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크로스는, 양어머니와 양언니들과 함께 살고 있다. 이를 봤을 때 재혼가정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텐데, 여기서 조금 다른 점은 일단 어머니와 언니들 또한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은 아니란 것에 있을 것이다. 여러 인과관계에 따라 비크로스는 흐릿한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릴 적 어머니께 맡겨지다시피 함께 살게 됐고, 자동적으로 자신보다 먼저 어머니와 함께한 두 언니들은 막냇동생이 생기게 됐다.
그는 그 전이나, 직후라면 몰라도 이들과 함께하게 된 첫날만은 똑똑히 기억했다. 가족끼리도 얼굴이 많이 다르기도 하고, 부모보다 조부모를 더 닮은 아이들도 많다지만 이제부터 어머니라고 불러야 할 이와 두 언니들은 정말 각양각색의 모습을 뽐냈다. 회색, 어두운 갈색, 금색. 특이하다 할 수밖에 없는 머리카락들은 같은 갈색이지만 첫째 언니와는 다른 머리색의 비크로스까지 함께하니 친 가족이라기보다는―실제로도 친족은 아니지만.― 먼 친척들이 모인 것 같은 모양새였다. 물론 이것 또한 가족으로 했을 때이며 아마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땐 어떠한 이유로 아이를 맡아주고 있는 젊은이 정도로 보였을 터였다.
더군다나, 겉모습뿐만이 아니라 성격마저 전부 달랐다.
“비크로스, 새어머니 말고 그냥 어머니라고 부르렴.”
왜, 뒤에서 나오는 말들은 막아도, 막아도 알아서 나온다지만 뒤에서 말만 많은 놈들에게 꼬투리가 잡힐만한 건 애초에 하지도 않으면 좋지 않겠니? 그림과 같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어머니, 아딘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노는 사람이었다. 예의와 예절을 중시하며 남의 시선을 신경 쓰던 어머니는 비크로스의 하나부터 열까지 조목조목 짚어나갔다. 첫 만남 때 자신을 어색하게나마 새어머니라 칭한 그에게 처음으로 한 말 또한 저것이었으니 다른 사람들과의 신경전이 벌어지면 상대를 말문이 막히게 하는 쪽은 어느 쪽일지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저 헛된 소문이 흐르지 않았으면 하는 깊은 마음에서 하신 말씀이니 따라주겠니?”
빙그레 웃어 보인 첫째 언니 발렌티노는 어머니를 퍽 닮아있었다. 다만 이는 겉모습이 아닌 분위기라던가, 행동 따위가 닮았다 표현할 수 있겠는데, 멀리서 본다면 정말 친 가족이라 믿을 터였다. 둘의 다른 점이라면 어머니가 고갤 다른 곳으로 돌린 잠깐 동안 척 보기에도 울리는 골을 겨우 붙잡고 있다는 듯 몰래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보였단 것 정도일까.
순간적으로 마주친 눈에 멈칫하는 모습 또한 보이긴 했으나 쉽게 갈무리하고 부드럽게 입 꼬릴 올리며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댔던 첫째언니는 묘하게 거역할 수 없는 느낌이 와 닿아, 비크로스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물론, 굳이 어머니께 말을 붙여서 첫째 언니가 한숨을 내쉬었단 걸 고할 생각조차 없었긴 하지만 혹시 모를 입막음을 하려는 것에 확신을 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
마지막, 둘째 언니와의 첫인사는 어쩌면 제일 평범하게 이뤄졌는데, 특이한 점이라면 둘째 언니 알베르가 조금 피곤해 보이는 기색이 언뜻 느껴졌단 것 정도일까. 그렇지만 금세 활짝 웃는 모습을 보니 잘못본 건가 싶어질 뿐이었다. 의혹은 금세 그쳤는데, 꾸준히 바라보니 결국 다시 피곤한 기색을 보이기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몸 괜찮냐는 물음에 알베르는 비크로스를 바라보며 애매하게 웃었다. 그러곤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는 것에 비크로스는 믿진 않았지만 같이 끄덕여줬다. 눈치가 빠른 편인 아이는 저게 잠을 잘 자지 않아서 생기는 거란 걸 생각보다 빠르게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저 눈가를 조금만 더 자세히 본다면 다들 같은 의견일 텐데. 어머니께 꼬리를 마는 두 언니들에 비크로스는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이거 부모에게 당하는 노동착취 같은 거 걱정해야 되는 거 아니야?
비크로스는 새로운 가족에 생각보다 빨리 적응했다. 어린 아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삼인 삼색의 가족들 사이에서 또 다른 색의 비크로스가 섞임으로 인해 혹시라도 균열이 생길까 어린 마음에도 슬며시 고갤 들이밀었던 걱정이 무색하게, 그는 자기 자신도 놀랄 정도로 적응이 빨랐다. 후에 비크로스는 그 이유를 순식간에 몰려드는 일거리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어린 아이에게 일을 맡기면 얼마나 맡기나 싶어도 세 가족, 이젠 네 가족이 머무는 집이라기엔 너무도 고풍스러워서 조심스럽게 관리가 필요한 저택까진 아니더라도 크기만은 정말 크기에 적잖은 관리가 필요했다. 그렇지만 그 집에서 거주하는 네 사람이 일을 모두 처리해야 하는 거였으며, 어머니는 일에 참여하지 않는 것 같고 그런 와중에 두 언니들도 바빠 보이는 것이 첫날 어린 비크로스가 딱 보기에도 저택 바닥에 먼지가 없는 것부터가 다행이었다. 청소는커녕 밥은 먹고 살았던 건지 매우 큰 걱정이 들었다.
비크로스는 어릴 때부터 어른들의 사정인지 뭔지 하는 걸로 어릴 때―맡겨질 때보다 더 어릴 때―부터 간단한 가사는 도맡았었다. 아직 미숙한 것은 있지만 비크로스는 일단 침착하게 저 세 사람보다는 자신이 훨씬 나을 거란 확신을 내렸다. 아니, 누구라도 이 집의 모습을 본다면 다 같은 소릴 할 것 같지만…. 우리들의 집이라며 그림 같은 미소를 지으신 어머니의 모습에 억지로라도 입 꼬리를 올리려곤 했지만 무리였다. 간단히 마저 안내를 받은 뒤, 비크로스는 청소도구를 집어 들었다. 앞서 혹시라도 이번에 새로 생긴 두 언니들이 노동착취를 당하는 건 아닌가 걱정한 게 무색하게 그는 자발적으로 노동력을 기부했다.
“미안해, 집이 조금…… 엉망이지?”
머쓱하게 웃으며 청소도구의 위치를 알려준 발렌티노는 굳게 닫힌 어머니 방 쪽을 힐끔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어머니는 이런 청소나 요리 같은 가사엔 손을 안 데시고 나는 둘째 치고 알베르가 처리할 일들이 조금 많거든. 평소에는 웬만해선 내가 하고, 알베르도 도왔는데 저택이 여간 커야지 말이야. 첫날부터 미안하네. 비크로스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고, 집에 오자마자 일을 하러 간다며 사라진 알베르의 표정을 생각하면 바쁘단 게 거짓일 것 같지는 않았다.
오늘은 자신도 바쁘다며 재차 미안하다 말하는 발렌티노에 비크로스는 고개를 한 번 까딱했다. 너무 박한 평가가 아닌가 싶지만 아무리 바쁘더라도 이리 훤한 곳에서도 먼지가 쉽게 보이는 건 두 사람의 청소 능력의 대해 쉽게 예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환경이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익숙해져야 하는 것이기에 구조를 파악할 수 있을 청소란 건 자원한 만큼 싫진 않았다. 무엇보다 어차피 지금은 할 것도 없었다. 바빠 보이는 두 언니처럼 언젠가는 자신 또한 밀려드는 일들에 휴가를 바라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지금 당장으로선 뭐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반가웠다. 거기에 비크로스가 잘하는 일들 중 하나로 간단한 청소 같은 것들이 들어감에 맞춤으로 할 일을 준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위쪽부터 먼지를 털고, 카펫이 있다면 밖에서 털며, 창틀과 같은 구석을 위주로 걸레를 활용해 구석구석 청소했다. 그 다음 바닥에 떨어진 먼지를 포함한 여러 가지 것들을 쓸어버리고 카펫을 다시 원상태로 돌려뒀다. 세탁하는 게 더 낫겠지만 비크로스가 집에 왔을 땐 점심시간을 조금 넘겼을 때기에 나머지 시간도 모두 투자해 종일 붙들고 있는 게 아니라면 12시를 넘겨도 청소를 끝내지 못할 것이기에, 금세 지나버린 저녁시간에 비크로스는 눈을 데구루루 굴려 커다란 시게를 쳐다봤다. 고풍스럽지만 칠이 거의 다 벗겨진 시계의 시침은 7을 지나 8을 향해 나아갔다. 저녁을 넘겨도 한참은 넘긴 시간에 어머니 방과 발렌티노, 알베르의 방을 순서대로 쳐다봤다. 시간을 그토록 넘겼으나 세 사람의 방에서는 인기척조차 들리지 않았다. 혹시 같이 먹는 게 아니라 다들 따로 먹는 건가 싶어 아까 확인했었던 식료품을 재차 확인했지만 저장된 식료품들에 변화는 없었다.
