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uth or Dare?
알베르 크로스만 X 케일 헤니투스 (약커플링 요소 O)
w.아씨
최근, 로운의 수도 휘스 시를 중심으로 이상한 사교 모임이 확산되고 있다는 일말의 정보를 얻은 알베르는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그 사교 모임의 이름은 Red Shoes. 말이 좋아 사교 모임이지 양아치 집단과 다를 바 없었다.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빨간 구두 동화의 교훈인 ‘금기를 어기면 반드시 벌을 받게 된다.’를 모티프로 삼고 있다는 것 외에 알려진 정보는 없었다. 워낙 은밀하게 움직이는 단체이기도 하고, 초대장이 있어야만 가입할 수 있으며 모든 모임에 대한 일정, 참가인원은 극비사항으로 다루어지기 때문에 꼬리를 잡기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었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그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공동체가 있는 법이다. 공동체의 역할에 따라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느냐,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느냐 등등. 비슷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끼리 유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이는 사회적 현상은 로운이나 대한민국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문화가 달라도, 언어가 달라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다만 마법은 발달했어도 첨단 과학 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로운 왕국은,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구전口傳이 가장 큰 힘을 가진다. 특히 귀족들이라면 그 입소문으로 먹고사는 족속들 아니던가. 일반 평민들이야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빠서 많은 시간을 생계에 소비하지만, 부모를 잘 만났거나 시대의 흐름을 잘 탔거나 아무튼 돈이 많고 풍부한 자금력에서 나오는 여유로움을 두루 갖춘 귀족들은 하루라도 다른 이에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라도 하지 않으면 혓바늘이 나는 모양인지 편지로도 모자라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 모임 중 하나가 Red Shoes였다. 일반적인 귀족들 간의 사교모임이라면 크게 상관할 바는 아니었으나, 알베르가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지나치게 깨끗하다는 점.
물론 귀족들 중에도 귀족다운 귀족들이 있다. 기품있고 우아하고,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다하며 약한 자에게는 부드럽게, 강한 자에게는 강하게 맞서 싸우는 진짜 귀족. 이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케일 헤니투스 같은 자를 예시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진짜보다 가짜가 판을 치기 쉬운 세상이다.
과연 허영심 많고 탐욕스러운 같잖은 귀족들이 모여서 깨끗한 이야기만 할까? 알베르는 쉽게 단언할 수 있었다. 절대 그럴 리 없을 것이라고. 귀족들이란 대귀족회의 때 모이는 것만 보아도 자잘한 불협화음이 존재하는 집단인데, 아무런 갈등이 없다는 말은 어불성설이었다. 하다못해 모임 장소는 누구의 집에서 할 것인지, 모임의 주최는 누가될 것인지 잡다한 감투를 놓고서라도 싸우는 것이 정상인 축이다.
로운의 권력의 중심에 있는 이상, 알베르는 공적으로든 뒤가 구린 쪽으로든 모든 정보를 손에 쥐고 있는 편이 마음 놓였다. 그래서 악착같이 귀족들의 정세를 파악하고 조그마한 움직임도 꼬박꼬박 보고를 받는 것이었는데 즉위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이런 단체가 생겨나니 크게 불편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편하지 않은 것은 아닌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를 조사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사항은 우선 귀족이라는 신분, 뛰어난 연기력, 그리고 자신에 버금갈 정도의 두뇌 회전이 빠른 동시에 제 몸 하나는 건사할 수 있는 사람. 그냥 케일 헤니투스밖에 없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알베르는 자신의 입으로 알베르 크로스만이라는 이름을 걸고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백수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한 이상 지금쯤 헤니투스 영지에서 베짱이처럼 놀고 있을 케일을 부르기 미안했으나, 현재로서는 뾰족한 수가 없었기에 결국 그를 왕궁으로 호출했다.
알베르의 집무실 안, 찬란한 빛과 함께 나타난 케일의 표정은 참 아니꼬웠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마주한 알베르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으나 일단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멋진 비즈니스를 위한 초석을 깔기 위해 혀에 기름칠을 하려는 순간, 케일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이 눈에 띄었다.
알베르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케일을 바라보았다.
“케일?”
“최근에 생긴 그 모임 때문에 그러십니까?”
“알고 있었나?”
역시. 케일이라면 답은 몰라도 힌트 정도는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알베르의 판단이 옳았다. 그간 그를 지켜봐 온 상사의 입장으로, 친한 형의 입장으로, 개인적인 호감이 있는 입장에서 다각도로 바라본 케일은 늘 난제를 풀어나갈 해결사 같은 존재였으니까.
“얼마 전에요. 확실한 사실이 아니라 말씀 못 드린 건 죄송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말할 걸 그랬네요.”
“그래서, 네가 아는 정보는?”
