군."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경계 마법을 만든 이의 잘못이고.
...조용히 침묵이 흐르고, 곧 사람 한 명과 고양이 두 마리, 그리고 뒤늦게 남자의 빈자릴 느끼곤 깨어 내려온 드래곤은 입에 초콜릿 한조각을 머금은채로 오랫동안 혼날 수 밖에 없었다. 알베르가 중간중간 억울하단 표정을 지었지만, 마법사는 그러게 왜 애들을 도와주냐며, 그러다 충치라도 생기면 책임질거냐는 말에 조용히 고갤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이윽고 한참을 혼난 뒤에, 양치까지 끝내고나서다시 자러갈 수 있게 됐는데. 마법사와 알베르의 방이 갈리는 갈림길에서 온이 알베르를 붙잡았다.
"알베르!"
"응?"
"..저어, 우린, 알베르가 전혀 안불편하다는데. 우린 오랫만에 여기 사람이 들어와서 재밌고 즐겁다는데! 그리고...우리야 가끔씩 마을에 내려갔지만, 케.. 인간은 여기 계속 혼자 있었으니까. 인간도 오랫만에 사람을 봐서, 즐거워하는 것 같아서 좋다는데. 그러니까...부담가지지말고 남은 날동안 재밌게 놀다가 가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말한 고양이는 어색한듯 주춤거리다 뒤로 도다다 사라졌고,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알베르는 작게 고갤 끄덕였다.
닷새.
"알베르 가기전에 같이 실컷 놀거라는데!"
"알베르야! 같이 그림그리자!"
하고 외치며 펜과 종이를 들고온지 어언 30분이던가. 처음엔 신나게 선을 긋던 아이들은 가면갈수록 느릿느릿 펜질을 깨작이더니...
"...얘들아?"
"....."
"....."
"......"
이내 잠들어버렸다. ...어제 그렇게 늦게 잤으니 예상은 했지만. 어젯밤 마법사에게 혼난 기억이 떠올라 씁쓸한 표정을 지은 알베르는 혹 몸부림에 채일까, 아이들이 쓰던 펜과 종이를 구석으로 모았다. 종이가 펄럭이는 작은 소리에도 쫑긋거리는 귀 때문에 러그 위에서 잠든 아이들을 소파 위로 옮겨줄 생각은 빠르게 포기한 채였다. 마법사가 쓰던 담요를 덮어주던 알베르의 시야에 문득 자신이 그린 그림이 잡혔다. 온, 홍, 라온. 그리고... 마법사가 그려진, 그림.
마법사. 알베르는 미간을 좁혔다.
동글동글한 검은 드래곤. 음, 귀엽게 잘그렸지.
적당히 삐죽삐죽한 온과 홍. 괜찮군. 나쁘지않은데..
..문제가, 바로 그 옆의 마법사였다. 일평생 그림을 그려본 적이라곤 손에 꼽을 정도로 서류작업에만 특화된 제 손이 문제인지, 아니면 인정하긴 싫지만 저 잘난 얼굴이 문제인지. 마법사만, 그래. 마법사만 조금, 앞선 아이들에 비해 조금 많이 삐뚫거리고 있었다. 선을 너무 자주 그은 탓인가, 얼굴은 라온의 손가락보다 두꺼웠고. 무뚝뚝한 표정이라며 그렸던 것은 홀로 가늘은 탓에 온과 홍의 수염같았다.
이걸 들켰다간 그 마법사의 입에서 어떻게든 미쳤습니까? 소릴 들을 것만 같아 종이에서 마법사만 빠르게 뜯어낸 알베르는 잠시 고민하다 종이를 러그 밑으로 종일 쑤셔넣었다.
...마법사는 지금 뭐하고 있더라.
