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수의 갑작스런 귀환. 로운의 모든 것 = 성냥팔이 소녀의 환상
귀환은 빙의와 마찬가지로 어느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이루어졌다.
작업곡 : https://youtu.be/xjSp2sIQAWY
*회귀 전 김록수는 흡연자고 회귀하면서 금연했다는 뇌피셜.
***
김록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 잘난 이능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능이 발현되기 전에도 그는 활자를 읽는 것을 즐겨했으니까.
사내가 읽어내린 문장들은 지독한 삶을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게 만드는 활력이었고 생기였으며 글 속에서 살아 숨쉬는 등장인물들은 그가 가질 수 없었던 행복을 보여주었기에, 그는 이야기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필연이었다.
***
그가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화려한 헤니투스 가의 기둥이 아닌 빛바랜 기억의 구석에 머무르는 낡은 천장이었다.
“또 이 꿈인가.”
낮은 한숨을 내뱉으며 록수는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자신은 꽤 자주 김록수일 적의 꿈을 꾸고는 했다. 전 팀원들, 정수, 그리고 제 신조를 가르쳐주신 팀장님. 때로는 자신이 구해 준 사람들이 나오고는 했다. 그랬기에 그는 이 꿈 또한 그 연장선상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자 먼 기억 속에서부터 끄집어내진 자신의 방과 다를 바 없이 구현된 모습에 록수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번의 꿈은 아침인지 작은 방의 창문으로 새소리가 따스한 볕과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머리맡에는 자신이 읽다 만 영웅의 탄생이 놓여 있었고 달력 또한 그가 이곳에서 사라진 날의 날짜를 표시하고 있었다.
“젠장, 이번에는 또 누가 나오려고.”
신음을 닮은 욕설을 내뱉으며 록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운 사람들이 나오는 꿈은 그에게 향수를 부르면서도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이번에는 누가 나올지, 아물 새도 없이 후벼지는, 그리고 곧 후벼질 상처를 부여잡으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으로 다가가 폰을 들어올렸다. 수년이 흘렀음에도 익숙한 동작으로 잠금을 풀어낸 그는 메신저를 눌렀다. 안부와 업무로 뒤덮인 수많은 메시지들 사이에서 록수는 가장 위에 놓인 1를 눌렀다. 팀장님, 어젯밤에는 잘 들어가셨나요? 장문의 글의 시작을 알리는 문장이었다. 내용은 예상하고 있던 것이었다. 팀원 중 자신과 가깝던 누군가가 죽었고, 자신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 퇴사해보겠다는 말을 풀어 쓴 긴 이야기. 자판을 눌렀다 지운다. 영웅의 탄생 속으로 들어오기 전 늘 적던 말이었을 터인데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누르기 힘들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앞으로 남은 기간 잘 부탁하고, 이곳에서 나간 후에도 잘 지내라. 수도 없이 적었던 이 포장된 다정함을 날이 선 꿈들을 꾸며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던 탓일지도 모른다. 결국 전송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 록수는 핸드폰을 책상에 던지듯 내려놓는다.
탁,
날카로운 금속의 부딪힘 사이로 무언가의 둔탁한 소리가 록수의 귀로 들려왔다. 의문스레 고개를 숙여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자 책상 아래에 떨어진 책 한권이 시선에 들어온다. 손을 뻗어 책을 들어올리자 ‘성냥팔이 소녀’ 라는 책의 제목이 보인다. 기억의 서재를 뒤지자 선명하게 떠오른 하나의 이야기. 성냥을 파는 소녀가 절망 속에서 마주한 행복한 환상들, 그리고 결국 그 환상에 잠겨 가장 보고싶어한 사람과 함께 행복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내용이었지. 문득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올라온다. 김록수의 감각은 던전 브레이크에서 시작되어 영웅의 탄생을 거치며 발전한, 쉬이 무시할 수 없는 그런 류의 것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제 직감이 울리는 비상벨을 넘어갈 수 없었다.
