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팅게일 – 숲의 작은 새를 데려온 황제는 그의 노랫소리에 반하여 눈물을 흘렸고 나이팅게일은 이로 인하여 궁궐에 살게 되었어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외출 시 열두 명의 하인이 그 다리에 매인 리본을 잡고 동행해야만 했답니다. 그러던 도중 황제는 인조 새를 선물 받고 그에 홀린 사이 나이팅게일은 숲으로 돌아갔어요.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황제에게 죽음의 신이 찾아오는데 나이팅게일은 감미로운 노래를 불러 그를 떠나게 했고, 다음날 아침 신하들이 죽은 그를 거두기 위해 들어왔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답니다.
[ Merry-go-round / 아딘발렌 ]
[ 엣취 作 ]
빙글.
오르골 위 두 인형이 춤을 추며 돌아간다. 까만 엘프 하나, 조금 어두운 피부의 사람 하나.
전쟁이 끝났다. 다크엘프는 전쟁에 큰 공헌을 했으며 사막의 사람들은 기꺼이 그들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축제에 손을 잡고 빙글, 빙글, 춤을 춘다. 어지러울 법도 햇것만 어찌되었던 그들은 종전을 축하하며 계속해서 춤을 추었다. 어느새 어색했던 둘은 손을 맞잡고 웃으며 춤을 출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빙글, 빙글.
빙글.
오르골 위 두 인형이 반복해서 돌아갔다.
아딘은 그것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천천히 느려지는 움직임만이 시간의 흐름을 알린다. 지금은 낮인가, 혹은 밤인가. 밑이 허전하다. 얇은 가운형식의 천 하나만 걸친 채로 두 손은 구속되어있다. 전쟁은 끝났나? 발목에 천을 덧댄 사슬은 그의 걸음걸이를 막고 시중을 드는 아이들은 매일, 매일. 바뀐다. 어쩌면 아이가 아닐 수도.
매일 아침 반복되는 방 문 밖의 소리.
곧이어 시동들이 그를 익숙하게 돌보기 위하여 들어왔다.
의심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의심할 수밖에 없다.
전쟁은 끝났나?
하얀별은 죽었나?
그렇다면 저 중에 과연 하얀별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빙글.
오르골 위 두 인형은 여전히 춤을 추고 있다.
빙글.
곧 들어올 아이들 중에 하얀별이 있다면 어쩌지. 이대로 끝인가? 이대로?
빙글.
“잘 지냈나?”
“…….”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니 여전히 어린 날의 네가 보인다. 세월은 흐르기나 한 걸까. 이곳에 오고 적은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지만 그는 변함이 없다. 환영마법일 수도 있겠군. 그렇다면 저 자는 발렌티노가 맞기는 할가? 아니라면 그저 나를 우롱하려 할 뿐인가.
세월이 흘렀다. 시간은 지나가고 자신은 볼품없어졌다. 단단한 근육도 사라지고 목소리에서 힘이 빠졌다. 그래서만은 아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딘은 답하지 않았다. 그 역시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음도 틀림없다.
새는 더 이상 지저귀지 않는다.
*
언제나 당당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딘가 힘이 빠져버린 인형과 같은 아딘이 정원에 홀로 앉아있다. 답답함에 가볍게 나왔던 것치고는 기대치 않은 얼굴이었다.
‘가까이 가도 될까.’
어린 발렌티노는 고민했다. 지켜보고 서서 고민하다 돌아서서 또 고민했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면 모를까, 자칫하다 아딘의 원성을 산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될 것임이 분명해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 그가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으니 이대로 뒤 돌아 가기만 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었지만 발렌티노는 결국 망설이다 발소리를 내며 아딘에게 다가갔다.
어차피 자신은 잃을 것도 없으며 어리기까지 하니 문제가 생긴다면 카로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자진하거나 하도 될 테였다. 한번쯤은 도박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황태자에게 말을 걸어봐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어린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왠지 울적해 보이는 그를 지나치기에는 그의 심정이 너무 여렸다.
