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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igheden

 

“…….”

물속에서 피어나던 숨결조차 그대로 얼어붙은 바닥, 숨통을 옥죄듯 몸을 휘감고 살갗을 찌르는 지독한 찬 기운, 모든 게 얼려져 부는 바람 하나 없이 고요한 정적의 공간….

왜 여기에 와있더라,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으나 눈 깜빡임 한 번에 잊히고 말 사소한 의문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눈에 담아내던 케일은 자신의 두 손에 가득 들어찬 얼음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얼음에 파인 홈들. 이를 연결하면 단어가 연결될 것이라는 간단한 문장이 마치 본능처럼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이 또한.

금세 잊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그의 이름을 아는 이들은 누구나 슬퍼했고, 그의 목소리를 귀에 담아본 이들은 가슴 속 요동치는 절규를 토해냈으며, 그의 두 눈을 마주했던 이들은….

아직 그의 죽음을 되돌릴 방법이 있다고 믿었다.

“그분들도 관련된 자료를 찾고는 계시나…, 현재 시점에서는 특별히 알아낸 바는 없으시다고 하셨습니다.”

전령이 눈치를 보듯 알베르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으나, 알베르의 시선은 전령을 향해 있지 않았다. 그는 몇 번을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죽음의 기운이 내려앉아 생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 그러나 마치 잠에 뒤척이는 모양새로 가지런히 모이지 않은 두 손, 헝클어진 그대로 내버려 둔 부스스한 머리는 정말로 그가 단순히 잠에 빠진 것만 같이 보였다. 그의 가족들이 그의 숨 쉬지 않는 시체를 정갈한 모양새로 만들지 않은 이유야 뻔했다. 알베르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아보았다.

차가웠다.

케일 헤니투스. 그가 평소와 다름없이 잠들었다가, 깨지 않은 지 두 달째였다. 그의 심장은 멈추었고, 가슴팍은 오르내리지 않았으며, 코끝에는 한 모금의 숨결도 맺히지 않았다. 그 어떤 전조도 보이지 않은 순식간의 죽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기이했지만, 이상한 점이 한 가지 더 존재했다. 그가 그렇게 숨을 거둔 이후로 그의 몸은 마치 겨울에 갇힌 듯 시리게도 차가워졌다. 죽은 몸에서 으레 느껴지곤 하는 서늘함보다도 더 날카롭고 깊은 냉기를 거둬낸다면, 분명 그를 돌아오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다들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다.

“…케일.”

왜요.

‘이런 불경은 봐주지 않아. 당장 돌아와.’

아직도 제가 돌아갈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온갖 일들을 해낸 훌륭한 인재니까, 너는. 돌아올 수 있어.’

이상한 논리네요.

‘내 생각에서조차도 내 속을 다 뒤집을 생각인가?’

그럼 그만 생각하세요.

“…….”

알베르는 차게 웃었다. 너는 모른다. 내가 너를 그리지 않는 순간은 존재치 않는다. 심지어 너를 마주하고 있을 때조차도 네 두 눈을 어떻게 하면 내게 고정시킬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그 시선을 받아낼 수 있는지 생각하며 끝없는 갈구에 시달렸는데….

“돌아갈 채비를 해라.”

“네, 알겠습니다.”

알베르는 케일의 손을 한 번 더 힘주어 꽉 잡았다가, 겨우 놓으며 뒤를 돌았다. 살아 돌아왔을 때 모든 게 엉망이라면 그가 충분히 쉬지 못할 테니, 이 로운은 제대로 돌아가야만 했다. 자신의 무너짐이 허락되는 이 짧은 순간을 제외하고선, 자신은 올곧게 존재해야만 했다.

 

 

쾅-!

습격이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라!”

“저하!”

정체불명의 굉음이 쉴 틈 없이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시야는 자꾸만 흔들렸고, 마차는 전복된 지 오래이며 사방이 시끄러워 정신이 없었다. 알베르는 자신이 케일의 상태를 비밀리에 살피기 위해 데려온 최소한의 인원의 전력을 냉정히 따져보았다. 과연 자신이 나서야 할 상황인가에 대한 고민을 빠르게 마치고 결국에는 검을 쥔 채 마차 밖으로 나서려던 순간.

-알베르 크로스만.

“…케일?”

아, 그토록 그리던 목소리가 들려오고.