“빌어쳐먹을,”
어쩐지 꿈 치고는 묘하게 생생하더라. 그의 입술이 굳게 다물린다. 자신도 모르게 턱에 힘이 바짝 들어간 채로 록수는 책을 책상 위에 소리나게 내려놓으며 창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조금은 다급한 걸음으로 그는 유리문을 열고 더운 열기가 스쳐오는 베란다로 나간다. 영웅의 탄생 속에서 수년이 흐른 것 과는 다른, 기억 속과 변함없는 무더운 여름하늘을 바라보던 김록수의 입매가 뒤틀린다. 귓가로 헤니투스 영지였으면 들릴 리 없는 자동차의 찢을 듯 한 클락션 소리, 한데 뭉개져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소음이 되어 섞여들어온다.
“그래서, 저쪽 세계에서 쓸모가 다 끝났다고 돌아온거라도 되나? 망할 신 같으니라고”
짜증스레 주머니를 뒤지자 나오는 익숙한 상표와 라이터 한 개. 영웅의 탄생으로 넘어간 후에 담배를 끊은 지 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그는 필터를 물고 불을 지폈다. 하늘로 올라가는 연기를 바라보며 김록수는 입에 문 대를 일그러트리듯 씹었다. 자신의 삶에 들어찬 온기는 단 한번도 머무르지 않았다. 전 팀장님도, 정수도, 자신의 팀원들도. 그리고 자신의 새로운 가족들. 나의 사람들 조차.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김록수는 예의 그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무심하게 담뱃불을 난간에 비벼 껐다.
다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김록수가 영웅의 탄생에서 돌아온지 수개월이 지난 후, 그와 그의 팀원들은 매일 그랬듯 바쁜 하루를 보냈다. 김록수 또한 자신의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적응해나갔다. 어쩌면 이미 수도 없이 잃어본 사람의 체념일지도 몰랐다. 가끔 그리운 사람들의 환상이 꿈에서 뿐 아니라 현실에서 드물게 보이는 것을 제외하고도 그는 그저 그런, 이전과 다르지 않은 한 때를 보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서늘함이 바짝 다가온 겨울 중에서도 특별하다 세간에서 일컫는 날, 크리스마스 이브가 불쑥 앞으로 걸음 했다. 김록수의 팀원들은 늘 그렇듯 그에게 올 한 해 동안 무사히 넘겼으니 매년 진행해온 작은 파티를 하자는 제안을 올렸고 록수는 늘 그래왔듯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승인을 내렸다. 물론 김록수 또한 연례행사와도 같은 이 작은 파티를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지만 어쩐 일인지 올해만큼은 가고 싶어지지 않았기에 그는 팀원들에게 자신은 참석하지 않는다며 단단히 못박아두었다. 물론 그들의 열화와도 같은 반항에 잠시 팀 내부가 시끌시끌했지만 팀장의 의지가 확고한 것을 느낀 팀원들은 한숨을 내쉬며 곧 선약이 잡히셨으리라 생각하며 그에 대한 마음을 고이 접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빠지지 않았던 록수였기에 팀원들은 그를 데려가려는 의지 대신 그의 선약 상대를 알려는 투쟁심이 새록새록 솟아나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묘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알아챈 김록수는 무던히 무시하려 노력했지만 차차 쌓이는 스트레스가 한계에 도달해 가기 시작한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팀장님, 이브에 데이트라도 가시나요?”
그리고 결국 어느 패기넘치는 신입의 말에 김록수는 간신히 유지하던 이성의 끊이 이미 닳아버져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적당히 하지 그래?”