“저하.”
“…아. 발렌티노로군. 내가 잠시 일이 있어 격조했네. 머뭄에 불편함은 없는가?”
“제국의 별이신 저하의 은혜로 무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군.”
평소와 다르게 넋이 나간 모습에 대화가 끊어질 새라 발렌티노가 급히 말을 이었다.
“정원의 꽃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들었었는데 혹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함께 보러 가시지 않겠습니까.”
“…그러지.”
‘그것 참 알기 쉬운 성격이군.’
그려내는 것 같지는 않은 미소와 원하는 답이 뻔히 보이는 질문. 그러함에도 기분이 나쁘지가 않았다. 가볍고 밝은 목소리 덕인지 천진하게 웃는 그의 모습 탓인지. 그도 아니라면 골 아프게 그 속을 가늠해볼 필요가 없기 때문일까. 어찌 되었던 아딘은 넉살좋게 다가온 발렌티노의 말에 응수하면서 앉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 쪽으로 오게. 얼마 전에 새로 들어온 진귀한 것이 있는데 그대가 보면 좋아하지 않을까싶군.”
“하하. 그럼 기대하겠습니다.”
“발렌티노. 새로 들어온 새의 깃이 무척 아름다운데, 보겠나?”
“발렌티노. 새로 온 학자의 명성이 대단하다던데 함께 가르침을 받으러 가지.”
“발렌티노. 대련 좀 같이 해주게. 후텐 후작은 너무 뒤로 뺀단 말이야.”
“발렌티노, 어디가? 저녁은 당연히 나랑 먹는 게 아니었어?”
당연히 나와 함께 할 거지?
기분 좋게 휘어지는 아딘의 눈웃음이 너무나도 당연스럽다는 듯, 그렇게 말하고 있어서 발렌티노는 정말 진심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자신의 친우가 저를 많이 좋아하나보다. 둘의 자리를 떠나서라도 유쾌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하하하. 당연하지 않은가. 내가 너를 두고 어디를 가겠어.”
두 사람이 급격히 가까워지기 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고, 그에게 ‘선물’이라며 새로운 시종들이 배정되는 것 역시 순간이었다.
“발렌티노님.”
괜찮다며 사양해도 그 득불 따라온 수하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평범한 시종들이 아닙니다.’
시선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발렌티노가 거주하는 곳은 제국의 황궁. 볼모나 다름없는 신세라 하나 그들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발렌티노는 이곳에서 안전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황태자의 친우다. 그런데도 이리 대놓고 가늠하기 힘든 자들을 보낼 줄이야…….
황제인가 황태자인가 누구의 명인지 알 수는 없으나 발렌티노는 이제 홀로 다닐 수 없었다. 말 한마디에 경계심이 섞인 시선을 받고, 행동 하나에 그 저의를 의심받는다. 물론 그 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기는 했지만 이처럼 기껍지는 않았다. 새로이 배정받은 12명의 시종. 과연 그 끝에는 누가 있으련지.
자신을 비하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카로왕국의 버리는 패였다. 외교란 것이 그런 것이 아닌가. 현 대륙의 정세가 안정적이라 하나 수틀린다면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며 위퍼왕국의 동태도 심상치 않다. 위퍼로만 끝난다면 다행이겠으나 얽힌 왕국들이 많다. 동맹이란 명목으로 보내졌다지만 혹, 문제라도 생긴다면 여차할 때 버릴 수 있는 패. 황태자의 흥미를 얻는 다면 좋고 얻지 못한다면 그로도 그만인 그런 이들이 현재 제국에 유학의 명목으로 머무르고 있는 왕족들의 현실이었다.
그런 자신에게 붙은 12명의 시종들.
홀로 산책을 하려하더라도 결코 일정거리 이상 벗어나지 않는 그들이 과연 평범한 시종들이라 믿는 자가 있을까?
정치인은 이유 없는 손해를 보지 않고
도박사는 지는 패에 판돈을 걸지 않는다.