곧바로 머리를 가격하는 충격과 함께 정신을 잃기 직전에서야 알베르는 헛웃음을 지었다.

봐, 네 목소리 하나에 이렇게나 무방비해질 정도로.

내가 이렇게 너를 그리고 있잖아.

 

 

“…….”

달그락, 하고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찬 기운…. 알베르는 눈을 뜨기 전, 당장 주어진 정보값만으로 주변의 상황을 살폈다. 죽지 않은 것을 보니 생포가 목적인듯했다. 원하는 것은 자신만이 아는 정보인가, 아니면 자신의 몸뚱아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 그 자체인가? 이 방에 있는 이는 총 몇 명이지?

“…….”

그러나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당장 느껴지는 기척은 한 명이었다. 그것도, 지나치게 익숙한 기척이었다. 알베르는 팔로 자신의 눈을 가린 채, 입을 달싹였다.

“…케일 공자. 이것도 자네의 계획인가?”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도가 지나쳤다고 내가 감히 말해도 되겠나?”

죽은 줄로만 알았다고, 그래도 앞에 다시 나타나 고맙다고, 그렇게 말하며 매달려야 마땅할 것을…, 그를 그리워한 시간이 너무 지독해서 결국에는 분노가 먼저 차올라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런데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아, 알베르는 눈을 가린 팔을 치워내고선 그를 바라보았다. 그다지도 짧은 시간 내에, 자신의 가슴에 절규와 혼동만을 가득 박아넣는 데에 기어코 성공하고 만 그.

 

케일 헤니투스가 거기에 있었다.

 

“…공자.”

하지만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알베르에게 있지 않았고, 그저 손에 가득 들린 얼음조각들을 향할 뿐이었다. 그마저도 뚜렷한 목적성은 깃들어있지 않은 동작으로, 계속해서 얼음조각들을 습관적으로 매만지며 멍하니 아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제야 알베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둘이 함께 있는 이 공간은 오로지 얼음으로만 조각된 널따란 돔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돔이라는 것도 천장에 모여진 원형의 끝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 지평선이라고 착각할 만치 이 얼음의 공간은 한없이 컸다. 그리고 돔 천장의 중앙 바로 아래에 자리한 것이 케일이었다.

마치 이 섬세하게 조각된 얼음의 공간 속에 자리하는 무기질의 조형물과 같은 자태로.

-반갑다.

서늘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것에 알베르는 반사적으로 놀라며 케일의 옆으로 빠르게 뛰어가 옆에 섰다. 케일은 자신의 옆에 선 누군가를 힐끗 바라보다가, 다시 자신의 손에 시선을 고정했다.

“누구야.”

-경계하지 말아라. 너를 해칠 생각도, 그를 해칠 생각도 없단다. 그저 내 과오를 바로잡고자 할 뿐.

“과오?”

-나는 이 공간의 주인. 세계와 세계의 틈 사이에 은신처를 꾸미고 사는 은둔자에 불과한 존재. 세계의 이들과 얽히는 것은 원하지 않아.

무슨 소리인지 당최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알베르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해결하는 대신, 결국에 저 존재가 하는 말을 듣고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고자 했다.

“지금 이 상황과 당신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군. 그것이 과오인가?”

-그래. 본디 나는 이 은신처를 내 성향에 맞게 꾸미는 것에 열중할 뿐이나…. 이번 장식품을 데려오면서 잘못된 것을 가져와버렸어.

장식품? 알베르는 사나운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빌어먹을 취미를 제법 당당하게 말하는군.”

-세계의 귀속자여, 마지막으로 말하지만 분명한 실수였다.

이상하지, 분명 그에게서는 귀속자보다는 세계의 틈새에 사는 이들의 냄새가 더 났는데…. 미지의 존재가 한숨을 쉬듯 중얼거렸다.

“어찌 되었든, 그럼 당장 당신의 과오를 바로잡아.”

그리 말하며 알베르는 케일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허공에다가 대고 말하는데도,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고 가만히 있는 모습이 마치 시체와 별다를 것 없어 보여 섬뜩했다. 알베르는 겉옷을 벗어 케일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시린 감촉, 지난 두 달간 넌덜머리 나게도 느낀 냉기였다.

-그는 현재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태라 자신을 되돌려보내지도 못하더군. 그래서 너를 데려왔지. 그가 그의 손에 들린 조각들을 맞춰 단어를 완성하도록 만들어라. 그럼 너와 그 모두 풀려나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지어다.