“…비크로스?”
“밥은 안 먹나요?”
발렌티노의 방문을 두어 번 두드리자 금세 답이 왔다. 약간의 뜸이 있었지만, 빠르게 열린 문틈 사이로 의아한 표정의 발렌티노가 보였다. 단도직입적으로 궁금했던 걸 묻자 발렌티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어떡하지, 우리 모두 일이 바빠 시간이 안 맞거나 그래서 안 먹는 게 버릇이 돼있어서. 어린 나이일수록 더 잘 먹어야 할 텐데. 첫째 언니라곤 해도 자기랑 나이도 몇 차이나지 않는 발렌티노가 어린 나이를 언급하자 정말 어린 나이의 비크로스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언제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누군가가 비크로스에게 했던 한 마디가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비크로스, 밥은 잘 먹어야한다.
친부모님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저 잠깐 맡아줬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그 말은 생각보다 깊게 기억됐다. 정확하겐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상대의 따뜻한 어조와 걱정 어린 말투, 그리고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을 기억하며, 이에 부가적으로 기억하는 간단한 당부 정도일 뿐이지만 비크로스는 꿋꿋이 지켜왔다. ‘잘’까지는 어렵더라도 식사시간이 되면 뭐라도 입에 넣었다. 입맛이 없는 날에도 간단한 견과류나 물을 잊지 않고 먹었다.
그러니 발렌티노의 말이 충격일 수밖에.
비크로스는 충격을 받아 헤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못하고 어이없는 눈빛으로 발렌티노를 쳐다봤다. 어떻게 밥을 안 먹을 수가 있지? 아무리 일이 바빠도? 보통 일이 많아서 바쁘면 뭔가를 먹고 힘을 내지 않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들에 비크로스는 고개를 흔들어 현재에 집중하려 했다. 그렇지만 못 먹는 음식 같은 걸 물어도 아침과 점심도 간단한 음식을 매번 비슷한 걸로 적당하게만 챙겨먹느라 잘 모른다는 답이 돌아오자 튀어나오는 한숨을 막지는 못했다. 식재료는 그래도 어느 정도 다양하게 있던 것 같은데. 상태도 그다지 나쁜 편은 아닌 것 같았고.
상태를 듣고 보니 갑자기 불안해지는 마음에 비크로스는 급히 발렌티노와 인사를 하고 아까 봤던 곳으로 잰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제야 식재료를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던 그를 비웃듯 어느 정도는 싱싱하다 생각했던 감자의 뒤쪽엔 조그만 싹이 나고 있었으며, 파릇파릇하다 생각했던 초록색의 채소들은 자세히 살피려 들어 올리니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많은 양은 아니라 처리하는 것에 아주 큰 부담으로 다가오진 않았지만 계속 밥을 잘 안 먹고 살았다는데 갑자기 음식을 해서 줘도 먹을까가 걱정이었다. 새로운 집에 와서 처음으로 하는 걱정이 밥걱정이라니. 시작부터 순탄치 않은 새로운 생활은 걱정이 계속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했다. 관리가 완벽하게 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적당히 청결한 조리도구와 그릇들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당연한 것이긴 하지만 이곳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많이.
“앞으로 이런 일들은 비크로스에게 맡기면 되겠구나.”
“어머니, 그래도 아직 어린데 오늘 이렇게 맡겼던 것도 조금―”
“비크로스, 요리 실력이 아주 좋네.”
여상하게 말을 내뱉는 어머니에 발렌티노는 반박을 해보려 했으나 어머니의 눈빛에 막힌 사이에 어머니가 이미 결정했음을 빠르게 깨달은 알베르는 다급히 비크로스의 요리를 칭찬하며 말을 돌렸다. 제일 급해 보이는 재료들과 일단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빵을 활용한 음식들인데 다행히 아주 못 먹을 건 아닌 듯싶었다. 어머니를 보면 표정을 숨기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것 같지만 보이는 모습과 말이 맛있다는데 뭐 어떤가. 굳이 맛이 없다고 하지 않는 이상 상관이 없을 것이다, 라고 당당히 생각하며 비크로스는 포크를 움직였다. 아삭아삭 씹히는 채소들이 시들시들한 부분을 최대한 골라내서 그런지, 아니면 아까 비크로스의 희망을 부쉈던 식료품들이 생각나서 그런지 생각보다 싱싱하게 느껴졌다.
*
비크로스는 손목의 반동만으로 프라이팬에 있는 채소와, 고기와, 기름을 자유자재로 고루 섞이게 하며 갑작스레 떠오른 과거의 기억을 찬찬히 되짚었다. 이 특이하다고 할 수밖에 없을 가족에 소속된 지도 벌써 몇 년이나 지났다. 친해지기 불가능해보이던 어머니와 두 언니들과도 그런대로 친해졌다. 몇 년을 요리와 청소, 세탁 따위만 하는 것 같지만 시간을 버렸단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생각보다 자신과 잘 맞는 일들이었던 것이다. 원래도 가끔 욱하는 걸 제외하곤 온종일 투덜거리거나 불만을 입 밖에 내는 편이 아니라 그런지 어머니의 사교와 관련된 여러 가지 교육보단 묵묵히 제 몫을 해내기만 하면 되는 요리가 제일 마음 편했다. 한데 모인 재료들이 익어가며 지글거리는 소리는 상상 이상으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효과가 있었다.
갓 성인이 된 비크로스는 여전히 세 명의 가족들과 함께하고 있다. 친부모를 찾고 싶단 생각을 한 번도 안한 건 아니지만 가능성도 낮고, 꾸준히 한 푼, 두 푼 모아놓은 돈은 끝도 기약할 수 없는 여행을 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간단한 바느질로 옷을 고쳐주거나, 식재료가 생각보다 많이 남았을 때 간단한 음식을 만들어 주변 사람에게 싼값에 팔거나, 단골이 된 가게에서 요리를 돕는 등의 일들을 하면서 집안일을 하거나 어머니께 사교와 관련된 걸 배우지 않는 시간엔 부지런히 돌아다녔지만 독립을 하기 위한 작은 방이나 요리로 돈을 벌기 위한 나만의 가게를 세우기 위해선 아직도 멀었음에 비크로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돈을 다 모아도 실제로 독립할지 자신의 마음을 정하지 못한 그는 그의 손을 한참을 탄 여러 도구들을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익숙한 집에서 독립을 하는 건 오래 전부터 고민을 해왔지만 정말 독립을 했을 때의 걱정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없으면 이 집 사람들 굶어 죽을 것 같은데.
“오늘도 고마워, 비크로스.”
“네가 수고가 많다….”