발렌티노는 가장 높을 자의 관심을 받고 '그'의 경계를 이끌어냈다. 하물며 그저 보여주기 식의 형식뿐이라 하더라도, 감수할 만 하였다. 자신을 제국으로 유학 보낸 그들은 이제서야 알았으리라. 그는 허수(虛數)로 끝나지 않았고 그 가치를 증명해냈다.
‘나쁘지 않아.’
발렌티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괜찮아, 경. 이건 그의 선물이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더욱이 친한 친우도 얻었으니 이처럼 만족스러운 때는 더 이상 없을 정도였다.
그로부터도 한동안 아딘은 자신의 처소로 발렌티노를 빈번이 불렀다. 제국의 황태자가 다른 왕족들과 친분을 다지는 것은 옳으나 그것이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는 것만큼 이목을 끄는 것도 없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로든지 간에 말이다. 그리하여 두 달이 지나 소문이 퍼지고 또 세 달 뒤, 여러 왕국에서 새로운 왕족들이 제국에 유학을 오기 시작했다. 다음대의 왕으로 유망한 자도 있었으며 말재간이 뛰어난 자도 있었다. 가히 경국지색이란 말도 부족할만한 외모를 가진 자도 있었고, 검술이 뛰어난 자도 있었다. 공통점은 단 하나. 이들은 모두 아딘과 발렌티노, 그들 또래의 자들이었다.
그것이 어떻든 간에, 그가 어떻게 생각하던지 간에 아딘은 제국의 황족으로서 그들을 맞이하고 친분을 나누었으며 그들이 하는 말들을 감미롭게 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필연적으로 분주하게도 흘러가는 일상 속에 발렌티노는 자연스럽게 멀어져갔다. 새로운 자들은 흥미로웠으며 그의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는 왕족들은 만족스러웠다. 일상이 낡은 피아노의 줄처럼 늘어질 때쯤에서야 아딘이 발렌티노를 찾았으나 이미 그는 인사를 건넬 새도 없이 바빠진 아딘을 뒤로한 채 카로로 돌아간 뒤었으며 더 이상 제국에 자유로이 올 수 없었다. 그들의 짧은, 어린날은 그렇게 끝이 났다.
통탄스럽고, 우스운 일이다.
*
“카로 왕국은 어떠한가.”
도대체 저 말에 어떠한 저의가 있는 것인가.
제국과 각 왕국들의 동태를 읊어야만 하는 이는 침음하였다. 황제와 황태자의 속을 읽어 적절히 그 순을 정하는 것이 자신의 역임을 잊지는 않았으나 이따금 물어오는 저 질문이 곤혹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특, 별한 소식은 없습니다. 다만 이번에 죽음의 사막에서 몇 명의 실루엣이 발견이 되어서 발렌티노 왕자가 그 수사를 맡았다고 합니다.”
“발렌티노가?”
“예. 하지만 아무래도 그 죽음의 사막이다 보니 별다른 진척 없이 끝날 것 같습니다.”
“…그래.”
시간은 쉴 새 없이 흐르고 그를 즐겁게 해주던 왕족들은 모두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 뒤를 이어 어린 왕족들이 새로이, 쉴 틈없이 제국으로 유학을 오고 갔으나 어떠한 이도 처음의 ‘그’만큼 감미롭지는 않았다.
“베니온 공작가의 장남이 다리를 잃었다고 합니다.”
“그럼 다음 후계자는 -가 되면 되겠군. 제 형에게 열등감이 심한 자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가 좋겠어.”
“일러두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카로 왕국의 왕세자가 바뀌었다고 합니다.”
“카로에서? 이렇게 갑자기?”
역시 도박의 나라. 다른 이들의 뒤통수치는걸 그렇게 좋아한다더니 그 철두철미한 왕세자의 뒤통수를 친 간 큰 왕족 놈은 도대체 누구려나. 머리가 잘 돌아가는 자라 알아서 적당히 움직여 다루기가 편했는데 귀찮게 되었어. 정해진 왕세자의 자리를 이리 순간에 바꿀 정도면 꽤나 대범한 이가 틀림없을 텐데, 한 번가서 어떻게 구워삶아야…….