내가 아무리 편하더라도,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는거야. 신입. 인식하지 못한 채 날카로운 으르렁거림과 함께 나간 말의 존재를 김록수는 신입의 창백한 표정을 보며 깨달았다. 분명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신입은 자신이 허용하는 선 안에서 평소와 같은 농담조로 던진 말이었을 터인데. 그래, 여유가 없는 것은 김 록수, 자신이었다. 영웅의 탄생에 들어가기 전 자신이었다면 분명 이 정도는 자연스러운 농담이었겠지만, 지금의 자신은 낭떠러지 위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상실은 익숙하다며, 자신은 괜찮다며 위안하던 말들이 무색하게 지금의 김록수는 무너져 내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
그 사건이 있은 후 김록수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라온, 온 홍, 최한과 로잘린, 헤니투스 가의 사람들, 에르하벤, 그리고 알베르. 그들의 부재가 자신에게 너무나도 크게 다가왔기에, 그리고 이 상태로는 애꿎은 사람들에게만 화풀이를 닮은 감정을 쏟아낼 것 같았기에 그는 자신의 팀원들에게 조차 희로애락 그 어떤 감정도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살얼음과 같은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크리스마스 이브, 먼저 퇴근해보겠다는 팀원들을 보내며 김록수는 텅 빈 사무실을 정리하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유리문을 열자 들어치는 서늘한 밤공기에 그는 옷깃을 여몄다. 회사가 시끌벅적한 번화가에 위치했기 때문인지 사람들의 말소리와 행복의 노랫소리, 기쁨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맺혔다 사라졌다.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하던 그는 문득 크리스마스의 선율이 들려오는 화려한 쇼윈도 앞에 멈추어 섰다. 행복한 소음 사이로 그리운 아이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쇼윈도의 불빛 사이에서 익숙한 환상이 스쳐지나갔다. 붉은 털뭉치와 은빛 털뭉치, 그리고 밤하늘을 닮은 새까만 용 하나. 그 환상을 애써 자신의 시선에 담아보려 바라보고 있으니 시야가 점차 흐릿해져간다. 그리운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으려 애써 붙잡아보지만 어느새 사라져버린 환상에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순간 침식하듯 몰려오는 외로움에 록수는 타인의 온기라곤 하나 없는 집으로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느 곳이던 자신의 텅 빈 목적지보다는 나을 것 같았기에 그는 결국 몸을 틀었다.
***
정처 없이 발 딛는 대로 한참을 걷던 록수는 어느덧 번화가에서 멀어진 한적한 공터로 들어섰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박자박, 살얼음이 낀 바닥을 딛는 그의 발소리가 고요한 밤공기를 뒤덮었다. 공터의 구석에 놓인 벤치에 다다른 김록수는 다리에 힘이 풀린 사람처럼 털썩 주저앉았다. 주머니를 뒤져 마지막 남은 담배개비를 꺼낸 그는 입에 물고 불씨를 지폈다. 그 어느 날보다도 니코틴이 가장 간절한 날이었다.
하늘로 향해 올라가는 담배연기를 바라보던 김록수의 시야가 깜빡 점멸된다. 어두운 밤의 풍경 사이로 화려한 태피스트리와 벽지가 흐릿하니 모습을 드러낸다.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황궁의 집무실. 기억 속과 한 점 다를 바 없는 그 풍경에 그의 눈가가 붉어진다. 어느덧 선명해진 환상의 가운데에는 가슴 속 깊이 묻어둔 자신의 연인이 자리해 그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로운의 왕세자, 그 누구보다 고귀한 자리에 올라갈 자. 그리고 제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람.
나의 황제, 알베르 크로스만.
과거의 기억이 김록수를 덮친다. 서로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케일 헤니투스가 아닌 김록수 그 사람 자체에게 의미가 부여된 날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의 로운은 어느 때 보다도 그 세가 강대했고 착실하게 제국으로 가는 전철을 밟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화려함의 이면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노력 그리고 과로가 묻어있었으며 그 선두에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왕세자 알베르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날은 여느 날과 같이 알베르가 철야를 하며 일에 치여가던 중이었다.
“그래서 그 일은 언제 끝난답니까?”
왕세자 집무실의 너른 의자에 나른하니 누워 달달한 과자를 먹던 케일이 도착한지 수 시간만에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우리 로운의 영웅, 은빛 방패 공자가 일을 도와주면 이 태양이 참으로 기쁠 것 같다마는”
“헛소리 하지 마세요. 저하, 오늘은 도와주러 온 거 아니니까.”
