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 현대 AU가 가미되어 있습니다.
- 아딘, 발렌티노, 케일, 알베르 (같은 반)
- 아딘발렌이 맞습니다
[아딘발렌] 석판은 사랑을 타고
W. 박샨
“…”
발렌티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케일은 발렌티노의 표정을 살피며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말을 해도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의 앞에는 회색 머리칼을 단정하게 넘기며 미소를 짓고 있는 아딘이 자리하고 있었다.
케일은 그런 아딘을 바라보며 혀를 작게 찼다. 쯧, 저건 뭐가 좋아서 저렇게 웃고 있는 거야. 그런 케일의 행동을 가장 가까이 있던 발렌티노는 들었으나 아는 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른 척 하며 더욱이 인상을 찌푸렸다. 발렌티노 역시 케일과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왜? 하필 왜?”
“반응이 너무한 거 아닌가?”
너라면 안 그러겠냐. 케일은 아딘을 바라보며 다시 혀를 쯧, 하고 찼다. 이번에는 꽤 큰소리가 났다. 케일은 그런 것은 상관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채 아딘을 바라보고 있다 시선을 돌렸다.
칠판 가득 쓰여 있는 하얀 글씨들. 분필 가루가 주변에 날리는 거 같은 기분이 들었으나 절대로 그럴 리 없는 블랙 보드. 케일은 그것을 보며 오늘로써 세 번째의 혀를 차고는 발렌티노의 어깨에 손을 올려 두드렸다.
<빨간머리 앤 연극 역할 분배>
앤 役, 발렌티노.
길버트 役, 아딘
:
아, 발렌티노는 머리가 아파왔다. 왜 자신이 앤 역할을 하게 된 것이며, 왜 하필 길버트의 역은 아딘인지. 그것보다는 앤의 역할은 자신 보다 케일이 더 어울리지 않은가? 제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두드리는 케일을 향해 발렌티노는 시선을 던졌지만 그의 마음은 전해지지 않았다.
“계속 그렇게 인상 쓰고 있을 건가?”
“그럼 안 하게 생겼나?”
“나랑 상대 역 하는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하고 있는 아딘을 향해, 발렌티노는 지금 당장 석판으로 저 머리를 깨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말을 지금 쟤는 무슨 생각으로 하고 있는 것일까. 케일을 향해 시선을 돌린 발렌티노였으나 케일은 고개를 젓기만 했다. 그래, 우리로서는 저놈의 머릿속을 다 알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
“그래도 석판 깨기가 있으니까 버텨보면…”
“그걸로 마음이 다 풀리진 않을 거 같아서 말이지.”
발렌티노는 작게 한숨을 쉬며 케일을 향해 돌린 시선을 다시 아딘을 향해 돌렸다. 아딘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그들을 보며 미소를 지으며 보고 있었다. 그런 아딘을 보던 발렌티노는 다시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짚었다.
“아주 신이 나셨네.”
“되게 재수 없지 않나?”
“딱 내가 하고 싶은 말.”
거기, 다 들리네.
아딘을 앞에 두고 두 사람은 그를 깠다. 아딘은 그것을 들으면서도 미소를 지었다. 케일은 그런 아딘을 보며 고개를 젓고는 소근거렸으나 딱히 작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일부러 더 들리게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걸 알고 있었으나 아딘도 딱히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저들이 제게 왜 저런 말을 하는 지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좀, 사고를 치긴 했지, 내가. 근데 이렇게 까일 일이었던가.
“가만히 듣고 계십쇼.”
케일은 그런 아딘에게 가차없었다. 발렌티노도 그렇게 유하게 넘어가진 않았지만 케일보다는 나았다. 소꿉친구라는 것이 그를 도와주는 듯 했다. 그렇게 말한 케일은 발렌티노와 몇 번의 말을 조금 더 주고받는 듯 하더니 다시 발렌티노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자리를 떠났다.
“…”
“…”
그리고 케일이 떠나고 남은 두 사람은 더 이상의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시선을 먼저 돌린 것은 발렌티노였고, 그 뒤를 따라서 아딘 역시도 시선을 돌렸다.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딘이었고, 그것을 용서하지 않은 것은 발렌티노였다.
두 사람은 한참 말을 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다 종이 치는 순간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 * *
“아니, 그래서 그대로 하게 됐다?”
연극 발표회의 역할 분배에 대해 늦게 알게 된 알베르는 발렌티노가 책상 위에서 녹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허어, 하고 숨을 뱉어내었다. 케일은 그런 발렌티노의 등을 느리게 두드렸고, 발렌티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거절 안 하고?”
“그럼 제가 하는데요.”
케일의 대답에 발렌티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케일이 하면 진짜로 석판으로 머리 깨는 짓 하다가 죽여버릴 거 같아서 걱정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시키기에는 다른 놈들에게 아딘이 다가가는 게 꺼려져서 결국 제가 하겠다고 했다.
발렌티노의 말들에 알베르는 다시 허어, 하고 숨을 뱉어내었다. 이러나 저러나 결국 그를 잡아둘 수 있는 것은 발렌티노뿐이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별말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연습은 언제부터 하지?”
“밥 먹고 바로, 한다는 거 같던데.”
“대본은?”
“이미 다 만들어 뒀다는 거 같습니다.”
들려오는 답들에 더욱이 발렌티노가 안쓰러워진 알베르였다. 그의 시선 끝에는 안쓰러움이 가득 담겼다. 알베르의 시선에 발렌티노는 그저 고개를 저어낼 뿐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래, 어쩔 수 없는 일.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대본 왜 이래?”