상념은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들려온 것은 생각지도 않았던 인물이어서, 아딘은 그저 멍청하게도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예. 저하의 친우이신 발렌티노님께서 왕세자로 책봉되셨답니다.”
“…발, 렌티노가?”
“하하. 의외이긴 하지요. 워낙 순하신 분이셨으니. 전하의 말씀처럼 상황이 급작스럽게 바뀌기도 했고요.”
그렇다면 앞으로도 발렌티노는 제국에 자유로이 오가지 못하게 된다. 그동안 자신이 어떻게 그를 기다렸는데. 조금만 놀다 조용히 돌아올 줄 알았더니.
“-된 것 같습니다. 자세한 정황은 이 서류에 적혀있습니다.”
“수고했네. 두고 나가보게.”
여직 연락이 없더니 왕세자 자리를 꽤 차느라 바쁜 거였나. 그렇게 도망가 버리고선-
“이제야 연락을 하나.”
[하하. 용서해주게나. 한동안 바빠 가지고 말이야.]
“허. 제국의 황태자에게 그리 편히 대하다니 간도 크고.”
[그래도 좋은 소식 하나 가져다주지 않았나. 기분 풀어, 아딘.]
“이젠 명령까지?”
분명 자신이 왕세자가 된 것은 친우인 아딘 입장에서도 나쁘지만은 않은 이야기일 텐데 아까부터 계속 대화가 헛돌았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으나 이어지는 불퉁한 답에 결국 발렌티노가 두 손을 들어 항복시늉을 해보였다.
[그래서, 안올거야?]
“내가 왜?”
[음……. 제가 연락이 늦어서 화가 나신 것 아니셨나요, 황태자 전하.]
“…….”
부러 높여 말하는 그 탓에 아딘은 결국 사람 좋게 웃어보였다. 어떤 식으로든 그는 여전히 친우에게 약할 수밖에 없었음으로.
“가야지, 내 친우가 왕세자로서 주최하는 첫 파티인데.”
[고마워, 아딘. 네가 와준다면 든든할 거야.]
정말 바쁘긴 했던지 이후 발렌티노는 의례적인 짧은 인사말만을 남기고 통신구를 끊었다. 생각보다 짧게 끝난 통화였다지만 그 때보다 조금 더 자란 소년과 청년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의 나이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중독적이여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머릿 속을 헤집고 도저히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붙잡아 듣고 싶고 옆에 머물게 만들고 싶은.
어느 시인이 말하였던가―
당신이 바다라면 나는 내게 가라앉아 죽어도 좋다고.
아, 나는 네가 내게 가라앉아 죽어버린다면 좋을 것 같은데.
네 부드러운 머리칼은 꿀처럼 달태고, 선명한 눈동자는 보석과 같아 반짝이겠지. 단단한 몸은 닻이 되어 빠져나갈 수 없음만을 각인시키고 내뱉는 숨이 수면에 닿을 때면 그제야 터져 나올 네 목소리는-
“사냥을 가야겠어.”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아니, 괜찮네. 숲에 있는 사슴 정도만 잡고 나올 테니 별달리 준비할 것은 없어.”
“예. 저하.”
평소 몬스터나 사자와 같은 포식자들을 사냥하길 즐기는 아딘이었다. 그들을 유인하여 서서히 강한 힘으로 짓뭉개며 자신이 피식자가 된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이 발악하는 것을 즐겼으나 오늘은 아니었다.
오늘은,
조금 더 여리고 맑은 눈동자를 지닌 것. 그런 것에 흥미를 느꼈다. 끼이, 끼이- 애처로운 목소리를 내며 살려 달라 비는 그런 것이 듣고 싶었기에.
아.
아니다.