가열하던 걸 멈추고 그릇으로 노릇노릇하게 잘 요리된 것을 옮겨 담자 타이밍 좋게 두 언니가 나타났다. 정확한 시간을 정해두고 식사하는 걸 몇 년을 하니 이제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그 시간이 되면 서류를 두고 방에서 나옴에 비크로스는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갤 한 번 끄덕였다. 피곤해보이긴 하지만 몇 년 전보단 훨씬 나아진 표정의 두 언니들은 이제 식탁에서도 서류 따위를 보지 않았다. 오랜 시간을 두고 어머니가 안 계실 땐 항상 식탁에서 입에 음식을 급히 쑤셔 넣으며 밥을 먹는 걸 하지 말라 염불을 외우듯 반복하니 결국 고쳐진 습관에 뿌듯함이 차올랐다. 더군다나 오늘은 어머니가 나가시는 날이라 평소보단 편안하게 밥을 먹을 수 있어서 그런가 모두의 얼굴이 밝은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가 계시면 언니들 중 한명이라도 서류를 들고 들어오지 않지만 그 대신 숨 막히는 침묵과 함께하는 식사시간이 되어 처음 몇 달은 반가웠지만, 그 뒤로는 어머니가 계시고 안 계시고의 공기를 확연히 느끼며 두 언니가 왜 그렇게 열심히 쉬지 않고 일을 해가며 독립을 위한 돈을 모아댔던 건지 알 수 있었다. 거기에 첫째인 발렌티노보다 둘째인 알베르는 특히 열심히 어디서 온지 모를 서류들을 처리했는데, 이는 어린 비크로스가 ‘저 집 둘째 딸이 요정을 매수해 그 마법을 사용하여 날다람쥐로 변하려고 돈을 그렇게 모은다며?’ 따위의 소문을 믿을 정도였다. 웬만한 소문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곤 했지만 매일 밤낮을 통틀어서 쉬는 시간이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낼 떼―그러니까 없다는 뜻이다―만큼인 것 같을 정도로 알베르의 방에 발렌티노의 심부름을 위해 방문했던 비크로스는 그 모습을 다시 생각하면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저러다 과로사로 잘못되지.
“비크로스가 오늘 장보는 담당이던가?”
“아, 그랬어? 그러면 이것 좀 부쳐줄래?”
“오늘도 두툼하네.”
“매번 그렇지 뭐…….”
조금 쉬어가며 해야 하지 않겠어? 발렌티노는 알베르를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비크로스의 영향으로 집안일을 여러 가지 돕기도 하고, 밖에 너무 안 나가는 걸 장보기 담당을 정하며 일부러라도 밖에 나가게 되는 일정이 만들어졌다. 그래도 웬만해선 비크로스가 나가기는 하지만 몇몇 사교와 관련된 게 아니고서야 나갈 일이 잘 없는 햇빛을 맞는 건 두 사람의 건강에 생각보다 좋은 영향을 많이 끼쳤다. 전에도 일과 관련된 서류를 보내야 할 때는 직접 나갔다고 하지만 정말 딱 목적을 위한 범위에서만 돌아다니고 원래도 없던 운동량이 없느니만 못하게 오르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에, 정말 큰 변화였다.
두 언니들이 이렇게 비크로스 자신의 말을 들어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기에 그는 언제나 바뀐 모습을 보면 뿌듯함이 차올랐다. 밥 좀 챙겨서 먹으라고 줄창 얘기를 할 때 짜증이 안 쌓인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일을 열심히 하는 이유도 함께 경험해 알게 된 것은 물론 자신도 돈을 모으기 시작하며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 어머니의 시아 밖에서 각자의 독립 자금을 모으는 것의 대한 동료라고도 할 수 있으니 어디서 온지 모를 동료애도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대외적으로 보이는 이미지 따위를 강요하는 면이 없지 않은 어머니에 그걸 곧이곧대로 배워서 쓰고 있는 두 언니지만 뒤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자금을 모은 상태라 두 언니들은 아마 곧 독립을 하고, 지금까지 보다는 편안히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없으면 외식만 반복하는 건 아닐까 걱정되긴 하지만 일단 독립하고의 외식생활이 집에서 숨 막힌 상태로 어머니와 식사를 하는 것보단 나을 터였다. 그러면 나도 그때는 독립을 제대로 생각해볼 수 있겠지. 비크로스는 눈을 찌르는 햇볕을 손으로 가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늘 설거지는 발렌티노 언니니까 안심해도 괜찮겠지. 아예 사교계로 돌리려던 발렌티노 언니가 설거지를 하는 걸 보면 어머니가 난리시겠지만 오늘은 늦게 들어오시는 날이니까.
비크로스는 친근하게 말을 붙이는 시장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싱싱한 채소나 고기들이 발목을 붙잡았지만 애써 외면하며 앞만 보고 걸어갔다. 앞, 뒷마당에 조그맣게 과일이나 채소를 조금씩 키우고 있고, 그걸 곧 수확해서 먹을 수 있는 상황에서 싱싱하단 이유만으로 사는 건 무리였으며, 고기 또한 며칠 전에 사다뒀기에 오늘 사기엔 다 먹기 전에 상할 것이 뻔히 보였다. 무엇보다 지금은 집에 가는 길이 아니기에, 비크로스는 몇 년을 다녀 눈 감고도 갈 것 같은 적당히 큰 음식점으로 향했다. 사장 아주머니가 인심 좋기로 유명한 곳인데, 비크로스는 사장님(과 남편분) 부부―아저씨는 보통 요리를 맡고, 아주머니는 카운터를 맡으시곤 하셨다―가 계실 때는 서빙과 함께 주방에서 보조를 했으며 오늘과 같이 어딘가로 두 분이서 놀러 가실 땐 또 다른 단기간 종업원과 함께 주방 일을 위주로 가게를 맡았다.
“왜 이제 오냐?”
“넌 또 왜 시비야?”
오랜만에 온전한 주방 일을 맡을 수 있어 가벼운 발걸음으로 문을 열었건만 기다리는 이는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오픈 때문에 복장을 점검할 거라면 그거에나 집중을 하지 왜 또 굳이 이쪽을 쳐다봐선.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저 새낀 뭐가 문젠데 저러는 거야? 평소와 똑같은 상황이지만 오늘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일이나 하라고 하는 사장님이 안 계셨다. 그렇지만 서류를 부치느라 지체된 시간으로 비크로스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으러 걸음을 옮겼다. 아주 크지 않은 가게라 오픈 시작부터 바쁘진 않지만 저 놈을 상대하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생산적인 일을 해두는 게 낫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오면서 소란스럽지 않았어?”
“왜 자꾸 말을 걸어?”
평소엔 서로가 있는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으려던 건 십 몇 년 전의 일이라는 듯이 눈도 깜빡하지 않고 말을 붙이는 것에 비크로스는 질색했다. 뭐 잘못 먹었나. 개나 걸린다던 여름 감기만 잠깐 달고 살 것 같은 놈이 뭐 하나 잘못 먹었다고 저럴 것 같진 않은데.
“……그래, 오늘은 평소보단 소란스러웠던 것 같네.”
떨떠름해지는 와중에도 서늘하게 노려보는 모습에 비크로스는 짜증내는 눈빛을 감추지 않고 대답을 툭 던져줬다. 아까 무슨 일이 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시장은 언제나 그렇듯 적당히 소란스러웠고, 적당히 활기찼다. 일이 터졌다면 수습을 하느라 이보다 더 떠들썩했을 것이다.
“끝?”
“이게 끝이 아니면 뭐가 더 있―”
어서 오세요. 입을 모아 딸랑이는 문을 향해 외쳤다. 문 앞에는 막 들어온 몇 손님들이 있었다. 야, 어서 가서 안내나 해. 벌레를 쫓듯 손을 휘저으니 노려보면서도 결국 걸음을 옮긴다. 비크로스는 메뉴판을 들고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놈을 쳐다봤다. 정말 뭐하는 놈이기에 어쩌다 두세 번만 일을 하는 건지. 왕궁에서도 짧게 일을 한다곤 하지만 편지를 보낼 곳이 왕궁이란 걸 확인했음에도 현실감이 없었다. 저런 놈을 왕궁에서 어떻게 뽑았는지. 성격만 더러워서는. 비크로스는 웬만해선 싸움을 피하려하는 편이지만 이놈은 유일하게 제대로 마주 대응하는 유일한 놈이다.
“토마토 스파게티 둘.”
평소엔 지도 말 잘 안 걸면서 왜 저러지. 전해진 주문을 듣고 건성건성 고개를 끄덕이고 앞치마를 점검하며 몸을 돌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의 시장 거리는 소란스럽기는 했어도 사람들이 많은 걸 생각해서 넘길 수 있는 것이었다. 서류를 부치느라 평소보다 조금 늦어진 시간 때문에 사람들과 인사도 간단히만 하고 바로 와서 그런지 무언가 소문이 돌았어도 몰랐을 가능성이 컸다.
뭐, 쟤가 굳이 말을 붙여가며 말하려 했던 거라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별로 나랑 상관도 없는 거겠지. 비크로스는 소문의 대한 생각을 머릿속 저 멀리로 보내버리며 요리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 소문이란 게 어머니의 입에서도 나올 거란 걸 모른 채.