편안한 백수 생활 보장해주시기로 하셨지 않습니까? 딱 잘라 거절의 의미를 담은 문장을 내뱉으며 케일은 팔을 뻗어 작은 상 위 접시에 놓인 과자를 집어 들었다. 와득, 달콤한 맛이 입 안에 퍼지는 것을 느끼던 그는 문득 드는 위화감에 고개를 들어 알베르를 바라보았다. 분명 기름칠 잘 된 혀로 서운하다느니, 자신에 대한 사랑이 이 정도밖에 안되느니 하며 서러운 척을 했어야 할 왕세자의 말들이 들려왔어야 할 참이었다. 의아해하는 케일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한 손에 서류뭉치를 쥔 채 책상 위로 소리 없이 엎어진 왕세자의 흐드러진 금발이었다. 낮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난 케일은 나긋한 발걸음으로 그를 향해 다가갔다. 허리를 숙이며 팔을 뻗어 종이를 쥔 알베르의 손을 천천히 그러쥐자 왕세자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했다. 알베르의 몸 위로 그늘진 케일의 그림자 때문인지 왕세자의 눈 아래 짙게 내려앉은 다크서클은 유독 그의 몰골을 초췌하게 만들었다.
“케일”
알베르의 입술 새로 낮게 흘러나간 이름에 그는 여상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둘의 이마가 맞붙자 케일의 붉은 머리카락이 사르륵 잡힌 손 위로 흘러내렸다.
“알베르, 우리 오늘 하루만 놀러 갑시다.”
아, 이건 데이트 신청이 아닌 통보인거 알죠? 그 차이는 아시리라 믿습니다. 자신의 연인의 환한 미소에 알베르는 오싹한 소름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알베르는 케일의 손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케일이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창문으로 끌고 갈 때 까지만 해도 알베르는 피곤에 잠겨 멍하니 그의 행동을 바라만 보았다.
벌컥, 창이 열리자 밀려 들어오는 서늘한 밤공기에 케일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가죠, 저하.”
“어, 어? 공자..?”
짧은 웃음을 터트리며 케일은 고대의 힘을 끌어올렸다. 바람의 소리는 사뿐하게 둘을 들어올려 별이 촘촘히 박힌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
케일이 알베르를 데리고 도착한 곳은 로운의 너른 수도와 황실이 펼쳐진 산의 중턱에 위치한 공터였다. 사뿐히 알베르를 내려놓은 케일은 알베르의 허리를 잡던 손을 푸르고 공터 가운데 놓인 돌 위로 올라갔다. 멍하니 자신을 향해 시선을 주던 알베르를 힐끗 바라본 케일은 돌에 앉아 손등으로 턱을 괴며 알베르를 힐끔 바라보았다.
“저하, 안 옵니까?”
“돌겠네.”
이런 곳은 또 언제 안거야. 중얼거리며 알베르는 케일을 뒤따라 너른 돌 위로 올라갔다. 연인 옆에 주저앉은 왕세자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눈앞에 펼쳐진 로운의 수도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보니 또 감흥이 새롭네.”
대답을 바라지 않는 듯 읊조리는 알베르의 모습에 케일은 그저 그의 어께에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둘의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갔다. 오래간만에 맞이하는 평화였다.
***
한참을 침묵 속에 시간이 흘렀을까 어스름한 새벽의 푸르름에 감싸인 집들의 불빛이 하나 둘 꺼지는 것을 구경하던 젊은 영웅은 제 옆에 앉은 왕세자를 바라보았다. 황금을 빚어 만든 금발에 새파란 하늘을 닮은 저 눈 뒤에는 자신만 아는 모습이 존재했다. 찬란한 태양이 아닌 어두운 밤과 저 나무를 닮은 그 모습. 알베르의 본질. 본질이라는 단어를 입 안에서 굴리던 케일은 자신과 시선을 마주하며 의문을 담은 눈빛을 짓는 알베르의 시선과 마주하자 툭 하고 내던졌다.
“알베르, 본모습을.”
당황스러운 문장에 흠칫 놀라는 것도 잠시, 알베르는 낮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여 케일의 뺨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그러지. 나의 공자.”
다정한 문장과 함께 찬란한 금실이 거뭇하니 어둡게 물들어갔다. 새파란 눈동자가 속에서부터 밝은 어둠을 닮은 색으로 번져나간다. 그 모습을 잘 만든 조각상 감ㄸ상하듯 바라보던 케일은 손을 뻗어 연인의 어두운 피부를 손끝으로 살짝 쓸어내렸다. 알베르, 입을 살짝 벌렸다 닫는다. 케일의 목 깊숙한 내부에서부터 충동적으로 단어가 튀어나온다.