살짝 찔린 마음에 몸을 일으킨 알베르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빨간 점에 문을 나섰다. 실로 복잡하고 특이한 것을 좋아한다는 마법사의 저택이라 그런것인지, 아니면 한참 전에 지어진 과거의 양식이라선지. 저택 곳곳엔 꼬불거리는 계단이 가득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번째 바퀴까지 빙글돌아 일층. 고작 5일인데, 이젠 익숙해져버린 약초의 향을 맡은 알베르는 저멀리 바람에 나부끼는 빨간 머리칼을 향해 걸었다.
"애들은 잡니까?"
바닥에 쭈구려 앉아 바닥을 흝던 남자가 뒤돌지 않은채 물었다. 많이 피곤한 것같더군. 금방 잠들었네. 알베르의 대답에 마법사는 고갤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뭘 한건지 물어도 되겠나?"
"아, 결계를 좀."
"결계를?"
"네. 원래는 이 결계가 여길 가리는 정도라서, 댁같은 외부인이 쉽게 들어올 수 있었는데.. 이젠 남들이 접근해도 못들어오게 조금 고쳤습니다."
"..신기하군."
남자는 별거 아니라는듯 제 손을 탁탁 털었다.
"자네의 스승은 대체 누구지?"
"황금패 하나만 주시면 답해드리죠."
씩 웃는 남자의 모습에 알베르는 또 한번 허, 황당한 헛웃음을 내뱉었다.
소소한 질답이 오가고, 창문 너머로 빼꼼 고갤 내민 아이들이 보이자 마법사는 몸을 틀었다. 들어가자고 말하는 제스쳐에, 알베르는 저도 모르게 입 안에 멤돌던 말을 내뱉었다.
"자네는 여기서 나갈 생각 없나?"
"제가 갇힌 것처럼 보입니까?"
왜 그런 뻔한 걸 물어보냐는 거들먹거리는 목소리에 알베르는 ..그건 아니지. 하고 어색하게 고갤 들다 입을 다물었다.
그런 목소리 치고는, 조금 갑갑한듯 짜증난다는 표정이라서.
"제 사람들이 여기 남아있어서. 저도 그냥 여기 있습니다."
'사람들'이 남아있다고 하기엔 넓고 고요한 저택.
마법사는 들판을 나부끼는 잔바람에 무언갈 듣는 것처럼 눈을 잠시 내리깔았다.
엿새.
소풍!
아이들의 꼬리가 양 옆으로 신나게 흔들렸다.
달콤매콤한 소스를 바른 두툼한 닭고기에 아삭한 양상추.
진득하게 녹아내린 치즈밑에 얇은 햄, 치즈, 바삭한 베이컨.
노릇하게 볶아낸 양파에, 토마토....야채는 됐다는데...
아이들은 알베르와 대화하고 있는 남자를 힐긋 쳐다보곤 야채 샌드위치를 조심스레 구석으로 치웠다.
이건 어떡할거냐..! 나중에 알베르 주자는데. 알베르는 어른이니까 야채 잘먹는다는데! 그렇군! 약초도 못캐서 쓸모없는줄 알았더니 가짜금발도 유용한 면이 있었다!
아까부터 수상쩍게 속삭이면서 저에게 묘하게 히죽이는 아이들을 애써 모른척한 알베르는 남자에게로 몸을 돌렸다.
"소풍을 간다고?"
"네. 댁도 같이 가야죠."
"..흠, 그렇지. 그렇고말고. 크흠.."
"....왜 그따구로 웃습니까?"
자기도 모르게 올라간 입꼬리에 큼, 계속 헛기침을 내뱉자 마법사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자네. 점점 경어를 쓰는 의미가 없는 것같다만."
"그래서요. 불만있어요?"
"아, 아니네. ...그런데, 이 시간에 가는건가?"
집 안엔 짙은 주황빛이 길게 들어차 있었다. 모든 것이 주황색과 노란색으로 비춰보이는 시간. 곧 어둠이 세상을 덮을 늦은 오후.
"네. 꽃은 일찍 딸수록 좋으니까요. 미리 가있는게.."
"...응?"
오묘해지는 분위기에 마법사는 눈을 깜빡였다. 설마 내가 얘기안했어?