“곧 왕자와 결혼할 사람을 고르기 위한 무도회가 있다더구나.”
귀족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초대한다 했고. 솔직히 공주들 중에서 고르겠지만, 일단 왕궁에서 열리는 이상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 되겠지. 저녁을 다 먹고 차를 내왔을 때 어머니는 폭탄을 던지셨다. 알베르와 발렌티노는 차를 마시는 척 눈빛을 교환했다. 굳이 결혼할 것이 아니더라도 왕자나 고위 관리들의 눈에 띄면**** 안 좋을 거 없었다.
“그럼, 비크로스?”
비크로스는 갑작스레 불린 자신의 이름에 의아한 표정으로 고갤 들었다, 옆에선 발렌티노와 알베르가 눈을 빛내는 중이었다. 어머니가 드디어 막내를 무도회에 데려가시려나 봐! 보통 무도회의 대해 말할 땐 함께 갈 아이에게 당부할 말―집중해서 말을 거는 게 좋은 귀족들 따위의―을 하시는데 그 아이에는 비크로스는 포함되지 않았었다. 그건 애초에 비크로스가 무도회의 수많은 춤 같은 걸 잘 따라하지 못한다는 것에서 이유를 들 수 있는데, 두 언니들은 가게를 내는 것이 꿈인 비크로스의 꿈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음식업 쪽으로 아는 사람을 만들어두는 게 생각보다 도움이 많이 될 텐데.
비크로스도 그런 걸 최근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계단을 하나씩 밟아 올라가며 느껴가고 있기에 기대도 안했던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머릿속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얘기로만 들어본 왕궁의 공들인 음식들을 애써 무시하며 딱, 그림과 같은 미소를 지은 어머니를 바라봤다.
“새로운 드레스 세 벌 주문하지 않고 뭐하니?”
비크로스는 짧게 대답을 하고 손에 들고 있었던 그릇부터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설마 어머니가?’라고 외쳤던 걸 무시한 결과였다. 기대부터 하지 않는 게 좋았는데. 물이 뭍은 손부터 행주로 대충 훔치고 밖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가 애용하시는 가게가 닫기 전에 산다는 연락을 해두려면 뛰어도 모자랐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무도회의 대한 아쉬움도 금세 사라졌다. 어머니가 언제는 보내주실 것처럼 하셨나, 항상 똑같았지. 비크로스는 평소와 똑같은 상태로 언니들의 드레스를 마지막으로 점검해줬다. 오히려 비크로스의 눈치를 살피며 미안해하는 건 두 언니들이었다. 비크로스, 내가 왕궁 음식 뭐라도 싸올게. 그거야 말로 어머니께 걸리면 큰일 나지 않아요? 자신을 생각해주는 건 알겠지만 비크로스는 음식이 조금 아쉬울지언정 크게 바라지도 않았다. 무도회에 정말 큰 관심이 있었다면 어떻게 해서든 마차가 없으면 말이라도 타고 왕궁으로 향했을 터였다.
해가 저물어가자 어머니와 두 언니들은 왕궁으로 향했다. 어머니가 안 보실 때 자꾸만 뒤를 보는 언니들에 손을 간단히 흔들었다. 하지 말했긴 하지만 어머니 몰래 음식을 싸오다 걸리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다, 비크로스는 느긋해진 마음으로 마당을 둘러보며 어머니와 두 언니들이 돌아올 때까지 무얼 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역시 마당에 심어둔 채소들이나 가꾸고 있을까. 어두워지니 그냥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러, 아, 그 놈도 왕궁에서 일을 주에 몇 번밖에 안하는 것 같지만 여하튼 오늘 같은 날에는 바쁘겠구나. 비크로스는 잠시 멍하니 서서 자신의 좁은 인간관계의 대해 생각해봤다. 편히 대하는 놈이 한 놈밖에 없단 것에 비크로스는 정말 오랜만에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무언가 수상쩍은 발소리를 듣기 전까지.
비크로스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이 집에 올 사람은 딱히 없었다. 거기에 웬만한 사람들은 무도회를 위해 왕궁으로 향했을 터였다. ……빈집털인가? 비크로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생각보다 현실성 있는 결론에 소릴 죽여 집 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빠르게 프라이팬 하나를 손에 쥐었다. 뭐가 됐건 대비하는 건 나쁘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아무런 움직임이 밖에서 보이지 않자 비크로스는 프라이팬을 손에서 놓지 않고 한 걸음, 두 걸음 밖으로 나왔다.
“아이고, 젊은이. 물 한 잔만 줄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비크로스를 기다리고 있는 건 어떤 할머니, 아니, 할아버진가 싶은 성별이 오묘한 어떤 노인이었다. 마당의 한쪽에 주저앉아 있었는데 손에 쥐어진 지팡이로 후려치는 연기파 빈집털이면 어떡하지 싶긴 했지만 비크로스는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데 매정하게 돌아서선 쫓아낼 사람은 아니었다.
“일어서실 수 있으세요? 배는 안 고프세요? 안에 들어오시면 제가 뭐라도 차려드릴게요. 힘없을 때는 뭐라도 먹는 게 나아요.”
“……그만하면 됐다.”
걱정 어린 말들을 쏟아 붓자마자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펑하는 소리와 함께 노인은 연기에 쌓여 사라졌다. 현실감이 없는 상황에 그 자리를 멀거니 바라보다 새로운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갤 돌렸다. 어두워져선 달이 떠오른 시간에 빛의 중심이 된 것처럼 마당에서 유일하게 낮처럼 밝은 곳을 찾기만 하면 됐으니 그다지 어렵진 않았으나 받아들이기까지의 시간이 그다지 짧진 않았다.
“그래, 왕궁으로 갈 거지?”
비크로스는 갑자기 나타나 황당한 소리를 하는 무언가의 생명체를 멀거니 응시했다. 눈이 딱히 안 좋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프라이팬은 일단 내려놓고 눈부터 비비는 것이 나을까 고민하다가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진실 되게 말할지는 모르겠지만 빈집털이인지 아닌지의 대한 확신이 필요했다. 비크로스는 프라이팬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누구세요.”
“그건 알 필요 없, 아니지, 일단 요정으로 알아두는 게 편할지도 모르겠네.”
아, 그리고 방금 노인은 그냥 명목상 도움을 줘도 괜찮은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한 절차 같은 거니까 무시해. 지루한 듯 눈을 천천히 깜빡이던 붉은 머리의 생명체는 무게가 나가지도 않는지 사람의 얼굴만 한 크기로 잘도 잎사귀 위에 편히 누워있었다. 잎사귀가 아무리 커다래도 무게를 잘 버틸 리가 없을 텐데. 눈 앞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한 손으로나마 눈가를 비벼 봐도 눈앞에서 왕궁이니, 요정이니 이해할 수 없는 소릴 하는 생명체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눈을 비비던 걸 멈추고 게슴츠레 눈을 떠봤지만 눈 앞 관경은 여전했다. 분명 우리 집 뒷마당인데도 아마 흔치 않을 생명체가 떡하니 자리하니 새로운 공간에 온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왠지 머리가 아파짐에, 일단 차근차근 하나하나 짚어나가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대체 누가 왕궁에 가고 싶단 겁니까.”
“아냐?”
“네.”
그런데 내가 뭘 믿고 솔직하게 대답을 하겠어. 요정이니 뭐니, 시각적으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지 몰라도 머리는 수긍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개성 가득한 가족들 사이에서 자란 탓에 침착해지는 거 하나만은 자신 있던 비크로스는 스스로가 일평생 관심을 둬본 적도 없던 요정이니 하는 이야기를 이 나이 먹고 갑자기 생각해내기엔 무리라 생각하며, 꿈일 거란 가정을 깔끔하게 폐기했다. 아쉽기는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왜냐 묻는다면 앞서 말했듯 살아온 환경이 빠른 침착하기 위해 매우 좋았다 해둘까. 그리고 이 침착함은 조그만 요정인 상태에서 마법봉 같은 무언가를 두어 번 휘둘러선 몸집을 보통 사람들처럼 키운 요정에도 일단은 침착하다 할 수 있을 목소리로 대답할 수 있게 해줬다.
“가고 싶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러니까, 도대체 어째섭니까?”