“김 록수입니다. 알베르,”
이 이름을 기억해주세요. 충동적으로 내뱉었음에도 케일의 기분은 썩 나쁜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편에 속했으니. 어쩌면 새벽의 충동이었을지도 모른다. 김 록수, 작게 입 안에서 이름을 굴려보는 알베르의 모습에 케일은 기쁨이 담긴 웃음을 자그마하게 터트렸다. 자신의 연인이 행복한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본 다크엘프는 그에게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그 이름 또한 제 것이니까요.”
모든 것은 저하가 황제가 되신 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알베르와 시선을 마주치며 케일은 속삭였다. 불경한 놈. 알베르는 연인의 조곤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미자 마주 웃어보였다.
“불경해서 사랑스러워, 그것이 케일 헤니투스. 은빛 방패 공자의 본질인가? ”
예상치 못한, 그럼에도 가장 듣고 싶었던 물음에 케일은 입매를 비틀었다. 욕심이었다. 케일 헤니투스의 가장 큰 이해자인 만큼,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을 거라 믿었고 그 믿음에 대한 보답을 받을 수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처음으로 자신의 본질을 알려주었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첫 번째 사람이었다. 케일 헤니투스, 아니 김 록수의 욕심은 그렇게 조금씩 몸집을 불려나갔다. 답을 들으려는 물음은 아니었던 듯 알베르는 케일의 암갈색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눈매를 휘어내릴 뿐이었다. 문득, 케일의 시야로 밤하늘에 한줄기 빛이 떨어졌다.
“별똥별이네요 저하.”
“그러게, 소원이라도 빌었나?”
소원은 말해주면 이루어지지 않는답니다. 선명한 대답을 들려주는 대신 케일은 눈을 감았다 뜬다. 알베르 크로스만, 밤을 닮은 연인이 그를 향해 손을 뻗는다.
“김 록수.”
그의 것이었던 이름을 부르며 볼을 쓰다듬는다.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이 되지 않은 따스함에 김록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알베르를 붙잡는다. 손 끝에 힘을 주어 손바닥을 잡아보지만 곧이어 허공을 스치는 그 감각이 서늘해 팔을 내려 손바닥을 바라본다.
“알베르.”
다 타버린 대에서 담뱃재가 바닥을 향해 떨어진다. 불이 꺼지고 환상이 흩어진다. 더 이상 그가 존재하지 않은 허공을 바라보다 일어나려 움직이다 탁,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텅 빈 허공에서 시선을 옮기자 들어온 것은 옆에 있었는지도 모를 낡은 책이었다. 익숙한 제목에 책을 주워들자 펼쳐진 장에 그려진 소녀와 할머니의 삽화가 눈에 들어온다. 삽화 아래에 적힌 문장을 혀끝으로 굴리다 입 밖으로 뱉어본다.
“별똥별은 누군가가 죽어가는 상징이란다,”
그 아름다움의 이면에는 슬픔이 숨어있는 법이지. 기억을 더듬어 올라간다. 알베르에게 김록수를 알려 준 날 그날에도 똑같이 별똥별이 떨어졌었다. 영웅의 탄생에서 등장하면 안 되었던 인물의 죽음이었다. 김록수가 그에게 본질을 알려주었기에, 케일 헤니투스이자 동시에 김록수로서 살아가고 싶었기에 영웅의 탄생은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닐까. 불길한 예감이 록수의 생각을 잠식한다. 삶에 있어서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김록수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기에 자신은…
멍하니 글귀를 바라보던 사내는 웃음을 터트렸다.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의 건조한 웃음이었다.
알베르 크로스만, 로운의 태양, 자신의 연인. 나의 저하, 당신이 황제가 되는 모습은 보고 싶었습니다.
***
동화의 주인공은 보통 모두들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이야기를 끝맺는다. 하지만 록수의 삶은 동화가 아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아닐거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렇기에 김록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