케일은 고저 없는 평이한 목소리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읊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두 사람이 알고 있는 정보는 엇비슷했으며 새로운 사실은 없었다. 즉, 본격적인 조사를 해야 알 수 있는 정보밖에는 남지 않았다는 암울한 현실 판단이 남았을 뿐이었다.
모든 조사 중에 가장 정확도가 높은 것은 현장 조사임을 둘 모두 알고 있었다. 알베르는 케일도 Red Shoes의 존재를 알고 있는 김에 조사를 맡길까, 그냥 계속 백수를 시켜줄까에 대해 몹시 고민했다. 이런 인재를 빈손으로 놀게 두기에는 인력이 아까운 탓도 있었지만,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이성과 감성을 모두 충족시킬 좋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케일의 눈치만 살피는 알베르에게 해답을 내려준 것은 이번에도 역시 케일이었다.
“제가 다녀오죠. 어차피 알아봐야 할 것도 있으니 겸사겸사요.”
“오, 정말? 역시 이럴 때면 우리 동생이 최-“
“우리 사이에 이러지 맙시다.”
“넵.”
케일은 지체할 것도 없이 곧바로 소문의 중심지로 떠나고자 했다.
어차피 라온만 있다면 기상천외한 무엇을 만난다 하더라도 무서울 일 없었으니까.
역시 위대한 용이 최고였다.
/
케일이 Red Shoes의 정기 모임에 잠입하게 된 것은 알베르와의 만남 이후 정확히 일주일 뒤였다.
초대장이야 암살은 물론 정보 수집에 뛰어난 이들이 손쉽게 구해준 덕분에 어려울 것 없었다. 다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잠입할 것인지, 라온에게 부탁해 변장 마법을 이용해 갈 것인지가 문제였는데 이번에는 자꾸 정면돌파가 낫겠다는 직감이 들어 모습을 숨기지 않는 쪽을 택했다.
모임 당일, 의기양양하게 화려한 적발을 뽐내며 모임 장소에 도착한 케일은 스스로 불러온 재앙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아니, 이게 누구야! 명예도 싫다, 권력도 싫다, 오직 돈만 좋아하는 케일 헤니투스 아닌가?"
"하하-, 이런 쳐돌은 새끼를 봤나."
지금 케일의 세상은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눌 수 있다.
쳐죽일 새끼, 쳐죽이지 않아도 되는 새끼. 이 기준은 오롯이 케일이 방금 정한 기준이었다. 아직까지는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았으니 도덕적으로 문제 될 사항은 없었다. 속으로만 생각한 자신의 잣대를 타인에게 들이밀지도, 타인의 잣대를 수용할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인가.
참고로 말하자면 케일은 지금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비교적 평범한 입장에 방심한 사이에 허를 찔려 놀랐을 뿐. 표현이 과격해서 그렇지 그 어느 때보다도 차분한 상태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쳐죽일 새끼는 대체 무슨 짓을 한 인간일까?
자연스럽게 드는 궁금증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지금 당장 눈을 감았을 때 캄캄한 어둠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분노가 있거나, 감았던 눈을 번쩍 뜨이게 할 정도로 화를 유발하는 사람. 그것이 쳐죽일 놈이라고 케일은 정의했다.
그리고 그 완벽한 예시가 지금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게 분명하다고도 생각했다.
저건 그냥 돌은 수준이 아니다. 쳐돌았다.
대가리에 총을 맞아서 뇌에 이상이 생겼거나, 겁대가리를 상실했거나 둘 중 하나겠지만 아무튼 돌았다.
“어어어? 이야, 케일 헤니투스가 여기를 다 오고. 이제 너도 끝이구나?”
“불쌍하니까 봐준다, 새끼야! 어린 놈이…”
“백수 백수 노래를 부르더니 백수는 개뿔!”
케일이 백수가 되고 싶다고 할 때마다 비웃는 것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그만이었다. 아무리 남들이 뭐라 하든 케일은 결국 백수의 길을 찾아갈 것이니까. 한때 일국의 황태자였던 아딘도 케일의 꿈을 비웃었지만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서대륙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깨졌다. 아딘이 용서가 불가능한 잔악무도한 짓을 저지른 탓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만 보면 결국 둘의 대결에서 승리한 건 케일이었고, 여기에 오기 전까지는 짱돌 저택에서 행복한 칩거 생활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그렇기에 남들이 백수의 꿈에 대해 뭐라고 하든 말든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는데, 이렇게 집단적으로 쳐돌은 새끼들에게 공격을 받으니 슬슬 열이 올랐다. 원래 묵직한 한 방보다는 졸렬한 잽잽원투가 더 짜증 나는 법이니까. 한두 번은 봐줘도 재수없게 걸린 한 사람은 그 화를 온전히 받아내게 되기 마련이었다.