“왕궁이니까 당연히 산해진미가 있는 거 아니야?”
그거야 당연히…. 눈을 끔뻑이며 대답을 하려 입을 열려던 비크로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맞긴 하지. 가고 싶지 않다기엔 왕실의 음식들은 본 적도, 맛본 적도 없음에도 입소문을 타고 널리 알려진 걸 생각하면 요리사에게 왕실 요리사보다 더 고급진 재료를 다루고, 더 청결한 환경에서 요리를 할 수 있는 곳은 아마 몇 없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정말 안타깝게도 비크로스가 왕실 음식을 직접 먹어보거나 만드는 모습을 견학하기엔 여러 가지 현실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기에 정말 솔직히, 놓치면 다시 없을법한 경험임이 틀림없었다. 어머니에게 맞서며 까지 갈 생각은 아니지만.
비크로스가 생각을 거듭할 때 갑자기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아!!!”
새까만 무언가가 몸집을 키운 요정에게 날다시피 하여 몸을 부딪치나 했더니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어두운 풀숲을 뚫고 나타난지라 요즘 민가를 위협한다던 곰이었던가 하던 짐승 중 하나인가 싶어 신경을 순간적으로나마 곤두세웠던 비크로스는 익숙한 인영에 어깨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뭔가 했더니 가끔 밥을 챙겨주던 도마뱀이잖아. 요새 안 보여서 어디로 갔나 싶었더니.
식재료 중 채소들은 웬만해선 그가 키워냈기에, 앞, 뒷마당에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많았었다. 그러면서 집 어딘가에 낑겨서 살고 있는 생명체들을 생각보다 많이 마주했는데, 검은색의 도마뱀도 이에 포함됐다. 청결을 중시해야만 하는 부엌에 들어오는 것만 아니라면 부러 먹을 만한 것들을 따로 만들어주며 챙기기도 했었다. …아니 잠깐만, 가끔 밥 챙겨주던 그 도마뱀이 저런 크기였나? 어둑어둑해지는 시간이며, 해도 모습을 감추는 시간이었지만 근 5미터 이내에 있는 것들의 크기를 확인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꼬리와 같은 것까지 했을 때 적잖은 크기를 지닌 생명체가 눈앞에 있다면 더더욱.
“웬일로 커진 건가? 작은 게 편하다하지 않았나?”
“아니, 뭐…. 여러 가지로 일이 있어서.”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양파를 많이 썰어도 눈이 아주 아프지만은 않더니, 맛이 갔던 것인가의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비크로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요정과 도마뱀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새까만 색에다가 점차 하늘이 더 어둑어둑해지고 있었지만 신났다는 듯 파닥이는 작고 검은 날개는 육안으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도마뱀이 날개를 가질 수 있던가 싶어졌지만 비크로스는 이젠 될 대로 됐으면 좋겠는 심정이었다. 예를 들자면 누구라도 나와서 이들이 무단침입을 한 게 아닌지 확인을 해주고 다 같이 나가준다던가.
물론 유감스럽게도 비크로스의 상상대로 일이 흘러가진 않았다. 정신 차리고 하나하나 짚어 가면 이런 이벤트인가 싶은 뭔가를 하려고 온 집주소가 잘못됐단 걸 알게 되던지, 아니면 내가 정말 비싼 돈을 주고서라도 의원에게 검진을 맡으러 가야했던 건지 알 수 있겠지.
“...분명 요정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뭐 어때. 애가 그렇게 부르고 싶다는데.”
미심쩍은 기색의 비크로스가 던진 말에 요정은 여상하게 대답했다. 몸집이 커지며 요정 날개 따위를 감춘 데다, 그러니 평범한 다른 사람들과 특별히 다른 점도 보이지 않아 요정은 더욱 평범한 인간으로 보였다. 그래서 혹시 싶어 조심스레 내어 보인 질문이건만, 깔끔한 대답만이 돌아와 비크로스는 결국 다시 입을 꾹 다무는 걸 선택했다.
라온, 이라 불린 듯한 도마뱀―이젠 드레곤이라 불러야 될지도 모른다―을 안고 말을 잇던 요정은 누가 봐도 귀찮은 것 같은 표정으로 마당을 둘러봤다.
“혹시 적당한 양동이 같은 건 없, 저거면 되겠다.”
“네?”
“호박 하나만 빌릴게.”
요정은 마법봉으로 원을 한 번 그렸다. 반짝이 같은 것이 봉을 따라 우수수 떨어졌지만 땅에 떨어지기 전에 사르르 녹아 사라지는 것에 비크로스는 눈을 크게 떴다. 텃밭을 공들여 키운 건 둘째 치고 키워온 작물들 중에서 제일 크게 자라서 무얼 해먹을까 고민했던 호박의 크기가 점점 커지니 눈도 그만큼 커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적당한 주황색의, 잘 익어가던 호박은 비크로스의 키보다도 더 크게 부풀어 올랐고, 호박넝쿨들은 억세서 끊기 힘들었던 건 꿈에서나 봤을 거라는 듯이 자기들끼리 얽혀선 바퀴를 만들었다. 잠깐 사이에 직접 키우던 식재료가 커다랗고 금빛까지 내보이는 고급스런 마차가 된 것에 비크로스는 소중한 프라이팬을 바닥에 떨굴 뻔했다.
“일단 마차는 해결이고.”
“……이걸, 정말 당신이 한―.”
“치맛자락 밟지 않게 조심해.”
자신을 향해 이번엔 반원을 그리는 마법봉을 멍하니 눈으로 쫓았다. 그리고 그 선을 따라 변하기 시작하는 자신의 옷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머리가 단정해진 건 물론이고 지팡이가 곡선을 그리며 아래를 향할 때 옷이 갈아입혀졌으며 위쪽으로 직선을 그을 땐 색이 바뀌었다. 새하얀 반짝이가 닿는 곳마다 변화가 일어나자 신기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헤 벌어진 입을 급히 다물었다. 말문이 막힌 사이 어디선가 전에 밥을 몇 번 챙겨줬던 고양이 두 마리가 나타났다. 다행히 이번엔 정말 고양이인 것 같지만.
“케일의 마법은 언제 봐도 신기하다는데~”
“그렇다는데~ 반짝반짝하고 예쁘다는데.”
아니지, 정말 그저 고양이일 뿐이라면 말을 못하겠구나. 자신의 옷도 이렇게 바뀌고, 옷의 촉감은 확실하니 꿈은 아닐 것이었다. 그러면 할 수 있는 거라곤 받아들이는 거 말곤 없지.
“그러니까 케일…님? 웬 드레습니까?”
“경비에게 걸려서 못 들어가는 불상사는 없어야 되지 않겠어?”
“그런 거라면 그냥 다른 옷도 있지 않습니까?”
“아니, 뭐…. 파란색이 잘 받네.”
비크로스는 일단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려 노력했다. 자신에게 입혀진 연푸른빛 드레스는 실제로 제대로 된 드레스를 입어보는 건 처음인 그가 보기에도 자신의 체형 같은 것에 아주 잘 맞춰져있어 어울릴 수밖에 없는 상태였고, 그렇기에 어째서 꼭 드레스인진 모르겠지만 일단 감사한 마음을 담아 요정―케일이라 불린―에게 간단히 인사를 전하고, 이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왕궁으로 가면 되는 거죠? 아닌데? 네? 당황한 눈빛의 비크로스에 케일은 마차 덜렁 있는 곳을 턱짓하며 입을 열었다.
“애들이 왕궁에 가고 싶대서. 마부와 같은 걸로 함께 따라갈 거야.”
아, 널 계속 따라다닐 건 아니고 그냥 가고 오는 것만 함께야. 두 고양이와 한 드래곤의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은빛 고양이는 은회색 빛의, 붉은 고양이는 조금 칙칙한 붉은빛의 머리카락을 지닌 어린아이로 변해있었다. 순서대로 온, 홍. 라온. 비크로스 음식 맛있다는데! 맞다, 비크로스만큼 맛있는 음식 만드는 사람 별로 못 봤다! 봇물 터지듯 몰려드는 아이들이 칭찬에 비크로스는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고 케일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애들이 너무 어린 것 같은데 마부 일을 맡기는 건 조금.”
“걱정 마, 명목상의 마부니까.”
