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U이며 이 글에서 나오는 라크는 성인을 기준으로 합니다. 다만 불편하신 분이 계시다면 읽지 않으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비크로스 몰란은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바구니에 음식을 담았다. 스카프가 원래 빨간색이었나? 어째 목을 죄여오는 것만 같은 스카프를 당겨 힘을 풀었다. 케일 헤니투스는 굳이 나가는 준비를 마친 비크로스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늦지 않게 돌아오라는 말을 덧붙였다. 요즘 숲에 늑대들이 나타난다던데. 조심하고. 비크로스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밖을 나섰다. 되도록 음식이 식기 전에 아버지의 식탁 위에 올려 맛을 보게 하고 싶었다. 새벽에 막 잡은 멧돼지 고기가 조금 남은 것을 아버지에게 가져다드려도 되냐 묻자 케일은 흔쾌히 그러라 허락했다. 다른 일 때문에 홀로 떨어져 지내는 아버지를 감히 자신이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런 참견이 불쾌하실 수도 있겠지. 그러나 어쩐지 오늘은 변덕을 부리고 싶었다. 케일 헤니투스도 그걸 알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까. 비크로스는 숲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울창한 숲길을 홀로 걷다보면 바스락거리며 저를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미행이라기에는 숨길 생각이 없는 건지, 그저 인기척을 숨기지도 못하는 순진한 존재인 건지. 비크로스는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렸다. 누구냐는 물음에 저보다 키가 좀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가 나무 뒤에서 튀어나왔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비크로스는 코트에서 비도를 꺼낼까 만지작거리던 손을 내렸다. 귀나 꼬리를 보면 영락없는 늑대족이었지만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이 곳은 늑대족이 살던 숲이 아니다. 여러 가지 가설을 떠올리고 있던 차에 라크는 비크로스의 바구니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먹을 걸 주시면 살려 드릴게요. 비크로스는 어이없어서 외쳤다. 너 지금 그걸 협박이라고 한 거냐? 라크가 입을 다문다. 상대를 잘못 고른 게 아닐까? 생각하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것 같았다.
너 말고 다른 늑대족이 얼마나 있는데. 정신 차리고 보면 곧이곧대로 묻는 말에 답하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열 댓 마리 정도……. 근데 이 작은 바구니 하나 털어서 먹이겠다고? 그건……. 이 남자는 답답해하고 있는 건가. 남자의 몸에는 미미하게 음식 냄새가 여럿 섞여서 났다. 깔끔한 향수 향이 워낙 진해서, 자신이 늑대족이 아니었다면 모를 정도로. 그리고 그가 든 바구니 안에서는 입 안에 절로 군침이 돌 정도로 지독하게 식욕을 돋우는 냄새가 풍겼다. 구운지 얼마 안 된 고기의 냄새였다. 동생들이 먹으면 아주 좋아할 것 같은데. 습격을 받아 어른들을 전부 잃고 도망치듯 거처를 옮기고 나서부터 마땅히 전부 두둑하게 먹을 식량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사냥에 능숙한 아이도 그리 없으니 할 줄 아는 자신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며 숲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처음 만난 인간. 남자는 한숨을 쉬다가 숲 저편의 어딘가를 보며 고민하는 듯 하더니 대뜸 라크에게 바구니를 떠넘기고 손을 털었다. 안내해. 네? 안내하라고. 그게 차기 늑대족의 우두머리인 라크와 요리인으로서의 비크로스의 첫만남이었다.
인간의 변덕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비크로스는 제 다리에 달라붙는 늑대족 아이들을 보며 이것을 후회해도 되는지 고민했다.
“비크로스 삼촌! 오늘은 칼 쓰는 거 알려줘요?”
아니다. 후회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가르쳐 주지도 않은 삼촌 호칭을 대체 어디서 배워서 저렇게 써먹는지 라크를 쳐다보자 눈을 피했다. 너냐? 너냐. 라크가 스프가 다 졸여졌는지 확인해보러 가야겠다며 자리를 떴다. 저게 이제 약아서는. 비크로스는 여태껏 여러 일을 해왔지만 보모일 마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제 발로 걸어 들어가서. 지독한 변덕 탓에.
동정심에, 동질감에, 그 날 따라 이상하던 변덕에 딱 한 번 그들을 도와주고 말자며 그 잠깐의 시간동안 결심했더랬다. 사냥감을 찾고 잡는 법과 조리하는 법만 간단히 알려주면 나머지는 오늘처럼 나한테 피해줄 일도 없고 알아서 잘하겠지. 스스로 일을 늘린 꼴이기야 했지만 평소에 하는 일에 비하면 간단하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케일 헤니투스의 저택에 열매나 과일을 한바구니 따놓고 간 라크의 행동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늑대족들과 연을 맺게 되리라고는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그것도 삼촌 취급을 받으며. 케일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면 그는 뭐 네가 알아서 하겠지. 라는 말만 뱉을 뿐이고 비크로스의 아버지는 별난 취미를 들였다며 지나갔다. 라크나 늑대족들은 그 사이 비크로스를 진심으로 따르기 시작한 모양이라, 그러지 않아도 어린아이에게 약하단 평가를 듣던 비크로스에게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라크가 끓인 수프는 아주, 라고 말하기에는 한참 멀었으나 그만하면 나름 훌륭하다고 빈 말을 조금 보태어 말할 수준이 되었다. 슬슬 혼자 알아서 하게 찾아오지 않아도 되겠다 싶을 즈음에 라크가 따로 비크로스를 불러 말했다. 혹시, 늑대왕의 배우자가 되어주지 않으시겠어요.
비크로스는 그 날 오랜만에 요리를 하다 제 손을 칼로 썰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