“너 이제 돈은 많아도 백수는 못 한다며?”
“뭐?”
“그렇게 살면 시간이 없어서 돈도 못 쓴다?”
투둑.
케일의 이성이 끊기는 소리였다.
좋은 의도로 말을 하더라도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타인의 참견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르듯, 듣는 이의 기분에 따라 혹은 충고를 건네는 이의 말투에 따라 꼰대의 오지랖 섞인 잔소리가 될 수도 있고 인생 선배의 유용한 충고가 될 수 있는 마당에 악담 아닌 악담이라니.
케일은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게 더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호불호의 영역이 극단적일 뿐, 남의 취향과 사상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었다. 자기가 듣기 싫은 말은 남한테도 하지 말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케일은 자기 몸 하나, 그리고 라온과 온, 홍을 챙기기에도 벅찬 인생인데 타인의 인생에 왈가왈부하며 말 얹을 시간도 아깝게 여기는 사람이니 말 다 했지.
어휴.
공중에서 자신의 머리 위를 맴돌며 헛소리하는 인간들을 죽일까 살릴까 고민하는 라온을 생각하며 케일은 화를 다스렸다. 하찮은 도발에 말려서 화를 내면 자신도 겨우 그 정도 되는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니까.
그래도 너무 참기만 하는 것도 호구 같지 않은가?
알베르가 재조사를 요청하지 않는 이상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다시 상종하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단체로 이성이 나가서 헤니투스 영지로 몰려온다 하더라도 걱정은 없었다. 짱돌 저택에 있는 인원이라면 나라를 하나 말아먹고도 남을 전력이었으니까.
케일은 억울하게 혼자 왔고, 이유 없이 시비도 털렸는데 한 번쯤 언어적인 위협을 가한다고 해서 천지개벽 정도의 큰일이 일어날 확률은 당첨자가 연이어 나타나지 않아 억 단위 이상의 상금이 걸린 로또에 당첨될 확률과 비슷했다. 사람이 너무 참고 살기만 하면 병이 난다는 자기합리화까지 마친 케일이 공포의 주둥아리를 놀리려는 순간, 무언가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여기 있는 모든 인간이 쳐돌기는 했어도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서로 대화를 한다기보다는 집단적 독백에 가까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이들이 훨씬 많았다.
눈빛 또한 광기나 이지가 없고 흐리멍텅했으나, 기분만은 몹시 좋은 사람들처럼 방방 뛰는 게 꼭 술에 취한 사람과도 엇비슷했다.
아, 이거 설마.
뒤가 구리다 했더니 단체로 약이라도 한 거였나?
케일은 로운에도 이런 게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왕궁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휘스 시에서 말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흔히 이상한 짓을 하거나, 심하게 하이텐션인 사람 보고 약 빨았냐고 묻는 경우도 있었지만 지금 여기는 진짜 약을 빤 것이니… …
세상이 말세다, 말세. 혀를 쯧쯧 차면서도 주변을 살피는 케일의 눈빛은 매섭게 빛났다. 정확한 증거는 없어도 어느 정도의 정황 판단은 끝났으니 최고의 상황 판독기 라온에게 사실 확인만 받으면 여기서 탈출할 수 있었다. 어차피 모두가 허공에 대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마당에, 케일이 허공에 대고 라온을 부른다 하더라도 이상하게 여길 사람은 없었다. 기억도 안 날 텐데 무슨.
조기 퇴근을 바라는 마음을 잔뜩 담아 설레는 목소리로 케일은 라온을 불렀다.
“라온.”
“왜 그러냐, 인간아?”
“얘네 이거 마법에 걸린 건 아니지?”
“마법은 아닌데… … 아직 위대한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상한 냄새가 난다!”
“환각 종류의 마법은 절대 아니지?”
“그렇다! 근데 다들 마법에 걸린 것처럼 맛이 가긴 했다! 이상한 클로페랑은 다르게 맛이 갔다!”
“그럼 됐어. 왕세자 저하한테 연락이나 넣어줘. 별일 아니니 안심하라고.”
“알았다!”
상황 판단도 해주고, 연락도 넣어주고. 역시 잘 먹인 용 한 마리가 가장 위대하다.
지금까지 파악한 단편적인 사실만으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러나 이들이 빨간 구두의 교훈을 모티프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훈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만은 명확했다. 향락과 사치에 빠진 귀족들이 돈지랄과 권력 쟁취에도 질리면 새로운 자극을 찾는다는 뜬소문이 사실일 줄이야.
클로페와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맛이 간 놈들과 길게 상종해서 이로울 것 하나 없었다. 어서 빨리 큰일도 아니고 작은 일도 아닌 어중간한 스케일의 일을 알아낸 케일은 설레는 마음을 안고 조기 퇴근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