마법으론 말도 만들 수 있고 말이야. 한 번 더 밤하늘의 은하수 같은 마법이 마차를 휘감자 발이 있어야 할 자리엔 새하얀 백마가 자리했고, 마부가 있어야 할 곳에는 아이들의 모습이 새로 인형마냥 생겨났다. 그런 뒤 케일은 비크로스의 마음을 읽은 듯 라온의 대해서도 덧붙였다. 얘, 우리들 말고는 안 보일거야. 그리고 아이들이 마차 안에 쪼르륵 앉는 걸 보던 케일은 여전히 비크로스의 손에 들린 프라이팬을 쳐다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작게 만들어 줄 테니 혹시라도 이상한 놈 있으면 프라이팬이 커졌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한 뒤에 후려쳐.”
비크로스는 한순간에 작아진 프라이팬을 챙기며 떨떠름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정말 필요할까 싶긴 하지만 일단 챙겨주니 감사한 건 받지만 갑작스레 일어난 일들에 현실인 것부터 맞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약간은 어린 애들끼리만 보내기엔 가는 길이 조금 불안하니 마땅한 애 찾아서 보내는 기분이지만 그냥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수십 번 감사해도 모자랄 걸 이러는데 혹시라도 꿈이라도 괜찮은 꿈인 것 같았다.
“12시까진 돌아와.”
마법이 풀릴 거라며 정해진 통금시간은 생각보다 현실적이라 현실임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줬지만 말이다.
그리고 뒤돌아 자신도 마차에 타자 케일은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고 마차의 문도 닫으려다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전과 같이 건성으로 마법봉을 흔들며 뭄을 닫고 마차를 출발시켰다. 그 모습에 의문을 갖던 비크로스는 발에서 느껴지는 색다른 느낌에 치마를 살짝 들어 올렸고, 그를 기다리는 건 투명한 유리 구두였다. 얼이 빠져서 구두를 바라보는 모습에 아이들은 잘 어울린다며 칭찬을 내뱉었다. 웬 유리로 만들어진 구두냐며 입을 열려던 비크로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그저 고맙다고 대답했다. 무도회의 시작 시간보다는 훨씬 늦은 시간이었지만 발 빠른 마법 말들로 비크로스는 벌써부터 보이는 왕궁을 쳐다봤다. 어머니가 알아보면 어떡하냐는 말에 아마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못아볼 거란 말을 듣긴 했지만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비크로스는 역시 이렇게 된 거 조용히 들어가서 조용히 먹고 나오기로 결정했다.
*
비크로스는 이를 악물었다. 무도회 시간에 늦게 들어온 것부터 ‘조용히’를 포기했어야 했던 거였다. 비크로스는 평소처럼 성큼성큼이 아니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발에 딱 맞는 유리 구두는 기분 상 벗겨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어쩔 수 없었다. 늦었다고 한 소리 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지만 시선이 집중되는 것부터 시작이 안 좋았다. 못 알아본다곤 했지만 여전히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비크로스는 자신에게 몰리는 시선들을 무시하며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는 온갖 식기들로 눈을 돌렸다. 사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반짝이는 식기에 담긴 음식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아무리 여러 가지 음식이 놓여있다 하더라도 한 접시 당 너무도 적은 양에 눈살이 살짝 찌푸려지나 싶다가도 깔끔하게 요리되어 접시에 가지런히 담긴 음식과 과하지 않게 꾸며진 걸 보니 저도 모르게 인상이 펴졌다. 갑자기 자신의 어깨를 잡는 사람이 생기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작게 만들어져선 적당히 숨길 수 있는 곳에 고정시켜둔 프라이팬에 손을 뻗으며 뒤를 도니 묘하게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비크로스?”
미간을 찌푸리고 자신을 보는 새까만 놈이 적잖이 각 잡힌 옷을 입고 있는 건 물론이고 새까만 색인 옷이 아닌 것에 비크로도 함께 미간을 찌푸렸다.
“최한, 네가 왜 여기에 있어?”
“그건 내가 할 소리 같은데.”
한눈에 봐도 아무리 왕궁이라도 서빙을 하는 이에게 이런 옷을 입히지 않을 거란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못 알아본다면서요, 아는 사람들도. 한숨이 튀어나오는 걸 애써 막았다. 아까부터 귀에 잘 꽂히던 몇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왕자님이 무슨 일이시지? 그 중에서도 귀에 꽂히듯 들리는 ‘왕자님’이란 단어는 무시하기엔 무리였다. 비크로스는 평소 막 대하던 놈이 이 무도회의 주인공 같은 걸 알아차리고 반쯤 체념한 상태에서 최한을 제대로 바라봤다. 꽤나 번듯하게 서있는 모양새에 할 말을 고르고 있을 때 최한은 비크로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으라고?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 최한에 비크로스는 홀린 듯 최한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수많은 샹들리에의 전등과 보석들이 빛을 내며 눈앞을 어지럽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손을 얹자 미소를 짓는 최한에 비크로스는 뭐라고 입을 열려던 입을 다시 그대로 다물었다. 볼 때마다 새까만 옷 위주로 주워 입고 나오던 놈이라 그런지 새하얀 옷을 입은 모습은 익숙하진 않았지만, 잘 어울리는 걸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순간적으로 덜컹거린 심장을 무시하면서 최한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며 비크로스는 최한의 모습을 피해 눈을 굴렸다.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떠들썩한데도 소문을 못 들었대서 그냥 아예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래, 꼴값 떨고 있는, 뭐?”
“뭐?”
비크로스는 익숙하게 구긴 얼굴을 마주하니 내가 알던 놈이 맞긴 하구나 싶어졌다. 그렇다고 굳이 자신의 말을 정정할 생각은 없지만, 아까의 최한의 모습은 그저 꼴값을 떠는 거였겠지 싶어진 비크로스는 최한의 말이 무슨 소린지 묻거나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그러니까, 홀의 중앙으로 온 자신을 알 수 있었다.
비크로스는 어머니조차 가르치시다 포기하셨긴 하지만 간단한 예절을 비롯한 것들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무도회의 주인공부터 춤을 춘다던가. 그리고 그 기억에 답하는 듯 잔잔한 노래만을 흘리던 악단은 아까보단 흥겨운 춤곡을 흘려보냈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니 최한은 아무렇지 않게 음악에 맞춰 비크로스를 이끌었다.
“미쳤어?”
“난 이미 미쳤지, 너에게.”
“평소랑 똑같이 헛소리를 하는 걸 보면 유감스럽게도 제정신이구나.”
여상히 헛소리를 하는 걸 보며 비크로스는 얼굴을 구겼다. 그래서, 무도회는 어떻게 온 거야? 그렇게 소란스러웠을 텐데도 소문 못 들었대서 아예 이쪽엔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아까의 말을 재차 반복하는 최한에 비크로스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피곤 웃음을 흘렸다.
“요정님이 도와주셔서.”
“……그래.”
믿어? 뭐, 일단 와서 함께 춤을 추고 있으니 과정은 중요하지 않지 않아? 그것 참 이상한 조미료로 간을 하고 맛있고 밥만 챙겨먹었으니 됐단 발언 같이 어이없는 발언인 건 알고 있냐? 그런데 춤 배웠어? 발 밟는 것부터 시작할 줄 알았는데.
비크로스는 최한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던 몸을 멈칫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이끌어지는 대로 따라갔더니 어릴 적 짧게나마 배웠었던 걸 몸이 기억했던 것 같지만 인식을 한 순간부터 틀려먹음을 비크로스는 빠르게 깨달았다. 이는 생각보다 큰 소리를 내며 무도회장 바닥에 내리꽂힌 유리 구두에 있겠다. 그래도 케일이 무언가의 손을 써둔 건지 깨질 생각은 안 하는 유리 구두에 안심하긴 커녕, 두 번째로 시작된 곡과 함께 사람들이 들어차기 시작하는 중심에 비크로스와 최한 모두 눈을 굴려 사람들의 틈새를 살펴봤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첫 춤이 시작되지 않았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중심으로 나왔기에 당장은 빠져나갈 틈새가 보이지 않았다.
“그냥 내가 이끄는 대로만 따라와.”
“그게 쉬웠으면 방금 그랬겠냐?”
“아까까진 어떻게 한 거고?”
“네가 춤추고 있다고 말한 것부터 틀려먹었으니 빠져나갈 틈이나 잘 찾아봐.”