대체품으로는 사슴보다는 새가 좋을 것 같다. 커다란 새장 안에서 그 공간만이 세상의 전부인 것을 믿으며 허공을 노니다 결국 제 손에 죽기 위해 태어나 길러진 것들. 그런 것들이 있었지.
“활을 준비하게.”
도망쳐 보았자, 너는 나의 새장 속에 있을 텐데. 그 때까지 기다리기가 힘들었다.
*
“살려달라고?”
이제 와서? 왜?
평이한 어조에 그저 순수한 호기심. 사람을 읽는 데는 도가 텄다지만 발렌티노는 도무지 제 앞의 그가 어떤 이인지, 어떠한 생각을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평범한 다크엘프 중 하나임이 분명 할 테지만, 그는 제국의 왕관을 장난감이라도 된 양 머리에 써보기도 하며 장난을 치다 검을 뽑아 아딘의 목에 가져다 대보기도 하였다. 한 때는 황태자였던 이가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양. 그 행패를 지켜보는 자신의 시선 따위도 어떠한 의미조차 갖지 못한다는 듯이.
“왕세자. 잊었나 봐? 이 자는 암의 하수인이야.”
“…….”
“설마 이 자가 카로 왕국에 한 일을 잊은 것도 아닐 텐데.”
역시나 어떠한 동요도 없는 목소리였다. 그러함에도 정말 의아하다는 듯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다크엘프가 없었다면 그 피해를 감당이나 했을 것 같은가, 왕세자? 진심이야?”
그 날을 기억하면서 이 자를 살려달라고? 그러한 것들을 차치하더라도 아딘은 제국에서 죽어야만 한다. 제국의 국민들을 배신했으니까. 아딘을 살리는 것은 그의 ‘대의’에 어긋난다. 허락의 문제가 아니다. 그의 신념상 이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그의 사형이 확정된 이때, 그를 빼돌리라고?
“자네들에게는 간단하지 않은가. 그저 눈만 감아준다면 된다네.”
“하. 왕세자. 합당한 대가는 치룰거라 믿네. 전 대륙이 좌시하고 있어. 게다가 우ㄹ.. 아니, 나는 현재 로운의 뜻인 케일 헤니투스 공자의 대리인이야. 만약 이 일이 알려진다면 이는 어찌할 건가.”
‘이 일이 알려질 경우 로운이 입을 피해 이상의 것을 감당하라는 이야기군.’
이렇게 떠먹여 주기도 힘들 텐데. 내야 할 패를 알려주면서 절대 그 이하를 허락하지 않는다. 조건만 맞춘다면 적당한 흥정 뒤에 거래는 성사될 것이었다. 그 조건을 맞추기 힘들다는 게 문제였지만.
“지금 카로는 어떠한 것도 해줄 수 없다네. 전후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자도 죽음을 면치 못하겠군.”
자신의 죽음을 놓고 이야기하고 있 것만 아딘은 그저 그들을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하얀별은 패배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제국을 버릴 리 없다. 그러니 아딘은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하얀별이 자신을 구하러 오기를.
감옥에 갇혀있으며, 알베르와 다른 이들이 정보를 차단한 결과였다지만 발렌티노는 변해버린 제 친우였던 자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로운은 승리할 테지.”
“당연하지 않은가.”
“그 이후를 약속하겠네.”
“계속해보게.”
얼굴의 하관은 베일로 가려져있었으나 어쩐지 그가 웃고 있는 듯 했고, 그새 검의 날도 아딘의 목에서 빗겨 나왔다.
“로운이 어떠한 결정을 내리던 카로는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지.”
“그리고?”
재롱이라도 보는 냥 기다란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진다. 뜯어낼 수 있을 만큼 뜯어내겠다는 의지 하나만큼은 돋보여 발렌티노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도무지 욕심의 끝을 알 수 없는 자였지만 그의 태도가 그것을 당연시 해주는 것과 같아 거절의 말은 그저 사그라질 뿐이다. 카로에서도 저 정도의 자를 보기 힘들거늘.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도대체 무엇을 원하나.”