인간 한명과 아이들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오늘 밤이. 보름달입니다. 라온이 날짜를 잘못 셌어요."
뎅그렁!
아기자기한 모양의 쿠키를 가득 담은 유리병이 바닥을 구르고, 유리병을 떨군 라온에게 자연스레 시선이 모였다.
"그럼, 그러면 오늘 가는거냐? 오늘 보름달이 뜨면..?"
남자가 고갤 끄덕이자 정신없이 파닥이던 날개가 축 쳐지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 살랑이던 두 꼬리 역시 마찬가지였고. 한가득 설레는 마음을 담았던 소풍이 우울한 작별 여행으로 바뀌는 광경에 알베르는 입을 다물었다.
...그 뒤로 아이들은 삐죽 입을 내민채 산을 올랐고, 여기서 저녁을 먹자며 커다란 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펼때도, 어느샌가 빛구슬이 옆에 둥둥 떠다녀 저번만큼은 아니어도 작은 별들이 총총 박힌 하늘을 바라보며 바구니를 열었을때도 아이들은 여전히 입이 불퉁하게 튀어나와있었다. 알베르가 야채 샌드위치를 집어들기 전까진.
"...알베르야. 그거 말고 이거 먹어라! 이게 칠면조 샌드위치다!"
"야채 샌드위친 맛없으니까 먹지말라는데."
"샌드위치 다 먹으면 이 과자도 꼭꼭 챙겨먹으라는데! 이건 막내구, 이건 누나랑 나라는데! 여기 우리 케.. 인간도 있다는데."
"고마워. ...그런데 야채는 내가 먹는게 좋지않나?"
"우리가 먹을거다!!!"
"먹긴 뭘. 이리 줘."
칠면조 샌드위치를 보내고 야채가 가득한 샌드위치를 호기롭게 들어올린 아이들은 마법사의 말에 히히, 웃으며 얌전히 샌드위치를 넘겼다.
한 번 흐름이 트여선지, 식사가 끝난 이후에도 산엔 재잘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알베르야, 넌 뭘 좋아하나! 우리 인간은 애플파이를 엄청 좋아한다!"
'...엄청 좋아하는 건 아닌 것같은데..'
"인간아, 표정이 왜 그러냐!"
"우리는 음식 중에선 스테이크가 제일 좋다는데!"
"알베르는 뭘 좋아하냐는데?"
주로 알베르를 겨냥한 질문이 한참을 오갔던가.
그러다 마침내. 오르는 길에 지표마냥 빛구슬을 하나씩 띄우며 올라오던 마법사의 손에 떠있던 빛구슬 하나가 훅, 사라졌다.
밝은, 빛구슬은 비교도 안될래야 밝은 빛이 길을 비추고 있었다. 빛구슬은 밤의 태양이 흘린 빛에 덮여 겨우시 제 모습만 보이는게 다였다.
진짜 크다.
"이 근방에서 달과 가장 가까운 곳이라고 했다..!"
홍의 감탄과 함께 달에 시선을 붙박은 라온이 중얼거렸다.
조금 구름에 가리긴 했지만, 커다란 달은 마치 거대한 산처럼 보였다. 바람에 울렁이는 구름이 저멀리로 둥실, 떠나가자 곧 저 끝을 비추던 달빛이 서서히 절벽 끝에 닿았고. 거대한 달빛에 한 사람과 아이들의 벌어진 입에서 와, 또 한 번 감탄사를 흘리는 사이, 어느샌가 그 절벽의 끝에 서서 달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하늘로 손을 뻗었다.
그리도 밝았던 달빛이 작은 두 손에 흘러담기더니 점차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손에 담긴 빛들은 곧 아래로, 땅으로 흩어졌고, 점점 흐릿해져가는 달빛 사이에서 땅에 닿은 빛들이 이내 한 잎, 두 잎, 땅에서 형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새하얀 달빛을 보곤 전혀 떠올릴 수 없는 새빨간, 눈을 떼기힘든 붉은 꽃.
꽃이 피어남과 동시에,
쿨럭!