아까 구두가 내리꽂힐 때 곡이 끝날 때라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다음 곡이 연주됐다. 경쾌한 리듬이 주를 이뤘긴 했지만 아까는 첫 음악이라 그렇다는 듯 경쾌한 걸 넘어서 다급한 템포의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왕자가 소드마스터니, 뭐니 하긴 했지만 날카롭게 내리꽂히는 유리 구두를 전부 피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정 안되겠으면 눈이라도 감고 있던가. 그거라고 쉬운 거 같진 않단 말을 내뱉으려던 비크로스는 결국 얕은 한숨과 함께 눈을 내리감았다. 양쪽에서 함께 각각의 춤동작을 해야 하는 거였지만 당장 못 빠져나가는 거, 이쪽을 보는 사람들도 몇 없을 것이고 알아서 어떻게든 하겠지 싶어 내린 결정이었다. 그 대신 붙어서 있어야 하는 탓에 자신의 발이 내리꽂힐 때마다 순간적으로 뭐라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아버리는 최한에 자신이 그의 발을 밟을 뻔 했구나 할 뿐이었다.
“이제 곧 12시네.”
곡이 몇 번 진행되자 어느 정도는 진정이 된 비크로스는 눈 뜨고도 적당히 최한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춤추는 동안이 주변의 간섭 없이 제일 조용히 있을 거란 걸 깨달은 이후론 결국 그냥저냥 끌려 다니고 있던 중이었다. 계속 추고 있다가 뒤늦게 빠져나오면 뭘 먹고 있던 상관을 쓰지 않겠구나 싶던 게 이유였다. 그리고 몇 마디씩 던지며 대화를 하던 걸로 인해 비크로스는 자신에게 통금이 걸려있단 걸 상기했다. 정확하겐 계속 있어도 상관없지만 마법이 풀릴.
무엇보다 왕궁 놀러오고 싶다고 같이 마차를 타고 온 세 아이가 있을 거라 생각하니 비크로스는 일단 최한의 손부터 놓고 봤다. 그리고 어이없는 표정의 최한이 붙잡으려 하는 것 같지만 비크로스는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다리를 빨리 움직였다. 딱딱한 구두가 달리기에 방해됐지만 손에 쥔다면 두 개나 되는 게 짐이 되지 않을 리가 없기에 점점 더 서두를 뿐이었다.
“비크로스!”
“넌 또 왜 따라오는데!”
무도회장에 들어오자마자 잡혀갖고 왕궁 음식은 정말 구경만 해본 것에 울컥하고 솟구치는 짜증 때문에 비크로스는 손에 쥐어들고 있던 걸리적거리는 치마를 놓아버리고, 대신 한쪽 유리 구두를 집어 들었다. 잠시 침착하게 숨을 고르던 그는 무서운 기세로 따라 달려오는 왕자란 놈을 향해 그대로 손을 내질렀다. 그는 앞서 말했듯 우연히 요리를 하게 된 이후 쉽게 보이는 재능과 함께 재미도 붙여나갔고, 식재료 하나하나 그의 손을 탔다. 그 중에서도 재배할 수 있던 식재료는 그의 손에서 길러지고, 운반됐다 할 수 있는데-이 식재료의 종류론 일단 호박이 포함된단 걸 강조해두겠다- 그리고 이는, 비크로스는 매일같이 무거운 무언가를 들고 팔을 움직였으며 유리 구두 따윈 정확한 명중률을 자랑하며 던져버릴 수 있단 것이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 왕자는 소드마스터였고, 검술뿐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신체적 조건이 보통 사람들보다 월등한 그는 자신을 목표로 똑바로 날라 오는 유리 구두 정도는 쉽게 잡을 수 있을 터였다. 안 봐도 뻔한 상황에 비크로스는 일단 남은 구두도 집어 들고 빠르게 맨발로 계단을 내려왔다. 곱게 자란 편까진 아니었지만 모래라도 있었다면 발이 아팠을 텐데, 그래도 야외긴 해도 아직 왕궁이라는 듯 깔끔한 계단엔 흙먼지도 찾을 수 없었다. 또한 다행히도 마차도 아래쪽에 바로 대기되어 있었기에 비크로스는 미끄러지듯 마차에 탔다. 세 아이도 왕궁 구경이 재밌었는지 조금 다급하게 달려서 온 상태로 아까 봤던 것들을 쉬지 않고 얘기하며 살짝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았지만 비크로스의 마음을 잘 아는지 곧장 부드럽게 움직이는 마차에 비크로스는 가빠오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집으로 갈 시간이었다. 집에 가기 전에 백마를 타고 죽을 둥, 살 둥 쫓아오는 왕자 놈을 따돌려야 할 것 같긴 하지만.
불안하게 창밖을 계속 힐끔거리자 온이라 불렸던 고양이―언제부턴가 고양이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가 여상하게 입을 열었다. 어차피 마법이 걸려있어서 따라잡히진 않을 거라는데~ 옆에서 홍이라 불렸던 고양이도 누나 말이 맞다고 하다 저 멀리에서 첫 번째 종소리가 갑자기 울려 놀라 털이 쭈뼛 섰다. 벌써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집까진 아직 거리가 있음에도 벌써부터 울린 첫 번째 종소리에 비크로스는 이를 악물었다. 마차는 분명 평범한 속도 이상을 내고 있고, 최한의 말 또한 이젠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집까지 도착할 수 있을 진 확실치 않았다.
“두 번째, 이제 세 번째까지.”
너무도 빨리 울려 펴지는 커다란 종소리와 함께 마차는 점점 덜컹거렸다. 집과 부쩍 가까워졌지만 마법이 풀리고 있는지 마차의 덜컹거림은 심해지기만 했다. 내부까지 원래의 호박에 가까워지기 시작하자 비크로스는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고 바깥을 훑었다. 집에 가까우니 여기서부턴 걸어서 가도 나쁘지 않겠지. 심호흡을 하며 아이들을 안아들었다. 정확하겐 라온을 등에 매달리게 하고, 온과 홍을 팔로 안아들었단 말이 더 맞지만, 오래 생각할 시간이 없는 상황에서 비크로스는 심호흡 몇 번을 하고 중심을 잘 잡지 못한 채 덜컹거리는 마차의 문을 열어젖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빨리 돌아와서 마차를 처분한 다음에 그 돈으로 독립이나 해볼걸 그랬나. 후회해도 늦은 건 맞지만 무도회에 갔음에도 결국 먹지 못한 왕궁 음식들을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열 번째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앞에 말이 남아있는지도 모르겠는 상황에서 비크로스는 재차 심호흡을 하고 다급히 달리다시피 마차에서 내려섰다. 내리는 반동에 엎어질 뻔하기도 했으나 앞뒤로 아이들이 있는 이상 어떻게든 버텨내니 열한 번째 종소리에 말들이 완벽하게 사라졌고, 열두 번째 종소리에는 호박조차 마법의 힘을 잃고 굴러 떨어져 박살이 났다.
좋아, 일단 호박의 속이 잘 익은 건 알겠군. 아이들을 내려주며 비크로스는 한숨을 삼켰다. 집에서 아주 먼 건 아니니 다행인가. 큼지막한 조각으로 박살이 난 호박의 조각을 주워들며 비크로스는 온과 홍, 라온에게 말했다. 호박수프 먹을래? 깨진 호박을 어떻게든 빨리 먹어야 하는 건 둘째 치고, 자신이 빨리 왔으면 됐던 거였으니 애들한테 미안하기도 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그래도 좋다고 고개 끄덕이는 애들을 보니 어찌됐던 잘 해결된 게 아닐까 싶어졌다. 원래 없던 기회가 생겼던 것뿐이니까.