“카로가 생각보다 담이 작군그래. 일단 나가지. 적을 앞에 두고 할 이야기는 아닌 듯하니.”
발렌티노가 제 뒤를 따를 것임을 의심치 않는 듯 그는 앞장서 감옥을 나섰고 발렌티노는 그가 어떻게 해야 거래에 응할지 고심하며 그 뒤를 따랐다.
*
이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감정을 공유하고 밀어를 속삭이며 체온을 나눈다.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 불완전한 것은 그의 주인을 붕괴시켰으나 그의 주인을 유지시키는 단 하나의 - .
발렌티노의 시종장은 침음을 삼켰다. 도무지 어찌 해야 할 지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제 주인을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음으로. 그저 지켜보고 지켜보다 이야기를 남기는 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저 이야기의 화자로 남아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여 말을 고르며 첨언할 뿐이다.
미쳐버린, 한 때의 제국의 황태자를 생각하며.
그렇다면 나의 주인은 어떠한가. 주인께서는 성군이다. 그러나 그의 광증 역시 의심할 바 없으리라. 아니, 이정도야 역대의 무수한 왕들 -도무지 없었다고는 말을 할 수 없으리라.― 에 비하여 사소한 것임이 분명하였다. 아니, 아니다. 실은 주인은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미쳤을지도 모르나, …그는 승리자다. 전쟁의 승리자이며 카로의 광영을 가지고 온 선지자다. 이정도의 광기쯤이야 우습지도 않다. 북부의 3국에 비하여 보더라도 카로는 전후 많은 것을 얻었다. 본래, 제국의 가장 우호적인 동맹으로서 잃었을 것을 채 가늠치를 못할 정도였으니 이는 의심할 수조차 없는 사실이다. 그러니 자신이 할 일은 그저 그의 뒤를 따르는 것 뿐. 하지만 정말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카로가, ‘그’가, 대륙의 정세가 어찌되는 지는 차치하더라도 나의 주인께서는. 이대로 괜찮으신 것일까. 정말?
“시종장.”
뒤를 따르는 그의 기색을 언제 읽은 것일까 퍽 다정한 목소리가 발렌티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릴 적과 다름이 없으나 한층 낮아진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도 매혹적이다. 황태자가 그의 낭독시간을 제일 좋아했더라지. 그 어떤 새의 노랫소리라 할지라도 자신의 주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면서.
“다음 일정이 어떻게 되지?”
방금 ‘그’와 만나고 온 것 같지 않게, 퍽이나 평이한 목소리다. 그렇다면 ‘그’가 느낀 자신의 주인은 어떠하였을까.
이는 흔히 볼 수 있는 ‘-’인가 혹은 하늘의 제왕이라 불리는 ‘-’이던가. 아니다. 이제와 그 새의 종(種)이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그는 승리자이며, 그의 광휘가 카로를 번영케 할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그러니 그가 살린 것이 무엇인지 역시 중요치 않다. 궁의 밑바닥에 내려앉은 이는 더 이상 제국의 황태자가 아닌 죽음을 겨우 피한 망령일 뿐. 모두 죽었으리라 믿은 ‘그’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던 일도 이미 오래 전인지라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다. 이따금 ‘그’에게 내려가 젊었을 적의 모습을 뒤집어쓰고 말을 나누고 온 제 주인을 보살피는 것만이 자신에게 남은 사명일뿐이다.
“의회 장에서 귀족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번 안건은 -”
“괜찮다네, 시종장.”
“…예?”
“…괜찮으니 걱정 말게.”
말을 마친 발렌티노가 습관적으로 웃어 보이며 오르골의 태엽을 감고 내려놓자 종전을 축하하던 노랫소리가 조용히 방안에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환하게 웃는 두 명의 인형(人形)은 여전히 춤을 추는 채로.
빙글,
빙글.
나의 주인께서는 진정,.