"케일!!!!!"
새빨간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왜 피가.
싸하게 굳은 알베르가 멍하니 마법사를 내려다보다, 그에게로 향하려는 순간. 제 입을, 흘러나오는 피를 가린 남자가 재빨리 라온을 불렀다.
"...라온!"
"알겠다, 인간아!"
작은 드래곤이 일으킨 광풍에 몸이 뒤로 물려졌다.
"잠깐만, 상태만 좀 보고...!"
"알베르야, 어서 뛰어라!"
새빨간 머리칼을 향한 눈 앞에 당장이라도 흩어질듯한 흐릿한 붉은 꽃이 불쑥 내밀어졌다.
"오늘은 달빛이 약해서 꽃이 얼마 못버틴다! 케일은 우리가 잘 돌볼테니까 나갈 생각이나 해라!!"
내리막길이라. 걸을 새도 없이 빠르게 걸음을 떼기 시작한 알베르는 빛구슬을 따라 쭉 뛰기 시작했다.
해가 지던 때의, 고작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오늘 내에 오를 수 있을까 고민하게 만들던 높은 산자락이, 얼마 뛰지도 않았건만 벌써부터 끝에 다가서고 있었다.
이대로 가는건가?
마법사가 한 말이 귓가를 스쳤다. 결계에 접근해도 이 곳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거라는 그 말. 이성적인 머리가 자연스레 느려지려는 발걸음을 붙잡았지만, 그럼에도 결계와 알베르의 사이엔 몇 걸음이 부족했다. 그에 곧 흩어지는 꽃을 본 라온이 그를 도왔다.
퉁!
마법사는 항상 삐쩍 말랐다며 말했지만, 결코 작고 말랐다 볼 수 없는 덩치로 알베르를 밀친 작은 드래곤은 해맑게 외쳤다.
"잘가라, 알베르야! 재밌었다!!"
한 발짝.
라온에 의해 내딛은, 딱 한 발짝.
결계너머로 건너온 그 발걸음에 빛이 모여 만들어진 꽃이 빛처럼 흩어졌고, 알베르의 손에 붉은 꽃잎 한장만을 남겼다.
...아아.
빛구슬의 잔잔한 빛도 없었다. 알베르에게 찰싹 달라붙어 조잘거리는 목소리들도 들리지 않았다. 달콤쌉쌀한 약초향, 탁 트인 들판의 풀내음을 담은 바람, 마법이 없었음에도 매 반짝였던 밤하늘. .... 아무것도 닿지않아, 밤부엉이 소리만 그의 귓가를 울렸다.
"하.... 돌겠네."
알베르는 멍하니 숲 속을 바라보다 결계가 있던 곳으로 손을 휘저었다.
몸이 멈추는 일도, 결계가 만져지는 일도 없었다.
그저, 손 안에 든 작은 꽃잎만이 그가 꿈을 꾸지 않았다 말해주고 있어서.
알베르는 그 날. 일주일의 휴가를 끝냈다.
* * *
왕궁에 돌아온지 한 달쯤 되었을까, 쌓여있는 일들을 몇날 몇일동안 고생해가며 처리해서 조금 여유가 난 밤. 알베르는 눈 앞의 파일을 내려다보며 책상을 톡, 톡 두들기고 있었다.
'네가 말한 케일이란 사람. 딱 한 사람 밖에 안나오던데.. 그, 살아있는 사람 맞지? 그럼 아무래도 우리가 못찾은 것 같아서.'
왠지 당황한 눈빛으로 파일을 내려다본 타샤가 가져가려던 파일을 굳이 받아온 찰나였다. 타샤의 석연찮은 반응이 걸려 잠시 파일집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알베르는 이내 손 안의 붉은 꽃잎을 매만지다 파일을 펼쳤다.
두 세장밖에 안되는 짧은 파일.
몇 번이고 종일 꼼꼼이 훑은 알베르는 곧 허탈한 웃음과 함께 파일을 내려놓았다.