“공자의 상태 또한 본래와 변함없을 것이라고 장담하나?”

-그가 얼어붙은 것은 내가 내린 겨울의 저주에 걸렸기 때문일 뿐. 내 주술에서 벗어난다면 그 또한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의심해야 마땅할 상황이었으나, 저 말에 대한 신뢰감이 조금이나마 가슴 속에 피어났다. 분명 저 미지의 존재가 자신의 심리를 건드리고 있다는 불쾌감이 피어오르긴 했으나 미약했다. 어쩌면 이런 상황을 바라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이 있고, 그 희망이 자신의 손에 있어서 그를 구원해주는 상황.

자기의 힘으로 행한 일이라면 해결도 직접 하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어쨌든 지금 당장은 이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을 보고, 그의 두 눈을 보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를 애타게 기다리고만 있었는지를 말해주어야만….

‘빌어먹을.’

빌어먹을 알베르. 모두의 그리움을 그에게 전달해주고 싶다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알베르는 케일의 앞으로 가 그의 손에 들린 얼음조각들을 다 내려놓은 다음, 그 차가운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쌌다. 손을 감싼 온기가 낯선 듯 잠깐 움찔거린 그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알베르… 크로스만?”

마치 금방 깨어난 사람처럼 잠기고 희미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였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래, 불경한 공자.”

자신의 말에 희미하게 입꼬리에 웃음기가 스며들었다가, 이내 다시 딱딱히 굳고 줄 끊긴 인형처럼 무표정해지는 것을 바라본 알베르는 숨을 내쉬었다. 우선 그의 손이 조금이나마 녹기를 기다렸으나, 아무리 감싸도 그의 손에 스며든 냉기는 쉽게 물러서지를 않았다. 결국 알베르는 그의 손목을 고쳐잡은 다음, 그의 손바닥을 펴게 만들고 그 위에 조각 하나를 얹어주었다.

“날 봐, 케일 헤니투스.”

또다시 끊어지듯 무감해지던 시선이 다시 색채를 띄고 알베르를 바라보았다. 알베르는 갈증 위로 물을 적셔내는 기분을 느끼며, 침착히 말을 이어나갔다.

“다들 제대로 울지도 못했어.”

움찔, 케일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알베르는 미소를 지으며 겹쳐 잡은 손을 옮겨 조각을 하나, 하나 들고서는 주욱 나열하며 맞춰갔다.

“한가닥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굳은 표정으로 있는데 다들 아무 소리도 안 하더라. 혹여나 입 밖으로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소리를 냈다가는 그게 그대로 현실이 되어버릴까봐.”

“…….”

“가족이 자네를 기다리고 있어, 케일.”

“…, 난….”

“그 모두에게 돌아올 곳을 만들어준 것은 자네잖아.”

아, 알베르. 멍청한 놈.

와중에 너를 가장 정신 차리게 만들 수 있는 말이 이런 말이라 생각하는 자신에게 일말의 비참함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가장 효과적인 것을 따지는 것은 그의 인생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습관이었기에, 계속해서 입은 자연스럽게도 움직였다.

“그러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은 비참해도 상관없었다. 네가 살아있는 한, 자신에게 기회는 있었고 언젠가 네가 자신만을 이유로 죽음조차 이겨내는 날도 있겠지. 지금은 이정도 역할이 충분하다. 알베르는 마지막 조각을 움직여, 퍼즐을 맞추어냈다. ‘영원’. 조각에 파인 홈들이 이어지고 단어가 완성되었다. 그러니까 돌아오라고 말을 끝마치려던 순간.

그가 웃었다.

“…알베르,”

크로스만. 그가 속삭였다.

오랜만이네.

“…….”

아직 제대로 정신은 차리지 못한 듯한 얼굴에 생기가 깃들더니, 꽃이 만개하듯 눈이 휘어지고 입꼬리는 그려져 부드러움이 만연했다. 그리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의 눈이 감기더니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케일 헤니투스.”

앞으로 쓰러진 그를 자연스럽게 안아낸 알베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반칙이잖아, 하고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깃들어있었다. 알베르는 고개를 숙여 그의 이마 위로 입술을 맞추었다.

“사랑하고 있어.”

 

아직은 이를 고백을 마지막으로,

둘을 가두고 있던 얼음의 벽이 허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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