그리고 왜인지 안 없어진 유리 구두는 버려둘 수는 없어서 조심스레 챙겨두었다. 나중에 팔아버릴까. 한 짝뿐이라 신을 수는 없겠지만 장식품으로는 꽤나 값비싼 가치를 지닐 것 같았다. 요정에게 돌려줘야 하는 건가 싶어 애들에게 물어보니 팔아도 상관없지 않겠냐는 소리에 비크로스는 수프를 저으며 마을에 있는 이런 걸 매입할만한 곳을 곰곰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정신은 없었지만 후에 독립할 자금이 생긴 건 물론이고 있던 인연이 새로운 인연과 함께 거듭 이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다지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
무도회의 다음날 아침 일찍 몸을 일으킨 비크로스는 무언가 찜찜한 기분과 함께 눈을 비볐다. 언니들이 새벽까지 서류를 처리하지 않는 이상 이 시간에 깨어있는 건 보통 비크로스뿐이었는데, 그만큼 조용한 아침공기는 산뜻했지만 비크로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지만 찜찜한 기분이 들더라도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는 건 무리였다. 이런 날은 푹 쉬는 게 최고일 텐데. 독립을 하고, 수많은 직원들을 고용한 상태의 음식점 주인이 아닌 이상 하루도 쉬지 못하는 비크로스는 어제 갑자기 오랫동안 춤을 추느라 혹사당한 몸에 있는 여러 근육들이 각자 욱신거림에 얼굴을 찌푸리고 방 밖으로 나섰다. 저도 모르게 늦장을 부린 건지 평소보다 조금 더 늦은 시각이라 아침식사 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했다.
평소보다 서둘러 간단히 씻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으니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맞췄음에 비크로스는 짧게 웃음을 흘렸다. 시간을 정확하게 맞출 때의 기분은 언제나 좋았다. 어제는 못 맞춘 시간 때문에 여러 가지로 아쉬운 게 많았지만. 무도회장에 들어가자마자 집중되는 시선이며 아슬아슬하게 마차에서 내린 걸 생각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됐다. 왕자 놈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인지.
“좋은 아침이야.”
“뭐야 미친.”
저도 모르게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튀어나온 말에 비크로스는 미간을 왕창 찌푸렸다. 내가 저놈 때문에 어제 무슨 고생을, 아니, 왕자라도 이렇게 남의 집에 들어와도 되는 건가? 내가 알 바는 아니지. 운 좋게도 옆쪽에 있던 어제의 프라이팬―드레스에 있던 걸 뒤늦게 생각나 확인해보니 그건 그때가 되어서 커지길 원해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줬다―의 손잡이를 손에 쥐었다. 그런 비크로스를 보고 최한은 멀리서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천으로 싸고 있던 유리 구두의 남은 한 쪽을 조심스레 내보이며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해주지.”
요리사 손에 물 안 묻히고 어쩌려고. 어이가 없어진 비크로스는 그냥 눈이 마주친 그 즉시 프라이팬으로 후려쳐 왕궁 앞으로 배달을 했어야 했나 싶었지만 소드마스터란 놈을 치려는 시도를 하는 즉시 실패할 건 둘째 치고 왕자라니 함부로 칠 수도 없는 법이었다. 그렇다고 손에 들린 프라이팬을 쥔 손의 힘을 풀 생각이 들진 않았지만 여하튼, 지금의 왕자 놈은 팔만한 곳이 마땅히 없어 방구석 작은 상자 안쪽에 숨겨버린 다른 한 짝의 유리 구두와 비슷할 정도로 처치곤란이란 건 똑같았다.
이른 아침이라곤 해도 해가 이미 모습을 보인 시간에 어두워 앞에 있는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프라이팬으로 후려쳤다고 변명을 해도 씨알도 먹힐 리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맑고 밝은 하늘대신 어두침침한 제 미래가 어두침침해진 것 같던 비크로스는 결국 일단 왕자를 일으켜 세웠다.
“야, 일어서봐.”
존대를 할까 싶다가도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 누가 알겠냔 생각에 비크로스는 찌푸려진 미간을 꾹꾹 누르며 프라이팬을 식탁에 올려놓았다. 그래도 말은 순순히 들으며 굽혔던 무릎을 폈다. 근 몇 년을 가게에서 일하는 날이 겹칠 때마다 대차게 싸웠던 걸 되짚어보면 딴사람 같을 정도였다. 그냥 일단 쫓아내고 볼까 싶다가도 어머니와 두 언니들이 일어날 때까진 한참 남았음에 식탁에 일단 앉혔다. 힐끔 쳐다본 시계는 짧게 얘기를 끝내고 호박수프를 대우면 된다고 하니 자기 자신의 빠른 행동력을 믿어보기로 했다.
이미 식탁에 앉힌 이상 오래 얘기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왕자란 놈이 왜 식당에서 일을 한 건데?”
“아버지가 여러 경험을 쌓으라고 하셔서.”
“…아무리 띄엄띄엄 이라고 하더라도 식당일을 몇 년을 꾸준히?”
“그 이유는 아무리 너라도 예상할 수 있지 않나?”
“그래, 그 망할 말본새는 여전하구나.”
…그리고 그런 아차 싶은 표정을 지을 거면 조금 천천히 생각을 하고 말하던가, 아니면 익숙하게 내뱉던 말들을 버리던가. 왕자란 놈이 저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건데? 너한테서. ……됐다. 방금 일어났지만 금세 피곤해지는 기분에 비크로스는 손으로 눈가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내리눌렀다. 아직도 어머니나 언니들이 일어나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혹시 하는 마음이나 아침을 준비해야 하는 걸 생각하면 불안한 시간이었다.
“일단, 나는 네, ……그거에 거절을 할 거다.”
말을 골랐지만 ‘프러포즈’ 말고는 마땅히 칭할 말이 없어 단어의 부분을 흐리게 발음했지만 못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되진 않았다. 프러포즈도 여러 가지를 다 잘라먹고 물이니 뭐니 하는 걸 보면 저 정도 잘라먹어도 알아서 알아들었겠지. 그리고 실제로 그런대로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일단 거절이란 단어에 반응을 한 건지 아까보다 찌푸려진 얼굴을 보니 단어 하나라도 제대로 들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난 독립을 할 때까지 연애고 결혼이고 뭐고 생각 없어.”
“그럼 독립만 하면 생각이라도 해줄 건가?”
“……그게 언제가 될 줄 알고?”
언제가 됐던 기다리면 돼. 내가 그 몇 년 동안 그 가게에서 있던 걸 아직도 추측하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뭐라고 덧붙이곤 싶어도 자신을 기다리겠다는 놈을 그저 꺼지라 할 수도 없기에, 비크로스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 기다려보던가. 떨떠름하게 말을 뱉자 다시 슬쩍 웃음을 짓는 최한의 모습에 비크로스는 입을 다시 꾹 다물었다. 일할 땐 그토록 안 웃고 찡그리고 시비만 걸던 놈이 이제 뭐가 됐던 웃고 보는 건가.
“그래서, 빨리 독립하고 싶어?”
“독립만 놓고 봤을 땐 그렇겠지.”
“시켜줄까?”
돈이라면 쌓였을 왕자가 말하는 건데, 뭐냐 묻지 않아도 무얼 뜻하는 건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됐고, 독립은 내 돈 모아서 할 거다. 그리고 이제 다들 일어날 시간이니 그만 나가. 딱 잘라냈음에도 평소에 시비가 붙으면 끝까지 이 악물고 받아치던 놈은 연기였는지, 뭔지 순순히 일어섬이 의심스러워 찡그린 채 바라봤다. 이따 식당에서 보자. 내가 오늘 식당에 가는 줄 어떻게 알고? 그 정도 정보도 못 구하면 왕자라고 할 수 있어? 허이고, 이젠 당당해졌다, 그냥 지 입으로 왕자라 하고? 그 왕자랑 누구보다 가까워질 사람이 넌데, 넌 조금 그 단어에 익숙해지는 건 어때?
그 말과 함께 최한은 비크로스에게 유리 구두를 건넸다. 내가 네 발에 직접 신겨주는 걸 원해? 네가 그런다면 그럴 수 있는데. 비크로스는 천연덕스러운 최한의 모습에 이를 부득 갈며 유리 구두를 건네받았다. 진짜 미쳤지? 아니다, 미친 건 나였네. 널 바로 쫓아내지 않고 집에 들였다는 점에서부터 정상인 실격이야. 그래, 사랑한다고? 나도 사랑해. 비크로스는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천천히 집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최한의 뒤통수에 손에 쥐어진 유리 구두를 곧장 내리꽂아야하나 짧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저 미친놈이 저딴 말을 어디서 배워서 온 거야? 사랑? 사랑한다고? 지금껏 그렇게 싸워댔으면서? 너무 어이가 없으니 웃음이 나온다는 걸 직접 경험해보고 있는 비크로스는 한숨을 내쉬며 식탁에 유리 구두를 내려놓으며 저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목부터 열기가 올라옴에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미친 건 저 놈뿐이 아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