몇백 년전에 사라진 가문이란 말과 함께,
케일 헤니투스. 사인 (실종)
이라 적힌 새빨간 글자가 눈 앞에 선명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마법이라도 걸려있었나?
새하얀 종이에 유려한 사인이 휘갈겨졌다.
그럼 아이들이 자랄리가 없지않나.
벽 어딘가에 남아있던, 아이들이 자란 키를 새겨둔 흔적들을 기억하며. 소음이 끊이지 않는 왕궁 속에서 대충 다릴 휘적였다.
...혹시 하프 드래곤같은거 아냐? 그럼 인간이라고 불러도 맞잖아.
계속해 이어진 생각의 끝에 괴상한 결론만이 남았을때, 눈 앞엔 작은 마을이 있었다.
“...두 달만이군.”
그 곳에 돌아가지 못하리란걸 알면서도, 아이들이 가끔 마을에 내려간단 말이 계속해 귀를 감아와서. 당연하게도 알베르는 이 작은 마을에 오는 방법을 택했다.
그나저나 어쩌지?
대충 위치만 확인하고 내려온 마을은 의외로 컸고, 아이들도 엄청 많았고, 그 아이들처럼 떠드는 아이들은 엄청, 엄청 많았다.
“아저씨. 왜 여기 서있어요? 길 잃어버렸어요?”
“마을 안에서 저런 하얀 로브 입고다니면 때탄다구 엄마가 그랬는데.”
“맞아!! 내가 만든 하얀 망토도 언덕에서 굴러서 갈색됐는데..”
“아저씨, 돈 좀 있어요? 우리 과자 사먹을건데 돈이 부족해서 그런데 좀 줄 수있나?”
...와. 아이들 무리에서 겨우시 탈출한 알베르는 근처 벤치에 축 늘어졌다. 혹시 은발이나 적발의 머리카락을 한 아이들을 본 적 있냐고 물으려 했는데. 시선을 모으려 해도 서있는 광장이 시끄러웠던 탓에 뭐라고요? 다시말해주세요! 라는 말만 돌아왔다.
"..돌아가야하나."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니, 옆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저기, 혹시 과자 사게 돈 좀 빌려줄 수 있냐는데.”
“우린 돈 잘 갚는데!”
“미안. 돈이 별로 없..”
“으음.. 돈이 별로 없다고 하는데, 홍?”
“음... 그럼 어쩔 수 없다는데... 우린 싼 과자 파는 곳으로 가봐야겠다는데, 누나.”
“가짜금발이 자긴 돈 많다고 그랬는데."
"거짓말쟁이였나본데."
알베르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오랫만이라는데, 알베르!"
"딱 선물이 만들어지자마자 왔다는데."
적발을 가진 소년이 말갛게 웃으며 새빨간 꽃잎으로 엉성하게 엮은 팔찌를 내밀었다.
"알베르, 다시 놀러오라는데!"
* * *
“자네도 오랫만이군. 케.. 인간.”
설마 애들 따라한겁니까? 잠시 못볼걸 봤다는듯 얼굴을 구긴 마법사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름 부르세요. 어짜피 그때 들었을거 아닙니까. 이젠 제가 누군지도 아실거고.”
“하하, 자네에 대해 아는거라곤 이름뿐이네. 케일. …믿기진 않지만 마을에서 꽤나 망나니로 이름을 날렸던 탓에 정보가..조금이나마 남아있다 하더군.”
“말했잖습니까. 망나니라고.”
알베르의 미묘한 표정에 가볍게 코웃음을 친 케일은 그러고보니 돌아오면 주고싶은게 있었다며 주머닐 뒤적였다.
“...자네가 날 생각해줬을줄은 몰랐는걸.”
퍽 감동먹은듯한 상대의 얼굴에 케일은 삐딱한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 속에서 구깃한 종이 쪼가리를 내밀었다.
“이거 설마 저라고 그린겁니까?”
“....아.”
아이들은 그날 돌아온지 10분도 안되어 쫓겨나려는 알베르를 붙잡기 위해 부딘 애를 써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