“각색을 하다 보니…”
대본을 받아본 발렌티노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석판 깨는 장면은 있다. 그래, 아주 잘 있었다. 근데 그 뒤에 있는 대사가 정말 말도 안 됐다. 아니 무슨 석판을 머리에 깨부순 걸로…
“사랑인가, 라는 대사를 해?”
“그럴수도 있지!”
아니, 절대 그럴 수 없는데. 발렌티노는 눈으로 그렇게 말을 하며 대본을 쓴 거 같은 반 아이를 바라보았다. 절대로 그럴 수 없는 일인데, 대체 무슨 소설을 보면 그런 게 생기는 건가. 케일 역시 같은 눈을 하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알베르와 아딘은 그저 미소만 짓고 있었다.
“난 이거 못 해.”
“네가 아니라 내가 하는 건데, 발렌티노.”
그래도 마음에 안 드니까 안 해, 발렌티노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렇게 말을 뱉어냈고, 대본을 각색한 아이는 대본을 가만히 들고 있다 한숨을 쉬었다. 그럼 그 부분만 고치면 된다는 거지? 그 말에 발렌티노는 고개를 끄덕였고, 아딘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 대사는 지우자.”
“좋아, 참가하지.”
“배우의 모든 의견을 수용하는 게 기본이지!”
딱히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줄까. 발렌티노는 박수를 치며 하하, 웃음을 흘렸고 그런 그의 행동에 아이는 고개를 치켜들고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다 옆에서 저기, 하고 자신을 부르는 다른 학생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 그럼 연습하자!”
아이는 박수를 치며 학급의 책상을 저 뒤로 밀어내었고, 교실 안에는 작은 연극 공간이 생겼다. 대본을 든 이들은 모두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의 자리에 섰다. 대본의 내용은 앤이 새로운 집으로 들어가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발렌티노가 한 곳에 서 있으면 멀리서 케일이 다가오는 것이 이 연극의 시작이었다. 그런 케일은 발렌티노가 서 있는 것을 보고는 관객을 향해 말을 한다.
“이런 우리는 남자 아이를 원했는데.”
누가 봐도 앤을 맡고 있는 아이는 남자아이로 보일 것이다. 이렇게 웃음을 끌어내는 건가. 발렌티노는 가만히 보고 있다가 그렇게 생각을 하고는 케일을 향해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메튜 아저씨인가요?
발렌티노의 걸걸한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케일은 우리는 남자아이를, 원했어. 하고 관객들을 향해 이야기를 한다. 그게 이 연극의 특징이었다. 모든 역할들을 남자들이 맡았다는 것이 특징인, 연극을 하자고 제안한 이의 의견이었다.
어쨌든, 이런 연극 속에서 메튜의 역은 케일이. 다이에나와 마닐라의 역을 알베르가 맡았다. 본래는 케일이 두 역을 하기로 했는데 케일이 귀찮은 건 싫다고 말하는 바람에 알베르가 두 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어쨌든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천천히 진행되어갔다. 앤 발렌티노는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갈 뻔 하지만 마닐라 알베르의 동정심으로 그들의 집으로 다시 돌아왔고,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학교에서 앤 발렌티노는 다이에나 알베르와 친해지게 되었고, 자주 놀았다.
그리고 다시 진행되는 이야기. 학교에서의 이야기들과 집에서의 이야기가 천천히 진행되는 도중 한 발 앞으로 다가오게 된 것은 문제의 장면이었다. 여전히 알베르가 걱정하고 케일이 원하고 발렌티노가 참지 못하는 것.
“석판은?”
“진짜 석판은 아니지만 준비되어 있지.”
‘아쉬운데.’
발렌티노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 앞에 놓여지는 석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쉬운데. 이런 폼블럭으로는 저놈의 머리를 내려쳐봤자 타격도 안 갈텐데. 그런 생각을 하던 발렌티노는 정말로 앤이 공상에 빠진 것처럼 되어버렸다.
그래서 옆에서 열심히 연기를 하며 발렌티노를 놀리는 아딘의 말을 듣지 못했고, 발렌티노를 향해 한참을 떠들던 아딘이 작게 순진한 멍청이, 하고 말을 하는 순간 발렌티노의 시선이 빠르게 그에게 돌아갔다.
“순진하고도 멍청한, 앤 발렌티노.”
“말이면 단 줄 아나?”
다시금 들려오는 말에 발렌티노는 인상을 찌푸리며 겨우 정신을 차려 대본대로 말을 하고는 앞에 보이는 폼블럭 석판으로 그의 머리를 내려쳤다. 아딘은 폼블럭임을 알고 있음에도 머리가 댕댕 울리는 것 같았다. 시선을 들어 제 위에서 씩씩, 숨을 뱉어내는 발렌티노를 올려다 보았다.
“뭘 봐!”
아딘은 발렌티노를 바라보았다. 시선의 끝에 닿은 발렌티노의 모습을 가만히 보던 아딘은 눈을 끔뻑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제 화로 붉게 달아오른 볼, 아래에서 올려다 보아도 변하지 않는 미모, 역할에 충실한 나머지 약간 우는 거 같기도 한 표정. 그리고 아딘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말을 뱉어내었다.
“… 사랑인가?”
“미쳤어!?”
아딘의 말에 발렌티노는 기겁을 하며 손에 들린 나머지 폼블럭 석판으로 다시 아딘의 머리를 내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